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66화 (166/318)

<검신재생 166화>

166. 비고(祕庫)

무인의 경지를 어떻게 나눌까.

많은 무인이 닿을 수 있는 경지는 대체로 절정이 최선이다.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과 조언, 적당한 영약, 피와 살이 되는 실전경험, 그리고 충분한 재능.

이 모든 게 갖춰지면 훌륭한 절정고수가 탄생한다.

문제는 보다 높은 경지다.

입신지경(入神之境).

현 강호에서 천하십대고수라 부르는 이들이 바로 입신지경의 절대자들이다.

그러면 지금 천무백의 경지는 어느정도일까?

“입신지경이라…….”

천무백은 확신했다. 현재 본인의 무위가 입신지경에 접어들었다고.

어쩌면 곁에 있는 능허나, 곡지흠도 이미 짐작하고 있으리라.

그렇다고 한들, 천무백이 천하십대고수에 필적한다고 여기지는 않을 게 분명했다.

같은 절정의 경지에서도 경험에 따라 상하가 명백하다.

입신지경도 마찬가지다.

천하십대고수들은 이미 수 년, 아니 십 수 년 전에 경지에 접어든 절대자.

긴 시간 동안 축적된 경험은 같은 입신지경이어도 명백한 상하의 우열을 나눈다.

하니 천무백이 입신지경에 올랐다고 한들, 십대고수에 포함하기엔 어폐란 얘기다.

물론 일반적인 얘기다.

천무백은 일반적인 범주를 이미 벗어나지 않았던가.

“경험이야 더는 쌓고 싶지 않을 정도로 내 머릿속에 충분하고.”

천무백이 피식거렸다.

관록으로 따지면 천무백이 압도적이다. 거기에 타고난 천재성과 오성으로 숱한 경험을 무공에 녹여 내는 것쯤이야 우습다.

입신지경에 도달하지 못했으면 모를까.

이미 입신지경에 도달한 천무백으로선, 천하십대고수와 최소한 동급이 됐다고 스스로 여겼다.

절대적인 내공의 총량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단전에 하단전의 극음지기까지 포함하면 내공의 양 역시 부족하지 않다. 내공의 질적인 면까지 따진다면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물론 천하십대고수 내에서도 서열이 있으니, 천무백이 거기서 어느 정도 위치냐는 건 추론하기 어렵다.

그나마 최근 만난 제갈세가의 태상가주, 제갈선을 떠올리면…….

‘그가 펼쳐 낸 진법만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면, 오 할 이상의 확률로 이길 수 있겠지.’

천무백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평가했다. 아니, 오히려 일부러 지독하게 비관적으로 판단했다.

싸움 중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는 예측 불가기에 예상에 포함하지 않는다. 하니 최대한 비관적으로 판단한다.

그것만으로도 천하의 제갈선을 상대로 오 할의 승리를 자신한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전대의 전설적 고수니까.

그러나 아쉬웠다.

“육신 때문이지.”

애당초 입신지경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노력과 근성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무를 이해하는 타고난 두뇌, 그리고 그걸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는 완벽한 무골.

그것들을 갖춰야만 가능한 게 바로 입신지경의 경지.

근골의 중요성은 경지가 높아질수록 더 커진다.

하여 천무백은 아무리 생각해도 제갈선과의 싸움을 가정한다면 오 할을 넘게 승산을 계산할 수 없었다.

“지금이야 나아졌다만, 이게 최선이니까.”

천무백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이 몸은 타고난 무골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최악이다.

처음 전생을 각성했을 때, 천하의 천무백도 당황하지 않았었나.

육신을 재정비해 주는 경천혼공이 아니었다면, 천무백은 여기까지 오는 데 더 많은 시간이 걸렸으리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면, 천하의 경천혼공으로도 이 정도로 만든 것에 그쳤다는 것이지.”

솔직히 말하면, 지금도 천무백의 마음에 차지 않는 육체였다.

“내 생각보다 느리다.”

상단전의 내공이 받쳐 주는 데도 한계가 명확했다.

가령 천무백의 머릿속으로는 공격해 오는 적의 칼을 쳐내고, 이미 가슴을 베는 투로가 완벽히 떠올랐는데.

그걸 육신으로 표현하자면 칼을 쳐 내는 것에 그친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만 해도 상대에겐 엄청난 충격을 전해 주지만, 직전 전생에서 천신지체(天神肢體)를 타고나 창천검신으로 살던 천무백에겐 답답할 지경이었다.

하여 천무백은 선택했다.

“최대한의 효율로 몸을 만든다.”

천무백의 머릿속엔 수많은 무공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무공을 택했고, 맞춰서 신체를 만들었다.

마음 같아선 직전 전생처럼, 세상의 모든 무공을 때에 맞춰 사용하고 싶었지만. 전생은 천신지체가 아니었던가.

천무백의 선택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래도 썩 마음에는 들지 않았었는데 말이야…….”

혀를 쯧쯧 찼다.

하나 만약에 그 자리에 능허가 있었다면, 어처구니없는 소리로 치부했으리라.

누가 봐도 천무백의 신체는 마치 잘 짜인 조각처럼 보였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몸이 더 빠르게 움직인다.”

천무백이 지금 상념에 빠진 중요한 이유.

왕전유를 피해 배를 건너면서 천무백은 뒤늦게 깨달았다. 제 몸이 반응하는 속도가 이전보다 훨씬 빨라졌다고.

인기척을 느끼는 것쯤이야 상단전의 영향으로 극도로 예민해진 오감, 그걸 넘어선 초감각에 잡힌다.

한데 몸이 곧장 반응했다.

마치 머릿속에서 계산과정이 딱 생략된 것처럼, 기척을 느끼자마자 천무백의 몸이 벼락처럼 움직였다.

한창 싸울 때야 집중하고 있어서 몰랐지만, 지금 곰곰이 생각하니 확실히 이상했다.

“반응속도가 극에 달했어.”

확실했다.

천무백은 두 눈을 감았다.

머릿속, 비고(祕庫)가 활짝 열렸다.

당장 시험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천하의 모든 비급이 모인 신선들의 장서각이 이러할까. 천무백은 머릿속의 비급을 하나씩 훑어봤다. 그러다 문득, 하나에서 멈췄다.

“조양비(鳥樣飛)”

일전, 하왕 왕전유가 보여준 경신공.

희대의 절기인 만큼, 그 연원은 자고로 수백 년까지 거슬러 올라야 한다.

당연히 그만한 절기라면 천무백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하물며 왕전유가 펼친 것이 시간이 흘러 다소 변형된 것이지만.

당장 머릿속에 있는 조양비는 원형(元型).

자고로 무공이라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지 못한다.

무공을 창안한 이는 대종사의 경지에 오르는 무학의 절대자다. 반면 그 유지를 이어받는 후계자들이 필적한 재능을 늘 갖추진 못한다.

후계자들은 자신이 최대한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게끔 무공을 조금씩 고친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다 보면 원형과 궤를 달리하게 되고, 결국 원형이 가지고 있는 강력한 묘리를 잃게 되기 마련.

하니 지금 천무백이 떠올린 건, 왕전유가 봤다면 두 눈을 부릅뜨고 가르침을 청할법한 비기(祕器)였다.

“딱 알맞군.”

천무백이 배의 난간에 올라섰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다. 상단전이 활짝 열리고 걷잡을 수 없는 내기가 전신의 기경팔맥을 타고 질주했다.

웅웅웅웅!

중단전의 심장이 거세게 맥동하며, 선기의 띠가 뚜렷한 빛을 발한다. 왜일까. 심장이 맥동하며 마구 쏟아 내는 신선한 선혈에 선기가 깃드는 듯 온몸에 활력이 퍼져나간다.

발끝부터 머리까지 차오르는 고양감.

천무백의 신형이 난간에서 순간 사라졌다.

타앗!

천무백의 몸이 낮고 빠르게, 수면을 갈랐다.

세찬 바람이 볼을 스치고, 수면을 박찰 때마다 튀어 오르는 물방울.

모르는 이가 봤다면 물 위를 달린다고 경악할 정도로 왕전유가 펼쳐 냈던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왕전유의 조양비가 수면 위를 박차고 달리는 느낌이라면, 천무백은 마치 수면 위를 가볍고 빠르게 미끄러지는 듯했다.

어느새 수면 위를 한 차례 달린 뒤, 다시 난간 위에 올라온 천무백의 얼굴엔 제법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조금 삐걱거리긴 하지만, 제대로 사용했군.”

천무백이 건곤창응보만을 사용하던 이유가 무엇인가.

당장 건곤창응보와 조양비에는 확실한 차이가 있다. 바로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다는 점.

두 무공 다 고도의 집중력과 지독하다 싶을 정도의 섬세함이 요구된다.

한데 아예 사용하는 근육이 다르니, 천무백으로선 더 효과적이고 파괴적인 건곤창응보에 맞춰 일부 근육만 효율적으로, 극한으로 단련했다.

그래야 건곤창응보에 맞게 조절할 수 있으니까.

한데 지금 천무백은 조양비를 완벽하게 펼쳐 냈다.

마치 평생 조양비만을 연구하고 익혀온 사람처럼.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마치, 직전 생의 신체와 같구나…….”

창천검신.

하늘이 내렸다는 천신지체를 타고나 천무백은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높은 경지에 올랐었다.

마치 그때의 육신과도 같았다.

모든 근육과 신경이 선기의 띠가 강렬하기 빛을 낼수록 예민하게 반응한다.

물론 창천검신 때의 신체와 비교하는 건 아직 무리다.

그러나 가능성은 있다.

타고난 신체의 약점을 극복할 가능성.

“중단전을 강화한다.”

성물이 되든, 무엇이 되든 간에 중단전을 강화만 한다면야.

그렇다면…….

머릿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비급들.

천무백의 머릿속,

비고가 활짝 열렸다.

* * *

복건성에 접어들자, 왕전유는 더는 배를 몰고 갈 수가 없었다.

강이 흐르긴 했지만, 폭이 워낙 좁았을뿐더러 흑회가 열리는 장소에 이만한 배들이 들어갈 선착장이 없었다.

하여 중간에 큰 선착장에 배를 대고 육로를 통할 수밖에 없었다.

“끙. 거, 골치 아프군.”

왕전유는 배에서 내리자 미간을 좁혔다.

배를 지켜야 하는 인원이 남아야 하니, 또 얼마 남지 않은 수하 중 적잖은 수가 빠져나갔다.

왕전유로서는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이다.

“안 그래도 내 새끼들은, 뭍에선 잘 못 싸우는데 말이야.”

수적들이 배에서 내리면, 그게 수적이겠는가.

물 위에서라면 한낱 일류, 이류인 수적들도 절정고수를 두려워하지 않는 법.

그러나 땅 위라면 달랐다. 수적들은 제 장기를 전혀 발휘하지 못한다.

지금 육로를 통해 가는 수하들의 숫자만 백이 넘어도, 정작 그중에 쓸 만한 놈은 몇 없었다.

그렇기 때문일까.

왕전유는 시간이 갈수록 능허가 마음에 들었다.

‘흑도판을 오랫동안 굴러다닌 놈이구나. 일솜씨가 아주 좋아.’

왕전유의 시선이 능허에게 닿았다.

배에서 내리자 뭘 어떻게 할 줄 몰라 허둥지둥하는 수하들과 달리, 능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움직였다.

우선 머무를 수 있는 객잔을 순식간에 찾았다.

수적들만 해도 일백여 명, 능허가 이끌고 온 숫자도 대략 칠십 명이 되는데, 그만한 인원이 머무를 객잔을 여러 곳이나 찾아내는 건 보통 여간내기가 아니다.

‘걷는 자세나 움직임을 보면 실력 역시 확실하군. 흑심방이라고 했나? 미래가 기대되는 흑도방파로다.’

저만한 녀석이 수장이면, 얼마 지나지 않아 두각을 드러내리라.

왕전유는 갈수록 욕심이 생겼다.

본래 강 위에서만 살아가는 그에게, 육지의 흑도가 탐이 날 리가 없다.

그러나 앞으로 벌어질 일이 무엇인지, 왕전유는 잘 알았다.

‘흑도의 연합체가 구성된다면 말이지.’

아무래도 강 위에서 사는 왕전유는 그 연합체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긴 좀처럼 쉽지 않을 거다.

태룡방이 적어도 오 할의 영향력을 가진다면, 녹림이 삼 할은 가져가고 왕전유가 이 할을 가져갈 것이다.

결국, 세력이란 땅을 밟고 맹위를 떨쳐야 하니까.

‘그런데 저런 흑도 방파 몇 개만 내 편으로 만들어 둔다면야…….’

그렇지 않아도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싹싹하니 마음에 드는 능허다. 실력도 좋고. 배짱도 두둑하다. 뿐이랴.

“아이고, 이 자식아. 너는 큰형님이 이렇게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데 어물쩍 뭐 하고 있냐?”

왕전유의 눈이 가늘어졌다.

벌써 몇 번이나 본 광경이다.

제법 덩치가 견실한 막내를 유난히 구박하는 능허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막내의 뒤통수를 시원하게 후려갈기는 모습에선, 왕전유마저도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저 막내라는 놈도, 태가 난단 말이야. 꽤 한가락 하는 놈 같은데…….’

막내마저도 어디 가면 무시 받을 입장은 아닐 터인데…….

“하. 이 자식. 덩치만 컸지. 하는 짓은 영 답답하네.”

능허의 구박을 묵묵히 견뎌내는 막내를 보며 왕전유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저기 능허나, 그 호위무사라는 어린놈이나, 또 저기 막내까지.

다 실력은 출중해 보이지 않는가.

왕전유는 결심했다.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내 세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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