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7화>
177. 뛰는 녹림 위에 나는 천무백.
“규칙에서 벗어난 건 아니지.”
독고패가 껄껄 웃었다.
“흑도는 싸우다 중과부적이면, 피해야지. 강대한 적 앞에서 목숨을 버려가며 싸우는 건 미련한 짓이야. 암.”
독고패의 말에 근처에 있던 흑도방파의 방주들이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하게 목숨까지 버려 가며 근거지를 지킬 이유는 없다. 몸 하나 성하면, 칼 하나만 있으면, 다시 아득바득 독하게 기어올라 와신상담할 수 있는 게 바로 흑도들 인생 아니던가.
“내 거점을 포기해도, 타 세력의 거점을 차지하는 것. 흑도들이 강호를 버텨 온 이유다.”
명문정파가 만들어 놓은 기반은, 한 번 잃어버리면 다시 세우기에 수십, 아니 수백 년이 걸리거나 아예 폭삭 무너진다.
흑도의 기반은 다르다. 무너져도, 다시 세울 수 있다. 버려져도, 다른 곳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천무백이 깃발을 들고 움직이자 오히려 위에서 구경하는 반응은 호의적이다.
“비단 장강 측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니오. 우리 녹림도 깃발을 들고 움직이는군.”
거력왕이 눈을 빛냈다.
염광채주는 거력왕이 가장 믿는 수하이자 동생이었다.
수많은 관록과 경험을 가진 백전노장이 아닌가. 비록 왕전유를 사로잡는 건 실패하고, 역공의 빌미를 줬다지만 가장 신뢰하는 수하다.
역시 염광채주도 규칙의 맹점을 파악한 듯, 깃발을 든 채 거점을 포기하고 움직이고 있었다.
“반면…… 삼괴이는 조용하군.”
태룡방의 깃발이 나부끼는 거점은 조용했다.
오히려 느껴지는 건 진한 여유였다. 행동부터 표정까지 여유가 느껴졌다.
“뭐, 머리 쓰는 것보다 칼 쓰는 걸 좋아하는 친구들인지라. 그게 참 안타깝소.”
독고패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그 말에 담긴 자신감을 못 느낄 사람은 없었다.
“…….”
왕전유는 내색하진 않았지만 다소 표정이 어두웠다.
‘삼괴이가 소문보다 더하다.’
일대일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삼괴이 중 맏이인 해이만큼은, 일대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기도가 느껴졌다.
어째서 독고패가 자신감을 가지는지 이해가 됐다. 주위 분위기도 그랬다. 천무백이나 염광채주가 깃발을 들고 움직이는 걸, 그저 흥미롭게 바라볼 뿐. 대단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어차피 태룡방이 이길 거라고 은연중에 생각하고 있는 것이니까.
하나 왕전유는 묘하게 반발심이 들었다.
‘흑심방주라면 말이지.’
그의 눈이 번뜩이며 수풀을 헤치고 움직이는 천무백에게 닿았다.
* * *
‘반드시 이번 대리전에서 승리한다. 그래야 거력왕께서 회주가 되시고, 흑회에서 녹림천하 열릴 테니까.’
상대가 삼괴이라지만, 염광채주는 자신이 있었다.
‘그래 봤자 뒷골목에서 칼질이나 해 대던 놈들.’
반면 자신들은 누구인가.
험한 산세를 바탕으로 칼날 같은 강호에서 가장 치열하게 싸우는 녹림이다.
강호에서 적어도 산에서만큼은 녹림을 피하라는 말이 통설처럼 퍼져 있다.
염광채주는 자신들의 장기를 마음껏 발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뺏는 건 거점이 아니라 깃발이지. 산채가 빼앗길 위기면 버리고 다른 산으로 냅다 튀면 되는 거잖아?”
염광채주의 말에 같이 참여한 두 명의 채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중원에 수도 없이 많은 게 산이요, 산만 있다면 다시 처음부터 산채를 키워 나가는 게 녹림 아니던가.
염광채주는 곧장 깃발을 등에 꽂고 움직였다.
“모두 흩어져서 자라놈들을 찾는다. 거리와 간격 유지하면서 샅샅이 훑어!”
“찾으면?”
“최대한 시간만 벌어야지. 흑심방주 놈을 산길로 유인하고, 그사이 거점을 빼앗는다. 그놈만 아니면 철면장이나 화상 입은 놈이나, 별거 아니니까.”
“실력이 만만치 않은 놈인데, 잘 꾀어낼 수 있겠나?”
“제아무리 절대 고수여도, 산을 평지처럼 내달릴 수 없는 법이지.”
한치의 막힘도 없이 자신 넘치는 눈빛. 표정에서부터 드러나는 자신감은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는 확신이 느껴졌다.
‘흑심방주, 그놈이 순순히 협력할 양반도 아니고.’
천무백이 녹림을 경계하는 것처럼, 염광채주도 마찬가지다.
‘어차피 회주가 될 사람은 하나니, 결국 싸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장강을 제압한다.’
이번 대리전은 흑도의 생리가 그대로 반영됐다.
깃발이 뺏긴다는 건 곧 세력이 무너졌다는 뜻.
흑도에서는 분쟁세력이 무너지면, 가루가 되어 사라지지 않는다. 세력을 접수하는 것이다. 내 세력으로 흡수하는 게 바로 흑도다. 이번 대리전도 그렇다. 뺐으면, 그 즉시 내 편이 된다.
‘흑심방주 놈이라면 태룡방을 칠 때 분명 도움이 될 터!’
그 무시무시한 신위를 잠깐 떠올리자 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올라왔다.
녹림도의 머리 위로 등평도수를 펼치곤, 부채주를 단칼에 죽였으며 제 팔을 잘랐던 위인.
거기에 유풍방주의 손목을 섬전과도 같이 베어냈던 쾌속함의 극치.
답은 간단하다. 장강의 깃발을 빼앗아 천무백을 수하로 다루는 것.
제 입으로 녹림과 협력을 운운했으니, 깃발까지 뺏기면 아무 말 못하리라.
‘흐흐. 그 시건방진 놈이 내 명령을 따른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튀어나오는구나!’
염광채주는 흐뭇한 미래를 떠올리며 웃었다. 자신감은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무이산이라면 내 잘 알지.”
아주 잘 알고말고.
이곳에서 왕전유를 습격하지 않았나. 무려 하왕을 생포하는 일이다. 주위 환경을 샅샅이 조사하고 파악하는 건 당연했다. 무이산의 모든 산길과 짐승들의 영역까지. 모든 게 지도가 되어 염광채주의 머리에 박혀 있었다.
‘아마도 이쪽 거점일 확률이 높다.’
계책은 간단했다. 천무백을 유인해서 산길로 끌어내고, 그사이 나머지 채주가 거점을 탈환하는 것.
<뻐꾹, 뻐꾹>
그때였다.
‘저쪽이다!’
적을 발견했다는 미리 약속된 신호. 염광채주는 곧장 방향을 틀어 내달렸다. 길 하나 없는, 짐승도 다니지 않는 산을 관도를 질주하는 말처럼 쾌속하게 달린다.
우거진 수풀을 헤치자, 염광채주의 눈앞에 일단의 광경이 드러났다.
‘흑심방주!’
때마침 등장한 염광채주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천무백의 시선과 허공에서 마주쳤다.
‘됐다!’
철면장이나, 저 깃발을 들고 있는 화상자국이나. 천무백만 빼내면 나머지가 충분히 제압할 터!
염광채주는 회심의 미소를 짓곤 소리쳤다.
“이 개자식아! 내 팔이 잘렸으니, 오늘은 네놈 목을 잘라주마!”
“……!”
거침없는 폭언에 녹림과 대치하던 능허가 순간 헛웃음을 지었다.
‘정말 참신하게 자살을 택하네.’
물론 염광채주 입장에서야 천무백을 유인하기 위함이었지만…….
그런 도발이 통했을까. 아니면 염광채주의 등에 메여있는 깃발이 보여서일까.
천무백은 몸을 돌려 염광채주에게 득달했다.
“헙!”
벼락과도 같은 신속함에 염광채주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예상보다 더한 쾌속한 경공.
염광채주 역시 곧장 몸을 돌려 수풀 사이로 몸을 던졌다.
뒤에서 엄습해오는 엄청난 기세에 염광채주 역시 이를 악물고 내달렸다.
‘이쪽으로 빠지면 늪지대 나온다. 우선 이쪽으로!’
무려 천무백에게 쫓기는 상황에서도 염광채주는 최대한의 침착함을 유지했다.
머릿속에서 수많은 길이 떠올랐다. 더 빠르고, 더 은밀하게 몸을 숨길 수 있는 길. 온갖 수풀이 복잡하게 얽혀서 뚫고 가기도 울창함 속에서도, 염광채주는 귀신같이 길을 찾아 움직였다. 산짐승보다 더 쾌속하고 은밀한 움직임.
그가 왜 자신만만하게 산길로 천무백을 유인하겠다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었다.
산에서는 녹림을 쫓을 수 없다는 강호의 통설이 정확하다는 걸 입증하는 듯, 염광채주의 움직임은 귀신같았으니까.
한데 어느 순간, 염광채주의 뒤로 엄습해오던 기세가 사라졌다.
뒤를 흘깃 바라본 염광채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너무 빨리 따돌렸나? 벌써 포기하고 돌아갔다고?”
아차 하는 심정이었다.
“이런 미련한 새끼. 시건방은 다 떨더니. 줏대도 없는 자식.”
염광채주는 승리감에 통쾌하기까지 했다. 제 팔을 잘라 놓고, 거력왕을 습격해서 쓸데없는 협력제안까지 하더니.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채주들이 장강의 깃발을 빼앗았을 것이다.
그런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천무백이 자신의 도발에 휩쓸려 쫓아오다가 포기하고 급히 돌아갔을 꼴을 생각하니, 염광채주는 허리를 젖히며 웃고 싶을 정도였다.
아니, 참지 못하고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튀어나왔다.
“흐흐흐! 이 병신새끼.”
그때였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선명하게 귓속에 때려박히는 목소리.
“거기 있었구나?”
“……!”
염광채주의 몸이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빳빳하게 굳었다.
염광채주의 목이 마치 혈도가 짚힌 것처럼 뚝뚝 끊기면서 뒤로 젖혔다.
나무 위.
가면 속 무심한 안광이 쏟아지고 있었다.
“허억!”
심장이 철컹 가라앉는 기분이 이런 것일까. 발끝부터 머리까지 오한이 스며듦과 동시에 본능적으로 몸을 돌려 다시 내달렸다. 있는 힘껏 경공을 펼치며, 울창한 수풀림을 쭉쭉 내달렸다.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냥감은, 때론 본래 달릴 수 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도망칠 수 있는 법. 극도로 위기감을 느낀 염광채주의 신형은 벼락처럼 녹림(綠林)을 꿰뚫었다.
“애쓴다. 용쓴다, 용 써.”
허나 목소리는 여전히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
등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그저 열심히 달렸다. 있는 힘껏 경공을 사용해 내달렸다. 거력왕이 아닌 이상, 어떤 절정고수도 이 울창한 산림에서 자신을 쫓아올 수 없다.
그러니까, 산을 밟으면서는 말이다.
“발에 땀 나겠다, 야. 적당히 뛰어.”
“다, 닥쳐!”
염광채주는 뛰었다. 천무백은 날았다.
그것이 맹점이었다. 아무리 도망쳐도, 땅을 밟고 도주해봤자 하늘을 나는 인물을 어찌 막으랴.
정확히는 나는 게 아니었다. 나무 꼭대기를 밟으며 성큼성큼 건너는 압도적인 경공. 제아무리 뛰어도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듯이 경공을 펼치는 천무백을 어찌 떨쳐내랴!
“거참, 거기까지 하고, 깃발 내놔라.”
순간 위에서 천무백의 신형이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격렬한 위기감에 염광채주는 급히 몸을 비틀었지만, 천무백은 그것마저 예상했다는 듯이 정확하게 꽂혔다.
꽈득!
“억!”
어깨에 전해지는 둔중한 충격에 달리는 속도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며 쭈욱 미끄러졌다.
“으으윽…….”
바닥에 처박힌 얼굴을 간신히 들어 올린 몰골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코뼈가 주저앉고 이빨이 우수수 빠졌다.
얼굴에 드러난 건 경악과 두려움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한데 묘하게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흐흐. 네놈 뜻대로 된 것 같으냐? 이미 늦었다. 네놈들 깃발은 우리가 차지했을 테니까.”
이미 충분히 시간을 끌었으리라는 판단.
천무백은 반응은 무심했다.
“깃발이 뺏기면 소식이 왔겠지.”
“뭐?”
순간 얼빠진 소릴 내는 염광채주를 무시하곤,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깃발을 뺏었다.
휘이이익! 퍼엉!
깃발을 뺏고 한차례 펄럭이자, 저 멀리 대리전을 구경하던 봉우리에서 신호탄이 쏘아졌다.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염광채주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뭐, 깃발은 됐고. 뭐라 했더라? 목을 잘라준다고 했던가. 미련한 놈이라고 했던가, 줏대 없는 놈이라 했던가.”
“…….”
어쩐지 목소리가 스산했다.
“하긴 줏대 없는 건 맞지. 팔 하나만 잘랐으니까. 양 팔을 잘라야 균형이 맞는데, 내가 너무 마음이 약해서.”
“…….”
“그렇다고 울지는 말고. 목은 안 잘라. 균형 맞게 팔만 자를게.”
그때였다.
“신호탄을 보고 왔더니, 녹림이 장강 걸 뺏은 게 아니라 자라놈이 산멧돼지 놈을 잡은 거였군?”
삼괴이의 독이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어쩌면 염광채주에게는 다행일지도 모른다. 천무백의 시선이 그를 떠나 독이에게 향했으니까.
“이왕이면 한 번에 깃발 두 개를 뺏어서 끝내면 좋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게 유감이군.”
독이는 그리 말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가 있는 자리를 중심으로 푸른 녹빛의 수풀이 급속도로 검게 시들었다.
독기(毒氣)였다.
천무백이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야. 염광채주.”
“으응?”
“팔 하나마저 잘리기 싫으면 깃발 들고 도망쳐라. 잘 간직해. 보니까 칼질은 허접해도 도망은 잘 치더라.”
“…….”
“잡히면 뒈진다.”
그 말에 염광채주는 흘깃 독이를 바라봤다. 그를 중심으로 퍼져나가는 강렬한 독기는, 조금이라도 들이마셨다간 폐가 쥐어짜질 않는 것처럼 무시무시했다.
맞다. 잡히면 저 독에 한줌 핏물이 되리라.
“아니, 쟤 말고.”
“……?”
“잡히면 나한테 뒈진다고. 팔 하나로 안 끝나.”
염광채주는 그대로 냅다 도망쳤다.
독이가 뒷모습을 보며 비웃었다.
“흥, 도망쳐 봤자 얼마나 가겠느냐. 안 그래도 네놈, 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번에 혼쭐을 내주마.”
“진짜 눈치 없네.”
천무백의 태연자약한 반응에 독이가 일순 멈칫했다.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표정. 아무리 절대고수여도, 독공을 쓰는 고수를 만나면 본능적으로 꺼리기 마련이다. 저보다 하수로 느껴지는 인물이라도, 독공만큼 꺼려지는 게 없으니까.
한데 천무백은 꺼리는 기색은커녕, 오히려 귀찮은 기색이었다.
“그때 살려 뒀더니, 이젠 죽여 달라고 이렇게 기어오다니 말이야.”
쯧. 자비를 베풀어도 기어이 죽기를 바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