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5화>
175. 대리전(代理戰)
거대한 장원에 딸린 대연무장.
흑회가 열리며 대대적인 개수공사를 거쳤다. 거의 팔천 명에 가까운 인파를 동시에 수용할 규모다.
한데도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도저히 움직일 구석도 없을 정도로 가득 찼다.
연단 위에 태룡방주, 독고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독고패만이 아니다. 거력왕과 왕전유 역시 양옆에 기립했다.
“강호의 호걸들이 이 모자란 놈의 청에 이 자리에 모였구려. 강호동도들! 노부는 태룡방주 독고패이외다!”
독고패의 등장에 모인 이들은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압도적인 광경이다. 애매한 표정을 짓는 건 녹림도와 수적들일 뿐, 절대다수의 흑도들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환호했다.
“그리고 여기, 강호를 위한 이번 모임에 장강의 하왕과, 녹림의 거력왕께서도 친히 납시었으니 이로써 정녕 강호의 영웅들이 흑도라는 깃발 아래 모두 모인 것이오!”
“와아아아아아!”
녹림과 수적들도 그제야 손뼉을 쳐 댔다.
그러나 천무백은 냉소를 지었다.
‘누가 우위에 서 있는지 한눈에 보이네.’
독고패는 가운데에서 홀로 이야기를 주도했다. 무대의 주인공처럼. 반면 왕전유와 거력왕은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마치 장식물 같았다. 독고패라는 주인공을 돋보이기 위한 배경.
천무백의 시선이 연무장을 훑었다. 어마어마한 인파.
하나같이 거친 삶을 살아온 흑도 중의 흑도. 어디 조무래기들이 아니라 진짜배기 날것 그대로의 힘이 역동했다.
천무백은 독고패의 목적을 눈치 챘다.
‘기선을 제압하고 위계를 정하는군.’
자신이 이룩한 성과, 태룡방을 비롯한 흑도의 열렬한지지.
모든 걸 보여 준다. 또 달콤한 열매를 제시한다.
이인자나 삼인자로 살아도 만족할 수 있다는 걸 강조한다. 적절한 보상, 가령 명예나 재물을 아낌없이 안겨 줄 만한 사내라는 걸.
‘흑도가 통합되는 이유가 있군.’
새삼 독고패에 대한 평가를 상향 수정한 천무백은 오히려 묘한 표정을 지었다.
저런 사람이 혈귀곡에게 그저 무작정 휘둘릴 것 같아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혈귀곡을 제 뜻대로 이용할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더 위험하다.’
차라리 혈귀곡의 수족이라면 그저 쳐 없애 버리면 그만이다. 다만 음흉한 놈이라면 골치가 아프다. 힘과 세력을 갖춘 상태니까.
‘삼분지계를 만들려면 최소한 왕전유를 회주로 만들고, 녹림의 협력을 이끌어 내어 견제한다. 그래야 통합된 흑도가 독고패의 의중대로 움직이지 않을 터이니.’
생각을 정리한 천무백은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독고패의 힘찬 개회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콰앙!
연무장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진각을 밟자, 일순 사위가 조용해졌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정도로 정적에 잠기고, 수많은 시선이 쏠렸다. 독고패는 그 시선을 즐기는 듯 미소 지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마시고!”
독고패의 우렁찬 선창.
태룡방의 직속 수하들이 벌떡 일어나 호응했다.
“마시고오오오오오!”
꽝!
“취하고!”
“취하고오오오오!”
이어지는 선창과 후창의 반복. 그 기묘한 울림은 어느새 모든 이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꽝!
“놀아라!”
“놀아라아아아아아!”
그것을 끝으로 곧장 잔치가 벌어졌다. 기녀들이 연무장으로 나와 춤을 췄고, 어느새 근사한 음식들이 진열됐다. 술과 음식, 그리고 기녀들의 춤까지.
화려한 잔치는 흡사 축제 같았고, 조금은 떨떠름하던 녹림과 수적들도 순식간에 분위기에 휩쓸렸다.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용처럼 강대하면서도 뱀같은 교묘함을 지닌 놈이로구나.’
이 순간, 천무백은 결심했다. 저자가 적이 된다면. 아니, 낌새라도 보이면 먼저 나서기로.
‘반드시 죽여야겠군.’
그래야만 했다.
* * *
흑회는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였다.
도시 전체가 술과 기녀, 음악으로 흠뻑 적셨다. 몇 날 며칠이고 술이 오가고, 온갖 산해진미가 먹어도 먹어도 동나지 않았다.
또 혈기왕성한 흑도들답게, 곳곳에서 시비가 붙는 건 흔한 일이었다.
매일같이 여기저기가 깨져나가고, 누군가는 의원한테 실려 나가면서도 그걸 지켜보면서 왁자지껄하게 웃는 모습은 날것 그대로였다.
“…….”
천무백은 묵묵히 상황을 지켜봤다.
아무런 규칙도 없는 무법지대요, 아수라장이었지만.
이것이 곧 흑도의 통합이다.
각지에서 모여든 흑도들이 술을 나누고, 시비도 틀고, 실컷 싸웠다가 다시 서로 술을 나누는 광경.
참으로 미련해 보이는 수라장이었지만, 오히려 흑도들은 여기서 강렬한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흑회의 회주를 정한다!”
어디서부턴가 시작된 소문은 곧 순식간에 퍼졌다.
“뭐, 당연히 태룡방주께서 하시겠지.”
“그래도 절차란 게 있지. 투표로 뽑으려나?”
“뭘 하던 결국 태룡방주가 회주 되는 거 아니야? 비무전으로 공평하게 싸운다고 해도 말이지.”
“하긴. 거력왕이나 하왕도 태룡방주에겐 안 되잖아?”
다들 그렇게 큰 흥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찌 됐건 독고패가 회주가 되는 건 유력해 보였으니까.
그리고 축제가 조금 시들어질 때쯤, 독고패는 다시금 대연무장에 사람들을 소집해 선언했다.
“이제 곧 출범할 흑회는 단순한 강호 방파가 아니오! 여태 백도무림에선 무림맹이란 단체를 만들어 자기네들의 이익을 추구했고, 마도에서도 같잖은 종교를 내세워 통합을 추구했소. 그 사이에서 흑도는 늘 분열되어 약자로 멸시됐소!”
“옳다!”
“맞소! 틀린 말은 아니지!”
순식간에 공감을 이끌어 낸 독고패가 이내 선언했다.
“하여 중원의 모든 흑도패와 장강의 수로채, 그리고 녹림의 호걸까지 아우르는 흑회가 이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바이니, 이젠 흑도들의 강호를 위해, 불길에 뛰어들 사내가 앞장서야 하지 않겠소. 흑회의 회주를 정하는 자리를 마련했소이다!”
독고패는 목을 가다듬고는 다시 소리쳤다. 웅혼한 내기가 쩌렁쩌렁 울렸다.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뛰게 하는 묘한 마력이 넘실거렸다.
“하나 우리는 저 마도의 무식한 놈들이 아니지 않소이까! 그저 강하다고만 해서 흑도를 위한 강호를 만들 순 없소. 하니 마도처럼 무작정 강한 놈이 회주 자리에 오를 필요가 없소.”
일장연설을 쏟아 낸 독고패는 잠시 침묵했다. 거짓말처럼 사위가 조용해졌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모든 시선, 모든 신경이 독고패에게 쏠린 순간. 선언했다.
“흑도는 형제요! 본인만 강하다고 강한 게 아니라, 형제들이 강해야 흑도는 강한 법이다! 내 형제, 내 동생, 내 수하들이 강해야 회주로 인정 받을 수 있겠지! 하니 나는 여기서 거력왕과 하왕과 협의한 내용을 얘기하겠소. 각자의 세력을 대표해, 나나 거력왕, 하왕이 아닌 휘하의 인물들이 ‘대리전(代理戰)’을 펼칠 것이오!”
대리전은 곧 상당한 반향을 불러왔다.
마도였다면, 가장 강한 놈이 우두머리를 차지한다는 강자존이 어울린다.
흑도는 아니다.
독고패가 말했던 ‘흑도는 형제다’라는 말은 곧 많은 흑도들에게서 공감을 일으켰다.
“우리가 왜 혼자 싸워?”
“여차하면 같이 싸우고 같이 죽는 거지.”
한 명을 수 명, 수십이 협공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수장들의 비무전이 아닌, 세력간의 대리전이란 사실에 흑회가 들썩였다.
“세력이라고 하면 녹림도 만만치 않지?”
“이거 꼭 태룡방주가 유리하다는 보장도 없는데?”
이런 저런 얘기들이 오가는 사이 발표된 대리전은 빠르게 급물살 탔다.
이미 모든 협의가 끝났으니까.
태룡방, 녹림, 장강에서 각 세력을 대표하는 세 명이 출전.
개인의 강함을 겨루는 비무전이 아닌, 각 세력을 뺏고 빼앗는 게 흑도의 일상이란 걸 고려해 거점전이었다.
인근 산맥에 솟은 세 개의 봉우리.
그곳에 각 세력의 거점을 마련하곤, 그 거점을 쟁취해 내는 규칙이었다.
각 세력의 출전명단이 정해지자 시작하기 전날, 출전자들은 연무장 중앙에 모였다.
당연히 천무백은 참가했다.
물론.
“나는 또 왜…….”
“수적들 중에 너만 한 놈이 없다.”
능허가 죽상을 지었다.
“잘 부탁하오. 이건 장강의 자존심과도 같은 일이니까.”
왕전유 측에서 참여한 이는 천무백과 능허, 그리고 철면장(鐵面掌)이라 불리는, 얼굴에 검붉은 빛이 감도는 사내였다.
장강에서도 제법 내로라하는 거대 수로채의 채주였다.
툭 튀어나온 태양혈을 보면 그도 만만찮은 절정의 고수였지만, 이어 자리에 모인 상대들 역시 범상치 않았다.
녹림에선 외팔이가 된 염광채주와, 건장한 사내가 둘이 나왔다. 듣기론 그들도 한때는 거력왕에게 대항하던 거대 녹림채의 채주였단다.
문제는 태룡방 측.
삼괴이라 불리는 수신호위 중 두 명, 적이(赤彲)와 독이(毒彲)였다. 나머지 한 명은 유풍방이라는 거대 흑도방파를 이끄는 작자였다.
유풍방주가 슥 시선을 돌리다가, 이내 천무백에서 시선을 멈췄다. 철면장을 보며 피식 웃었다.
“흐음. 이거야 원, 녹림의 영웅들이야 험한 산세에서도 칼 잘 쓰기로 유명한데. 장강의 친구들은 이번 일이 참 골치 아프겠소?”
“…….”
“웬 가면을 쓴 어린 놈에, 얼굴에 화상 자국 드글한 중늙은이에…… 철면장이었나? 그쪽 소문은 들었지. 물 위에서 귀신같이 칼춤을 춘다고. 근데 이걸 어쩌나. 여긴 땅 위라서, 춤을 잘 출 수 있을지 모르겠소. 춤추려면 저기 내가 데려온 기녀들이 있으니, 검무 한번 배워보는 게 어떻겠소? 괜히 이런 험한 일에 끼어들지 마시고.”
유풍방주는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기분 나쁘게 이죽였다.
능허야 이런 일에 흔들리지 않았고, 천무백 역시 웬 개가 짖나 하는 심정이었지만.
철면장은 모욕당했다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흐흐흐. 이거야 원. 아니다 싶으면 저 밑에서 물을 떠 와서 봉우리에 호수를 파는 게 어떻겠소?”
그러면서 허우적거리며 수영해 대는 동작을 취해 보이니, 옆에 있던 독이란 놈이 껄껄껄 웃었다.
서로 안면이나 익히자는 자리였지만, 유풍방주는 대놓고 비아냥댔다.
그러나 누구도 만류하지 않았다.
이게 흑도들의 일상이었으니까. 언제든 시비를 걸고 진흙탕을 뒹구는 게 그들의 방식 아니던가. 오히려 흥미진진한 얼굴로 지켜보는 이들이 한가득이었다.
“그리고 거기 가면 쓴 애송아, 보아하니 아직 어린놈인 것 같은데. 흑도 칼밥 먹고 사는 놈이, 왜 뜬금없이 장강의 자라 밑에 들어가셨나?”
유풍방주가 히죽 웃었다. 그리곤 가랑이를 벌려 기어가는 시늉을 하니 이건 대놓고 조롱이었다.
하긴, 누가 봐도 장강측이 가장 약해 보이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서로 신경전을 펼치며 기선제압하는 게 흑도이기에 유풍방주는 가장 만만한 상대를 택한 것이다.
천무백의 입이 열렸다.
“거, 존나게 깝죽대네.”
“……!”
갑자기 튀어나온 말에 유풍방주는 순간 말을 잃었다.
이내 그 말이 자신에게 한 말이란 걸 깨달은 유풍방주가 표정을 굳혔다.
“이 어린놈의 새끼가 뭐라고?”
“늙어서 귓구멍이 처 막혔나. 흑도 칼밥 먹고 사는 놈이 태룡방주 가랑이 사이를 기어 다니더니 귀가 망가졌나 보네.”
“…….”
태연하게 폭언을 쏟아붓자 유풍방주는 오히려 어버버하며 얼굴이 벌게졌다.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단 생각에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예상외의 반응에 주위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바라봤다. 시선이 일순 집중되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모욕이라고 여긴 유풍방주가 벌게진 채 대뜸 검을 뽑았다.
“이 새끼가, 너는 흑도판에서 선배를 존중해야 하는 거 모르냐?”
“남 가랑이 사이를 기는 걸 자랑스럽게 여기는 병신은 선배라고 생각 안 해서.”
“이익!”
결국, 참지 못하고 유풍방주가 검을 내질렀다. 내심 적당히 상처를 입혀 고개를 조아리게 할 속셈이었다. 하나 그 순간.
서걱!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눈을 부릅뜨고, 제 눈을 의심했다.
“……!”
그야말로 간결했다. 검이 내지르는 순간까지도, 검은 검집 속에 있었다.
하나 눈이 한번 감았다 떠지는 순간, 어느새 검이 뽑혀져 있었고 바닥에는 유풍방주의 손목이 나뒹굴었다. 유풍방주의 기행에 껄껄 웃던 독이의 눈이 살벌하게 번뜩였다. 잔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간결하고 깔끔한 검격이다. 저 애송이놈…… 대체 뭐지? 하왕이 어디서 저런 놈을 데리고 온거지?’
유풍방주는 손목에서 치솟는 핏물을 보며 괴성을 질러댔다.
“으아아아악!”
“입도 찢어지고 싶으면 계속 소리 질러.”
“……!”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유풍방주는 입을 꾹 다물었다.
천무백에게서 일순 쏟아지는 폭력적인 살기!
간단히 유풍방주를 제압해 버린 천무백은 태연하게 태룡방측을 바라보며 말했다.
“손목 하나 잘렸는데, 대리전에 참여할 수나 있을지 모르겠소.”
흑도 사이에서 만남이 이뤄지면, 기선싸움은 늘 있는 법.
유풍방주가 먼저 나섰지만, 결국 제압당한 건 천무백이 아니라 좌중이었다.
모두가 침묵하는 가운데, 삼괴이 중 독이와 적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나서려는 찰나.
묵직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하면 참가자를 바꿔야지. 태룡방주께서 허락하셨으니, 내가 대신 참가하겠네.”
모습을 드러낸 건 긴 머리칼의 무심한 얼굴의 사내.
삼괴이 중 맏이, 해이였다.
그의 등장에 주위에 침음이 흘렀다. 녹림도의 표정 역시 찌푸려졌고, 철면장도 굳은 얼굴이었다.
셋이 나서면 거력왕과 하왕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는 태룡방주의 수신호위 삼괴이.
그 셋 모두가 대리전에 참가한다.
해이가 마음껏 기세를 드러내며 등장하자, 순간 주위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하나…….
“어쩌지. 대리전 중에 셋이 다 죽어 버리면, 태룡방주께선 수신호위를 다 잃는 거 아니오?”
“……!”
천무백의 입가엔 미소가 피어올랐다. 오히려 눈빛에 떠오르는 건, 기대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