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73화 (173/318)

<검신재생 173화>

173. 천무백식 협력제안.

왕전유와 거력왕 모두 서로 눈치를 보며 천무백을 공격할 생각을 선뜻 하지 못했다.

당장 마음 같아선 둘 다 천무백을 씹어 삼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

균형이었다.

‘내가 저 녀석 공격하다가, 저 산지렁이가 날 치면?’

‘내가 저 가면을 쓴 애송이 새끼 죽이는 와중에, 거북이 새끼가 내 뒤통수를 후리면?’

몸 상태가 최상이면 모를까.

이미 둘은 서로에게 치명적인 상처 하나둘쯤은 안겨 준 상황이 아닌가.

피를 하도 흘러서 현기증이 살짝 올 정도였다.

하니 천무백이 갑자기 평화주의자니 뭐니 막말하며 등장했는데도 누구도 건들지 못했다.

천무백은 싱긋 웃었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태연했다. 하나 그의 눈빛만큼은 날카롭게 번뜩였다.

‘둘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확인했다. 거력왕이 한 수 위지만, 적어도 물 위에서 왕전유와 그 휘하 수적들은 어떤 무림방파보다도 강력하다.’

배에서 벌이는 싸움, 물 밑에서 기습하는 특유의 공격방식. 수적들은 대단한 싸움을 보였다. 그래서일까. 천무백은 녹림에게 점수를 더 주고 싶었다. 호수라는 지형의 불리함에도 녹림은 분전했다. 거력왕도 왕전유를 몇 번이나 위기에 처하게 했고.

왕전유가 눈을 부라렸다.

“흑심방주! 나랑 같은 편 아니었나?”

“응 같은 편 맞소. 그래서 지금 선배 구해준 거 아니오.”

뻔뻔한 대답에 왕전유는 뒷목이 빳빳해졌다. 당장이라도 씹어 삼킬 것 같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지금까지 뱃놀이하면서 술이나 마시다가, 인제 와서 중재한다고? 네놈 속셈을 모를 줄 아느냐!”

“내가 중재 않으면 당신 뒈질 거 같아서 말린거요. 그러니까 같은 편 아니겠소?”

“······!”

왕전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 얼마나 뻔뻔한 발언인가. 같은 편이었으면 진작 같이 싸웠어야지!

“네가, 네가 도왔다면 저 산지렁이 새끼를 제압하고도 남았다!”

그러자 천무백이 혀를 쯧쯧 찼다.

“하왕 선배. 생각해 봅시다. 어차피 태룡방주와 싸우려면, 그들의 거점을 끊어 내야 하는데. 다 땅 위에 모든 이권과 거점이 몰려 있지 않소?”

“너, 너!”

“그래서 한번 시험한 거요. 둘 중에 누구랑 손잡는 게 좋을까. 하고.”

왕전유는 더는 놀랄 일도 없는 사람처럼 거의 체념한 표정이었다. 허탈한 웃음이 실없이 흘러나왔다.

자신이 놀아났다는 걸 깨달은 그는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러자 천무백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걱정 마시오. 선배 손 쳐 낼 생각 없으니까.”

“허허허허······ 그거 고맙구나.”

왕전유와 천무백의 대화를 듣고 있던 거력왕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 개 같은 놈들이. 도대체 무슨 개소리를 지껄여?”

“거, 개같이 생긴 놈이 계속 개개거리니까 기분 나쁘네. 개자식아.”

“뭐? 이, 애송이가······.”

천무백의 거침없는 막말에 거칠고 욕설이 난무하는 산채에서 살아온 거력왕마저 말문이 턱 막혔다.

그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진정시켰다.

너무 황망한 상황에 당황해서 온전히 상황판단을 못 하고 있는 걸 깨달았다.

갑작스러운 하왕과 수적들의 기습.

‘아뿔싸, 염광채주가 당했구나!’

염광채주가 성공했다면, 이런 기습 따위는 없었을 터.

하면 저들은 나름의 복수를 하려고 온 것이다.

‘태룡방주와 싸운다니, 그건 또 뭔 소리야? 손을 잡아? 흑심방주? 이 자식이 하왕 놈과 손을 잡고 태룡방주를 친다?’

무식하다는 편견이 있는 산적이지만, 녹림을 일통한 거력왕이다. 상황판단만큼은 기민했다.

몇 번 머리를 굴린 그는 대략적인 개요를 파악할 수 있었다.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는 게냐, 이 자라 새끼야!”

“흥. 네놈이 하는 짓과 똑같지. 염광채주를 보내서 날 사로잡은 뒤에 굴복시킬 생각 아니었느냐? 세력을 키우려고? 나도 마찬가지다.”

순간 둘의 눈이 묘하게 얽혀들었다.

서로 있는 힘껏 싸웠지만, 막상 둘의 목적이 같음을 확인한 것 아닌가.

그 모습에 천무백이 껄껄 웃었다.

“역시. 사내놈들은 싸우면서 친해지고, 뜻도 맞는다니까.”

“너······ 하아.”

왕전유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천무백이 여유롭게 대치하는 두명 사이를 산책하듯이 걸었다.

“난 원래 하왕 선배와 손잡고, 태룡방을 몰아 낼 생각이었소.”

“······.”

“근데 녹림을 보니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탐이 나네. 하왕 선배하고 나만 협력해선, 태룡방 밀어내기 여간 힘들거든. 어찌어찌 밀어낸다 해도, 그 틈에 녹림이 확 끼어들면?”

“······그래서 지금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내 결정했소. 특별히, 내 모두 손을 잡아 드리리다.”

천무백이 크게 인심 쓴다는 듯한 투로 말하자 일순 정적이 맴돌았다.

정적을 깬 건 거력왕의 콧방귀였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도 있지만, 자존심을 툭툭 건드리는 말이 아닌가.

“네놈이 뭐라고, 너 따위가 없어도. 저 장강의 거북이들이 없어도. 난 이미 태룡방주를 밀어내고 있단 말이다!”

그러자 천무백이 비아냥거렸다.

“진짜로? 진짜 필요 없어? 그런 양반이 치사하게 기습해서 하왕을 인질로 삼으려고 해? 그럼 내가 장강에 붙어서 녹림부터 잡을까?”

거력왕은 코웃음을 쳤지만, 표정이 묘하게 굳었다.

처음엔 자신이 지금 지친 상황이라 이기기 어려울 거란 판단이었다.

하나 조금 정신을 차린 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아니다.

거력왕이 침음을 삼켰다.

‘만만치 않은 놈이로다. 태룡방을 친다는 배짱은 둘째 치고, 그만한 자신감을 가질 만한 놈이야. 강하다. 강해.’

사이를 가를 때 부딪쳤던 검격과 은연중에 느껴지는 단단한 기도는 범상치 않았다.

‘저 물고기에 붙어서 녹림을 적대하면, 태룡방을 견제하기는커녕 녹림이 먼저 큰 피해를 볼 것이다.’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마음 같아선 저놈의 목을 쳐버리고 싶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도리가 없다.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상대에 대한 감탄이 불쑥 들었다.

거력왕도 세력을 확대해 태룡방과 비슷한 영향력을 흑회에서 구축하려는 게 목표였다.

태룡방주를 아예 밀어낸다?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너 하나 끼어든다고, 태룡방주가 그리도 쉽게 무너질 위인으로 보이느냐?”

천무백이 혀를 차며 한숨을 내쉬었다. 더는 말하기 귀찮은 표정이었다.

“아, 뭐 그러면 나 혼자 태룡방주랑 싸우고.”

“······!”

“아, 내 계획을 태룡방주에게 일러바칠지도 모르니, 둘 다 여기서 물속에 수장당해야 할거요.”

동시에 천무백은 일제히 기세를 개방했다.

물론 상단전을 연건 아니다.

하단전만 최대치로 개방했을 뿐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년월단에 깃들었던 모든 극음지기가 거칠게 머리를 치켜드니, 주위가 차갑게 얼어붙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두 사람은 느꼈다.

협박이다.

이 상태로 싸우면 저 말이 거짓이 아니게 된다.

굴복할 수밖에 없다.

왕전유는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애당초 자신이 목적이 아니었다. 저 인간은 자신과 녹림 둘 다 제 품으로 끌어 모을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판을 벌인 것이다.

왕전유의 경악에 찬 시선을 받으며, 천무백이 웃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제안하겠소. 둘 다 나랑 협력합시다. 태룡방주 무너뜨리자고.”

천무백식 협력제안이었다.

* * *

[걱정하지 마시오. 녹림을 이용하는 것일 뿐. 어차피 태룡방과 싸우면 땅 위의 일이니, 결국 전선에서 싸우는 건 녹림일 확률이 높겠지. 태룡방도 강 위에서 굳이 수적들하고 싸움을 피하려고 할 테니까.]

순식간에 파고든 천무백의 전음에 그는 흠칫했지만, 이내 태연하게 노려보는 표정을 지었다.

맞은편에 거력왕이 여러 감정이 복잡하게 드러난 표정으로 고민하고 있었으니까.

[그럼 결국 녹림이나 태룡이나 서로 피 튀기며 죽어가는 것이고. 선배나 나나, 그 사이에서 떨어지는 이권과 세력을 야금야금 먹다가, 나중에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으면 그만이오.]

그럴듯했다.

둘 중에 누가 더 나은지 시험해 본다고 싸움에 안 끼어들고 구경이나 하던 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아니, 생각해 보시오. 내가 시작부터 다짜고짜 선배랑 짝짜꿍해서 거력왕을 몰아붙이면, 이 양반 성격에 흑회니 뭐니 다 포기하고 전쟁할 거 아니겠소? 그러니 내가 중립에서 두 세력을 서로 잘 협력하게 만들겠단 거지. 물론 내 뜻은 선배에게 있소.]

연이어 들려오는 전음에 왕전유는 귀가 솔깃해졌다.

‘허. 이 자식. 상계로 나갔어도 대성했을 놈이군.’

하긴, 그런 놈이니 저 태룡방주를 밀어내겠다는 어마어마한 생각을 하지.

고작 흑도방파의 방주면서도, 그 담대함과 배짱이 영 싫지만은 않았다.

어쨌거나 왕전유 역시 욕망이 꿈틀거리는 흑도 사내였으니까.

결국, 왕전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력하지.”

“······!”

거력왕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여기서 자신이 거절하게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떻게 되겠수. 우리 둘한테 목이 잘려서 호수 아래로 시체로 남겠지.”

“겁박하는 것이냐?”

“맞소.”

“······.”

태연자약한 반응에 거력왕은 한숨을 내쉬곤, 겨눴던 검을 내려놓았다.

“좋아. 이제 뭘 어떻게 할 생각이지?”

애매했지만, 사실상 승낙 표현이었다.

천무백이 웃으며 손뼉을 쳤다.

“여어! 부방주! 여기 술상하나 내오거라!”

“······.”

갑자기 술상을 차리라는 천무백이나, 또 그걸 좋다고 기다렸다는 듯이 술상을 떠오는 능허를 보며, 둘은 말을 잃었다.

천무백이 중앙에 털썩 앉으며 말했다.

“싸운 뒤에 술 한잔해야 사내들끼리 친해지는 법 아니겠소?”

그 뻔뻔한 태도에 질렸다는 듯, 거력왕은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곤 이죽였다.

“네 목표는 태룡방주를 죽이는 것이냐?”

“가급적이면.”

“가급적이면? 하면 맹목적인 목적은 아닐 텐데······ 장담하지. 태룡방주는 죽일 수 없다.”

“······.”

거력왕의 단호한 어조에 천무백은 술잔을 가볍게 들이키며 바라봤다.

“태룡방주 자체도 입신지경에 오른 인외(人外)의 괴물이고, 곁에 있는 삼괴이(三怪彲)라 불리는 세 명의 수신호위 역시 만만치 않지. 일대일로 싸우면 나나, 여기 왕 씨나 하나씩 잡을 수 있지만. 셋이라면 우리 둘이 협공해도 죽는다.”

“삼괴이······ 들어봤지. 세 명의 이무기.”

왕전유 역시 떨떠름한 목소리로 술을 들이켰다.

“그 정도인가?”

천무백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태룡방주의 수신호위, 삼괴이.

하지만 이 셋이 거력왕과 왕전유를 동시에 상대할 수 있다고?

‘하오문의 정보에선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천무백의 눈에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언제부턴가 말도 안 되게 강해졌지. 이무기 놈들이나, 태룡방주 본인도 마찬가지야.”

“······.”

“기연을 얻었나?”

장강에 있어서 비교적 태룡방과 접점이 녹림보다 없는 왕전유 역시 의문을 품었다.

거력왕이 별안간 비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그것도 모르고 태룡방주를 죽이겠다고 설쳐 댄 거냐? 이 병신 같은 자라 새끼야. 그리고 너, 애송이 자식아.”

“닥치고 말이나 하시오.”

“놈은 못 죽인다. 내가 태룡방과 갈등을 일으키는 것도, 그냥 흑회에서 영향력만 더 얻을 생각에 그친 거지. 태룡방주는 죽일 수가 없거든.”

“······.”

“지금 모든 흑도가 하나로 통합되는 건 시대의 수순이야. 정파놈들이 중경에서 정의맹이니 뭐니 하면서 뭉친다지? 흑도라고 가만히 있어야 하나. 이런 생각이 은연중에 흐르고 있단 얘기야.”

천무백은 자신이 굴린 눈덩이가 여기까지 미쳤단 생각에 다소 떨떠름해졌다.

“결국, 죽이면 흑도끼리 내분이 발생할거고, 태룡방주의 휘하들은 녹림과 장강을 적대할 거다. 서로 하나가 멸절될 때까지 또 죽이겠지. 하니 서로 죽이는 건, 흑도의 구성원들이 모두 납득하지 못할 거란 얘기야.”

흑도 아래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이 정도일 줄이야.

하면 왕전유와 거력왕을 이용해 태룡방주를 죽이는 건 무리다. 흑도 구성원들 사이에 흑도연합이란 기정사실이 명백해진 상황에서, 태룡방주를 죽인다는 건 구성원들이 납득 못 할 테니 거력왕과 왕전유도 섣불리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면 태룡방주를 죽이는 건 무리고, 흑도가 완전히 통합되면 적잖이 부담스러우니까······. 결국 삼분지계가 가장 좋은 목표로군.’

거기에 거력왕이 쐐기를 박았다.

“그리고, 태룡방은 생각보다 더 크거든.”

“더 커?”

하오문주가 전해준 정보보다 더 클까?

“외부 세력이 붙었다. 그래서 내가 조금이라도 영향력을 키우려는 것이다. 그 외부세력이 흑도를 쥐락펴락하는 꼴은 볼 수 없으니까.”

그 순간, 천무백은 거력왕의 눈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거력왕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요즘 떠들썩한 놈들 있잖나. 혈귀곡이란 웬 마도의 개새끼들 말이야.”

의혹에서 확신.

천무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 * *

결국, 그날 회합의 결론은 정확히 나오지 않았다.

우선 왕전유, 거력왕 그리고 천무백의 기묘한 협력관계는 체결됐다.

다만 목표는 미정이었다.

왕전유는 혈귀곡이 흑회에 손을 댔으면, 그 연결고리인 태룡방주를 죽이고자 말했다. 거력왕은 그것은 불가능이라며 녹림도 절반은 불타고 수적도 절반은 강에 수장될 거라고 반대했다.

천무백 역시 고민했다.

결국, 모종의 일에 있어 흑회에서 이권을 두고 태룡방주와 경쟁할 때, 서로 협력해 태룡방주를 견제한다.

정도의 골자만 성립됐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수장 자리에는 태룡방주가 앉겠지. 그 두자리를 저 두 사람이 견제할 수 있는 실력과 명분이 있을까?’

그런데 그때, 왕전유와 거력왕에게 태룡방주의 명의로 연락이 왔다.

<이대로 우리끼리 싸우지 말고, 아예 제대로 규칙을 세워 흑회에서 출범할 연합체의 수장을 뽑는 게 어떻겠소?>

“······흐음.”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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