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68화 (168/318)

<검신재생 168화>

168. 흑도삼분지계(黑道三分之計)

능허 역시 서류들을 보곤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야. 이것들 봐라.”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겠냐?”

천무백의 물음에 능허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에는 최근 복건성뿐 아니라 중원을 통틀어 여러 유력한 흑도방파의 행적이 적혀 있었다.

특히 주목할 부분은 거력왕(巨力王), 즉 녹림의 행적이다.

<녹림과 태룡방 곳곳에서 세력간 분쟁>

태룡방과 녹림은 엄연히 서로 세력권이 다르다. 도심지의 뒷골목이 태룡방의 무대요, 수많은 산림이 녹림의 무대다.

둘이 분쟁을 일으킬 만한 이유가 없다. 더구나 지금은 모든 흑도가 모이는 흑회가 열리는 시점. 흑회는 곧 중원 흑도들의 통합을 추구하는 것인데, 지금 굳이 갈등을 빚고 있다?

능허가 이죽이며 말했다.

“누가 흑도 새끼들 아니랄까 봐. 이런 와중에도 세력싸움을 하네.”

천무백의 눈이 빛났다.

“세력싸움이다?”

“흑회가 열린다는 거 자체가 일단 서로 통합을 시도한다는 거 아닙니까. 보아하니 통합은 거의 당연한 일이고, 연합체가 탄생하면, 결국 우두머리는 하나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

“근데 흑도들은 말입니다. 위계질서가 뚜렷해요. 대가리가 셋일 수는 없단 말입니다.”

태룡방주, 거력왕, 그리고 왕전유.

현재 흑회의 가장 유력한 세력가 세 명.

“지금이야 모든 흑도들의 큰형님 노릇 하는 태룡방이 가장 세가 강력하고, 그래서 흑회를 주도해 우두머리가 될 확률이 높지만, 녹림이 호락호락하게 그 우두머리 자리를 넘기겠습니까?”

제법 날카로운 직관력과 분석이다.

슬쩍 보니 곡지흠도 의외라는 듯 눈을 빛내며 능허를 쳐다보고 있었다. 천무백 역시 같은 생각이라 제법 대견한 눈빛으로 능허를 쳐다봤다.

그러자 능허가 어깨를 으쓱였다.

“왜들 이러시나. 이 정돈 생각할 머리는 있습니다.”

천무백이 새삼스럽게 말했다.

“가끔 신기하단 말이다. 평생 흑도판 구른 놈이 글자도 잘 알고, 서류정리도 제법 하고.”

“이래 봬도 제가 어릴 때 서당을 다녔는데, 거기서 5등이나 했지요.”

“서당에 다니는 서생이 다섯 명이었니?”

“…….”

단숨에 능허의 우쭐거림을 막아 버린 천무백은 곡지흠을 바라봤다.

이런 서류에 나열된 정보라면 만족할 수 없다.

무려 하오문주가 아닌가. 단순한 정보는 자료에 그치지만, 그걸 분석하고 파헤쳐서 정리하면, 그건 진짜배기 정보가 되는 법.

곡지흠을 바라보는 천무백의 시선에 담긴 의미는 뻔했다.

단순히 사실만 나열하지 말고, 분석한 정보를 내놓으라는 것.

하오문주라는 직함을 걸고 말이다.

그래야 합리적인 거래가 될 것이고, 암진혜검의 구결을 전해 주겠단 뜻.

‘쉽게 가는 건 없군.’

곡지흠이 쓴웃음을 깃곤 입을 열었다.

“독안사의 말이 맞소. 현재 흑회에서 연합체가 출범하면 태룡방주, 거력왕, 왕전유가 지도부가 되겠지. 현재로선 태룡방주가 적어도 오 할의 영향력을 갖고 있다고 판단되오. 거력왕이 삼할, 왕전유가 이할 가량.”

“이대로면 태룡방주가 우두머리가 되겠군?”

“하지만 애매한 수치지. 거력왕이 태룡방 세력의 일할만 자기편으로 뺏어도, 같아지니까.”

“그래서 거력왕이 태룡방의 세력에 포함된 흑도들을 포섭하고 있다?”

“태룡방이 거대한 흑도방파지만, 그 밑의 방파들이 모두 좋게 여기진 않았지. 그들의 세가 확장되면서 어쩔 수 없이 허리를 굽힌 방파도 있으니까.”

“태룡방에 반감을 품은 흑도 세력을 최대한 끌어들이고 있고, 태룡방이 그에 반발해 분쟁이 일어나고 있는 거군.”

“태룡방주의 본래 목적은 삼두정치로 추정되오.”

“삼두 정치라…….”

“그러나 자신의 영향력이 가장 강력하니, 시간이 지나면서 연합체를 완전히 휘어잡을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거력왕의 수완이 꽤 대단한 편인 듯했다.

야금야금 태룡방에서 소외된 세력을 삼키면서 영향력을 늘리고 있었다.

“이대로 흑회에 참여할 때쯤이면 태룡방주와 거력왕의 알력 싸움이 볼 만하겠어.”

천무백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흑도연합체의 탄생.

긴 중원 역사 중에, 마교의 중원 침략보다 그 빈도가 낮았던 사건이다.

그만큼 흑도가 일통된다는 건 힘든 일이다.

하물며 같은 흑색이라지만 성격이 다른 녹림과 수로채까지 일통되는 경우는 천무백의 기억으로도 정말 극히 적었다.

하지만 그 극히 적은 경우로 봐도 확실한 게 있었다.

“통합된 흑도의 힘은 예상보다 더 충격적이고 파괴적이지.”

그 어마어마한 숫자와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과감함과 결단력.

한마음으로 뭉친 흑도는 분명 위험하다.

더구나 이 흑도연합체의 탄생이 과연 누구의 입김이 닿았느냐가 문제다.

‘일전에 중경성에서 적룡방에 나타난 혈귀곡은, 태룡방의 소개로 찾아왔었지.’

태룡방이 혈귀곡과 연관이 됐다면?

만일 이번 흑회에 혈귀곡의 입김이 들어간 거면?

‘태룡방이 혈귀곡과 동맹인지, 아니면 단순히 서로 거래를 하는 사이인지.’

전자면 위험하고, 후자여도 위험하다.

‘태룡방주가 흑회를 장악해서 우두머리가 된다면?’

그거야말로 끔찍한 일이다.

중원의 마도 세력인 혈귀곡만 해도 만만치 않다. 하물며 새외에 뻗어 나간 모종의 세력까지 고려하면 더더욱.

거기에 태룡방이 주도하는 흑회가 동맹을 맺는다면?

‘끔찍하다.’

물론 태룡방이 혈귀곡과 어떤 관계인지 아직 불명확하나.

적어도 태룡방주가 주도하는 흑도연합체의 탄생은 저지해야 한다.

“능허야.”

“네.”

“거력왕에게 힘을 실어 줘서 거력왕이 흑회를 먹는 게 낫겠냐?”

“어…… 글쎄요.”

아니, 사실 그것도 문제다.

태룡방이 무너지고 거력왕이 흑회를 주도하면?

과연 혈귀곡이 가만히 있겠는가?

어쩌면 무언가 보상을 주고, 거력왕을 회유하겠지.

최선은 간단하다.

“오랜만에 우리 공명이의 계책을 떠올려 봐야겠구나.”

“공명이요……? 공명? 제갈공명? 무슨, 무향후를 친구 부르듯이 말합니까.”

“친구는 무슨, 한참 형님이었는데.”

“뭔 또 개소리를 참신하게 하십니까?”

천무백은 크게 한번 능허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움직이자고.”

어차피 흑회로 인해 흑도가 연합체가 되는 건 큰 흐름.

막기 어렵다.

그렇다면, 그 누구도 주도권을 쥐지 못하는 형국으로 만들어야 한다.

“천하삼분지계가 아니라, 흑도삼분지계구나.”

천무백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 * *

천무백은 길을 걷는 무리를 천천히 후미에서 따라가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왕전유의 세력이 팍 약해 보이는군.’

중원 전토에 산이 몇 개고, 그 산에 거주하는 녹림도가 몇이겠는가.

각 도시의 뒷골목마다 기거하는 흑도 건달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반면 왕전유는 장강을 장악했지만, 결국 강을 벗어나 땅 위에 오르면, 저 두 세력에 비교하면 현저히 부족했다.

지금 길을 걷는 수적들의 행렬만 해도 그렇다.

‘물론 내가 절반은 넘게 줄였지만.’

부상자에 배를 지키는 인원까지.

아무래도 흑회에서 왕전유의 세력이 가장 약한 건 자명한 일.

지금 왕전유가 능허와 흑심방에게 깊은 호의를 보이는 것도 이 같은 이유다.

‘이대로면 삼분지계는커녕, 어디 한쪽에 잡아먹히겠는데?’

생각보다 흑회의 방향성이 다르다.

태룡방주가 압도적인 힘으로 흑도들을 통합할 줄 알았건만, 녹림이 바탕이 된 거력왕의 영향력도 어마어마하고, 야금야금 세력을 늘리는 수완도 혀를 내두를 정도.

‘거력왕이 태룡방하고 눈에 띄게 갈등을 일으키며 세력 확장을 할 정도로, 살벌하단 말이야.’

수백 년 만에 나타나는 일통된 흑도 연합체의 수장.

그 권력과 힘이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탐을 낼 만도 하다.

그리고 욕망은, 때때로 과감한 결단을 부르는 법이다.

더구나 뒤를 돌아보지 않는 무모함, 좋게 말하면 과감성이 특징인 흑도에겐 그런 성향이 더 짙게 나타난다.

‘가장 세력이 약한 왕전유를 내버려 둘까?’

답은 아니다.

왕전유만 어떻게든 굴복시켜서, 장강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거력왕이나 태룡방주나.

둘 중 누가 되든 흑회의 주도권을 완벽하게 손에 쥐는 것이다.

그러니 왕전유가 저리 긴장한 얼굴로 행렬을 이끌고 이동하는 것이리라.

이내 행렬은 무이산으로 향했다.

무이산을 거쳐 근방에 있는 작은 도시가 흑회가 열리는 장소였기에, 무이산을 넘기만 하면 곧장 도착하는 빠른 길이다.

다만 문제는 무이산을 넘으려면 구곡계를 지나야 한다.

계곡을 구불거리며 길게 늘어난 구곡계는 무척이나 좁은 길이다.

하여 행렬은 일자로 길게 쭉 늘어나며 걸을 수밖에 없었다.

한때 천무백은 언젠가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다.

무척이나 많은 전생 중에, 이곳에서 크게 한번 싸운 적이 있었다.

‘사람 습격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란 말이지.’

길 양쪽의 수풀에 웅크려 있다가 기습하기 딱 좋은 장소.

천무백이 슬쩍 시선을 돌리자 능허와 곡지흠 역시 심상치 않은 표정이었다.

하물며 행렬의 앞에 있던 왕전유 역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반면 그 휘하 수적들은 크게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하기야. 수적들의 절대 명제가 뭐였던가. 강 위에서만 싸우고, 뭍에선 싸우지 않는다. 그들은 여기에 매복이 있으리라곤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래도 평생 배 위에서 살아온 왕전유가 저리 긴장하는 건, 무인으로서 가진 감이 경고하고 있음이리라.

“능허야.”

“예, 주군.”

“어떻게 해야 할 거 같냐?”

“사람을 보내서 매복이 있는지 확인해야죠. 이거 그냥 가다가 뒤통수 맞기 딱 좋은 곳입니다. 더구나 하오문 통해서 그런 정보까지 접했는데요.”

“네가 가서 얘기해 봐.”

능허는 이내 왕전유에게 다가가 말했다. 척후를 보내자고.

왕전유 역시 합당하다고 여겼는지, 이내 휘하 수적들을 척후로 미리 보내 길을 살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서 수적들은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보고했다.

“아무리 샅샅이 훑어도 벌레 한 마리 안 보입니다.”

“그러느냐? 흐음.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계곡을 빠져나가야겠다.”

척후가 그리 말하니 왕전유도 별수 있겠는가.

하나 천무백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평생 물 위에서 싸움질하던 놈들이 산에 숨은 매복을 쉽게 찾을까.’

천무백은 혀를 쯧쯧 찼다.

산에서의 매복은 정말 절묘해서, 눈을 크게 뜨고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찾기 어렵다.

코앞에 두고도 지나치는 경우가 왕왕 있으니까.

하물며 그 매복한 상대가 만일, 평생 산에서 먹고 자라 싸운 녹림도라면?

그 녹림이 작정하고 매복하면, 수적이 발견할 수 있을까?

천무백은 온몸을 찌르는 초감각에 집중했다.

‘매복은 있다.’

철저하게 기척을 죽였지만, 천무백의 초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흑도가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자멸하는 건 내 환영하는 일이다만.’

천무백의 미간이 미미하게 좁혀졌다.

서로 양패구상으로 녹림이든 수적이든 싹 다 무너지면 문제없겠다만.

그리하면 태룡방이 득세할 테니 그것도 문제, 그렇다고 왕전유가 무너지면 녹림의 세가 강해질 거니 태룡방이 잡아먹힐 수도 있다.

능허 역시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왕전유에게 간언했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습니다. 분명 매복이 있을 겁니다.”

“음, 방주. 나도 범상치 않다고 여기다만. 설마 누가 우릴 공격하겠소? 복건엔 그럴듯한 백도 놈들도 없소. 녹림이나 다 흑도뿐인데. 우린 흑회에서 형제가 되기 위해 가는 것이지, 싸우러 가는 게 아니오.”

설마 직접 목숨을 노리고 공격까지 할 거라곤 생각지 않는 모습이다.

세력싸움이 있어도 적당히 신경전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러자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천무백이 나섰다.

“지금까지 일궈 온 수로채를 모두 녹림에게 갖다 바칠 거 아니면, 지금이라도 방향을 다시 잡으시지요.”

“……!”

순간 왕전유가 차가운 얼굴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일순 좌중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호위무사가 어딜 끼어드느냐?”

“호위무사도 뻔히 아는 걸, 애써 스스로 합리화하며 부정하는 꼴이 웃길 따름입니다.”

예상치 못한 답이었는지 왕전유는 입을 쩍 벌리며 능허를 쳐다봤다.

능허 역시 갑자기 천무백이 저리 나올 줄 몰랐던지, 어찌할 바를 모르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지. 갑자기 저러는 거 보면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

그리 생각한 능허는 침묵했다.

왕전유가 황당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방주, 호위무사가 아무리 조카 같다지만, 교육을 제대로 할 필요가 있겠소.”

“그것이…….”

“자고로 귀에 쓴 말은 충언이라 했습니다. 채주님. 주위를 둘러보십시오. 당장 양쪽에서 화살이 쏟아지고 칼이 쏟아지면 다 죽습니다. 더구나 배 위가 아닌 땅 위의 수적들이라면요.”

천무백의 덧붙이는 말에 왕전유도 무언가 느낀 게 있는지 다소 진지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지독한 정적이 일순 가라앉았다.

천무백의 말을 들어서일까. 주위를 둘러보던 왕전유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화감이 어디에서부터 오는지 이내 눈치챘다.

“……척후가 벌레도 안 보인다고 했었지.”

왕전유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그 말인즉슨…….

때마침, 반대편에서 흐릿한 신형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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