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5화>
165. 일거양득의 계(計).
능허는 작금의 상황에 얼떨떨함을 감추지 못했다.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제 돈 주고 구매한 배가 절반으로 쩍 쪼개진 건 가슴이 쓰라렸지만, 더 문제는 흑회까지 나아갈 배가 없다는 점이다.
육로를 통하려면 시간을 맞추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니까.
한데 일이 갑자기 잘 풀렸다.
능허는 환히 웃으며 제 손을 잡는 굵은 팔뚝을 내려다봤다.
“어서 오시오, 흑심방주라 하셨지. 그대의 도움 덕택에 그 간악한 애송이 놈이 꼬리를 말고 도망쳤구려!”
능허는 허리가 빳빳해졌다.
눈앞의 상대가 누군가.
무려 장강수로총채주.
장강의 수많은 수적을 일통한 흑도의 거인.
하왕(河王)이란 거창한 별호로 불리는 무림의 거두가 아닌가. 한낱 수적이라고 그를 깎아내리는 무인은 백도에도, 마도에도 없다.
한데 그런 거물이 자신의 배에 초청할 뿐 아니라 두발로 나와 양손을 잡아 주는 게 아닌가.
한 번도 받아 보지 못한 환대다. 하물며 이런 거창한 무인에게는 더욱이.
“일이 이리됐으니, 이 배에 수하들과 함께 올라오시오. 여기서 나와 함께 흑회까지 갑시다.”
그제야 능허는 머릿속이 환해졌다. 모든 게 천무백의 계획대로다.
‘설마 일부러 이런거야?’
마지막 천무백을 향해 충각돌진한건,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
간신히 정신 차리고, 수봉의 부축으로 일어날 때 귓가에 천무백의 전음이 꽂혔다.
‘언제까지 누워 있을래? 슬슬 연기 마무리 짓자? 응?’
그 전음을 듣는 순간 저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불쑥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그간 당하고 참아 온 억눌린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팍 터지는 느낌.
‘그래, 연기라고? 최선의 연기는 연기인 줄 몰라야 하는 법이지!’
그리 생각한 능허는 이를 악물고 배를 몰고 돌진했다.
배가 부러지든 말든, 정말로 천무백이 물에 빠지는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나름의 복수심에 사로잡힌 행동이었지만,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지켜보던 왕전유의 눈에 어떻게 비쳤겠는가.
“암! 흑도라면, 칼밥 먹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런 배짱 하나는 있어야지!”
능허의 어깨를 두드리는 왕전유의 얼굴엔 호의가 가득했다.
‘다행이다. 변장하길 잘했어.’
능허는 독안사란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변장을 했다. 잘린 왼팔은 의수를 달았고, 없는 한쪽 눈은 마치 화상을 입어 일그러진 것처럼 꾸몄다.
하오문의 조력이었다.
만일 그리 변장하지 않았다면, 왕전유와 이리 가까이 붙어 있으니 나중에 정체가 들켰을 확률도 높을 터.
‘잠깐, 정체를 들켜?’
순간 머릿속에 퍼뜩 파고드는 생각에 능허는 몸이 딱딱하게 경직됐다.
‘그저 유람선을 구하려는 목적이 아니었다.’
물론 처음에는 본래 목적이 맞았을 것이다.
왕전유의 권유를 거절할 수 없으니까.
그가 본 천무백은 완벽한 선인(善人)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무림과 일절 관계없는 이들이 희생당하는 꼴은 지켜보지 못하는 나름, 협객에 가까운 사람이니까. 유람선을 구하고자 하는 게 목적이 맞았다.
다만 결과물이 하나에 그치지 않았다.
‘단순히 합 맞춰 연기하는 수준이 아니라…….’
죽는 줄 알았다. 잠깐이지만 웬 저승차사가 눈앞에서 살생부를 살살 흔드는 게 스쳐 가지 않았나.
진심으로 자신에게 강맹한 일격을 날렸다. 능허는 처음에 그것이 자신에게 화풀이하려는 속셈인가 여겼지만, 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어쨌거나 난 그 강맹한 일격을 받고도 살아남은 거다. 이들이 보기에는 말이야.’
능허는 조심스레 왕전유를 바라봤다. 호의에 가득 찬 시선. 하나 그 속에 은근히 자신을 날카롭게 살피는 기색이 담겨있다.
‘날 가볍게 생각할 상황이 아니지.’
왕전유의 수적들은 부딪치는 족족 죽어 나갔다. 각 배의 선장들은 물론이요, 나름 한가락하는 정예들이 모두.
반면 능허는 버텨내다 못해, 결정적인 순간에 천무백을 떨쳐냈으니. 만만치 않은 고수란 걸 왕전유의 머릿속에 각인시켜 준 것이다.
‘더구나 당장 하왕의 수하들이 팍 줄어들었지.’
천무백이 그리 날뛰니, 왕전유의 선단은 절반 이하로 팍 쪼그라들었다. 부상자들까지 생각하면 삼 분의 일도 되지 않을 정도다.
이런 상황이니 흑회에 참여해야 하는 왕전유는 능허와 그 수하들이 탐이 났으리라.
능허는 자연스럽게 왕전유의 환대를 받게 됐고, 곧 있을 흑회에서 아마 왕전유가 곁에 계속 둘 확률이 높다.
‘자연스럽게 왕전유 곁에서 흑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여기까지만 해도 천무백이 만들어 낸 결과는 놀랍다.
‘거기에 내가 독안사라는 의심을 저버릴 수 있겠지.’
단순히 변장만 했다가는 들켰을 확률이 높다.
하나 천무백과 직접 부딪쳤다. 이 같은 사실은 곧 강호에 퍼질 게 분명하다. 굳이 유람선 위에서 제 정체를 밝힌 이유가 그거다. 무사히 살아남은 유람선의 선객들이 천룡검협이 구해 줬다는 소문을 퍼뜨릴 테니까.
그러면 추후에 천룡검협과 흑심방의 연관성을 부정할 수 있게 됐다. 아니, 웬만해서는 의심조차 할 수 없겠지.
순간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야말로 일거양득의 계(計).
이런 계책을 이룬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능허는 다른 점에서 전율했다.
아주 잠깐, 유람선이 등장하자마자 이런 계를 꾸며 낸 것이 아닌가?
‘미친놈, 아무리 생각해도 이놈을 적으로 만나면 안 된다!’
천무백에게 불쑥 들었던 불만을, 능허는 억지로 쑤셔 넣었다.
“갑자기 왜 그리 몸을 떠시오? 아, 이름이 뭐라 하셨더라?”
“그…… 화웅이라 합니다.”
“화웅이라! 화웅. 흑도다운 이름이군.”
능허란 이름을 말할 순 없으니, 능허는 부방주 화웅의 이름을 들먹였다.
“하면, 옆에 있는 사람은 방주의 호위무사인가?”
“네?”
갑작스러운 말에 고개를 홱 돌린 능허는 정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느새 천무백이 곁에 조용히 서있었다.
‘도대체 또 언제 온 거야?’
오늘 몇 번 간이 떨어지는 건지. 이러다 제 명에 못 살겠다는 마음이 불쑥 들었다.
천무백은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철저하게 지웠는지 능허는 곁에 언제 왔는지 눈치조차 채지 못했다.
왕전유 정도야 뭔가 위화감을 느끼고 천무백을 쳐다보고 있었다.
능허가 급히 화답했다.
“아, 예. 제 호위무사입니다.”
“흠. 흑심방의 수준이 생각보다 대단한가보오. 천룡검협과 부딪쳐 이리 멀쩡한 걸 보니, 방주의 실력도 대단해 보이는데. 호위무사 역시 평범해 보이진 않는군.”
왕전유의 눈이 번뜩였지만, 가면 뒤에 천무백의 표정을 알 길이 없었다.
한데 능허는 어쩐지 그 표정이 짐작됐다.
‘거 귀찮은 표정이겠지. 호위무사인 척해야 하니. 어? 잠깐만?’
호위무사라면, 내 밑이잖아?
능허는 씩 웃고는, 별안간 천무백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제가 조카처럼 여기는 놈입니다, 칼 하나는 잘 쓰는데, 성격이 영 개차반 같은지라. 곁에 데리고 다니면서 교육하고 있습니다.”
능허는 그리 말하며 천무백의 귓불을 쭉 잡아당겼다.
“버르장머리가 없어서 고민입니다. 이노무 자슥아, 여 하왕이 계시는데 인사 안 하고 멀뚱히 서 있어?”
귀를 쭉 잡아당기자, 천무백은 그제야 느릿하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했다. 저도 모르게 천무백을 유심히 살피던 하왕은 헛웃음을 터뜨리며 손사래를 쳤다.
“됐소, 됐소이다. 어쩐지 뭔가 미묘한 기세가 느껴졌는데,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어린 친구 같군. 잘 가르쳐보시오.”
“예예, 알겠습니다. 이놈아, 어서 고개 안 수그리고 뭐 해?”
능허는 그리 말하며 천무백의 뒤통수를 꾹꾹 눌렀다.
그 순간, 능허는 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쾌감을 느꼈다.
그건 여인과의 방사에서도 느낄 수 없는, 도박에서 크게 한판 딸 때도 느끼지 못했던 격렬한 쾌감이었다.
‘시바. 드디어 살 거 같다.’
후환 따위야 뭐가 두려우랴.
흑회까지 가는 길도 남았고, 흑회 안에서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후환이야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닌가.
물론, 그 감정도 천무백의 전음이 들려오기까지 전에만 유효했다.
‘능허야, 정말 새로운 방식으로 자살을 시도하는구나.’
‘무슨 소립니까. 지금 저 하왕이 당신 유심히 쳐다보는 거 안 보입니까? 일부러 그런 겁니다. 일부러.’
‘일부러 그렇다기엔 네 손에 감정이 실렸다. 누군가 내 귀를 잡아당기는 건 난생처음이구나.’
‘다 경험이라 생각하십시오. 보십쇼. 제가 이렇게 주군을 가볍게 대하니, 저 하왕도 의심을 접지 않소.’
틀린 말은 아니다.
천무백이 아주 의도적으로 존재감을 지워도, 하왕은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고 쳐다보고 있었으니까.
하나 능허가 이리 정말로 제 조카를 대하듯이 가볍게 대하자, 그 의심의 시선이 덜어지지 않았는가.
“이런, 부상이 심할 터인데 내가 오래 잡아 뒀군. 선실은 마련해 뒀으니 쉬고 계시오. 흑회까지, 이 하왕 왕전유와 함께 움직입시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능허는 그리 고개를 숙이며 선실을 빠져나왔다. 천무백의 전음이 파고들었다.
‘아주 그럴듯한 변명이라서 더 화가 나는구나. 배로 충각돌진 한 것부터, 날 물에 빠뜨려 죽일 심산이었지?’
‘댁이야말로 진짜로 나 죽이려던 거 아니요?’
‘내가? 내가 왜 널 죽여?’
정말 모르겠다는 동그래진 두 눈. 능허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눈앞에서 웬 저승차사가 살생부를 흔들면서 내 이름을 부르더라니까?’
‘거. 요즘 기가 허하나 보네. 약재 좀 지어 먹어라.’
‘와, 나 씨.’
‘내가 죽이려고 했으면, 네가 지금 두 발로 서 있겠냐?’
‘……!’
순간 능허는 우뚝 멈춰 섰다. 어쩐지 스산한 마음이 들었다.
“다 봐준 거다. 짜식아.”
하기야 틀린 말을 아닐 거다. 무당에서 일을 마친 이후, 천무백은 능허가 보기에도 절정을 월등히 넘어선. 그야말로 괴물과도 같은 ‘입신지경’에 올랐다고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썅. 이걸 고마워해야 해 말아야 해?’
부러진 코뼈에서 쓰라림이 몰려왔다.
왠지 억울했다.
* * *
결과적으로 보면 능허의 행동은 꽤 적절했다.
“역시, 흑도는 감각을 믿고 살아간다니까.”
가면을 썼고, 모든 존재감을 철저하게 지웠다. 상단전에서 흘러나오는 특유의 기운은 거둬들였다. 오로지 하단전만 열어서 누가 봐도 빙공을 익혔으리라고 짐작하게끔 유도했다.
한데도 왕전유는 흑도가 가진 특유의 감각, 어쩌면 눈치라고 부르는 그것으로 천무백에게 위화감을 느끼는 눈치였다.
“천룡검협이라고 생각은 못 해도, 무언가 위화감을 느끼면 의심이 들기 마련이니까.”
한데 거기서 능허가 천무백을 친근한 조카처럼 대하니, 나름대로 의심을 덜어낼 수 있었다.
물론 천무백은 귀가 잡아당겨진 걸 잊지 않았다.
다만 여기서는 참을 뿐.
“그래도 능허 그놈이, 나쁘지 않게 잘해 주고 있단 말이지.”
알게 모르게 왕전유는 그 상황에서도 기세를 은연중에 내뿜고 있었다.
한데 능허는 그 기세를 받으면서도 흔들리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천룡검협과 부딪쳐 살아남다 못해, 배를 부서뜨려 일격을 먹인 게 우연이 아니리라 생각하리라.
태룡방주, 그리고 거력왕.
그 둘에 비교해 일신의 무력이 부족한 왕전유가 기댈 건 바로 세력.
하니 왕전유는 어떻게든 능허를 곁에 두려하리라.
“이로써 일단 흑회의 중심에 파고들 구석이 생겼군.”
태룡방주, 거력왕, 하왕. 이 셋이 흑회의 우두머리가 될 게 분명하니까.
천무백은 그러면 흑회에 도착할 동안, 배 위에서 천천히 제 무공을 점검할 생각이었다.
‘중단전이 단순히 통로라고만 생각했지만…….’
상단전과 하단전의 연결, 그리고 통로.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이 아니다.
중단전을 장악한 선기는 상반된 두 가지 기운을 연결해 주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걸 절실하게 느꼈다.
‘하왕이 입신지경의 고수가 아니라고 한들, 약하진 않다.’
특히 하왕이 물 위를 건너던 조상비는 천무백이 보기에도 손에 꼽히는 절기였다.
하나 천무백은 왕전유가 뒤에 도달하는 순간, 몸이 저절로 반응하여 공격을 흘려보냈다.
‘신체의 반응속도가 기존을 훨씬 뛰어넘는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천무백이어도 평생을 배 위에서 살아온 왕전유의 추적을 뿌리칠 수 없다.
한데 가능했다. 늘 한 박자 먼저 움직였다. 왕전유가 뒤에서 쫓아오는 인기척쯤이야, 상단전 개방 후 갖게 된 일종의 초감각에 잡히는 것이니 문제없다.
한데 감각으로 느꼈다고 한들, 그 감각에 맞춰 몸이 반응하는 건 다른 종류다. 철저하게 육체를 단련해놓는 것도 필수적이지만, 천무백이 이번에 왕전유와 부딪친 건 그 이상이었다.
‘반응속도가 빨라졌어.’
그때마다 천무백은 중단전에서 선기의 띠가 빛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초감각에 이어 극에 달한 반사속도라…….’
천무백이 출렁이는 수면 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달빛이 드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