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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신재생-176화 (176/318)

<검신재생 176화>

176. 뺏기면…… 알지?

생각지도 않은 천무백의 반응에 해이는 말을 잃었다.

수많은 시선이 천무백에게 쏠렸다. 얼마나 어처구니없고, 광오한 발언이었는지 모두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자 천무백이 웃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뭐, 그렇다는 거지. 싸우다 보면 죽을 수도 있는 거고. 안 그렇소? 규칙 중에 살인이 금지되지는 않았을 터이니.”

어쩌면 당돌하다 싶은 반응. 천무백이 어린 건 목소리나 체형에서 드러났다.

하니 여기 있는 이들은 작게 보면 흑도 선배요, 넓게 보면 강호 선배다.

지독히도 건방지다. 단순 맹랑한 게 아니다. 다만 단숨에 유풍방주를 제압한 모습을 보고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삼괴이 중 독이만이 잔뜩 찌푸린 얼굴로 노려보다가 한마디 했다.

“거, 말조심하지? 후배. 그러다가 정말 내일이 제삿날이 될지도 모르니까.”

“누구의 제삿날이 될지는 모르는 일이지.”

“……!”

가면 속 웃음이 확연히 느껴지자 독이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도발인지, 당돌함인지 알 수 없는 배짱에 독이는 표정을 와락 찌푸렸다.

“어린놈의 새끼가, 칼질 좀 한다고 많이 설쳐대는구나?”

순간 폭발적인 살기가 터져나왔다.

그야말로 폭력적인 기세. 숨이 턱 막히고 과격하고도, 무지막지한 기세.

오로지 천무백에만 집중되는 기세의 폭풍.

단 한 명에게 의도적으로 기세를 쏟아 냈지만, 주위에도 영향을 끼쳤다. 저릿저릿한 살기가 피부를 찔렀다.

기세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압도적인 경지는 아니나, 적어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지독한 공포를 안겨 줄 정도는 됐다.

“흥. 애송이 자식아. 여기는 강호다. 변방에서 칼 좀 쓴다고 주제 파악 못하고 덤벼들다간 오줌을 지리고 목이 잘릴 것이다.”

독이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가면이 얼굴을 가려, 표정을 알 길이 없다만 예측은 할 수 있다.

‘건방진…… 감히 누구 앞에서 개소리를 지껄여?’

편협한 성정인 그는 감히 제 앞에서 건방진 모습을 보이는 천무백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반드시 이번 대리전에서 죽여 주마.’

살인이 금지된다는 규칙은 없으니, 죽여도 무방하다.

진심으로 살의를 가져서일까. 더 진해진 살기가 천무백에게 집중됐다. 어느새 주위도 영향을 받아 모두 딱딱하게 굳었다. 단숨에 분위기를 휘어잡고 독이가 이죽였다.

“이쯤 되면 경고는 된 것 같으니, 주제를 알고 자중하거라. 애송아.”

그쯤하고 독이는 기운을 거뒀다. 어차피 죽이는 거야 대리전에 들어가서 하면 되는 일이니. 저 건방진 애송이를 갖고 노는 건 여기까지 해도 충분하리라.

그는 비웃음을 만면에 띄우고 바위처럼 굳어 있는 천무백을 바라봤다.

‘쯧. 제법 한가락 하는 놈 같았지만, 저보다 강한 기세를 맞닥뜨리니 별 수를 못 쓰는군. 이래서 경험이 많아야 해.’

그때였다. 천무백의 고개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

“주제를 모르는 놈이 주제 운운하는 법이지.”

가면 속 눈동자가 번뜩이는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

독이는 입을 닫았다. 말하지도, 눈을 마주치기도 힘들었다. 어려웠다. 아니, 저번뜩이는 안광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고개가 숙여지고 피해야 한다는 직감이 들었지만, 단 조금도 꼼짝하지 못했다.

감겼던 눈이 뜨이며 시퍼런 안광이 번뜩이는 순간.

강렬한 자성(磁性)에 휩쓸리듯 독이의 시선이 천무백에게 고정됐다.

시각, 청각, 후각. 그리고 온몸으로 느끼는 수많은 미세 감각이 비명을 내지르는 듯 몸이 빳빳하게 굳었다.

“끄읍…….”

답답한 신음이 튀어나왔다. 득의양양했던 독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저도 모르게 검집을 쥔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불거졌다. 그도 모자라 손톱이 피부에 파고들어 새빨간 선혈이 맺혔다.

‘나한테…… 기세를 집중하고 있다.’

간신히, 아주 간신히 생각의 끈이 이어질 때. 독이는 느꼈다. 자신이 했던 것처럼, 저 녀석도 똑같이 하고 있다고.

한데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서로 살의를 가지고 살기를 쏘아보냈지만, 명백히 달랐다.

자신은 기세로 상대를 제압하는 수준이라면.

저놈은…….

‘기세만으로 적을 죽이는 경지.’

입신지경의 절대자.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독이에게는 다행이었다. 숨이 턱 막히고 뇌로 산소 공급이 끊겨가는 순간.

“거, 어린 소형제가 배짱 한번 마음에 드는구나!”

독고패가 껄껄 웃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독이에게 기세를 쏟아 내던 천무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깔끔하게 거둬들였다.

순간 독고패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허? 기운의 갈무리가 깔끔하다 못해 통제력이 엄청난데? 독이가 제대로 한방 먹었군.’

아직 어린 나이로 보인다. 한데 그 실력이 삼괴이 중 가장 약한 독괴이라지만, 그를 기세만으로 제압할 정도로 기운을 잘 갈무리한다. 완벽에 가까운 내공의 통제력. 소름이 돋을 정도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독고패의 날카롭게 번뜩였다.

경계심? 그런 게 아니다.

‘이런 똘똘한 놈이 하남성에 숨어 있었다니.’

왜 왕전유의 밑으로 기어들어갔는지는 몰랐지만, 독고패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흑회가 통합되어 손아귀에 들어오면, 제 수하가 될 테니까.

고작 한합에 손목이 잘린 저런 미련한 놈 대신에 말이다.

“유풍방주께선 대리전에 참가할 수 없겠으니, 이만 물러가 보중하시오.”

“방, 방주님. 전…….”

유풍방주의 얼굴이 아연해졌다. 이번 기회에 독고패의 눈에 들어 흑회에서 한자리 단단히 하려는 속셈이었으니까.

하나 독고패의 차가운 눈빛에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숙이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천무백을 바라보는 눈빛은 달랐다.

“흑심방주라 했나? 하왕께서 대리인으로 수로채주가 아닌, 흑도방파의 방주를 내세워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 정도 위인이라니. 진작 내 곁에 두지 못한 게 아쉽군!”

호탕하게 웃었다. 허나 그사이에 천무백은 제 몸을 훑어보는 뱀 같은 눈빛을 느꼈다. 어깨를 툭툭 두들기면서 은근슬쩍 침투해 오는 내공까지.

천무백은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차피 상단전은 천무백이 드러내지 않는 이상 접근조차 못 하고. 독고패가 볼 수 있는 건 하단전의 극음지기였을 뿐이니.

‘……!’

그것만으로도 독고패의 동공에 언뜻 놀라움이 스친다.

“소형제가 상당히 수준이 높군. 허어. 좋아, 생각해 보니 이만한 사람들이 나나 하왕이나 거력왕을 대리하여 큰 싸움을 펼치는데, 이들에게도 보상이 돌아가야겠지.”

별안간 독고패가 그리 말했다.

어차피 독고패는 제 승리를 확신하고 있다. 추후에 통합되면 천무백이나 녹림이나 모두 독고패의 수하가 되리라는 판단. 아낌없이 베푸는 모습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속셈을 파악한 천무백이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하나 독고패가 보상이라며 꺼낸 것에 천무백 역시 표정이 묘하게 흔들렸다.

“흑성단(黑成団)이라는 희대의 영약이지.”

흑성단. 그것을 꺼내자 삼괴이 세 명 모두 얼굴에 놀라움이 파문처럼 번졌다.

처음 듣는 이름이기에, 염광채주를 비롯한 녹림도, 철면장도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설명에 그들 얼굴 역시 상기되었다.

“여기 삼괴이 세 명이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는 소문은 익히 알려졌을 것이오. 이 셋의 치열한 노력 덕이기도 하나, 이 흑성단이 톡톡히 역할을 해냈지. 소림의 대환단 부럽지 않은 희대의 영약이오.”

분위기가 순식간에 후끈 달아올랐다. 대환단과 같은 수준이라니. 독고패가 허풍을 떨지는 않을 테니 사실이리라. 그런 영약을 상품으로 내민다는 배포에 좌중은 경악했다.

아마 누군가는 흑도의 우두머리가 될 만한 사내의 배포라고 생각도 하겠지.

하나 천무백은 독고패의 배포 따위는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흑성단.

영약 특유의 향에 섞여 흘러나오는 낯설지 않은 기운.

그것은…….

‘혈귀곡 놈들이 가진 특유의 마기다. 정순하여 정종의 기운 같지만, 그 속내는 지독하게도 파괴적인…….’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왕전유를 회주로 만드는 것뿐 아니라, 그에게도 승리가 필요한 이유가 생겼으니까.

* * *

일전에 천무백이 말했던 적이 있다.

자고로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구경이 싸움구경이라고.

그것도 태룡방, 녹림, 장강을 대표하는 대리전.

그야말로 열렬한 반응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어째, 투견판의 투견이 된 기분이라 썩 좋지 않습니다.”

능허가 툴툴댔다.

총 여덟 개의 봉우리를 품고 있는 무이산이다.

일전에 염광채주의 습격이 있던 그곳이기도 했다.

가장 높은 봉우리에 일단의 무리가 어렴풋이 이곳을 내려다보는 듯한 모습이 보였다.

“팔자 좋아. 술판까지 벌이고 가장 좋은 데에서 구경도 하고.”

독고패를 비롯한 구경꾼들은 최고봉에서 이번 대리전을 관람한다. 하나같이 내공이 견실한 자들이라, 안력을 돋궈 밑을 내려다보는 건 일도 아니리라.

위에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며 천무백은 주위를 둘러봤다.

“녹림과 협력해서 태룡방부터 치는 게 어떻겠소?”

철면장이 먼저 건의했다.

합당한 의견이다. 녹림과 장강의 협력관계는 이미 체결됐으니까.

허나 녹림도 음흉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위인들 아닌가.

“애석하게도 누가 우위인지 정해진 상태가 아니잖소?”

“우위가 정해지지 않았다?”

천무백은 냉철하게 상황을 파악했다. 녹림과 체결한 협력은 태룡방을 적대할 때 서로 합을 맞춘다는 것.

“녹림 역시 결국 거력왕을 회주로 옹립하려고 할 텐데. 힘 합쳐서 태룡방을 먼저 친다 칩시다. 나중엔 결국 우리를 겁박하지 않겠소. 순순히 거력왕이 회주가 되게 만들자고. 아니면 칼을 휘두르겠지.”

“…….”

“적어도 지금에서 녹림과 손잡을 순 없소. 괜히 놈들이 뒤통수치기 전에 녹림먼저 해결하는 게 속 편한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 쳐도 태룡방의 삼괴이를…….”

“아, 그건 걱정 마시오.”

천무백은 대수롭지 않게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철면장은 입을 다물었다. 미심쩍은 표정이었지만, 철면장은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은연중에, 이번 대리전의 수장으로 인정하고 있었으니까.

‘그 괴물 같던 신위는…….’

똑똑히 기억했다. 녹림도 머리를 밟아 등평도수를 펼치곤, 단숨에 염광채주의 팔을 잘라 버리던 섬전과도 같던 모습.

‘채주님께서도 이 자를 은근히 믿는 구석이시니…….’

물론 거력왕과 싸울 때 도와주지 않았다고, 믿지 못할 쌍놈이라는 평가를 했지만.

오랫동안 왕전유 곁을 지킨 철면장은 잘 알았다. 나름대로 천무백을 신뢰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니 철면장은 천무백의 뜻대로 움직이기로 마음먹었다.

“자. 그럼 우선 녹림부터 치러 갑시다.”

“그러면 누가 남아서 거점을 지키오?”

사실 이번 대리전은 꽤 머리를 굴려야 했다.

우선 다른 세력의 거점이 어느 봉우리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찾는 시간도 있을 뿐더러, 찾으러 나간 사이 제 거점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가령 녹림을 치러 간 사이, 태룡방이 와서 빈집털이 할 수도 있고.

누가 거점을 지키느냐, 누가 거점을 빼앗으려 가느냐.

꽤 중요한 문제였다.

“뭐, 다 같이 가면 되지.”

“……이 거점을 지켜야 할 사람이 있어야 하오. 혹여 누가 먼저 여길 찾으면.”

“말은 바로 합시다. 우리가 지키고 뺏어야 할 게, 거점이오?”

뜬금없는 말에 철면장이 표정을 구겼다. 거점을 빼앗는 게 이번 대리전의 규칙이다. 그걸 모를 리가 없다. 몰라서 묻는 건 아닐 테니, 철면장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때였다. 능허가 천무백의 말뜻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었다.

“거점을 뺏는 게 아니라 봉우리에 꽂힌 깃발을 뺏는 거죠.”

“그게 그거 아니오. 깃발은 거점에 꽂혀 있는…… 어?”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이 말하던 철면장의 얼굴이 일순 흔들렸다.

천무백이 씩 웃었다.

“흑도가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제 거점을 버리고 딴 곳으로 튀는 게 뭐가 부끄럽겠나. 흑도란 이름 하나만 살아남으면 그만이지.”

천무백의 시선이 봉우리에 꽂힌, 수(水)자가 새겨진 깃발에 향했다.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올라 깃발을 뽑은 뒤, 능허에게 건넸다.

“……왜 나한테 줍니까.”

“등에 돌돌 메라.”

“……?”

“뺏기면…… 알지?”

능허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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