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9화>
169. 수적과 산적이 만나면, 개판.
계곡에 깊이 들어갈수록 안개가 짙었다. 하여 안개 속에서 신형이 불쑥 튀어나왔을 때, 그걸 곧장 확인한 건 천무백과 왕전유뿐이었다.
오히려 천무백은 그 전부터 진작 기척을 느꼈다.
이왕이면 싸움을 피하고 왕전유의 마음을 돌려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려 했지만, 한참 중간에서 머뭇대니 상대가 눈치채고 먼저 칼을 뽑았다.
안개 속 신형은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협상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죽이려고 했으면 애당초 저리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곧장 공격부터 했을 터다.
그러나 협상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것이, 양옆으로 높이 솟구친 계곡의 절벽 위에 녹림도들이 은밀하게 자리 잡는 기척이 뚜렷하게 느껴졌다.
협상이 아니라, 이건 숫제 겁박이었다.
왕전유도 절벽 위로 무수하게 자리 잡는 인기척을 느끼곤, 딱딱해진 얼굴로 으르렁거렸다.
“누군데 감히 본좌의 길을 막느냐.”
낮지만 당당한 목소리. 좁은 계곡을 웅웅 울리는 웅혼함이 가득했다.
과연 장강을 일통한 호걸다웠다.
하나 앞을 막은 녹의인도 녹록치 않았다. 왕전유의 호령에 살짝 긴장한 기색이 스쳤을 뿐, 담담한 표정으로 정체를 밝혔다.
“반갑습니다. 흑도의 선배를 이리 마중하러 나오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녹림의 혈광채주이며, 거력왕께서 강 위의 호걸을 모셔오라는 명을 분부받고 왔습니다.”
천무백은 하오문을 통해 얻은 정보를 떠올렸다.
혈광채주.
‘녹림의 2인자로군.’
거력왕과 호형호제를 하기로 유명한 고수다. 사실상 녹림의 두 번째 서열을 차지한 거물.
그의 등장에 왕전유의 눈가가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썩 떠들썩한 마중이로구나. 앞길을 막고, 절벽 위로는 병력들을 끌고 오고 말이야. 산적들은 마중을 이리 거창하게 하느냐.”
“하하하.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다름이 아니라 태룡방주께서 워낙 음흉한 너구리 같은 분이신지라, 우리 거력왕께선 하왕 선배와 함께 손을 잡고 태룡방주에게 적절한 가르침을 내리시고자 합니다.”
왕전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대놓고 태룡방주를 적대하고 손을 잡자는 말이다.
하나 천무백은 지켜보면서 속으로 냉소를 지었다.
‘내 밑으로 들어오란 말을 뭘 저리 돌려서 말해?’
말은 협력제안이었지만, 곧이곧대로 듣고 넘어갈 사항이 아니었다.
땅 위에서 언제든지 어마어마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녹림과 달리, 왕전유의 수적 세력은 강 위가 아니라면 투사하기 어렵지 않은가.
협력한다 해도, 사실 거력왕 밑에 왕전유가 고갤 숙이고 들어가는 모양새일 터.
왕전유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협력을 제안한다면서 수틀리면 공격이라도 할 셈이더냐?”
혈광채주가 쓴웃음을 지었다.
“이왕이면 협조적으로 같이 가 주시는 게 저희 바람입니다만, 우리 거력왕께서도 확실한 걸 좋아하시는 분이신지라…….”
“건방진 놈. 산 위에서나 왕 흉내 내는 얼간이 밑에 본좌한테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라고?”
조금은 존중하는 척이라도 했던 혈광채주의 얼굴이 굳었다.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장강에서 자맥질이나 하는 거북이들을 우리 거력왕께서 손을 잡아 주시는 것인데, 어째 여기가 장강인 줄 아시나 봅니다. 선배님.”
그야말로 살벌한 논담이었다.
물론 길게 이어질 수 있는 논담은 애당초 아니다. 학자들 간의 논담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인들의 논담도 아니다.
수적과 산적이 벌이는 논쟁의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왕전유가 대도를 불쑥 꺼내들며 버럭 호령했다.
“어디 한번, 그 거북이들을 네놈들이 모셔가 보아라! 본좌를 때려 눕혀서 말이다!”
“쯧. 정말로 여기가 장강인 줄 아나 보군. 하면 실례지만 내가 직접 모셔가겠소이다! 선배!”
결국, 정해진 결말이었다. 혈광채주가 병력을 이끌고 나타났을 때부터.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찼다.
‘왕전유도 어지간히 다혈질이군. 생긴 거하고 성격이 다르다지만, 이 경우에는 딱히 맞는 말도 아니야.’
절벽 위에 병력이 잔뜩 몰려 있는 걸 눈치챈 양반이 말이다.
자존심을 죽여서라도 일단 조용히 여길 빠져나가서 방법을 찾아봐야지.
왕전유 정도의 실력자라면 작금 사태만 피한다면야 어떻게든 수를 낼 수 있을 터.
한데 그걸 참지 못하고 저리 싸움을 걸다니.
‘안 그래도 병력이 적은 양반이. 쯧쯧.’
왕전유는 벼락처럼 뛰어나갔다. 조양비가 수면 위에서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경공이라지만, 육지라고 해도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미끄러진 왕전유의 대도가 힘차게 혈광채주를 갈랐다.
쩌저저저적!
혈광채주는 간신히 한 합 버텨 내며 뒷걸음치곤, 소리쳤다.
“쳐라!”
양쪽 절벽에서 녹림도들이 함성과 함께 일어나 화살과 온갖 날붙이들이 쏟아졌다.
일자로 늘어선 행렬, 좁은 길목, 피하기엔 여의치 않은 협소한 공간.
화살은 무림인에게 비교적 치명적인 공격이 아니다.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른 무인이게는 말이다. 이런 환경에서 우수수 쏟아지는 화살비는 대다수 수적에겐 치명적인 위협이었다.
검을 휘둘러 쳐 내는 것도 한계가 존재한다. 손에 든 검은 하나지 않은가.
“으아악!”
푹, 푹, 푹.
수적들이 픽픽픽 쓰러졌다.
“능허야, 일단 우리 애들부터 좀 잘 지켜봐라.”
수적들과 달리 능허의 흑도패들은 습격이 벌어지자마자 곧장 방패를 꺼내 들었다.
무인들은 보통 방패를 잘 사용하진 않지만, 흑도들은 다르다.
수봉을 비롯한 흑도들은 능허에게 여러 흑도 무공을 전수받았지만, 가장 집중적으로 교육받은 건 방패를 다루는 재주였다.
‘방패가 장식이야? 네가 창천검신이야? 검 하나로 다 막을 수 있어? 호신강기 쓸 줄 알아?’
제대로 된 무공 없이, 잡다한 무공을 익힌 흑도들에게 방패는 필수였다.
파바바바박!
대부분 방패에 막혔지만, 무수히 쏟아지는 화살에 한두 명씩 쓰러지는 희생자가 생겼다.
“이런 썅! 똑바로 들어! 쳐 낼 자신 없으면 그냥 버텨!”
능허는 그래도 그간 정이 들었는지 직접 뛰어다니면서 화살을 쳐 내길 반복했다.
능허의 활약 덕택에 흑도패는 그나마 괜찮았지만, 수적들은 그야말로 난리였다. 일부 산적들은 절벽 밑으로 내려와 난전을 벌였고, 일부 수적들도 바득바득 절벽을 기어 올라가 산적들을 베었다.
독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수적들과 산적들은 흉흉한 눈빛으로 싸웠다.
“산적과 수적이 만나면 그야말로 개판이군.”
천무백은 그 광경을 구경이라도 하듯 한번 쭉 훑어봤다.
슬쩍 보니 왕전유는 혈광채주와 녹림도 한 명에게 협공을 당하고 있었다.
정말 보기 힘든 광경 아닌가.
수적과 산적이 싸우는 꼴이라니.
천무백은 생각했다.
이대로 싸움이 격화되어 양패구상 된다면 태룡방주만 좋은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순순히 녹림의 밑에 들어가기엔, 균형의 추가 녹림으로 확 기울여진다.
‘귀찮게 됐어. 이러나저러나 왕전유가 사는 게 나에게 이롭지. 왕전유가 훅 가면, 기껏 변장해서 호의를 사 놓은 게 다 무슨 소용이야?’
삼분지계를 떠올렸던 천무백으로서는 달갑지 않다. 하물며 지금까지 착실히 쌓아온 호의도 소용없어지기는 마찬가지다.
일단 이 상황을 타개한 뒤에, 계략을 꾸미든 깽판을 치든 뭘 할 수 있다. 하니 천무백은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묘책을 떠올리곤 능허를 불렀다.
“능허야.”
“네.”
“나랑 일 좀 하자.”
“저 애들 지키느라 죽겠습니다.”
얼굴이 시뻘게진 채 땀을 뻘뻘 흘리는 능허는 절로 불퉁한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빨리 일 끝내야지.”
“저 빠지면 얘들 어찌합니까.”
“막내 있잖냐.”
“…….”
능허는 곧장 방패를 들고 있는 곡지흠에게 다가가 뭐라 속삭였다.
“으아아압!”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곡지흠이 별안간 기합을 내지르며 녹림도를 문자 그대로 썰어 버리는 광경에 천무백은 혀를 내둘렀다.
“뭐 어떻게 했는데? 쟤가 저래?”
“갈구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참으로 지키지 않을 약속을 잘도 지껄였구나.”
“원래 구두계약이 다 그렇죠.”
능허가 웃자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찼다. 곡지흠의 인생도 참 안타깝구나 싶었지만, 뭐 지금으로선 천군만마이니 나중에 때가 되면 적당히 풀어 줘도 무방할 터.
천무백은 능허에게 말했다.
“내가 움직일 테니, 적당히 옆에서 보조해라.”
“묘책이라도 있으십니까? 이 개판을 어떻게?”
“녹림이 지금 무리수를 쓰면서도 습격한 이유가 뭐겠냐?”
“그야 하왕을 사로잡으려는 속셈이죠. 하왕의 세력들은 장강 위에 흩어져서 분포해 있으니까, 산에 틀어박혀 있으면 막는 거야 어렵지 않고. 하왕의 신병만 손에 쥐고 있으면…… 사실상 수적들을 휘하에 끌어들일 수 있어서?”
눈치가 빠르다는 건 상황을 보는 눈이 제법 넓고 깊다는 것을 뜻했다. 하물며 그 상황을 파악하고 분석하는 능력 역시 괜찮다는 의미다.
능허의 판단은 정확했고, 이내 그는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거…… 또 그 얘기요?”
“전장에서 만고불변의 진리다. 특히 흑도 놈들에겐 말이지.”
능허는 쓰게 웃었다.
암. 자기도 잘 알지 않은가.
가장 많이 당해보고, 천무백 옆에서 여러 번 해 본 것.
“대가리부터 잡는다.”
녹림들이 왕전유의 신병을 확보하려는 것처럼.
지금 싸움도 혈광채주를 제압하면 싱겁게 끝날지도 모른다.
정말 전면전을 할 것도 아니고, 흑회를 앞두고 우두머리가 잡혔는데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겠는가.
다만 능허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혈광채주 저거 만만치 않은데요? 왕전유랑 제법 비등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가 땅 위라는 점, 그리고 혈광채주는 휘하 녹림도 한명과 협공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도, 왕전유와 비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왕전유의 딱딱하게 굳은 얼굴과 몸 곳곳에 생겨나는 상처가 증거였다.
물론 천무백의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다.
“혈광채주를 죽일 수야 있겠지만, 저만한 인물이 죽으면 태룡방주만 노나는 거 아닙니까.”
죽이는 거야 천무백이면 가능하다. 능허는 감히 의심치 않았다.
하나 사로잡는 건 오히려 죽이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법.
왕전유까지 싸움에 복잡하게 얽힌 상황에서 더더욱.
하나 능허의 그런 염려에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찼다.
“능허 감 많이 떨어졌네.”
“네?”
“혈광채주 사로잡는 거야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더구나 걱정해야 할 건 그게 아니지.”
“……설마?”
태연한 낯빛에 능허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래, 요즈음 천무백이 호위무사인 척한다고, 잠잠해서 깜빡했지.
이 양반…….
“거력왕이 대가리잖냐. 걔를 잡아야 싹수가 보이겠지.”
“…….”
배포 하나만큼은 미친놈이 아니던가.
혈광채주 사로잡는 건 애당초 계획도 아니다. 그거야 작금의 상황을 타개할 방법의 하나고. 천무백은 더 멀리 보고 있었다. 작금의 상황뿐 아니라, 전체 판을 양손에 잡고 흔들 계획을.
천무백은 칼을 꺼내 들고, 왕전유와 싸우는 혈광채주에게 천천히 걸어갔다.
여기서 능허의 역할은 간단했다.
보조.
무참히 쏟아지는 화살과 날붙이, 그리고 여기저기서 불쑥 튀어나오는 녹림도들의 검.
그것들을 쳐 내면서 혈광채주까지의 길을 여는 것.
“이런 썅! 보조는 개뿔, 어려운 걸 대수롭지 않게 시켜요!”
능허는 그리 말하면서도 착실히 길을 만들었다.
천무백은 그 길을, 산책이라도 하듯이 천천히 거닐었다.
마치 마실이라도 나온 것처럼.
주위의 살벌한 광경과는 동떨어진 분위기를 풍기며, 천무백은 걸었다.
“거, 호위무사인 척 하기 힘드네. 역시 역할을 바꿔야겠어.”
그리 중얼거리며, 검에서 눈부신 섬광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