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3화>
163. 적당히 싸우는 거 아니었나?
“형님…… 공자님이 왜 저기에 계십니까?”
수봉의 얼굴이 얼떨떨해졌다.
“공자님이, 천룡검협이라니요?”
천무백의 정체를 파악한 수하들은 모두 당혹을 감추지 못했다.
수봉들은 이 흑도행이 흑도를 일통하려는 과정으로 짐작했다.
그도 아니면 최소한 호북을 근거지로 한 새로운 흑도문파의 창설이라고 여겼다.
한데 천룡검협이라니. 천무백이 대체 흑도들을 왜 모은단 말인가?
웅성거림이 배 위에서 번져가자, 능허는 이대로 내버려 뒀다간 왕전유의 귀에도 들어갈까 우려됐다.
그렇다고 상세한 내용을 말하기에는 여의치가 않다. 일단 조용히 시키려고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댔다.
“천룡검협께선 너희들을 데리고 강호를 위해 대계를 꾸미고 계신다. 그러니 모두 눈치껏 행동해라!”
능허가 인원을 선별할 때 가장 중점을 줬던 부분이 바로 눈치와 잔머리였다.
흑도라면 눈치 하나는 갖고 살아야 한다는 신념의 결과물이다.
하나, 이건 눈치가 있다고 한들 쉽게 넘어갈 얘기가 아니지 않은가.
대충 둘러댄 말에 한두명이 의문을 품고, 반발이라도 하다간 일은 복잡하게 될 터.
‘여차하면, 흑도답게 찍어 누른다.’
능허의 눈이 스산하게 번뜩였다.
몇 놈을 찍어 눌러서, 공포로라도 입을 다물게 할 마음을 먹었다.
과연 능허가 대충 둘러댄 허술한 말이 통하지 않았던걸까. 수봉이 딱딱한 얼굴로 능허를 빤히 노려봤다. 배 위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하나 수봉의 입이 열리는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그렇군요. 어쩐지 범상치 않은 분이시라고 느꼈건만……. 알겠습니다.”
“……어?”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봉이 수긍하자 오히려 능허가 얼이 빠져버렸다.
수봉이 후련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랬군요. 이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됩니다. 단순히 흑도문파를 창설할 거였다면, 그냥 강한 흑도놈들을 다 데려왔을 텐데. 형님께선 그러지 않으셨죠.”
“으응?”
“사람 갖고 장사한 놈, 빚을 지게 해서 딸내미를 기루에 팔아먹은 놈, 도박장 운영하면서 사람이며 가정이며 모두 무너뜨린 인면수심 놈들은, 다 쳐 내고 관아에 처박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
뭐, 당장 전쟁하러 데리고 갈 인원도 아니고. 그런 놈들은 독하기도 어지간히 독해서, 관리하기 정말 귀찮다는 점이 주효했다. 어차피 머리 숫자만 채울 목적이 아니던가. 관리가 귀찮은 놈들은 쳐내는 게 낫지.
“이제 알겠습니다. 저 같은 하류인생을 모으는 것도, 우리를 안타깝게 여기고, 교화시켜서 강호 정의에 도움이 되게끔 만드시려는 속셈이시겠지요. 과연……. 알겠습니다. 눈치껏 행동하겠습니다!”
“…….”
이 새끼, 더럽게 눈치 없다.
“그럼 이제 우리는 흑도인 척, 싸우는 척해야 하는 겁니까?”
무언가 들뜬 기색의 질문에, 능허는 침음을 삼켰다.
천무백이 왜 저기에 있는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능허는 눈치챘다.
‘적당히 눈치껏 싸우고, 물러나라는 거겠지.’
다름 아닌 천룡검협을 상대로 배를 약탈할 수 있겠는가.
그럼 대충 싸우는 척하며, 중과부적으로 물러서면 된다. 그사이 유람선은 빠르게 도망칠 것이고. 하면 능허는 왕전유의 말을 거절하는 것도 아니고, 유람선을 약탈하지 않아도 된다.
확실히 좋은 방법이다.
‘한데…….’
능허의 표정은 좀처럼 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시발, 살기를 왜 이렇게 뿌려대?’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칼날처럼 스며드는 살기.
새하얀 검신을 뽑은 채, 이쪽을 겨누고 있는 천무백의 무표정.
그 표정에 담긴 의미를 능허는 진즉 깨달았다.
이미 알아차렸지만, 차마 그럴 리가 없다고 부정했던 그것.
“쓰바…… 저 양반 작심했는데.”
이거 단순히 합 맞추는 연기가 아니다.
그때, 천무백이 선수에서 뛰어올랐다. 동시에 그의 검에 새하얀 검기가 불쑥 솟구쳤다.
“진짜 죽이려고 하네?”
능허의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 * *
수적.
강 위에서, 호수 위에서 그것만큼 두려운 이름이 있을까.
하물며 이 유람선에는 제법 무림인처럼 보이는 칼 찬 사람들도 없었다.
수적들이 나타났을 때, 노모를 모시고 처음으로 효도하겠다고 마음먹은 길성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수없이 공부하고, 드디어 과거에 붙었다. 이제 드디어 출세할 일만 남아서 제 공부를 위해 평생을 뒷바라지한 노모께 유람이라도 시켜 주려 했건만…….
“걱정하지 마셔요, 어머니. 아직 거리가 머니, 있는 힘껏 도망가면 그만일 겁니다.”
선장은 수적들을 보자마자 배를 돌렸다.
애석하게도 선체는 무거웠다. 약탈을 업으로 삼는 수적들의 날렵한 배보다 빠를 리가 없었다. 수적들의 험상궂은 표정과 살기가 맴도는 웃음소리가 가까워지자 길성은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겁에 질린 노모의 주름진 손을 꽉 잡아보지만, 거칠게 맥동하는 심장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이, 이대로면 다 죽는다!”
“어떡하오, 더 빨리 가란 말이야! 선장! 배를 빨리 몰아!”
그야말로 공황상태에 빠진 선객들이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위기에 처하면 초인적인 능력이 발휘된다고 하던가.
길성은 오히려 위험에 처하자 머리가 차가워졌다.
“짐, 짐을 모두 버리시오! 배를 가볍게 합시다!”
길성은 그렇게 소리치고, 선상에 있던 잡다한 기물들을 모조리 강에 던졌다.
그런 행위에 선객들은 하나둘씩 달라붙어, 짐이란 짐은 모두 던졌다.
확실히 짐을 버리자 배가 가벼워진 듯했다.
그러나 맹렬하게 쫓아오는 수적들의 배를 따돌리기란 요원한 일.
길성은 어떻게든 노모만은 살릴 방법을 모색하려고 쉼 없이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철저하게 막힌 벽 앞에서 구멍을 찾는다 한들, 없는 구멍이 불쑥 솟구치겠는가.
‘아…… 아.’
없다. 방법이 없다. 살아나갈 구멍도 없다.
직감한 길성은 그저 벌벌 떨고 있는 노모를 꽉 끌어안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이보시오 선장, 뒤도 돌아보지 말고 선착장을 향해 배를 몰고 가시오.”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하고도 진중한 목소리였다.
한데 목소리는 묘했다. 듣는 이에게 심신을 편안케 하는 마력이 깃들었다.
놀랍게도 품속에서 느껴지던 노모의 떨림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에게 시선을 돌린 길성은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검을 찬 청년?’
저보다 열 살은 어려 보이는 청년.
허리춤엔 두 개의 검을 찼다.
무인이다.
유람선에 저런 무인이라면 진작 알아봤을 터. 그리 많은 인원이 타고 있는 배가 아니니까.
한데 길성은 저런 사내를 처음 봤다.
이내 그는 청년의 머리칼이 햇빛에 살짝 반짝이는 걸 목격했다.
‘물기?’
물에 젖은 머리칼. 그러고 보니 사내의 발치에 물이 묻은 발자국이 남았다.
마치 수영이라도 해서 배에 올라탄 것처럼.
사내는 천천히 검을 뽑아 들곤 선수 위에 올라섰다.
웬만한 사람도 중심을 잡기 힘든 흔들리는 선수 위에서, 청년은 굳건하게 섰다.
“……!”
분명 한참이나 어린 사람의 등이다.
한데 그 등을 보는 순간, 길성은 지금껏 막막했던 벽 앞에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는 듯했다.
“천룡검협, 천무백이 네놈들을 모조리 수장시켜 주마!”
길성은 노모를 꽉 껴안았다.
그의 머릿속에 드는 건 단 하나였다.
‘살았다……!’
천룡검협.
작금의 강호에서, 그 별호가 가지는 의미였다.
* * *
천무백은 선수에 서서 전면을 바라봤다.
‘흐음. 수적들의 왕, 강을 지배하는 절대자, 과연 그 별호가 어울리긴 하는군.’
상대편에서 바라보는 왕전유의 선단은 웅장함과 위압감을 안겨줬다.
유람선보다 적어도 세 배는 큰 듯한, 3층까지 있는 배는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저기에 왕전유가 있다.
‘이 기회에 왕전유를 죽여 버릴까?’
머릿속에 슬며시 떠오르는 고민.
하지만 천무백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격살할 수 있다. 다만 빠져나가는 게 문제다. 이곳은 강 위였고, 강에서 수적들은 단순한 내공만으로 판단하기 어려운 실력을 지녔다.
물론 지금 중단전이 강화된 천무백은 자신감이 충분했으나, 문제는 능허와 그 애들이니까. 더구나 천무백은 머릿속에 생각해 놓은 바가 있었다.
‘흑도는 그야말로 회색이다. 마도, 백도도 아닌. 충분한 이익만 제시된다면 언제든 편을 갈아탈 수 있는 놈들.’
천무백은 아직 지켜보기로 했다.
흑도 연합체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는 다 추론에 불과하니까.
직접 부딪쳐 본다. 가장 빠른 길이다.
‘그렇다면, 손 좀 써야지.’
중원의 내로라하는 흑도가 한곳에 모이는데, 능허의 흑심방이 고개를 치켜들 수나 있겠는가.
불가능이다.
‘불가능하면, 가능하게 만들어야지.’
천무백은 속으로 내심 음흉한 웃음을 짓곤, 그대로 사자후를 터뜨렸다.
“육지에 올라서면 아무것도 못 하는 버러지들아, 강 위에서 자기들끼리 왕이네, 뭐네 하는 것도 우습지 않으냐.”
천무백의 외침에 수적들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갑판 위에 모든 수적이 우르르 몰려나와 하나같이 흉흉한 무기를 꺼내놓고 천무백을 노려보고 있었다. 살이 저릴 듯한 살기가 쏟아지는데도, 천무백은 태연했다.
“병신들. 바다는 무서우니 강에서나 자맥질하는 민물고기 같은 새끼들.”
천무백의 이어지는 폭언에 결국 참지 못하고 왕전유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웬 애송이 하나가 모기처럼 앵앵대는구나!”
과연 하왕(河王)이란 별호가 붙은 이유가 있듯이, 그 공력이 상당했다.
하왕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제야 수적들은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욕설을 왁자하게 쏟아부었다.
수적들 사이로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신장은 평균보다 한 뼘은 작았는데, 굵은 팔과 다리, 그리고 비대하다 싶을 정도로 가득한 상체 근육 때문인지, 결코 작다고 느껴지지 않는 인상이었다.
어찌 보면 무식한 무부(武夫)로만 보일 법한 인상이지만, 절대 아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걷는 자세나, 양팔의 흔들림, 얼굴에 드러난 표정의 변화.
그 모든 걸 봤을 때, 천무백은 짐작했다.
‘적어도 싸움에 있어선 교활하고 수 쓰는 걸 망설이지 않는 놈이다.’
단숨에 왕전유를 파악한 천무백은, 곧장 자신이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깨달았다.
왕전유는 천무백을 보며 새하얀 이를 드러냈다.
“흐흐. 강호에 천룡검협이란 허명이 자자하더니, 이런 애송이였다니. 백도 무림 놈들이 영웅 만들기에 환장을 했구나?”
“허허, 강호에 하왕이란 병신 같은 이름이 단 조금도 들리지 않더니, 이런 짤막한 멧돼지 같은 놈이었다니. 수적 놈들이 왜 제 우두머리를 부끄러워하는지 알겠구나?”
그야말로 제가 한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도발.
왕전유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짤막한 멧돼지라니. 가장 싫어하는 소리가 아니던가.
“이 애송이 새끼가!”
왕전유는 반월 모양의 뭉툭한 대도를 대뜸 휘둘렀다.
도강(刀罡)이 벼락처럼 쏟아졌다.
푸아아아아앙!
물이 쩍 갈라지며 날아오는 도강을, 천무백은 냅다 검을 휘둘러 막았다.
엄청난 충격이 동심원을 수면에도 전해졌다. 잔잔한 호수 위에 거센 파도가 일렁이며 배가 크게 흔들렸다.
그 여파로 천무백은 훌쩍 뛰어올라 배를 건넜다.
동시에 유람선에 있던 이들에게 소리쳤다.
“여긴 내가 막을 것이니, 전력으로 도망치시오!”
천무백이 훌쩍 건넌 건, 바로 가장 가까이 있는 배.
능허의 배였다.
천무백은 능허의 배에 착지하는 순간 빠르게 시선을 교차했다.
능허 역시 눈치라면, 이인자라면 서러운 이가 아니던가.
‘적당히 싸우다가 물러서!’
그 의미를 받아들인 능허는 곧장 칼을 꺼냈다.
적당히 연기해서 왕전유의 눈을 속이는 것.
능허는 딱 그리 여기고 칼을 쭉 뻗었다.
한데…….
‘적당히…… 싸우는 거 아니었나?’
천무백의 검에서, 새하얀 강기가 길쭉하게 솟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