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4화>
164. 그건 알 바 아니고.
능허 역시 분명 절정의 고수였지만, 상대는 천무백이다.
천무백이 작정하고 쏟아 낸 강기는 천둔검법의 묘리가 담겼다.
초식을 벗어났기에 더 위력적인 상승의 묘(妙).
우드드드득!
능허는 실 떨어진 인형처럼 빙글빙글 돌며 처박혔다.
날아가는 꼴이 얼마나 처참했는지, 막상 강기를 쏘아 보낸 천무백도 미안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이래야 너랑 천룡검협이랑 한편이란 의심은 전혀 안 들지 않겠냐.]
천무백이 머쓱한 어조로 전음을 보내자, 무너진 돛대 사이에 깔린 능허의 몸이 한 차례 경련했다.
저렇게까지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러게, 수련 좀 열심히 하지 그랬냐. 어떻게 한 합을 못 버티냐. 응?]
부르르르!
능허가 더 격하게 경련했지만 천무백은 무시하고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로 화끈하게 등장했으니, 왕전유의 시선은 충분히 끌었을 터.
천무백의 배를 중심으로 왕전유의 선단이 크게 선회하며 포위망을 구축했다.
‘역시 하왕의 수적들이라 이건가.’
많은 배가 갑작스러운 선회에도 깔끔하게 포위망을 구축하는 모습은 과연 장관이었다.
천무백은 그중 하나의 배에 훌쩍 뛰어올랐다.
선단 중에서도 왕전유가 탄 배 다음으로 두 번째로 큰 배였다.
크기만큼 갑판에 올라선 수적들도 바글댔다.
“……!”
그런 갑판위로 천무백이 홀로 뚝 떨어지니 모두 멈췄다.
‘미친놈 아니야?’
‘혼자 여길 올라온다고?’
갑판의 높이가 차이가 크다. 거기에 배는 흔들리고 있어 중심 잡기도 어렵다.
누가 배를 저따위로 건넌단 말인가.
그런 의문이 머릿속에 들자 수적들은 순간 멈췄다. 아주 찰나였다.
잠깐의 찰나에 천무백은 갑판 위의 모조리 시선을 훔쳤다. 천무백의 움직임을 따라 그들의 시선이 이동했다. 천무백은 곧장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무판자들을 발로 걷어찼다.
순간 수적들의 시선이 판자에 닿았다. 내공이 실린 판자가 맹렬한 기세로 파고들었다.
한낱 판자라 무시할 수 없다. 기세만큼은 단숨에 사람 서넛을 피육으로 만드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하나 굳이 따지면, 시선을 훔치는 허초였다.
“……!”
살초는 판자 뒤로 수십 줄기로 쏟아져 나오는 강기였다.
파파파파팍!
강기에 휘말린 수적들은 그대로 한 줌 핏물이 되거나, 어찌어찌 막아내도 팔다리가 부러져 바닥을 나뒹굴었다. 단숨에 갑판 위가 피범벅 됐다.
“정신 차려!”
모두가 넋을 놓자 갑판장이 씹어 삼키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쇠그물을 던져! 동시에 달려들어! 그물을 던지고 물에 빠뜨려 버려!”
수적들이 절정고수를 상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법.
촤르르륵!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네다섯 개의 쇠그물이 활짝 펼쳐지며 천무백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평범한 철이 아닌, 강철 중에서도 그 내구도가 탁월해 웬만한 검기에도 버틴다는 빈철(鑌鐵)로 잘 짜인 쇠그물.
그물에 한 번 걸리면, 절정고수라도 어찌할 수가 없다. 쉽게 잘리지도 않을뿐더러,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더 얽혀 들어가니까.
그때 우르르 달려들어 물에 빠뜨리면, 천하의 고수도 버티지 못한다.
하나…….
까가가가강!
“미, 미친!”
수어 개의 쇠그물이 강기에 종이쪼가리처럼 갈갈이 찢겼다.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광경에 모두의 입이 쩍 벌어졌다.
갑판장이 목에 핏줄이 설 정도로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화살을 쏴! 쏴! 물을 끼얹어!”
갑판장의 명령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천무백이 쏜 반월형의 검기가 닿을 때마다 수적들이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여지없었다. 모두 절명이다. 냉정하게 명령을 내리던 갑판장의 목이 허공에 솟구치는 순간, 절망이 덮쳤다.
“마, 막을 수 없어!”
“괴물이야……!”
그야말로 아비규환.
쇠그물을 던져도, 물을 왕창 끼얹어도, 천무백의 검은 막지 못했다.
달려드는 족족 목이 잘리고, 가슴이 벌어졌다. 심장이 꿰뚫리고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픽픽 쓰러진다.
믿기지 않는 광경이다.
양 떼에 떨어진 늑대의 모습이 저러할까. 한 놈, 한 놈, 무심한 표정으로 기계적으로 검을 휘두르는 천무백의 모습은 흡사 공포였다.
“으으으으!”
더 두려운 건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가공할 섬광이다.
마치 부처가 강림한 듯, 온몸을 둘러싼 후광은 민간에서 신앙처럼 숭상받는 무애광명처럼 보였다.
하나 그 빛에 둘러싸인 사내가 무심하게 자신들을 차근차근 베어내는 모습은, 격렬한 위화감을 가져다 줬다.
“이노오오옴!”
결국, 천무백을 상대할 수 있는 건 왕전유뿐이다.
왕전유가 고함을 내지르며 훌쩍 건너왔다.
쿠우웅!
배가 크게 출렁였다. 왕전유는 착지하자마자 곧장 쇄도했다. 둔하지 않다. 날렵하다 못해 쾌속하다.
반월형의 대도가 거칠게 강기를 쏟아냈다. 강기가 폭풍처럼 쏟아졌다. 천무백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새하얀 섬광. 귀곡광애는 왕전유의 강기마저 막아냈다.
하나 그 충격만큼은 완전히 상쇄할 순 없었다. 천무백은 충격의 여파로 뒤로 훌쩍 날아갔다.
“와아아아!”
“역시, 채주님!”
수적들이 일제히 환호를 터뜨렸다. 비록 참살시키진 못했지만, 한 치의 흔들림도 없던 천무백의 신형이 버티지 못하고 날아가지 않는가.
하나 막상 기세 좋게 천무백을 공격한 왕전유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었다.
손끝에서 전해지는 감각.
‘반탄력이 없다.’
어떤 호신강기든 두드리면 반탄력이 생기기 마련.
한데 손목으로 전해지는 충격은 아주 미세했다. 마치 그 힘을 일부러 받아들인 듯한 느낌.
‘일부러?’
그 순간 격렬한 위기감이 왕전유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거, 고맙소. 덕택에 배 건너가기 쉽네.”
왕전유의 도강에 휘말려 훌쩍 날아간 천무백은, 오히려 충격력을 역이용해 가장 멀리 떨어져 있던 배로 옮겨갔다.
허공에서 몸을 비틀어 원하는 지점으로 뚝 떨어지는 고강한 내력은 둘째 치고, 천무백의 행동이 무얼 의미하는지 깨달은 왕전유의 눈이 부릅떠졌다.
“주, 죽여!”
“물에 빠뜨려!”
이어지는 상황은 조금 전 있던 배에서 벌어진 일의 반복이었다.
갑판에 있던 수적들을 망설임 없이 뱄다. 천무백은 특별한 무공의 묘리를 발현하지도 않았다. 그저 무참히 상단전에서 쏟아지는 내기를 강기로 바꾸어 미친 듯이 쏟아냈다.
“이노오오오옴!”
왕전유가 배를 징검다리 삼아서 쫓아왔다. 하나 늦었다. 이미 갑판 위 삼분지 일은 죽었으니까.
왕전유가 쫓아오자 천무백은 언제 수적들을 공격했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검을 회수하곤 곧장 다른 몸을 뺐다.
왕전유의 눈이 반쯤 뒤집혔다.
“어딜, 어딜 가느냐! 멈추란 말이다! 백도의 영웅이란 놈이 꽁지를 말고 도망치는 게냐!”
“이토록 아름다운 호수 위에서 사이좋게 같이 유람하기엔, 내 남색에는 취향이 없는지라!”
천무백은 천연덕스럽게 웃곤, 다음 배로 건너가 곧장 강기를 쏟아냈다.
“끄아아악!”
비명을 내지르며 쓰러지는 수적들.
왕전유가 한 박자 늦게 도달하면,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몸을 빼 다른 배로 옮겨 탔다.
그제야 왕전유는 천무백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이 개자식이 내 수하놈들을 다 죽이려는구나!’
벌써 배 세 척이 당했다.
배는 멀쩡해도, 배를 운용할 수적이란 수적은 싹 다 죽어 나갔다.
왕전유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 미친놈아! 그만둬! 그렇게 강기를 쏟아냈다간, 네놈 몸이 버틸성싶으냐! 곧 메말라서 내 손아귀에 잡힐 거다!”
왕전유의 말은 합당했다. 천무백은 배를 건너뛸 때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무작정 강기를 쏟아냈다. 강기는 엄청난 위력과 살상력을 가졌지만, 그만큼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
이대로라면 내공이 고갈되어 결국 왕전유에게 잡힐 터.
하나 천무백은 태연자약하게 웃었다.
“역시, 강호의 선배가 후배에게 깊은 조언을 해주시는구려! 한데 어찌하겠소, 난 내 몸의 모든 내공을 싹다 긁어 한 놈도 살아나가지 못하게 할 생각인데!”
“내공이 고갈된 네놈이 나를 버틸성싶으냐!”
“그건 알 바 아니고, 그냥 기다리시던가.”
천무백이 웃음을 터뜨리자, 왕전유는 분통이 터졌다.
“멈추란 말이다!”
왕전유는 이를 악물고 내공을 극한까지 운용했다.
조양비(鳥樣飛).
새가 수면 위를 빠르고 낮게 날아다니는 모습에서 따온 상승의 경공.
극한까지 조양비를 운용하자, 왕전유는 순식간에 물 위를 건너 천무백의 지척에 도달했다. 이번엔 천무백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가공한 속도였다
곧장 천무백의 뒤를 점한 왕전유는 대도를 냅다 휘둘렀다.
콰아아앙!
“……!”
천무백의 몸이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검을 비스듬히 휘두르며 대도를 흘려보냈다. 순간적으로 충격을 흘려보내는 그 기지에 왕전유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터뜨렸다. 하나 감탄은 감탄일 뿐, 왕전유는 이어 두 번째 공격을 퍼부었다.
애석하게도 시도에 그쳤다.
“우어억!”
모든 시선이 천무백의 손과 검에 집중되어서 그랬을까. 천무백의 발이 불쑥 올라와 왕전유의 복부를 강하게 밀어 찼다.
갑판 위,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기에 왕전유는 그대로 배 밑으로 풍덩 빠졌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중심을 잃은 것이다. 수적들의 왕이자 강의 왕이라고 불리는 무인이 강에 빠지다니!
“어떠신가! 강에서 자맥질 하는 게, 하왕이란 별호에 더 맞지 않겠나?”
“이노옴!”
정말로 얄밉게도, 천무백은 웃음을 터뜨리며 곧장 다음 배에 건너가 강기를 뿌려댔다.
“개판이구나, 아주 개판이야!”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왕전유가 있는 힘껏 쫓았지만 천무백은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한 박자 빠르게 몸을 빼냈다. 그와 같은 고수에겐 그 한 박자라는 ‘찰나’만으로 여러 목숨이 저승으로 가는 데 충분했다.
‘안 된다. 천룡검협의 목숨 따위가 나에게 뭐가 중요하다고!’
눈앞이 깜깜해졌다. 지금 데리고 온 녀석들은 수하 중에서도 정예 중의 정예.
이번 흑회가 어떤 자리인가.
중원의 모든 흑도가 모이는 연합체. 그런 연합체에서 제대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우선 기선제압이 중요했다.
태룡방주와 거력왕에게 개인의 무위는 다소 손색이 있는 왕전유가 아니던가. 하니 내세울 수 있는 건 세력이다. 당장 이번 흑회에서 기 싸움을 펼치려고 데려가는 이 수하들을 잃는다면?
그것도 애송이인 천룡검협에 싹 당했다는 소문이 난다면?
흑회에서 왕전유의 입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이 개자식!”
결국, 왕전유는 선택했다. 천무백의 내공이 고갈되기까지 기다리다간, 이대로 수하들이 다 죽어 나가게 생겼으니까.
왕전유가 있는 힘껏 내공을 쏟아내려는 찰나. 그때였다.
꽈아아아아앙!
한 척의 배가 천무백이 타고 있던 배를 그대로 들이박았다.
얼마나 맹렬하게 충돌했는지, 배가 우지끈 쪼개졌다. 갑작스러운 충돌에 당황한 건 천무백도 마찬가지였는지, 황급히 뛰어올랐다.
그러나 때마침 주위에는 배가 없었다. 당장 가까이 있는 배는 왕전유가 있는 배.
천무백은 미간을 좁히더니 이내 물에 떠다니는 잔해 위에 올라섰다.
그 모습에 왕전유가 내심 반색했다.
‘내공소모가 극심하구나!’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배로 건너오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한데도 그냥 물러서다니.
내공소모가 극심한 것이 틀림없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왕전유는 천무백을 쫓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쫓는다고 한들 수하들의 피해는 더 극심해질 것이고, 자신이 천룡검협을 잡아서 얻을 이득이 뭐가 있겠는가.
저런 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까.
“천룡검협, 네 이놈! 어딜 도망가느냐!”
하지만 체면은 살리기 위해 그리 외쳤다. 속내는 완전히 달랐지만.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쓸어내린 왕전유는 마지막에 충각돌진을 해서 천무백이 물러가게 만든 배를 바라봤다.
‘흑심방이라고 했나?’
우연히 흑회에 참여하러 가는 흑도를 만났다.
한데…….
‘생각해 보니, 그놈들의 수장이란 놈은 천룡검협의 공격을 한번 버텨 냈지?’
다른 정예 수하들이 우수수 쓰러진 걸 생각하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실력이란 얘기다.
하물며…….
‘운이 좋은 건지, 흑심방의 피해는 없어 보이는데. 백 명 정도 되는 흑도라. 수장이 그만하게 강한 놈이면, 수하들도 실력이 썩 괜찮을 터.’
하물며 수적도 아닌 것들이, 마지막엔 기세 좋게 충각돌진을 하다니.
그 대담함이 마음에 들었다.
‘더구나…… 내 애들이 다 죽어 나간 마당이니.’
당장 흑회에 참여해야 하는데, 배를 돌려 수채에 머무는 수하놈들을 데리고 오기엔 너무 늦다.
그렇다고 지금 행색으로 가기엔 세력이 너무 쪼그라들었다.
‘저 녀석을 끼고 가야겠군.’
왕전유의 눈에, 잔뜩 성이 난 얼굴로 피범벅이 된 능허의 모습이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