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2화>
162. 네가 왜 거기에 있어?
“거, 갑자기 살기가 좋아졌네?”
호북성의 민심은 저 한마디에 모두 담겼다.
제갈세가와 무당파가 있다지만, 흑도가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무림인들이 보기엔 어처구니없는 조무래기여도, 일반 서민들에겐 그야말로 치가 떨리는 양아치요, 건달들이 아닌가.
하나 그 양아치들이 호북성 어디 한 곳에서만 사라진 게 아니라 호북성 전체에서 거의 증발하다시피 자취를 감췄다.
천무백은 그들을 철저하게 박멸했다.
“제 기준에 따라서, 적당히 쓸 만하다 싶은 놈들로만 골랐고 나머지는 관아로 싹 다 넘겼습니다.”
능허는 천무백의 명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적당히 싹수 있어 보이는 놈들을 고르는 건 능허의 몫이었다.
실제로 능허가 고른 인원은 천무백이 보기에도 알맞았다. 무공이 부족해도 성정이 괜찮거나, 실력이 좋아도 지독하게 잔인한 성격은 없었다.
하나 그러면서도 필요할 땐 피를 보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 독심을 가진 놈들도 꽤 있었다.
만약 제대로 된 기회가 왔다면, 충분히 무서운 흑도로 성장할 만한 놈들이었다.
그 외에 마음에 차지 않는 놈들, 교화할 건덕지가 없는 쓰레기들, 천성이 타고난 양아치인 놈들은 관아에 곧장 넘겼다.
관아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건들기에 무서운 흑도가 뒷배로 있는 것도 아닌, 그저 양아치 건달들이니까.
실적도 올리고 좋은 일 아닌가. 하물며 놈들이 작은 도박장 같은 걸 운영하며 모은 자금도 관아에 넘겨 버렸다. 적당한 뇌물이니 천무백의 뜻대로 놈들을 닥치는 대로 집어넣었다.
덕택에 호북성에선 정말 흑도가 씨가 말랐다는 표현이 통했다.
“고생했다.”
“…….”
능허는 격려 한마디에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하나 이내 그는 격렬한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자신이 고작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릴 정도로, 그만큼 피로가 심했나?
아니다. 그건 아니었다.
‘그래. 이 양반. 그때 이후로, 묘하게 얼굴에 빛이 돌고 말 한마디에 이상한 기운이 느껴진단 말이야.’
그건 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언가 분위기, 또는 기세였다.
의도치 않게 사람 자체에서 풍겨 나오는 기질이 있지 않은가.
‘객잔 지붕 부서뜨린 그 날 이후로 말이지.’
사람의 기질이란 게 쉽게 변하지는 않는 법이다.
능허는 일전부터 천무백을 ‘요물’이라고 생각했다.
솔직히 생각해 보자.
‘내 팔을 자른 양반이란 말이지.’
무인에겐 원수가 아니고 뭐겠는가.
한데 능허는 처음부터 천무백이 싫지 않았다.
천무백이 가진 묘한 기질.
처음 보는 사람도 이유를 알 수 없는 호감을 느끼는 그 특유의 기질은, 여우가 둔갑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요물다웠다.
한데 지금은 보다 더 진해진 느낌이다.
‘사내로 태어나서 다행이지. 여자로 태어났으면 천지를 홀렸겠어.’
능허는 휘휘 고개를 저었다.
능허의 생각대로, 천무백의 기질은 한층 더 강화됐다.
‘띠가 더 많아졌다.’
띠가 더 굵어진 게 아니라, 나뉘었다.
머리카락 하나는 툭 끊어지지만, 머리카락 수십, 수백 개가 겹쳐있으면 천하장사도 끊기 어려운 법이다.
같은 이치였다.
마치 국숫발처럼 수백 가락으로 나뉜 띠. 오히려 더 튼튼해졌고, 천무백은 지금 상태의 또 다른 장점을 찾았다.
‘선기의 띠는 상단전과 하단전의 기운이 오갈 수 있는 일종의 통로이자 연결이다.’
기존의 몇 개 없는 띠로는, 한꺼번에 많은 기운이 오갈 수는 있어도, 다양한 기운이 오가지는 못했다.
즉 기운이 오갈 수 있는 통로가 수없이 많아졌으니, 그것들을 모두 활용할 수 있게 됐다.
힘을 세분화할 수 있으니, 내공을 발출할 때 세심한 조절이 가능하다. 정확한 지점에, 정확한 힘만 발출하는 것까지.
천무백은 능허가 이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동안, 이것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띠를 이용해 두 기운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조금 익숙해졌다.’
물론 그게 쉬울 리가 없다. 엄청난 집중력과 타고난 감각이 있어야 했다. 수백 개의 띠가 저마다 기운을 담고 있는데, 그것을 각각 운용하는 것이 어디 가당키나 한 말이던가.
하나 천무백은 가능했다.
수많은 전생을 거쳐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집중력과 지식, 그리고 응용력까지.
거기에 상단전의 개방 이후 얻게 된 오감을 넘어선 일종의 초감각까지.
천무백은 여유롭게 웃었다. 무언가 새로운 길이 보이니, 자연 마음이 편해졌다. 마음이 편해지니 주위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빨리빨리 움직여라! 복건까지 가야 하니 필요한 건 다 챙겨!”
천무백은 능허가 밑에 들어온 흑도들을 다그치는 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
역시.
흑도는 흑도가 다뤄야 한다니까. 한데 흑도들 사이에서 유난히 눈에 밟히는 한 신형을 보고, 천무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어쩐지 익숙한 걸음걸이와 체격.
‘어처구니가 없군.’
흑도들 사이에 섞인 건 곡지흠이었으니까.
‘저 양반이 왜 저깄어?’
슬쩍 보니 꼴이 우습다. 흑도처럼 분장한 모습 아닌가.
사실 놀라울 정도로 우수한 변장이다. 천무백의 눈썰미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정도로, 전형적인 흑도로 분한 곡지흠.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따라오지 말라니까, 기어이…….’
곡지흠은 자신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목적은 중간중간 암진혜검의 구결을 얻기 위해서였다. 하나 천무백은 단호하게 거부했다.
‘내 행적이 노출된단 말이지.’
다른 이도 아닌, 그것도 하오문주에게 직접 말이다.
곡지흠은 문주다. 그에게 암진혜검이 중요하다고 한들, 만일 문파와 천무백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문파의 이익을 위해 움직일 사람이다.
‘뭐, 내가 저 양반 다리를 부러뜨리지 않는 한, 쫓아오겠다고 마음먹으면 쉬이 떼기도 힘든 일이기도 한데.’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떼어놓을 수 없다면, 아예 알차게 써먹어야지.
천무백은 곡지흠에게 다가갔다. 흑도로 변장한 곡지흠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
“네가 막내니?”
“……네.”
천무백이 씩 웃자, 곡지흠의 몸이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막내가 가만히 있어서 쓰나.”
“아, 죄송합니다. 곧장 움직이겠습니다.”
“그래, 그래. 능허야.”
“바빠 죽겠는데 왜요?”
“이 친구가 막내니까, 네가 잘 챙겨줘라.”
능허는 곡지흠을 번갈아 보다, 이내 무언가 알아차린 듯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습죠! 막내는 제가 챙겨야죠.”
순간, 곡지흠은 몸에 스며드는 으슬으슬한 한기에 움찔했다.
‘아니지. 들켰을 리가 없어.’
곡지흠은 저를 쳐다보는 웃음기 어린 천무백의 표정을 흘깃거리며, 애써 부정했다. 안타깝게도.
* * *
강서성에 접어들어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아니, 주군. 주군은 돈 안 갖고 왔습니까?”
“네가 있잖냐.”
“제가 주군 지갑입니까?”
“그런 것 같다.”
“무슨 흑도가 배를 돈 주고 정중하게 사들입니까?”
“그럼 뺏지 그랬냐?”
“…….”
능허는 혀를 내둘렀다. 저번 객잔에서 비싼 음식 시키면서 돈 있다고 말한 게 실수였다. 지붕도 자기가 배상해줘, 배도 자기가 돈 내고 구해…….
‘아주 벗겨 먹는구나, 벗겨 먹어.’
능허는 화딱지가 솟았지만 차마 천무백에게 풀 수는 없었다. 하여 그는 배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수하들에게 다가가, 여지없이 뒤통수를 후렸다.
빠악!
“억!”
“새끼가. 빠져서. 막내면 막내답게 빨리빨리 안 움직여?”
막내, 그러니까 곡지흠은 순간 능허를 노려봤다.
“어쭈? 눈을 부라려?”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형님.”
흘깃 여길 보고 있는 천무백의 시선에 곡지흠은 눈물을 삼키고 빠르게 움직였다. 능허는 그 옆에서 쫑알쫑알 시끄럽게 구박을 계속했다.
그 모습에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하여간 저 자식, 뻔히 알면서 일부러 저러네.’
간댕이 하나는 참 두껍다니까.
배는 도창에서 출발해 포양호를 건너, 흘러나가는 강의 지류를 따라 복건으로 향하는 행로를 잡았다.
포양호는 넓은 호수였는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해 유람선이 많이 띄워지는 곳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곳에, 유람선이 아닌 거대한 배 수십 척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나타난 선단에 잔뜩 긴장한 능허가 뛰어왔다. 저만한 선단을 이끄는 건 상단 아니면 수적이다.
“수적들입니다.”
그리고 보통 수적이 아니리라.
천무백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선단을 바라봤다. 그리고 배 위에 펄럭이는 깃발을 본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장강수로총채주 하왕 왕전유라.”
수적들의 왕. 하왕 왕전유다.
능허의 낯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때마침 선단에서도 여길 발견했는지, 작고 날렵한 배가 다가왔다.
천무백은 순식간에 기세를 지우며 말했다.
“잘 상대해라. 싸우진 않는다. 이대로 흑회에 참여해야 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능허는 긴장한 눈빛이었지만, 정작 일은 제법 수월하게 풀렸다.
다가온 날렵한 배에 자신들도 흑회에 참여하는 흑심방의 흑도들이라고 당당하게 밝혔다.
그러자 상대는 몇 번 선단 사이를 오가면서 얘기를 전했고, 하왕 왕전유는 그럼 복건까지 같이 가자고 선단에 합류하라 제의했다. 말이 제의지, 사실상 명령이다.
“어떡할까요?”
능허가 묻자,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아. 이왕 이 기회에 하왕 놈하고 네가 면식 좀 트고 친해져라.”
“……이야, 능허 출세했네. 하왕하고 친구도 먹어야 한다니.”
그렇게 능허의 배는 조심스럽게 하왕의 선단에 합류했다.
하왕이 직접 능허에게 자신의 배에 올라오라고 초청을 할 때.
문제가 발생했다.
저 멀리 건너편에서 꽤 큰 규모의 유람선 하나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유람선은 이쪽의 선단을 발견한 듯, 급하게 선회했지만, 수적들은 오랜만에 발견한 먹잇감에 눈을 빛냈다. 그 흉흉한 기운이 선단에 합류한 천무백에게도 전해졌다.
“이런, 좋은 일이군. 하왕께서 선단에 합류한 손님들에 대한 배려로, 저 맛있는 음식을 그 쪽에게 넘겼소.”
하왕의 명을 전달해 오는 수적의 얼굴에는 부러움이 잔뜩 어려 있었다.
이들에게 있어 배를 납치하는 건 중요한 의미다. 그곳에 있는 모든 재화 중 일부를 하왕에게 바치면, 나머지는 개인이 챙길 수 있으니까.
하왕이 흑심방에게 선의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다.
하나 천무백은 그게 아님을 알았다.
‘일종의 시험인가…….’
하긴 강 위에서 만난 놈들이 다짜고짜 흑도라는데, 그걸 곧이곧대로 믿겠는가.
천무백은 능허를 바라봤다. 능허 역시 짐작했는지 낯빛이 어두웠다. 여기서 거부하면 하왕이 해 준 호의를 거절하는 꼴이니까.
능허는 애써 독하게 마음먹었다.
자신의 원래 정체성은 흑도다.
‘이놈아. 네가 천무백이랑 다니면서 진짜 정파의 협객이 된 줄 알았더냐!’
그리 마음먹으며 능허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심정을 눈치챘을까.
지금껏 조용히 있던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 방법이 있다.”
“방법이요?”
“우선 하왕놈이 시킨 대로, 저 배를 공격할 준비나 해.”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방법이 있단다.
참으로 애증의 대상이지만, 그래도 능허는 이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사내라곤 천무백밖에 없다고 여겼다.
천무백이 저리도 자신만만하게 말하니, 우선 뜻대로 움직이기로 했다.
배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저들의 배는 유람선이라 그런지 무겁고 느렸다. 도망치려고 열심히 노를 젓지만, 거리가 좁혀지는 건 순식간.
그럴수록 배 위에 있는 군중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평범한 연인, 늙은 부모를 모시고 유람을 나온 효자 녀석들, 가족과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
차라리 과거에 그토록 싫어하던 정파놈들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가.
‘능허야, 넌 이젠 흑도가 아니구나.’
옛날이었으면 망설임 따위는 없겠지만, 지금은 그 감정이 너무 뚜렷했다.
능허는 애써 독하게 마음먹었다.
여기서 멋대로 굴다간, 흑회에 참여하기 전에 하왕과 싸우게 되리라. 그러면 여기까지 온 보람도, 흑도 놈들을 모아온 이유도 없지 않은가.
더구나 곁엔 천무백이 있지 않은가. 천무백이라면 무언가 방법이 있을 거다. 저들을 죽이지 않고 적당히 혼내주면서 돌려보낼 방법……
늘 곁에 있던 천무백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능허의 몸이 순간 얼어붙었다.
“어? 어디 갔어?”
없다. 천무백이 없다. 옆에 있던 천무백이 어느새 눈 깜짝할 새에 모습을 감췄다.
한데 그때였다.
건너편의 배에서 부산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심해지더니, 이내 환호에 찬 함성과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강 위다.
강에서 수적들에게 습격당하는데 왜 환호에 찬 표정이야?
저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그러나 능허는 이내 자신이 미친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선수 위에 불쑥 올라선 신형.
여리여리하지만 천년 고목처럼 흔들리지 않는 사내의 신형.
어쩐지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그 유려한 선이 눈에 익숙하다.
능허의 손이 벌벌 떨렸다.
“뭐야? 왜……?”
능허의 눈이 사정없이 진동했다.
저 선수에서.
새하얀 검신을 뽑으며, 눈부신 섬광을 쏟아내는 무인.
사자후가 쩌렁쩌렁 울렸다.
“이 간악한 수적놈들! 네놈들은 단 하나도 살아남지 못하리라!”
“…….”
능허의 얼굴에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다. 파랗게 질린 낯빛에 떠오르는 건 당혹, 두려움, 배신감 등등…….
“나, 천룡검협, 천무백이 네놈들을 모조리 수장시켜 주마!”
왜 네가 거기에 있어?
개자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