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8화>
178. 아직 한참 못 배웠네.
퍼엉.
“……하나는 잡았나?”
해이는 머리 위에서 터지는 신호탄을 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아마도 독이가 녹림 거점을 뺏었겠지.”
해이는 본인이 거점을 지키되, 나머지 두 명의 이무기를 내보냈다.
적이를 장강으로, 독이는 녹림으로.
처음에는 적이를 녹림으로 보낼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대리전이 펼쳐지는 무이산은 산세라는 지형적 특성으로 녹림이 꽤 유리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반면 장강의 수적들은 이런 곳에서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기도 하고.
그러나 해이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흑심방주…….’
흑심방주가 떠오르자 기세가 빳빳해졌다. 그때의 기운, 분위기, 기세.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사내라는 점을 절실하게 느꼈다.
단순히 비범함을 넘어 특별함이 있었다.
‘강하다. 분명 강해.’
유풍방주의 손목을 섬전처럼 잘라 낸 건 둘째 치자. 기습과 쾌속의 극치에 달한 발검술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않은가.
진짜 놀라운 점은 바로 독이와의 기싸움이다. 아무리 내공에 비교적 손색이 있는 막내인 독이더라도 기세만으로 집어삼킨 건 보통 수준이 아니다.
‘녹림보다는 흑심방주, 그놈이 더 위험하다.’
전신의 감각이 쏘아보내는 강렬한 직감이자 경고.
적이는 독이보다 내공의 수발에 자유롭고, 은밀한 기습이 특기인 녀석이니까. 천무백과 정면으로 다퉈서 이길 가능성은 몰라도, 적어도 깃발 하나 정도는 뺏어 거점을 취할 정도는 됐다.
“물론 그렇다고 독이 녀석이 녹림에게 질 것 같지도 않고.”
독공이라는 특성은 제아무리 녹림이어도 버텨 내지 못하리라. 아마 삼 대 일의 싸움이 될 테지만, 그렇게 염려스럽진 않았다.
제 동생들의 실력을 믿었으니까.
“…….”
그러나 해이는 묘하게 가슴을 간질거리는 불쾌한 감정에 미간을 좁혔다.
‘왜지?’
한층 더 예민해진 감각 때문일까. 미세한 변화가 느껴졌다.
산세를 둘러싼 흐름, 분위기, 공기.
그 모든 것들이 요동쳤다.
기감에 예민한 고수인 만큼, 그는 이 분위기가 저 위에 대리전을 관전하는 이들에게서 전해짐을 깨달았다.
‘분위기가 묘하구나.’
마치 예상치 못한 이변이 발생하였는지 동요했다.
사람마다 각자가 뿜어내는 기파가 있다. 수십의 사람, 그것도 수십 명의 고수가 내뿜는 기파가 일시에 동요한다면 당연히 주위에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뭐지……?’
혹시 떠오르는 건 생각지도 못한 가정.
‘적이가 당했나? 아니면 흑심방주가 먼저 녹림의 거점을 쟁취한 것인가?’
그것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분위기를 설명할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계획이 다 실타래처럼 엉킨다.
하나 그때였다.
‘독기!’
다른 이들이라면 기겁을 할 독기였지만, 오히려 해이의 만면에 미소가 떠올랐다.
“독이 녀석이 왔구나!”
동고동락한 막내의 독기를 어찌 모르랴.
해이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떠오르자마자 그대로 굳었다.
“……이건.”
독기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타인의 기운.
묘하게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특유의 분위기. 감각이 예민하게 요동쳤다.
꽝!
저 멀리서 무언가 파공성을 내며 휙 날아왔다.
흠칫 놀라 재빨리 뒤로 물러서는 그의 발치 앞에 뚝 떨어진 건 다름 아닌 독이다.
“……!”
해이의 눈동자가 부릅떠졌다. 처참한 몰골이다. 가슴에 긴 자상, 어깨에 손가락 두 개가 들어갈 만한 구멍, 한쪽이 날아간 귀까지.
다행히 아주 미약하게나마 배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다.
해이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녹푸른 빛이 꿈틀거렸다.
독기 사이로 스며들던 특유의 기운과 분위기의 인물.
“흑심방…… 주.”
가면을 쓴 채 천천히 걸어나오는 천무백.
넝마가 된 독이와 천무백을 번갈아 본 해이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독이가 이 꼴이 된 이상, 상대도 정상은 아니어야 한다. 적어도 멀쩡히 두 발로 서있지는 못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하나 천무백은 두 발로 서 있다 못해 여유로웠다. 옷 곳곳이 잘리거나 찢어진 흔적은 있어도, 피를 흘린 자국은 없다.
무슨 의미인가?
‘완패(完敗)……!’
해이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코 끝을 훅 찌르고, 폐부를 찢을 듯이 쑤시는 냄새가 난다. 수없이 강호판을 헤집고, 흑도판에서 아찔한 칼춤을 췄던 해이였기에 느낄 수 있는 향기.
지독히도 위험한 냄새.
가까이 가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찢어 버리는 사내에게서만 풍기는 특유의 향.
‘이…… 정도 차이였나?’
상황을 보니 독이는 완패했다. 믿기 어려웠다. 독이가 한수 부족하지 않을까 막연하게 생각은 했다. 그래도 감정의 동요는 다스리기 어려웠다. 막상 이 꼴을 보니 충격적이다 못해 경악스럽다.
‘잠깐만, 그렇다면 아까 신호탄은?’
녹림으로 보냈던 독이가 천무백에게 당했다. 천무백이 이미 녹림의 거점에 있었다는 뜻이다. 즉슨, 천무백이 거점을 취한 건 천무백.
더구나 이 자리엔 천무백 혼자 왔다. 아마도 장강의 거점에는 나머지 인원이 몰려 있을 터.
‘녹림 세 명과 장강의 인물 둘.’
아무리 고수여도, 한 단계 낮은 급의 고수 다섯 명이 협공한다면 버텨 낼 수 없다.
해이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무언가 단단히 꼬였다!’
어째서 저 위에서 동요하는 분위기가 일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만 비키지. 이 이상한 대리전도 끝난 것 같은데.”
무심한 듯 평이한 어조에 해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거만하면 이해할텐데.
너무 평이하다. 그저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듯이.
분위기와 눈빛, 목소리까지 모두. 해이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저놈의 뜻대로 순순히 경기가 끝나게 둬서는 안 된다는 반골의 기질이 튀어나왔다.
“끝났다고? 하. 네놈이 생각보다 강한 고수라는 건 내 인정하마. 하지만 나를 내버려 두고 거점을 탈취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보다 판단력이 부족한 놈인가?’
해이가 천무백을 신경 쓴 것처럼, 천무백 역시 해이를 유심히 살폈다.
사람에겐 특유의 기파와 살아온 경험으로 쌓여 형성되는 분위기가 있다.
천무백은 숱한 전생을 살아오며, 완벽하게 일치하진 않아도 대체로 상대가 어떤 부류인지 대략 파악할 수 있었다.
‘제법 눈치 빠르고, 머리만 좀 쓰는 놈인 줄 알았건만.’
그래서 일부러 천무백은 기세를 마음껏 내뿜었고, 이미 실신해 버린 독이를 들고 왔다.
상대에게 싸울 의욕조차 들지 않게끔 하려고.
‘믿는 구석이 있는 눈친데.’
그렇지 않고서야 저리 흔들림 없이 나설 수 있을까.
천무백의 예상대로였다.
해이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천무백이 한걸음 내딛는 순간.
웅웅웅웅웅!
“……!”
기파가 공명했다. 천무백의 눈이 크게 찌푸려졌다.
“이건…….”
평이했던 천무백의 어조가 눈에 띄게 흔들렸다.
기파의 공명에 상단전이 저절로 반응했다. 뿐만이 아니다. 천무백이 건들기 전까지는 잠잠한 중단전의 선기까지 심장을 주위로 회전했다.
몸에서 일어나는 격렬한 반응.
천무백의 눈앞에 해이가 일순 흐릿해지더니 둘, 셋, 넷…… 늘어났다.
‘분신?’
분신술이라고 일컬어지는 전설 속 도가의 술법.
찌푸려진 천무백의 표정을 본 해이가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아해야. 칼질 잘한다고 살아남는 게 강호가 아니고, 흑도판이 아니란다.”
계속해서 늘어나는 분신들이 동시에 말했다. 실제였다. 한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말하며 소리가 공명했다.
천무백의 감각으로 전해지는 울림은 거짓 없는 진실.
“강호란 검 하나 믿고 설쳤다간 언제든지 목이 잘리는 곳이요, 흑도판은 배짱 하나 믿고 앞장서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곳이니. 그 이유를 알려 주마.”
그야말로 광오한 소리였지만, 그만한 자신감을 내보일 만했다.
그 순간, 찌푸려진 천무백의 입이 열렸다.
“뭐야, 모팽련의 진전을 이었나?”
“……!”
이제는 잊혀진 사문. 령문(靈門)의 개파조사였던 이의 이름이 천무백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순간, 그의 분신이 터져나갔다.
* * *
분신술 같은 도가의 전설 속 술법이 아니다.
기문둔갑(奇門遁甲)의 환술(幻術)이다.
‘내가 첩자질 했을 때였나.’
기억이 뚜렷할 수밖에 없다. 암천검제(暗天劍帝)라는 별호로 불리던 시절.
당시 오랫동안 마교 내부에서 암약할 수 있던 이유가 바로 환술 덕이었다.
극마들도 속이는 지고한 경지의 환술이 암천검제가 들키지 않고 마교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줬으니까. 당시 익혔던 심법이 정종무공인걸 감안하면, 오랫동안 걸리지 않은 이유가 다 모팽련의 환술덕이었다.
그러니 천무백이 눈앞의 환술을 못 알아볼까.
‘여태 그 명맥이 끊기지 않았군.’
적어도 창천검신 시절일 땐 흔적도 없던 령문의 흔적.
이미 멸문되어 사라졌다고만 여겼건만,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인물이 보여 주다니.
오랜 시간이 지나서일까.
“부족하구나. 아직 한참 못 배웠어.”
그랬다. 허술한 점이 훤히 보였다. 적어도 천무백의 눈에는.
“뭐, 뭐라고?”
해이의 얼굴에 파문이 일었다. 제 사문의 개파조사를 알아보고, 환술의 원류를 눈치채다니. 놀라움에 몸이 굳어버린 해이에게 천무백의 혀 차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하긴. 제대로 명맥을 잇지 못했으니까 그 환술을 가지고도 흑도로 사는 거겠지.”
“……!”
환술임을 간파하자 해이는 마음을 다스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동요했다.
“강호가 무엇인지 조언해 줬다만, 강호란 말로써 조언하는 게 아니다.”
천무백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울렸다.
그 순간, 천무백은 눈을 감았다.
“……!”
해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을 감는다고? 싸움 중에?’
세상 어떤 무인이 싸움 중에 눈을 감는단 말인가?
아무리 감각이 발달해도, 시각이란 건 절대적이다.
보아야 피하고, 보아야 찌르는 법이다.
눈을 감는다는 건, 절대적인 고수가 하수를 가르칠 때나 하는 행위.
지금 상황에서 눈을 감는다고?
농락이다. 모욕적이다. 해이는 그리 느꼈다.
하나 천무백은 그런 의도는 단 조금도 품지 않았다.
머릿속에 모팽련이 했던 말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환술의 골자는 시각(視覺)을 혼란케 하는 것이며…….’
눈을 감는다. 모든 시각이 차단한다. 오로지 암(暗)이 망막에 맺힌다. 적이 보이지 않는다. 그랬기에 적의 환술도 보이지 않는다.
‘청각(聽覺)을 교란하고, 촉각(觸覺)마저 구름 위에 노는 것처럼 만들며, 허상의 것을 현실로 꾸며 결국에는 세상을 왜곡하는 것이 곧 환술.’
내공을 귀에 보내 소리를 차단한다. 피부 아래 숨겨진 감각을 차단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도 않으며, 느껴지지도 않는다.
오감이 차단된다.
이것만이 환술에 미혹되지 않는 법.
그러나 이리되면 맹인이요, 듣지 못하니 농인(聾人)이다.
‘지금, 지금 쳐야 한다!’
해이는 악물고 검을 쭉 뻗어왔다. 상대가 환술임을 아는 이상 혼란케 하려는 의도는 반쯤 상실된 터. 아직 환술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지금 무릎 꿇려야 한다.
빠른 판단과 결단력.
해이의 검이 벼락처럼 찔러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감각을 차단한 사람으로선 절대로 반응할 수 없는 쾌속.
검이 가슴팍으로 찔러가는 순간, 천무백의 몸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웅웅웅!
상단전이 열리며 감각의 확장을 불러온다. 오감이 사라진 채, 모든 신경이 집중되어 오히려 초감각(超感覺)이 극도로 발휘된다.
‘보인다.’
암(暗)속에 적의 분신이 아니라, 본체가 보인다. 소리가 들린다. 피부로 전해지는 풍압이 느껴진다.
가슴 부근으로 찔러오는 날카로운 기세까지. 보이고, 들리며, 느껴진다. 그러면 막을 수 있다.
쩌엉!
벼락처럼 내질렀던 검이 반 토막이 나는 광경.
해이의 눈빛이 거세게 떨렸다. 낯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 떻게?”
이어 천무백의 수도(手刀)가 대답을 대신했다.
“강호는 칼과 행동으로서 조언하는 것이지.”
천무백의 묵직한 울림이 귓가에 꽂히며, 해이는 정신을 잃었다.
그제야 눈을 뜬 천무백은 거침없이 걸어가 봉우리에 꽂힌 깃발을 뽑았다.
“…….”
두 번째 깃발. 천무백은 저 멀리, 봉우리 위에서 딱딱한 얼굴로 무서우리만큼 노려보는 독고패와 눈을 마주하며 깃발을 펄럭였다.
당장이라도 찢어 죽일 듯 노려보는 독고패의 시선.
하나 시선을 마주하는 천무백의 눈은 냉막하게 가라앉았다.
‘자, 이제 어쩔테냐?’
독고패가 머리를 굴려 계획하고 짜놓은 판.
천무백이 엎었다. 그러니 이제 새로운 판을 짜야 할 터.
“내가 만든 판에서 같이 놀아볼 테냐…….”
천무백은 남이 짜놓은 인형극의 인형이 될 생각이 추호도 없다. 남이 만든 판이라면, 그 판을 완전히 뒤엎어버린다. 그리고 새로운 판을 짜 판을 주도한다.
이제는 천무백의 차례다.
천무백이 담담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