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1화>
161. 호북의 협객
“형님, 그냥 도망치는 게 어떻습니까?”
수봉은 어림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가려면 가라. 난 여기서 뼈를 묻을 거다.”
냉정한 말에 수하는 입을 삐죽였지만, 몸을 내빼진 않았다.
수봉은 지금이 기회라는 걸 알았다.
능허라는 그 무시무시한 양반은, 생각보다 자상했다.
물론 능허가 들으면 소름 돋는 표정으로 욕지거리를 내뱉겠지만.
‘이 비루먹은 망아지 새끼들아! 네놈들이 응? 주먹질 좀 할 줄 알아야 내가 편하다고오!’
그리 소리치더니, 당장이라도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무공수련에 들어갔다.
얼마나 긴장했던가.
가만히만 있어도 흉신악살처럼 보이는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는데. 표정에선 숱한 사선을 넘어온 역전의 용사에게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기운이 어렸다.
하나 막상 수련에 들어가니, 입은 걸쭉해도 하는 행동은 꼭 그렇지도 않았다.
천천히 하나씩 알려 주는 건 당연한 일이고, 이해를 못 하면 몇 번이고 더 얘기해 주는 자상함까지. 물론 어조야 퉁명스럽지만, 행동은 세심했다.
수봉은 크게 감복했다.
‘나같은 멍청이도, 익히고 당장 써먹을 수 있는 무공이라니!’
무공은 능허가 흑도판을 구르면서 습득한, 익히기 쉬우면서도 지극히 실전적인 무공.
무공이라고 보기엔 뭐한 기술에 가까운 것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수봉은 눈이 밝아지는 기분이었다.
“이것들만 제대로 배워도, 한량 짓은 그만둬도 된다.”
“그래 봤자 흑도 아닙니까, 형님.”
“이놈아. 너는 저분들이 평범한 흑도처럼 보이느냐?”
수봉의 말에 수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능허도 능허지만, 능허가 따르는 잘생긴 청년은 묘했다.
간혹 능허는 무언가를 알려 줄 때, 답답함을 감추지 못하곤 했다.
수봉을 비롯한 호북에서 하나둘, 잡혀 오는 한량들은 기가 죽었다. 간단한 것이면 몰라도, 조금 무학의 묘리를 담은 건 쉽게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자신들이 멍청하고 재능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한다고 여겼다.
하나 그때 천무백이 다가왔다.
‘능허야, 한 명이 이해를 못 하면, 그 한 명이 멍청한 거지만. 전부가 모르면, 가르치는 네가 조온나게 멍청한거란다.’
차분한 어조로 능허의 입을 다물게 하곤, 수봉들에게 다가와 동작 하나, 하나를 교정시켜줬다.
그때마다 수봉은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정말 별거 없었다. 주먹을 내지르면, 그저 팔의 각도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맞춰 주는 것뿐이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마치 그 주먹의 내지름이 뼛속에 각인 되는 것처럼 정확하고, 균일하게 힘이 뻗어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무공의 무(武)자도 모르던 수봉에게 있어선,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나 다름없었다.
‘어마어마한 사람이다. 이게 바로 진짜 무공 고수구나!’
그리 생각이 드니, 몸이 절로 떨렸다.
강호와는 일절 인연도 없는 수봉이지만, 강호의 이야기는 듣고 자랐다.
그런 고수를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만나서 가르침을 받는다는 건 더 어불성설인 법이다.
한데 능허만 해도 대단한 고수인데, 그보다 더해 보이는 천무백이 무심한 척하면서도, 확실하게 가르쳐주다니!
수봉은 확신했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연이라고.
한낱 한량으로 사는 자신에게 온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그 뭐시냐, 노인네가 젊어지는 거.”
“반로환동?”
“그거 한 고수가 아닐까요?”
“흐음.”
반로환동은 전설에 불과하다.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하나 수봉은 그 전설이 사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천무백을 흠모했다.
능허가 가르치는 장면을 멀찍이 구경하는 모습부터, 간혹 모습을 드러내 자세를 교정해 줄 때마다, 깨달음의 벽이 우수수 부서지는 기분이니까.
하는 행동, 표정, 가끔 튀어나오는 어조까지.
어째 귀공자가 아닌 오래 산 노인 같은 느낌이 왕왕 들 때가 있었다.
더구나 놀라운 건 그저 한량이나 다름없는 자신들을 별로 차별 없이 대한다는 점이다.
분명 심복처럼 보이는 능허나, 자신들이다 천무백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처음이었다.
동네 사람들도 저를 그저 한량처럼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천무백은 달랐다. 특별히 기대하는 눈빛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류인생을 내려다보는 듯한 시선도 아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
그 같은 태도에 수봉뿐 아니라 강제로 잡혀 온 한량들은 은근히 감명받은 상태였다.
“아서라. 주군에 대해서 함부로 추론하지 말자.”
“주군이요?”
“……그럼 뭐라 부를래?”
“음. 주군이라. 주군이 좋죠.”
수봉은 능허가 천무백을 부를 때마다 주군이라 부르는 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따라 붙였지만, 은근히 만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야, 너희들 동생들 데리고 왔다.”
그때였다. 능허가 포승줄로 묶은 열 명 안팎의 사람들을 데리고 왔다.
험상궂은 얼굴과 곳곳에 자상이 남은 흔적. 꽤 반항을 심하게 했는지, 두들겨 맞은 자국이 처량할 정도다.
수봉은 내심 긴장했다. 자신처럼 한량이 아닌, 진짜 칼질 좀 한 흑도다.
“이 새끼가? 네놈들 형님인데, 눈 안 깔아?”
빠악.
하나 능허가 뒤통수를 후리니, 이내 그들은 힘 빠진 눈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평소라면 눈도 못 마주칠 험상궂은 인상이건만, 그들이 저보다 동생이고 수하란 사실에 수봉은 묘한 감흥이 들었다.
“야. 수봉.”
“예, 형님.”
“교육 좀 해 놔라. 나는 몇 놈 더 잡아 와야 하니까.”
능허가 그리 말하고, 수봉이 내심 득의한 미소를 지을 때.
파사사삿!
별안간 천무백이 머무르는 건물에서 섬광이 솟구쳤다.
“……!”
흡사 하늘로 가는 길이 열리는 듯이, 새하얀 섬광으로 이뤄진 기둥.
마치 누군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 아니면 누군가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듯한 눈부신 섬광.
“뭐…… 뭐야?”
수봉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뿐이랴. 모두가 낯빛이 새하얗게 질렸다.
차라리 칼이 난무하면 모를까.
빛으로 만들어진 기둥이 하늘로 솟구치다니.
저게 대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비이성적이며 초자연적인 현상에 모두가 입을 쩍 벌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둥은 하늘을 뚫을 것처럼 기세좋게 솟구치다가, 이내 눈 깜짝할 새에 없어졌다. 그리고 천무백이 개운한 표정으로 천천히 건물 밖으로 나왔다.
지독한 정적.
하나 수봉은 천무백의 모습을 보고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흡사 신선을 마주하면 이러할까. 무언가 이해 못 할 불가사의한 빛이 천무백에게서 흘러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물론 천무백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신선과는 거리가 멀었다.
“능허야. 지붕 날아간 건 네가 배상해라.”
“……내가요?”
“연화루주니까 돈 많잖냐.”
“아니…….”
능허는 늘 그렇듯이 가슴이 답답해졌다.
* * *
중경성, 정의맹(正義盟).
투신이라 불리며 정마대전에서 숱한 마인들의 시신위에 올랐던 곽용은 감흥 어린 눈빛으로 깃발을 바라보았다.
정의(定義).
딱 두 글자가 적힌 깃발이 건물 위에서 거칠게 펄럭였다.
하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어르신, 저 임가의 임계손이라고 합니다!”
“임가? 혹시 임진도의 자손인가?”
“제 조부 되십니다.”
“으하하하! 어서 오거라! 네 조부와는 술과 검으로 대작하던 사이였도다!”
오래전 같이 싸운 전우의 후인들부터.
“이 노인네, 아직도 정정하구만?”
“오 가 놈 왔는가! 네놈은 그때도 무공이 형편없더니, 지금은 그냥 묫자리나 알아봐야 할 노인네가 다 됐구나!”
“웃기는 소리 말게. 이래 봐도 마인 한 놈쯤은 찜쪄먹을 수 있다니까.”
함께 싸웠던 동료까지.
곽용은 저 밑에서부터 무언가 뜨거운 게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나도 늙긴 했나 보군,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했어.’
이리 다시 모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록 그것이 마교의 재준동이라는 일생일대의 사건 때문이지만.
비단 그것만이 이유겠는가.
‘아니다. 마교가 준동한다고 해도, 저 깃발 하나 아래 이렇게 모여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40년 전 그때처럼 정파의 절반이 무너진 이후에나. 소림이 봉문한 이후에나. 무당이 죽기 직전에나.
위기감을 느끼고 뭉쳤으리라.
그때는 창천검신이란 깃발 아래 모였다.
하나 지금은, 이 정의맹이란 깃발 아래 모이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천무백…….”
그토록 흠모하던 위대한 무인. 창천검신의 직계후인이자, 잠재력을 알 수 없는 재능의 소유자.
천무백이 있기에 정의맹은 설립될 수 있었고, 이름을 떨칠 수 있었다.
“곧 사람들이 더 모여들 것입니다.”
“아, 추 단주, 미안한 일이지만 조금만 더 고생해 주게. 자네와 같은 무인에게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맹주님.”
추혼삭은 그리 말하며 물러갔다. 워낙 많은 사람이 모이고 있어, 혼잡한 상태다.
그나마 정의맹에 추혼삭이 이끄는 적건회, 지금은 적건단이 된 무사들이 아니었다면 더 바빴으리라.
곽용은 물러서서 사람들을 이끄는 추혼삭을 흐뭇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근래에 보기 드문 무도가로다.’
무도에 대한 집념과 진중한 성정, 거기에 마음속에 간직한 협의심까지.
일찍이 만났다면 제자로 삼았을 정도로 훌륭한 무인이다.
‘추단주도, 천무백, 고놈이 이쪽으로 오게 했다지.’
도대체 그놈은 무슨 짓을 하고 있길래.
저런 대단한 무인을 정의맹에 투신하게 한단 말인가.
정의맹의 맹주는 자신이지만, 곽용은 분명하게 알았다.
‘천무백이 실질적인 정의맹의 중심이다.’
하나 그것이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깟 맹주자리? 권력? 그딴 건 필요도 없다. 곽용은 가슴속에서 싹터오는 불같은 호승심을 그대로 느꼈다.
혈귀곡이란 이름으로 다시 준동하는 거악(巨嶽).
죽기 직전까지 싸울 수 있는 상대가 나타났으니, 오히려 천무백에게 고맙다. 이렇게 싸울 자리를 마련해 줬으니까. 정의맹이 만들어졌으니, 이제 마인들과 죽을 때까지 싸울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네놈이 나를 부려먹으려는 속셈인 건 맹랑하지만, 내 능히 따라 주마!’
곽용은 그리 웃었다.
담벼락 너머, 정의맹에 속속 들어오는 깃발들을 보면서.
소림, 무당, 화산, 종남, 개방, 제갈세가…….
혈귀곡이 암중에서 준동하고, 복건에서 흑도들이 모이고, 그리고 중경엔 정파의 절반이 모이고 있으니…….
무림이 격동했다.
* * *
정의맹의 첫 회합.
모인 사람의 면면을 보자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 가득했다.
우선 맹주, 투신 곽용.
소림의 나한각주, 무소선사.
무당파의 대장로이자 이제는 새로이 장문인이 된 진청진인의 사제인 유청.
화산에서는 수호검 청현진인과 화산일검 국보.
종남에서는 다시금 장로 자리를 차지한 종남풍검, 전현.
개방에서는 일전에 화산에서 천무백과 접촉했던 개방의 섬서분타주, 육걸개.
구파일방의 최소한 장로급 인사들이 모여든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장로급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하나같이 각 문파에서 유력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다. 나한각주야 방장과 사형제고, 무당도 마찬가지. 화산 수호검 청현진인이야 이미 강호에서 유명한 명사고, 국보 역시 후기지수 중 가장 앞에 있는 이름이 아니던가.
종남의 종남풍검 전현도 이대로만 간다면 먼 미래에 장문인이 될 게 틀림없는 사람.
하나 이들보다 더 놀라운 건, 바로 제갈세가였다.
“제갈세가의 가주께서 직접 오실 줄은 몰랐소이다.”
“곽용 선배님께서, 강호동도들을 위해 정의를 세운다는데, 어찌 제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여강이 직접 왔다.
그러자 개방의 육걸개가 묘한 눈빛으로 제갈여강을 쳐다봤다.
“직접 오셔도 괜찮겠습니까? 호북의 일이 심상치 않을 텐데.”
제갈여강의 눈빛이 묘해졌다.
“심상치 않다니요?”
다른 이가 말했다면 무시했겠지만, 상대가 누군가. 개방이 아닌가.
육걸개는 고개를 갸웃했다.
“최근 호북에서 흑도들이 뭉치고 있단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흑도들이요?”
“예.”
“그럴 리가…….”
제갈여강이 중경성에 오는 사이 퍼진 소문이었기에 접하지 못했다.
흑도가 뭉친다. 제갈세가 입장에서야 뭐가 무섭겠나. 하나, 뭉친다는 것 자체가 좋은 징조는 아니다.
하나 다행히도 육걸개는 빙긋 웃었다.
“하긴, 제갈세가 입장에서는 그리 큰일이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시오?”
“세간에는 흑도들이 스스로 뭉치는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저희 개방에서는 그 일을 천룡검협이 주도하고 있음을 파악했습니다.”
“천룡검협?”
천무백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회합에 참여한 이들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한 객잔 여아의 소원이라고 하더군요. 흑도들 벌해주라는.”
“아……!”
“한데 더 놀라운 건, 그저 흑도를 벌하는 것뿐 아니라 직접 그들을 모아서 일종의 교화를 시키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육걸개의 설명에 좌중은 탄식을 터뜨렸다.
“과연…….”
“어찌 사람이 그럴 수 있는가. 무당에서 나가자마자 또 한번 협객행이라니…….”
“평범한 여아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궂은 일을 하다니.”
“단순히 흑도를 치우는 것이 아니라, 교화라! 과연 천공자만이 할 수 있는 생각이고, 행동이외다.”
하나같이 모두 감탄을 터뜨리자 제갈여강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가 본 천무백은 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의 협객이 전혀 아니다.
속에는 의뭉스러운 노인네가 들어서 있었고, 지금까지의 모든 행적을 보면 지극히 계산적이면서도 본인에게 이로운 방향이었다.
하니 협객이니 뭐니 해도, 그것이 충분한 이득이 되니 행한다는 뜻.
물론 그것만 해도, 근래 보기 드문 제대로 된 사람이긴 했지만…….
‘아니, 내 딸아이를 같이 못 가게 했다고, 딸아이한테 방에 들어오지 말란 얘기까지 듣게 만든 놈인데.’
하나같이 천무백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면서, 제갈여강은 뭔가 불퉁해졌다.
어쩐지 자신만이 이상한 놈이 된 기분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