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74화>
174. 흑회(黑會)
“하왕과 거력왕이 두 차례 부딪쳤습니다.”
광택이 은은하게 맴도는 견고한 자단목(紫檀木)으로 만들어진 태사의. 그곳에 앉아 있는 화려한 옷차림의 사내는 수하의 보고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등받이에 기댄 장년인의 이름은 독고패(獨孤敗).
정마대전의 틈바구니에서 태룡방이라는 거대한 흑도방파를 일으켜 세운 불세출의 영걸.
바로 태룡방주가 그였다.
독고패의 눈이 빙그르르 돌아 보고를 올린 사내에게 닿았다.
세간에서는 삼괴이라고 불리는 태룡방주의 수신호위 중 일인.
해이(海彲)는 독고패의 시선을 받고 흠칫 떨었다.
그도 세상 두려울 것 없는 고수였지만, 독고패의 저 뱀 같은 눈빛은 감당하기 힘들었다.
때로는 용처럼 범접할 수 없고, 때로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뱀처럼 사특한 눈빛.
정면에서 받는 건 꽤 곤욕스런 일이다. 독고패의 쇠를 긁는 듯한 목소리가 물었다.
“결과는?”
“각자 데리고 온 수하들의 손실의 일부는 있으나, 둘 다 무사합니다. 현재 흑회에 참여하기 위해 오고 있습니다.”
“흐음. 녹림채주가 근래 깜찍한 일들을 하더니, 수적까지 삼키려고 했나?”
독고패는 실소했다.
비웃음이었다.
“쯧쯧쯧······ 그토록 흑도의 수장이 탐났으면, 사내남아답게 당당하게 나에게 승부를 걸지. 안 그런가?”
“그렇습니다. 하면······ 거력왕을 제거할까요?”
“아니다.”
독고패는 손을 저었다.
“녹림을 완전히 연합체 안에 묶어 두려면, 거력왕의 수완이 필요하지. 녹림을 아우르는 그 관록만큼은 대체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녹림채주가 계속 이런 식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도를 하고, 만일 하왕 왕전유를 무너뜨리고, 수적들을 통합한다면······.”
해이는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녹림이 용을 써도, 태룡방에 반기를 드는 흑도방파를 포섭해도 발악에 불과했다. 태룡방의 아성을 넘기란 불가능이다.
차라리 경지의 벽을 넘어 입신지경에 도달하는 게 더 가능성 있는 일이라고 해이는 생각했다.
수십 년 동안.
그러니까 정마대전이 한창 치열한 시절부터 기반을 튼튼하게 다져 온 태룡방이다.
작금의 태룡방은 수백 년 역사를 간직한 명문정파에 버금가는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해이의 말대로 녹림이 장강수로채를 꿀꺽 삼킨다면, 그건 심대한 위협이 된다.
이미 일통된 녹림과 장강이 힘을 합친다면?
태룡방주의 절대적인 권위에 도전해 볼 만한 힘이 생기는 것이다.
“하왕 왕전유가 그리 만만한 상대는 아니다. 비교적 세가 약하다지만, 수적놈들도 기가 엄청 세거든. 죽을망정 굴복하지 않는 놈들이야.”
그것이 독고패가 하왕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이유였다.
녹림과 장강수로채.
두 세력을 아우르는 것이 그의 중대한 목표.
“정파놈들이 정의맹이란 같잖은 이름으로 뭉쳐도, 능히 일전을 겨룰 만하다.”
그랬다.
범 흑도를 아우르는 새로운 흑도연합체를 탄생시키고 수장 자리에 오르는 것.
독고패의 목표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토록 흉흉하고 기센 수적과 산적을 휘어잡은 하왕과 거력왕이 살아서 자신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만일 둘이 독고패에게 죽으면, 적어도 녹림과 수적은 있는 힘을 다해 독고패에게 반기를 들테니까.
“하면 힘으로 제압하실 겁니까?”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흑회를 열어 세를 통합하고 달콤한 열매를 내밀면 천천히 우리에게 흡수되겠지.”
독고패는 영민했다. 태룡방을 혼자 만들어 낸 시대의 거인다웠다.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그는 기다릴 줄 알았다.
섣불리 나서서 열매를 따지 않았다.
시간만 있으면 녹림과 장강이 태룡방에 점차 흡수되는 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다만 문제는······.
“생각보다 우리의 두 친구가 욕심이 많아.”
독고패가 비웃음을 흘렸다.
적당히 욕심내는 거야 괜찮지만, 제 권위에 도전하려고 발악하다니.
거력왕이야 녹림의 세력권이 태룡방의 세력권과 겹치는 부분이 왕왕 있으니 이해한다.
하나 왕전유까지 저럴 줄이야.
“아무래도 둘을 한번 눌러 줘야겠다. 이번 흑회에서 말이야.”
“어쩌실 요량이십니까?”
“마음 같아선 내가 직접 두들겨 패 주고 싶으나, 그래도 한 세력의 수장이니 그럴 수는 없지. 신사적으로 대해야지. 몸 풀어놓고 있으시게. 자네와 자네 동생 둘 다.”
수신호위 세 명.
삼괴이에게 몸을 풀어 두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깨달은 해이는 미소를 지었다.
“우두머리 체통이 있으니 직접 싸울 순 없고, 수하들의 수준이 그 세력의 크기를 논하는 거 아니겠느냐.”
“준비하겠습니다.”
독고패는 천천히 태사의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3층으로 이뤄진 고급 주루의 꼭대기.
그의 눈앞에 수천이 훨씬 넘는 흑도가 바글거리는 모습이 펼쳐졌다.
고작 일부다.
중원 흑도의 일부, 태룡방의 정예들만 모인 것이 이 정도다.
이제 흑도 전부가 모이고, 여기에 녹림과 장강까지 손아귀에 넣는다면.
‘혈귀곡의 빌어먹을 마도 놈들아······ 태룡방을 이용해 정파와 대신 싸울 사냥개를 만들 생각이었겠지만, 네놈들 뜻대로는 되지 않을 것이다.’
독고패의 눈이 번뜩였다.
* * *
복건의 포성현은 그리 큰 도시는 아니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도시라고 해도, 도시 자체가 사람들로 꽉 찼다는 느낌이 드는 건 평범한 일상이 아니다.
흑회(黑會).
중원 전토의 모든 흑도가 모이는 유례없는 행사가 열리는 장소였으니까.
“이거 하왕 아니었으면, 객잔도 못 잡았을 겁니다.”
능허의 말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원의 내로라하는 흑도들이 모이기 때문인지, 흑심방의 명패 갖곤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나마 능허가 수집한 육십여 명에 이르는 흑도 없이 천무백과 능허 둘이 왔다면 아예 포성현에 들어오지도 못 했으리라.
일단 왕전유의 일행으로 접수되었기에, 천무백은 곧 회합이 열릴 거대한 장원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
“거. 어마어마한 놈들 많던데요. 옛날 같았으면 저도 쳐다도 못 볼 놈들 말입니다.”
“지금은 쳐다볼 수도 있고?”
“에이. 절 뭐로 보시고. 태룡방주, 하왕, 거력왕 뺴곤 다 제 앞에서 눈 깔아야죠.”
능허가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사실 반쯤 허세에 가까웠다.
장원에 속속 모여드는 흑도방파의 우두머리들은 하나같이 거물이었으니까.
흑심방은 명함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다. 나름 하남성에서 힘쓰는 방파라지만, 중원 전체를 통틀어 보면 그리 크지 않으니까.
“그거야 뭐, 주군이 사업 확장을 막으시니까요.”
“내가 확장을 막는다고?”
“흑도들한테 돈 되는데 인신매매, 도박 아닙니까. 그걸 다 막으시니 별수 없죠.”
“그거 안 해서 망할 흑도면 진작 망해야지.”
“뭐, 그렇다고요. 저도 그런 거 안 하니까 차라리 속 편합니다.”
천무백의 반응이 날카롭자 능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능청을 떨었다.
“그나저나 도대체 뭔 얘기를 하는 걸까요.”
아직 흑회가 공식으로 개최되진 않았다. 하나 태룡방주, 왕전유, 거력왕을 포함해 몇몇 대형 방파의 방주는 사전에 모임을 가졌다.
“이것저것 치열하겠지. 연합체의 구성부터 해서. 내부에 여러 조직이 생겨 날 테고, 그 조직의 장에 각자 자기 세력의 인물을 앉히려고 수 싸움 할 테고.”
아마 머리가 꽤 아플 거다.
더구나 태룡방주가 대놓고 왕전유와 거력왕에게 말하지 않았나.
이렇게 싸울 바엔 우두머리를 아예 정하자고.
‘골치가 아프군.’
천무백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태룡방주에게 혈귀곡이 붙었다고 했으니 그건 틀림없는 사실일 터.
실제로 여기에 와서 느낀 태룡방의 저력은 하오문의 정보보다 더 강했다.
일전에 평가하기를 태룡방이 흑회에서 오 할의 영향력을 가질 거라 예상했는데.
천무백이 보기엔 아니다.
‘적어도 칠 할, 거기에 혈귀곡이란 변수까지 포함하면 거력왕과 왕전유가 힘을 합쳐도 불가능.’
너무 컸다.
이대로라면 태룡방주가 흑회를 완벽하게 장악하는 건 시간문제다.
어째서 녹림과 장강을 흑회에 초대했는지, 그 광오한 자신감이 어디서 솟았는지 이해가 됐다.
‘태룡방주가 혈귀곡의 꼭두각시일까?’
자문해보건데, 답은 아니었다.
‘혈귀곡의 조력을 받은 건 사실이겠지. 다만 혈귀곡에 호의적일 거라고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이만한 세력을 구축한 건, 정마대전 때부터 오로지 태룡방주의 능력이니까. 오히려 그는 혈귀곡의 조력을 이용하고 있을 것이다.’
흑도 연합체를 탄생시키고, 그걸 제 손아귀에 넣는다면.
태룡방주는 오히려 혈귀곡과 대등한 위치에서 거래하거나, 또는 맞설 것이다.
정마대전 때처럼.
정의맹과 혈귀곡. 그사이에서 태룡방주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출렁이니까.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흑도연합체가 누군가 한명의 손에 휘둘리는 건 위험하다.’
판을 뒤바꿀 수 있는 회심의 패가 된다. 앞으로 혈귀곡을 상대하는 데 있어, 판을 바꿀 비장의 패가 내 손에 있는 게 아니라면 골치가 아픈 법.
하니 천무백은 결정했다.
‘최소한 삼분지계를 유지한다. 거력왕, 왕전유, 태룡방이 어떻게든. 위촉오처럼 태룡방이 세력이 더 커도, 감히 두 세력을 모두 아우를 수 없게끔. 그래서 함부로 혈귀곡에 기울여질 수 없게.’
또는.
‘아니면 내가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이 흑회를 장악하게끔 하거나.’
그 순간 천무백의 머릿속에 누군가 떠올랐다.
‘현재로선 왕전유가 가장 좋지.’
다만 왕전유가 자신의 맘대로 다룰 수 있는 인물인가는, 아직 문제였다.
생각보다 단순하고 우직해 나름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만······.
아무래도 확실한 내 세력은 아니니까.
그래도 왕전유가 우선 주도권을 잡는 것이 천무백에게 이롭긴 했다.
그러면 적어도 혈귀곡이 왕전유에게 접근해 오면, 그걸 천무백이 옆에서 곧장 알고 역공을 가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방법인데.’
세력 차이가 분명하다.
그러니 세력을 늘려서 태룡방을 찍어 누르는 건 불가능.
하면 최소한의 명분과 권력을 쥐어야 한다.
가령 이번 흑회의 회주 자리 같은. 물론 세력이 없으면 완장을 차고 있다고 한들 힘이 생기겠느냐지만. 왕전유 정도의 명성과 장강의 세력이라면 충분히 없는 명분도 만들 수 있다.
‘뭐 흑도놈들끼리 투표를 해서 뽑을 것도 아니고. 그래 봤자 태룡방주겠지만.’
천무백은 턱을 쓰다듬었다. 어차피 태룡방주가 우두머리를 흑도의 방식대로 정하자고 했으니까.
그 안이 나오면, 생각해 볼 문제다.
다행히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길고 긴 사전 회합이 끝나고, 왕전유가 지친 표정으로 천무백을 찾아왔다.
“어째 피곤해 보이오.”
“피곤하지. 서로 이권이 걸렸는데 말이야.”
“흐음. 그래서 뭔 얘기가 나왔소?”
“여러 조직을 신설하고, 그 조직에 어디 출신을 앉힐지 이런 것들하고 뭐 수많은 것들.”
“가장 중요한 건?”
“흑회의 회주를 뽑기로 했다.”
천무백은 팔짱을 낀 채 빤히 쳐다봤다.
“흑도에서 우두머리가 어떤 놈이지?”
“세고 독한 놈을 뽑지.”
“그래. 세고 독한 놈을 뽑아 회주로 옹립하기로 했다.”
그 말에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했다.
“뭐, 선배나 거력왕, 태룡방주 셋이 비무라도 펼치는 것이오?”
“절반만.”
왕전유는 지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정확히는 대리전(代理戰)이다.”
대리전.
그 말에 천무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수를 썼구나. 제법이군.”
만일 셋이 비무전을 벌였다면, 사실 누구나 태룡방주의 압승을 예상한다. 당연한 거 아닌가. 입신지경의 절대 고수인데.
만일 비무전을 제안하면, 대다수의 흑도가 이미 정해놓은 결말을 위한 요식행위라고 여길 것이다. 오히려 일부는 회주 자리에 오르려고 너무 속보이는 거 아니겠냐는 반응도 튀어나올 터.
“각자 휘하의 수하들이 대리전을 한다는 게 태룡방주의 의견이야. 나나 거력왕이나, 한 세력의 수장인데 대놓고 나서서 회주자리 앉겠다고 싸우면 참 꼴불견 같아 보이지 않겠느냐더군.”
하지만 대리전을 한다는 건, 꼭 태룡방주가 이기리라는 보장도 없다. 비무전처럼 이미 결말이 정해진 요식행위라고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렇지만 결국 태룡방주가 이기겠지. 삼괴이가 있으니까.’
흑회의 수장.
개인의 무력이 강하면 수장 자리에 어울린다는 건, 일견 이해할 수 있지만. 절대적인 명제는 아니다.
강한 놈이 왕이 된다는 건 마도에서나 그렇지.
흑도에선 자신 무력보단 세력의 힘을 더 크게 치는 경향이 크다.
그래서 대리전이다.
비단 자신만 독보적으로 강한 게 아니라, 수하들도 강하다는 걸 흑도들 앞에서 보여주는 것이니까. 그 세력의 공고함은 더 두터워지리라.
‘머리를 제대로 썼군.’
차라리 비무전이면 거력왕이나 왕전유가 동귀어진의 수로 기회라도 만들겠다만······.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머리를 제대로 썼다. 명분에서도 문제없고, 또 확실한 방법이니까.
다만.
“하왕 선배.”
“응?”
“회주 해 보실 생각 있으시오?”
천무백이란 변수를 생각하지 못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