소설리스트

검신재생-179화 (179/318)

<검신재생 179화>

179. 본좌의 이름이다.

누구나 결과를 보고 이변이라 여겼다.

가장 약체라 생각했던 장강의 승리로 끝났다.

심지어 참가했던 수신호위 세 명 모두 꽤 심각한 부상을 입으며 패배했다.

그중 적이는 다섯 명의 협공에 당했다지만, 독이와 해이는 달랐다.

“도대체 누구야?”

“흑심방주라고?”

“하남성이 워낙 멀리 있어야지.”

“저런 괴물이 대체 어디서…….”

흑도들은 일제히 경악했다.

가면을 쓴 괴상한 위인. 하나 드러난 실력은 괴상함을 넘어 무시무시했다.

단 한 명에게 당했다. 무언가 특별한 계략이 있던 것도 아니다. 정면으로 싸웠고, 당당하게 겨뤘다.

오로지 흑심방주, 천무백 혼자 삼괴이 중 둘을 제압했고, 깃발을 뺏었다.

사실상 홀로 대리전을 끝냈다. 믿기 어려운, 경악과 호기심이 어린 시선이 천무백에게 쏟아졌다.

“그럼 이제 하왕이 회주가 되는 게 확실한 건가?”

“글세…… 이것 참.”

반응이 묘했다. 규칙대로라면 하왕이 회주가 되는 게 당연한 결과.

문제는 독고패였다.

물론 대리전에 패배했지만, 사실 중원 전체에 퍼진 세력이나 무력은 삼괴이 셋이 떨어져 나갔어도 독고패가 압도적이기 때문에.

허나 아무리 독고패라도 공식으로 선언했던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한다면 흑회의 회주는커녕, 드디어 하나로 통합되는 흑도가 찢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모든 이의 시선이 독고패에게 향한 순간.

독고패는 호탕하게 웃으며 선언했다.

“이로써 우리 흑회의 회주로서 하왕께서 오르시게 됐구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시원한 결단.

해이가 천무백에게 당했을 때,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시무시한 기세를 읽었던 왕전유가 오히려 당황할 정도였다.

허나 독고패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여기서 부정한다면 그가 평생 염원하던 흑도의 통합은 물 건너가니까.

그는 이미 머릿속에서 계산이 끝났다.

‘어차피 회주 자리를 넘겨도, 흑회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다.’

독고패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더구나 그는 천무백에게 집중했다.

‘왕전유의 아래가 아니야. 최소한 동급이다. 어쩌면 입신지경의 코앞에 도달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곧 무엇을 의미함인가.

‘오히려 왕전유를 휘어잡은 비선(秘線)일지도 모르지.’

왕전유가 회주자리에 오른다고, 모든 게 장강의 입맛대로 움직일 리가 없다. 결국, 천무백이 원하는 것이 곧 회주의 의견으로 반영될 터.

‘아무리 찾아봐도 흑심방주가 태룡방에게 원한을 가질 이유는 하등 없어. 하면 어떻게든 꾀어낼 구석이 있겠지.’

오히려 독고패는 천무백이 탐이 났다. 근래 보기 드문 흑도의 고수. 저자를 확실하게 회유한다면? 오히려 왕전유까지 손아귀에 넣는 게 아닌가.

독고패는 자신 있었다. 천무백이 강하다는 건 직감했지만 자신보다는 아니지 않은가. 세력이나 개인의 무력, 그 하나 밀리는 게 없다.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눌려 버릴 수 있다.

“그리고 이번 대리전을 승리로 이끈 이들에게 일전에 말했듯이, 소림의 대환단과 동급이나 다름없는 흑성단을 내어 드리겠소!”

시원시원한 독고패의 행보에 흑도들은 열광했다.

배짱 있고 배포가 넘치는 호걸의 모습이 아닌가.

더구나 회주 자리를 순순히 넘겼다는 건, 아무런 사심 없이 흑도의 통합을 바랐다는 뜻이 아닌가. 천무백은 내심 혀를 찼다. 그의 행보가 퍽 인상적이었으니까.

회주 자리를 놓쳤어도, 독고패는 오히려 자신을 부각시켰다. 영향력은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다.

물론 독고패도 꿍꿍이가 존재했다. 흑성단을 거침없이 내주는 그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이걸 내주면, 오히려 내 사람으로 만들 수 있겠지.’

여하튼 독고패의 반응은 천무백으로서도 꽤 의외였다.

‘도대체 뭔 생각이길래 이렇게 호의적이야?’

천무백의 강렬한 직감이 의심했다. 이어지는 상황에 천무백은 확신이 섰다.

“이 흑성단은 영험한 만큼 귀하고, 복용할 때도 까다롭지. 내공의 수발이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완전히 흡수하려면 쉬운 일이 아니오. 하니 이 영약을 제조한 기인이 있으니, 그분이 복용방법을 직접 설명해 주실 것이오.”

이내 한 사람을 소개했다.

흡사 신선과도 같은 풍모를 지닌 노인이 흑성단을 들고 걸어 나왔다.

“강서성 출신의 한모(某)라고 하외다.”

일견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노인.

허리춤까지 내려오는 새하얀 백발, 흡사 맹인이 아닌가 감고 있는 두 눈. 분명 노인인데, 광택이 도는 새하얀 피부는 오히려 어린아이보다 더해서 나이가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흡사 신선의 풍모.

옆에 있던 능허가 팔꿈치로 툭툭 쳤다.

“어째 화산이나 무당에서 본 양반들보다 더 신선 같은데요?”

“아서라.”

천무백의 단호한 어조에 농담했던 능허의 눈썹이 휘었다.

어째 천무백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물론 가면을 쓰고 있어 표정을 알 길이 없었지만, 천무백은 내심 감정의 동요를 숨겼다.

독고패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이 분은 강서성의 임강부, 장수진 출신이시오.”

강서성 임강부 장수진.

그 말에 제법 식견이 높은 이들은 감탄을 터뜨렸다. 특히 왕전유와 철면장이 눈을 빛냈다.

“약재로 유명한 곳 아니오?”

장수진은 장강을 그대로 통과하는 위치에 있다.

그런 고로 수운이 발달했고, 호북성, 호남성, 사천성의 온갖 약재들이 몰렸다. 특히 중원에서는 거리의 문제로 구하기 힘든 사천성의 귀한 약재들이 많이 거래됐다.

그 탓일까. 유명한 의방과 의원들은 대부분 장수진 출신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 하나 있다.

“그 유명한 약선이 나고 자란 곳 아닙니까?”

분명 그런 오해를 할 정도로 노인의 풍모는 신선이라 불려도 무방했으니까. 한모(某)라고 본인을 소개한 노인은 겸연쩍게 웃었다.

“감히 노부가 그런 분에게 비하겠습니까.”

“…….”

겸양을 떠는 모습이었지만, 만일 대환단과 동급의 효능을 지닌 흑성단을 제조한 게 맞다면.

약선과 비견할 수 있는 실력임은 맞았다.

하나 천무백은 속으로 실소했다.

‘표정 관리하느라 빡세 보이네.’

분명 한없이 겸양한 표정이었지만, 그 미세한 떨림을 눈치챈 건 천무백만이 아니다.

좌중에는 거력왕과 하왕도 있었는데 둘 역시 묘한 표정이었다.

분명 방금 전 한 씨 노인의 살짝 떨리는 목소리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면 별호가 있지 않으십니까? 이런 대단한 영약을 제조하실 정도라면…….”

천무백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한 씨 노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약만 제조하고, 강호에는 나온 적이 없어 별호는 없습니다, 소형제.”

“그렇군요.”

천무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천무백의 냉소는 더 진해졌다.

‘별호가 없기는…….’

어찌 별호가 없겠는가. 언제 강호에 나선 적이 왜 없겠는가.

천무백은 웃었다.

‘독마(毒魔)여.’

드디어 마(魔)의 중심에 닿았다.

* * *

독마.

그 끔찍한 이름을 어찌 잊을까.

정마대전 때 천마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골치 아픈 놈이었다.

‘도저히 기어 나오질 않았으니까.’

그 무시무시한 독공은 물론이요, 천무백이 마교의 장로들을 만나면 무조건 목을 잘라야 한다고 마음먹게 했던 위인이었다.

목이 잘리거나 심장이 터지지 않는 한, 독마가 어떻게든 살려냈으니까.

‘천마 놈도 몇 번이고 살아남아서 덤벼왔지.’

사람들은 정마대전 때 창천검신과 천마가 부딪친 건 최종결전 시기라고 여기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았다.

여러 번 부딪쳤다. 그리고 매번 천무백이 이겼다. 천마는 늘 심각한 부상을 입고, 수하들을 희생양으로 던진 채 도망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마의 치료를 받아 회복한 채 다시 드러냈다. 그 과정이 몇 번이고 지루하게 반복되자, 천무백은 반드시 독마를 죽이겠노라 마음먹었다.

‘용케도 살아 있었구나.’

독마는 보통 인물이 아니다.

당시 마교의 핵심전력이자 그 자체. 극도의 보안과 보호를 받던 인물.

‘그때 못 끝냈으니, 지금이라도 끝내야지.’

물론 천무백은 겨우 찾은 핵심을 단숨에 쳐 낼 생각은 없었다.

‘마교의 핵심이었으니까.’

더구나 천무백이 의아한 건, 그가 바로 마류칠종의 독종(毒宗)의 종주라는 점이다.

혈귀곡은 지금껏 밝혀진 사실로는 혈종과 암종이 주축이 된 세력 아닌가.

독종은…….

‘새외에서.’

그가 어째서 이곳에 있는지가 의아했다. 하필이면 또 흑도를 배후조종하려는지.

‘파고들어야 한다.’

천무백은 독마를 기점으로 파고들 틈을 보았다.

문제는 독마를 독고패가 의도적으로 숨기고 있다는 것.

흑성단의 복용법을 알려 주고, 독마는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흑회가 열리는 전각을 샅샅이 훑었는데도, 독마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딘가 모처에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추적하려면 추적 못 할 것도 없다만, 자칫 잘못된 길로 빠지면 시간이 적잖이 소비될 터.

천무백은 빙 돌아가는 대신, 직진을 택했다.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하다니, 어쩐 일이시오? 흑심방주.”

독고패가 호탕한 웃음을 띠며 반겼다. 천무백은 웃는 낯 아래 날카로운 눈빛이 단전을 훑는 걸 느꼈다. 이내 독고패의 시선이 묘하게 떨렸다.

“흑성단을 복용하면 며칠 몸을 정양해야 할 터인데, 혹시 아직 복용하시지 않은 것이오?”

어째 조금은 조급한 기색마저 느껴지는 목소리.

물론 전혀 눈치 못 챌 정도로 미세한 변화였지만, 천무백은 목소리에 담긴 감정을 단숨에 눈치챘다.

‘그럴 수밖에. 이걸 복용하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알 테니까.’

천무백은 그대로 들이박았다.

“보상으로 고독(蠱毒)을 주시다니, 장난기가 너무 심하신 거 아닙니까?”

“……!”

순간 언제 호탕하게 웃었냐는 듯, 독고패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콰콰콰콰!

살벌한 기세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일그러진 눈매가 천무백을 꿰뚫듯이 노려보았다.

“복용방법이 까다로운 것도 마찬가지 이유겠지요. 잘못 복용하면, 환단 속 고독이 죽어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요.”

독고패는 더는 기세를 숨기지 않았다. 일그러진 표정에선 물씬 살의가 피어올랐다.

‘어떻게……?’

완전하게 알아차렸다. 대충 넘겨짚은 게 아니다.

천무백은 거침없이 쏘아 보내듯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태룡방을 일구고 이미 가진 힘만으로도 흑도 통합을 이룩할 수 있는 사내가, 혈귀곡과 야합했는지 알겠소.”

변한 어조. 담담했던 천무백의 기세 역시 일변했다. 독고패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흑도 사이엔 왕이 없지. 거력왕이나 하왕이나, 그저 별호가 그럴 뿐. 흑도는 서로를 형제라고 여기니,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나올 수는 없어. 흑회라는 연합체에서는 더더욱.”

“…….”

독고패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놀람을 넘어선 경악, 그리고 경악이 지나 호기심이 치밀었다.

“그래서 저 고독이 필요했던 거지. 고독의 조종권을 당신에게 줬겠지? 고독으로 수하들의 절대적인 충성을 이끌어내, 흑도 연합의 우두머리가 아니라, 흑도 자체의 진짜 왕이 되려고. 형제가 아니라 자신의 명에 절대복종하는 충실한 수하들을 만들려고.”

그야말로 속에 숨겨 놓은 타오르는 야망과 탐욕을 정확히 저격하는 발언이었다.

지금껏 남에게 한 번도 드러내지 못했던 제 감정이 여실히 드러난 걸 깨달은 독고패의 얼굴엔 오히려 후련함이 맴돌았다.

맞다.

흑도는 형제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왕이 나올 수 없다.

왕이라는 별호는 받아도, 형제이기에 맏형일 수는 있어도 ‘주인’이 될 수는 없던 것이다.

하나 독고패는 흑도의 왕이 되고자 하는 강렬한 욕심이 있었다.

때문에, 그는 혈귀곡의 조력을 받아들였다.

그들이 가진 고독의 조종권을 받아 냈고, 휘하 수하들의 감정마저 조종해 내는 절대적인 권한을 가졌으니까.

그 모든 걸 단번에 간파해 버린 천무백에 대한 감탄도 잠시. 독고패의 얼굴은 흉신악살처럼 변해 무지막지한 살기를 쏘아 보냈다.

“그래서 본좌를 협박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아니, 그럴 리가. 난 당신이 흑도의 수장들을 고독으로 조종해서 왕이 되든 말든 상관없소. 개의치도 않고.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너도 흑도가 아니더냐?”

“아직도 그리 생각하시오?”

“뭐라?”

“내가 원하는 건 혈귀곡이고, 마도요. 하니 당신이 말해 줘야겠소. 흑성단을 만든 한 씨 노인에 대한 모든 사실을. 어디에 있고,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꾸미고 있는지.”

독고패는 침묵했다. 그의 눈동자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어렸다.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가. 도대체 누구이기에 이런 발언을 하는가.

그런 의문을 읽었음인가.

천무백은 가면을 벗었다. 일순 새하얀 얼굴이 떠오르자 독고패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천무백의 입이 열리고 묵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천룡검협.”

“……!”

찢어질 듯이 부릅떠진 두 눈. 독고패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천룡검협, 천무백.”

예상치도, 생각지도 못했던 별호와 이름.

독고패는 저도 모르게 모든 기세를 끌어냈다.

허나 그 기세는 천무백의 눈이 번쩍 뜨이는 순간, 집어 삼켜졌다.

“그것이 본좌의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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