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60화>
160. 봉황처럼
수봉(隨鳳)은 본인을 제대로 된 흑도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무공은 저자에서 굴러다니는 잡다한 것을 익혔을 뿐이요, 단전에 쌓은 내공은 좁쌀만 하니 삼류요. 무학에 깊은 뜻과 배움은 부족하니, 흑도라고도 부르기엔 뭐 한…….
“양아치죠.”
제 동생이자 수하 놈이 그리 툭 던졌지만 차마 부정하지 못했다.
강호에 칼 차고 들어섰으면 사람 하나쯤은 죽여 봤을 법한데.
수봉은 단 한 번도 그래 본 적이 없다.
“덕택에 우리가 먹고사는 거 아닙니까.”
“흠. 뭐, 그렇지.”
수봉은 제 분수를 알았다.
배운 것도 없어 먹고 살길도 막막하나, 타고난 성정은 자유로웠다.
이 험한 중원에서 자유로운 성정으로 살려면, 강력한 무공이나, 엄청난 재화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수봉은 그게 안 되니 흑도가 됐다.
아니, 흑도인 척하는 양아치가 됐다.
하지만 성정이 자유로운 것하고 잔인한 것과는 달랐다.
“혀엉님! 아이고오, 형님!”
수하 중 하나가 울면서 들이닥치자 수봉의 눈썹이 찌푸려졌다.
수하의 꼴이 영 말이 아니다.
“너 어디서 맞았냐?”
눈에 시퍼런 멍이 들고, 다리 하나 절뚝이는 모습이 영락없이 누구에게 맞은 꼴이 아닌가.
“쓰읍. 작두 놈들이냐?”
“아이고, 아닙니다요. 그 양 씨네 객잔 있지 않습니까.”
“양 씨네 객잔? 그 꼬마애하고 애비만 운영하는 곳?”
“예. 예. 거기서 거 객잔 주인에게 처맞았습니다.”
“…….”
수봉은 침묵했다. 아무리 양아치라지만, 그래도 객잔 주인에게 처맞아 이 꼴이라니…….
“아이고, 이놈아. 내가 거긴 가지 말라 했잖냐. 양 씨가 소싯적에 군문에서 놀았다는 거 몰라?”
“어쩐지, 국자 휘두르는데 매섭더라고요.”
수하들의 대화를 들으며 수봉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길 왜 갔냐. 거기 양씨네 딸내미가 우리 관아에 신고해서 욕봤었잖냐. 거긴 건들지 말라니까…….”
“그것이, 작두 놈들이 근방에서 얼쩡거리길래…….”
작두파.
이놈들도 흑도인 척하는 양아치지만, 그래도 제법 세가 매서웠다.
“젠장. 이거 한 따까리 해?”
“자신 있으십니까? 형님?”
“흠흠.”
수봉은 헛기침하며 시선을 피했다. 수하들의 얼굴에서 그럼 그렇지, 하는 체념이 떠오른다.
수봉은 내심 입안이 씁쓸했다. 못난 놈을 형님이라 부르며 잘 따르는 미안한 놈들이다.
‘봉황을 쫓으며 살라고 이름을 지어 주셨건만, 어째 내 인생도 참으로 갑갑하다.’
어머니가 꾼 태몽에서 하늘을 자유로이 나는 봉황을 쫓아가는 모습이 그리도 행복해 보여서 지어 준 이름이건만.
봉황을 따르는 삶은커녕, 뒷골목에서도 암울한 인생이 아닌가.
“혀어어어엉님!”
그때였다.
이번에도 수하 한 놈이 문을 박차며 들어왔다. 그 황급한 모습에 조금 전의 기시감을 느꼈지만, 이번엔 달랐다.
코끝을 훅 찌르는 혈향.
핏물을 뒤집어쓴 수하.
지금껏 호북성에서 기생충처럼 목숨을 연명해온 수봉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무슨 일이야!”
“웬 무림인이 들이닥쳤습니다!”
“무림인!”
무림인이란 말에 수봉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대체 왜?”
수봉이 한량짓, 양아치짓을 하면서도 큰 경을 치지 않았던 건, 무림과 관련된 쪽은 일절 건드리지 않아서다.
하나 의문은 잠깐이었다. 어찌 됐건 무림인이 자신들을 공격한 건 명약관화.
“야! 일단 튀어!”
수봉은 그리 외치고 냅다 뛰었다.
아니, 뛰려고 했다.
“이 자식들이, 어디서 내 앞에서 도망을 쳐?”
이내, 수봉은 문을 턱 막아서는 외팔이를 보며 흠칫 굳었다.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팔 하나도 없다.
검을 든 자태를 보면, 그야말로 진짜 흑도의 전형.
‘무림인이 아니라, 흑도가 세력장악 하려고 하는 건가?’
추론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외팔이 사내가 살기등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다 꿇어, 새끼들아.”
* * *
솔직한 말로, 능허는 이놈들을 흑도라고 여기지 않았다.
“흑도가 다 흑도지. 뭐가 대수냐.”
천무백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능허는 고개를 단호하게 저었다.
“작두파란 놈들은 그래도 손속이 더럽긴 했다만, 이놈들은 아예 아니지 않수.”
이곳에 흑도라고 불릴 만한 세력은 두 집단이었다. 작두파와 수봉파.
작두파는 규모가 작고 수준이 높지 않지만, 그래도 하는 짓은 흑도들이 할 법한 수작질이긴 했다. 적당한 폭력과 협박으로 돈을 챙기고, 아주 작은 도박장까지 운영하더라.
양 씨 객잔의 여자아이가 처치해 달라던 흑도인 작두파는 우두머리 몇을 손봐서 단숨에 제압했다.
그리고 여기, 소위 수봉이란 놈 밑에 있는 애들은 흑도는커녕…….
“그냥 한량들이죠.”
딱히 나쁜 짓을 많이 한 것도 아니다. 오죽하면 동네 사람들이 정신 차리고 일 좀 하라고 타박까지 하면서, 밥까지 챙겨주겠나.
능허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얘들 다 데리고 가실 겁니까?”
“데리고 가야지.”
“얘들 삼류무공도 못 익혔습니다.”
“흑도가 최고의 무공을 익혀봤자 삼류지. 너는 인마. 좌수검법 익힌 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그 수준이야?”
“능허좌검이외다.”
“어차피 중요한 건 숫자야. 대충 세력이 있어 보여야 하니까.”
“주군은 일당백 아니요. 싸우면 주군이 다 알아서 할 터인데.”
“그러다 뒈진다.”
“네?”
천무백의 말에 능허의 눈이 동그래졌다. 늘 자신만만했던 천무백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흑도 주제에 천하십대고수에 들어간다는 태룡방주부터 수로채의 하왕, 녹림의 거력왕. 특히 거력왕은 십대고수에 근접한다는 얘기가 있고, 하왕은 비록 그 수준은 아니나 물 위에서만큼은 비견된다는 얘기가 있지.”
“……으음.”
“거기에 흑도놈들 특성상, 어깨에 힘준다고 하나같이 제 밑에 애들 왕창 데리고 왔을 것이고.”
“그렇죠.”
“나야 거기서 싸우다 여차하면 튈 수 있는데, 넌?”
“…….”
능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불가능이다. 아무리 천하제일의 고수라도 중과부적이란 게 있는 법이다.
천하의 천무백도 마찬가지다.
포천산장에서 마인들을 상대한 것도, 그치들이 적은 병력으로 연달아 와서 가능했지. 만일 그 모든 수효가 한 번에 들이닥쳤다면, 천무백도 버티지 못하고 몸을 뺐으리라.
그때 능허에게 도주로를 확보하란 명령을 내려놓지 않았던가.
천무백은 제가 가진 실력은 믿지만, 그것보다 더 냉정한 판단력의 소유자였다.
“결국, 싸우는 건 최악까지 피해야 하는 수다.”
“그렇다면 최선의 수는요?”
“저들 사이에 제대로 파고들어 무슨 꿍꿍이인지 파악하는 거지.”
“그러니까, 그 흑회에서 제대로 자리 하나 차지하겠단 뜻 아닙니까?”
“맞다.”
“그렇다면, 음. 아무래도 세력이 필요하긴 하겠네요.”
능허는 흑도의 생리를 잘 알았다.
절정고수 한 명보다, 이류 백 명을 더 크게 치는 게 바로 흑도다.
천무백은 우선 몸집을 불릴 생각이다.
“하지만 태룡방주하고, 하왕, 거력왕 그사이에 끼어드는 건 세력이 많다고 될 일이 아닌데요.”
“몸집을 불리는 건 최소한의 준비지. 그 이후의 일은 가서 직접 부딪쳐 봐야 하지 않겠느냐.”
능허는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저들 사이에서 신뢰를 완벽하게 얻어야 했다. 그러려면 완전한 흑도처럼 보여야 했다.
“그게 뭐가 어려워?”
“네?”
“여기 흑도의 전형이 계시는데.”
“……!”
능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저보고…… 하란 말씀입니까?”
낯빛이 새하얗게 질린 능허는 말이 안 나오는 듯 입만 뻐끔거렸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외팔이나 외눈 같은 특징은 수를 써서 감추면 될 일이니 문제없다.
“흑심방주는 너다, 능허야. 난 널 호위하는 호위무사로 분할 거고.”
“허허허허…….”
허탈한 웃음을 짓는 능허의 어깨를 천무백은 툭툭 두들겨줬다.
“별거 없다. 그냥 내키는 대로 잘하면 돼.”
“마교에서 무림맹의 간자 짓 하던 암천검제처럼 말입니까?”
“그래. 잘 아네.”
“…….”
아니, 암천검제가 어디 예사 인물이었나. 비아냥대려고 던진 말에, 천무백이 흡족한 듯 반응을 보이자 능허는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허허로운 기분이었다.
“그래도 이왕이면 좀 쎈 놈들 잡아가지 말입니다.”
“호북에 제법 힘쓰는 흑도가 어딨다고.”
“혹시 모르는 알력싸움 같은 거 있지 않습니까. 흑도놈들끼리 모이면, 싸움질하는 건 예삿일입니다.”
“그러면 알아서 해.”
“네?”
“갈 때까지 쟤들 적당히 주먹질하게 만들라고.”
천무백은 손가락 하나 꼼짝하지 않았다.
“어째, 저한테만 시키실 겁니까?”
“네가 흑심방주잖냐. 네 동생 직접 챙겨야지.”
“니런 썅.”
“어쭈? 다시 입이 험해진다?”
“흑심방주답게, 응? 흑도인답게 하는 것입니다.‘
능허는 그리 말하곤 꿇어 앉아있는 수봉을 바라봤다.
“야, 너희들.”
“네, 넵!”
“이제부터 너희는 흑심방 소속 흑도다.”
“……네?”
“그리고 이제부터 복건성까지, 흑도행(黑道行)을 할 것이다.”
“흑도행? 그게 뭡니까?”
“너희 같은 흑도놈들 다 때려잡고, 흡수한다고.”
“……!”
능허는 천무백의 말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처지에서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수봉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능허를 바라봤다.
‘단순 흑도가 아니다.’
수봉이 그래도 제법 오랫동안 이 짓으로 먹고산 이유는 눈치가 빨라서다.
그가 본 능허는 그저 평범한 흑도가 아니다. 칼을 쓰는 솜씨가 흑도의 날 것 같으면서도, 무언가 깊이가 느껴졌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덤빌 엄두는커녕 곧장 굴복하지 않았나.
하물며 저런 괴물 같은 사람이 꼼짝도 못 하는, 상관으로 보이는 어린 청년은 묘했다.
어느 고관의 자제처럼 고귀해 보이기도 했으며, 세상을 초탈한 노인의 눈을 가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니 수봉은 저 둘이 범상치 않음을 진즉 깨달았다.
그런 이들은 그냥 말을 내뱉는 법이 없다.
흑도들을 흡수한다?
그 말은 곧…….
‘호북의 흑도들을 일통(一統)하겠단 뜻 아닌가?’
호북은 무당과 제갈세가의 영향력 때문에 흑도의 구심점이 없다.
아니, 흑도자체가 성립되기 힘들다.
기껏해야 작두파와 같은 양아치와 흑도 사이의 애매한 건달들만 있을 뿐이다.
한데 능허의 말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가.
흑도들을 전부 흡수한다는 건, 곧 호북을 아우르는 흑도를 탄생시키겠단 뜻.
하물며 복건성까지. 고작 성 하나에 만족하지 않겠단 거창한 포부.
다른 사람이 그리 말했다면 웬 미친놈처럼 느껴졌겠지만.
수봉은 능허의 무력을 목격했고, 그런 능허가 꼼짝도 못 하는 천무백을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봉황이다!’
매번 객잔 주인에게도 국자로 타박받는 삶에 답답함을 느끼던 수봉은, 이것이 어쩌면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될 계기라는 걸 절실히 느꼈다.
하여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뭐야, 이 새낀.”
능허만이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 * *
천무백은 능허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
능허 정도라면, 제대로 구심점이 없는 호북의 흑도쯤이야 우습게 제압하리라.
그사이 천무백은 할 일이 있었다.
“후우, 어디 보자.”
조용히 눈을 감고 제 몸을 관조했다.
활짝 열린 상단전을 통해 오가는 항마의 기운.
뱀처럼 길게 똬리를 튼 하단전의 극음지기.
그리고 그 두 단전을 잇는 심장을 둘러싼 선기의 띠.
이전의 전투 이후 끊어질 듯 아슬아슬했던 그 띠가, 지금은 더 두꺼워진 채 반지르르하게 빛났다.
신령부가 흡수된 이후 바뀐 변화였다.
‘성물의 힘만이 이 중단전의 불가해함을 증진해줄 수 있음인가?’
선근경에 이어 신령부.
천무백은 오성물의 남은 성물을 찾아야 하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하오문주를 암진혜검으로 꾀어냈으니, 적극적으로 찾아봐야겠어.’
천무백이 직접 묘리가 담긴 구결을 전해 줬다. 타고난 무인이자 경지에 오른 곡지흠은 이제 천무백에게 구결을 받기 위해, 가용 가능한 정보력을 동원할 것이다.
천무백이 꼴랑 흑회에 하왕과 거력왕이 모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암진혜검의 구결을 알려 준 게 아니다.
알려준 건 지극히 일부 구절.
한번 그 묘리를 맛본 곡지흠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낄 것이다.
모든 구결을 알기 위해 결국, 그는 천무백이 원하는 정보를 하나씩 바치리라.
‘혈귀곡도 비다라를 개선할 방법을 찾기 위해 성물을 찾으려 할 테고. 나야 그럼 혈귀곡만 추적하면 문제없겠어.’
상황을 정리한 천무백은 품에서 환단을 꺼냈다.
고아한 향기가 풍기는 환단은 무당에서 내어준 선단이다.
‘선기…….’
자연기처럼 비치나, 그 속은 확실한 선기가 분명한 것이 이 선단이 품고 있다.
천무백은, 한 차례 심호흡한 뒤.
그대로 선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