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67화 (167/318)

<검신재생 167화>

167. 내가 누군지 알고?

곡지흠은 두 가지 분야에서 큰 자부심을 느꼈다.

첫째는 자신의 무공 실력이다.

‘암진혜검의 구결, 천 공자에게 전부 받아 낸다면 입신지경이 꿈만은 아니다.’

확실히 임홍을 통해 전해 듣는 것과 천무백에게 직접 듣는 건 차원이 달랐다.

같은 구결이어도 천무백에게 들으면, 속에 담긴 오묘한 이치와 묘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었다.

그러니 구결을 전해 받으려면 천무백 곁에 머물러야 한다.

‘그 행적이 도통 종잡을 수 없는 양반이니까.’

워낙 신출귀몰한 행적으로 유명한 천무백이다.

이번에는 뜬금없는 복건행.

암진혜검 구결을 받을 때마다 천무백을 찾아가서 필요한 정보를 구하고 넘겨줘야 하는 복잡한 절차가 생기게 된다.

그래서 곡지흠은 결심했다.

‘곁에 따라다니다가, 정보가 필요할 때마다 나서서 내주는 거다.’

당장 하오문 어느 지부를 가도 곡지흠은 모든 정보를 열람할 권한이 있으니 문제없다.

문제는 천무백이 제 행적이 노출될까, 동행을 거절했다는 점.

‘흥. 그렇다고 굴할 수야 없지!’

한낱 기녀들의 품에서 자랐지만, 끝내 불굴의 의지로, 오직 능력만으로 하오문주에 오른 곡지흠이다.

자고로 무인이라면 무(武)를 향하는 길을 방해하는 어떤 난관에도 굴하지 않는 법.

하여 곡지흠은 자신이 자부심을 가진 두 번째 분야의 재능을 아낌없이 발휘했다.

바로 변용술(變容術).

단순한 역용술을 이르는 게 아니다.

근육과 뼈를 인위적으로 뒤틀면 당연히 미미하나 내공의 흔적이 남는다.

뛰어난 고수는 내공의 흔적을 감지하고 역용술을 단번에 간파한다.

변용술은 다르다.

뼈와 근육을 뒤트는 게 아니라, 순전히 잡기(雜技)였으니까.

가령 능허의 한쪽 눈에 화상 자국처럼 일그러뜨리게 만든 것과 의수를 만들어 준 것이 곡지흠의 솜씨였다.

아무리 잡기여도, 그것이 하오문주 대대로 전승되는 기술이라면 지고한 경지인 법.

지금 곡지흠이 그랬다.

흑도에서도 전형적인 막내의 모습, 어수룩하면서도 적잖이 신경질적인 인상을 풍기는 얼굴.

곡지흠은 스스로 흑도로 변용하여 천무백의 흑도패에 끼어들었다.

물론 천무백이 알아차렸을 거라고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알아차렸으면 진즉에 내쫓았겠지!’

곡지흠은 제 변용술이 제대로 통했다고 여겼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것도 꼭 좋지 않음을 근래 느꼈다.

“하. 이 새끼 봐라. 막내면 빠릿빠릿하게 움직여야지?”

어디선가 귀에 꽂히는 능허의 목소리에 곡지흠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바싹 숙였다.

하오문도들이 봤다면 통탄할 광경이리라.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흑도 생활 끝나냐?”

“아닙니다.”

“뭐가 아닌데?”

“똑바로 행동하겠습니다.”

“똑바로가 어떻겐데?”

막내로 변용한 만큼 적당히 어수룩한 인상도 드러냈는데, 그게 독이 된 듯싶었다.

능허는 사정없이 곡지흠을 갈궜다.

‘참아야 하느니라…….’

곡지흠은 시뻘게진 얼굴로 꾹 참았다.

계속 천무백 곁에 붙어 있으려면 이 방법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구박도 하루 이틀이어야지. 이제는 능허가 눈 한번 부라리면 심장이 덜컥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수장인 능허가 그러다 보니, 다른 수하들도 은근히 곡지흠을 타박했다.

‘허허…… 명색의 하오문주인 내가 한낱 흑도, 그것도 한량들한테 이토록 갈굼 당하다니……!’

새삼 자신의 처지가 처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참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곡지흠은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오히려 나에게도 이득이다. 흑회에 참여하는 건 둘째 치고, 그것도 하왕 왕전유의 호의를 얻어서 접근하다니.’

설마 흑회에 이런 식으로 참여할 줄은 몰랐다.

이번 흑회는 역사적으로도 유례없는 대사건이다.

한데 왕전유의 호의를 받으면서 흑회에 참여한다면, 흑회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의 중심부를 더 가까이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건 곡지흠으로서도 기회다.

자고로 흑도와 하오문은 서로 바탕이 겹치지 않던가. 흑회 내부의 상황을 파악할 기회.

‘새삼 이렇게 수를 쓰는 것도 대단한 작자다.’

흘깃, 가면을 쓰고 있는 천무백을 바라보는 곡지흠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무위만 특출나게 강했다면, 차라리 눈 감고 이해했을 거다.

고금을 통틀어 젊은 나이에 갑자기 활약하는 무인이 없는 건 아니니까.

가령 산동검호나 열여섯의 나이에 마교의 일개 종단을 열어 종주가 됐던 패천검마나. 검왕도 어린 나이에 말도 안 되는 무위를 자랑하며 등장했었지.

그러니 천무백이 후기지수의 수준을 뛰어넘어, 어쩌면 입신지경에 접어들었을지도 모른다는 추론은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눈 딱 감으면 납득 못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곡지흠은 진실로 두려웠다.

‘저 비상한 머리!’

단숨에 왕전유의 호의를 얻어 냈다. 심지어 왕전유가 같이 흑회에 갈 것을 권유했다. 흑회의 중심부에 곧장 들어갈 수 있는 계략을 천무백이 꾸며내고, 이뤄냈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흘러가는 상황에 몸에 오돌토돌 소름이 올라올 정도였다.

‘무공도 무공인데 머리까지 잘 쓴다? 천 공자가 지천명이 된다면, 사실상 무림을 손아귀에 넣을 만한 거인이 될 것이다.’

오랜 직감으로 확신한 곡지흠은 그전에, 암진혜검을 완성해서 하오문을 성장시킬 필요성을 느꼈다.

어쩌면 그때가 되면 천무백의 한낱 정보조직에 전락해버릴지도 모른다는 격렬한 위기감이 머릿속에 맴돌았으니까.

이런저런 이유로, 하오문주로서, 그리고 한 무인으로서 곡지흠은 이 굴욕을 참았다. 이를 악물고.

그러나…….

빠악!

“이 자식 봐라. 일 안 하고 어디서 눈알만 굴려? 미쳤나 이게? 세상 참 잘 돌아간다. 내가 막내 시절엔 말이야. 직각으로 하도 인사만 하다 보니까 허리가 부러졌다니까?”

곡지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뒤통수를 후려치는 굴욕은 둘째치고도, 툭하면 ‘나 때는 말이야’를 시전하는 능허를 보니 속이 뒤집혔다.

“어쭈? 한 대 치겠다? 하? 나 때는 말이야. 형님 앞에서 주먹을 쥐는 것부터가…….”

더 화나는 건, 정작 자신이 잘못한 건 없다는 것이다.

그제야 곡지흠은 느꼈다.

‘이 자식. 속에 쌓인 화병을 나한테 풀고 있다.’

그리고 화병의 근원이 어디에서 오겠나.

곡지흠의 시선이 돌아갔다.

저기, 천무백이 있다.

지금이야 호위무사로 분하고 있어서 덜하지만, 자신이 농락당하는 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구박받던 게 능허다.

그간 쌓인 화를 자신한테 풀고 있는 게 틀림없다.

‘허허허. 천하의 암상군자가 한낱 흑도에게 화풀이 대상이나 되다니.’

이러다가 머리칼이 다 새하얗게 변할 것 같아서 곡지흠은 결심했다.

곡지흠이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형님, 따로 얘기 좀 나누시죠.”

“어쭈? 이 새끼. 어디서 표정을 굳혀?”

능허는 순순히 객잔 뒤편으로 곡지흠을 따라갔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곡지흠이 이내 표정을 일변했다.

“이보쇼, 독안사.”

“……?”

“내가 누군지 아시오?”

“이 새끼…… 하극상이냐?”

곡지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 하오문주 곡지흠이오.”

“……!”

“사정이 있어 이리 변장했지만, 이해 바라오. 적당히 들키지 않게 잘할 테니, 내가 하오문주란 사실은 천 공자에겐 알리지 마시오.”

곡지흠은 그리 말하며 모든 기세를 개방했다.

능허도 훌륭한 고수가 됐지만, 애당초 곡지흠과는 차원이 달랐다.

암진혜검만 익힌다면 입신지경에 접어들 게 틀림없는 곡지흠이 아니던가.

곡지흠이 있는 힘껏 기세를 개방해 압박하자, 능허의 표정이 꿈틀거렸다.

입을 꾹 다물고 아무 말도 못 하는 능허를 흘긴 곡지흠은 내심 득의한 미소를 지었다.

‘흥. 진작 이럴걸. 이제 좀 나아지겠군…….’

하지만 그건 단단히 잘못한 생각이었다.

애당초 능허는 천무백의 눈치를 받고 곡지흠인 줄 진작 알고 있었으니까.

능허가 누구던가!

천무백에게 그토록 많은 핍박과 비무를 빙자한 폭력 속에서도 꿋꿋이 머리를 치켜든 능허다.

그리도 처맞으면서 꿋꿋이 대들었던 철혈간담의 흑도 사나이 아니던가!

그런 능허에게 곡지흠이 뭐가 대수겠는가.

“어쩌라고?”

예상치 못한 대답에 곡지흠의 몸이 우뚝 멈췄다.

“네가 곡지흠이든, 하오문주든, 하오문주 할애비든. 어쩌라고?”

“독안사……?”

곡지흠의 목소리에 넋이 나간 듯했다.

“하, 거 답답한 양반이시네. 그쪽은 일단 막내로 들어온 거 아니요? 그래서 뭐, 정체 밝혀서 협박하겠다는 거야 뭐야. 아니, 내가 당장 주군에게 쪼르르 달려가서 아, 이 새끼! 하오문에서 주군 행적 팔아넘기려고 숨어들어 온 하오문주 새끼래요! 이렇게 말하면 어쩌려고?”

“……!”

정말 예상치 못했던 반응이기에 곡지흠은 입을 쩍 벌렸다.

능허가 혀를 찼다.

“거, 막내면 막내답게 합시다. 응? 꼬우면 나가던가.”

능허가 혀를 차며 어깨를 툭툭 쳤다. 손에 힘이 하나도 안 실렸지만, 어째서인지 고통보다 더한 굴욕감이 밑에서부터 몰려왔다. 곡지흠은 머릿속 신경망이 하나가 툭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눈이 벌겋게 뒤집히는 순간.

“능허야.”

천무백의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오자, 곡지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급히 숙였다.

“예, 주군.”

“하오문 좀 찾자.”

“뭐 필요하십니까?”

“흑회에 들어가기 전에, 최대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확인해야지.”

천무백의 나른한 목소리에, 고개를 숙인 곡지흠의 눈이 번뜩였다.

그리고 그런 그를 향해 천무백의 시선이 닿았다.

“막내 데리고 뭐 하고 있어?”

곡지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순간 능허와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능허의 눈썹이 호선을 그렸다. 비웃음이다. 곡지흠의 눈이 애처롭게 변했다.

“흠흠. 뭐 막내 교육 좀 하고 있었습니다.”

능허가 그리 말하며 어깨를 두드릴 때, 곡지흠은 결국 고개를 숙였다.

‘참자. 참아야 한다. 암진혜검과 흑회 내부의 정보까지 두 개를 다 얻을 기회이니…….’

그리 합리화하면서.

* * *

복건성 하오문 분타.

천무백은 애처로운 시선으로 눈앞의 상대를 바라봤다.

“하오문주께서 언제 복건성에 오셨소?”

능허에게 하오문을 찾자고 얘기하자마자, 별안간 곡지흠이 모습을 드러냈다.

“당연한 거 아니겠소. 복건에서 흑도들이 모이는데, 하오문주인 내가 직접 살펴야지.”

“어째, 시기적절하게 딱 눈앞에 나타나는구려?”

천무백이 가늘게 뜨고 쳐다보자, 곡지흠은 애써 헛기침을 했다.

그 모습에 천무백은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 전까지 능허에게 된통 당하던 흑도 막내였던 놈이, 저리 연기하는 모습이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다.

하긴,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천무백으로서도 나쁘지 않다.

아무래도 하오문 분타주가 다루는 정보하고, 하오문주가 열람하고 취급할 수 있는 극비정보는 차원이 다르니까.

“무슨 정보가 필요하시오?”

“현재 흑회에 모여들고 있는 세력들에 대한 최신 정보.”

“일전에 임홍 분타주가 넘겨준 정보보다 최신?”

“아무래도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바뀐 정보가 더 중할 테니까.”

“잠시 기다리시오.”

곡지흠은 그리 말하며, 잠시 몸을 피했다.

천무백은 같이 온 능허를 흘깃 바라보며 말했다.

“요즘 행복해 보인다?”

능허의 얼굴은 확실히 이전보다 밝아 보였다. 잠이라도 잘 자는 것처럼 광택이 은은하게 돌았다.

“흐흐흐. 행복이 그리 멀리 있는 게 아니더군요.”

“너도 참…… 너보다 스무 살은 더 많은데, 그러고 싶냐.”

“…….”

주군이 그런 말 할 사람은 아니지 않소?

능허가 대답하지 않고 천무백을 빤히 쳐다봤다. 마치 눈으로 욕하는 듯이.

그제야 자신이 능허의 조카뻘인 걸 깨달은 천무백은 대충 어깨를 으쓱였다.

“스무 살 차이면 친구지 뭐.”

“그렇죠.”

“적당히 해라. 그래도 강호 선배다.”

“흐흐. 흑도로 치면 내 후뱁니다.”

“아주, 역할극에 신이 났구만.”

천무백은 그런 능허를 굳이 만류하지 않았다.

‘보니까 쌓인 게 많더만.’

곡지흠을 다루는 모습을 보면, 정말 혀를 내두를 정도다.

그간 쌓인 화병을 모두 푸는 것 같았으니까.

얼마나 쌓였는지, 천무백이 봐도 곡지흠이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측은지심이 드는 건 드는 것일 뿐.

애당초 자신을 속이고 몰래 흑도패에 들어온 것 자체가 조금 괘씸한 일이니. 내버려 둘 생각이다.

‘쌓인 게 있으면 풀어야지.’

저토록 많이 쌓였을 줄은 몰랐다만.

어쩌면 나중에 자고 있을 때 죽이겠다고 칼 들고 들어올지도 모른다. 새삼 뒷골이 싸늘해졌다. 천무백은 이 기회에 능허가 쌓인 걸 다 풀게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그렇게 잡담을 나누며 시간을 죽일 무렵.

얼마나 지났을까.

곡지흠이 묘한 표정을 지으며 등장했다.

“이거, 좀 일이 재밌게 돌아가고 있소.”

곡지흠이 뜻 모를 말을 내뱉으며 서류를 건넸다.

“허? 이것들 봐라?”

서류를 확인한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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