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9화 (159/318)

<검신재생 159화>

159. 계산적인 남자.

“아저씨들, 무림인이죠? 여기서 싸우면 울 아버지 또 술 마시고 엉엉 울어요. 나가서 싸우세여!”

“…….”

“크흠흠.”

꼬마의 당찬 목소리에 곡지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주방에 있던 객잔 주인이 황망한 얼굴로 달려와 꼬맹이를 품에 안고 허리를 숙였다.

“아이고, 아이고, 협객님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 애가 감히 협객님들이 대화하시는데 끼어들어서…….”

객잔 주인의 얼굴은 그야말로 창백하게 질렸다. 하긴 당연한 일 아닌가. 강호인 중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눈알을 뽑아버리는 족속도 있으니까.

다행히도 천무백은 그런 부류가 아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내가 상황에 맞지 않게 유치한 짓을 했으니, 안심하세요.”

언제 곡지흠과 기 싸움을 했냐는 듯, 냉막했던 천무백의 목소리는 다정하기 그지없었다.

그 확연한 변화에 곡지흠은 황당하다는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유치한 짓?’

무언가 불쑥 솟구쳤지만, 이쪽을 보며 하얗게 질린 주인의 얼굴을 보면 억지로라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하오, 주인장. 조용히 식사만 하고 나가겠소.”

“아이고, 미안하다니요. 그럴 인사하실 필요 없으십니다요! 주문하신 음식은 곧장 내어 드리겠습니다요.”

객잔 주인이 꼬마를 품에 안고 들어간 뒤.

곡지흠은 천무백을 빤히 바라봤다.

흔들리지 않는 무심한 눈동자. 맑은 빛이 가득하다. 곡지흠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야 원. 급한 쪽은 나야.’

천무백은 그걸 확실하게 이해하고 있다. 하등 급하지 않은 표정과 눈빛. 곡지흠은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맞소. 난 천공자의 예측대로, 두 가지 일 때문에 찾아왔소. 하나는 호북에서 일어난 무인들이 다 죽어 나자빠진 것. 그리고 둘째는 암진혜검의 구결을 듣기 위해서요.”

“첫째 일은 내가 죽인 놈들은 죽어 마땅한 혈귀곡 마인들이니 문제없소. 그들이 마인이란 증거는, 능허야. 서류들 내줘라.”

“네, 네.”

능허는 서류들을 차곡차곡 건넸다.

포천산장에서 갖고 온 서류. 이번에 죽은 이들이 혈귀곡 소속의 마인들임을 확인할 수 있는 확실한 증거였다.

서류를 확인하는 곡지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건…… 진짜군.’

서류가 위조된 흔적은 없다. 곡지흠이 비록 무인의 기질이 더 강하더라도, 엄연히 하오문주다.

위조된 문서는 눈썰미 하나만으로도 잡아낼 수 있다.

‘하면 이 양반이 정말 다 해치웠다는 건데…….’

서류 너머로 천무백을 흘깃 본 곡지흠은 침음을 삼켰다.

‘이 자식들을 진짜로?’

죽은 명단 중에 강호에서 익히 이름이 알려진 무인도 몇 있었다.

그 모든 이들을 천무백이 다 상대했다는 뜻이니, 곡지흠은 입안이 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미래에 가장 유력한 천하제일인이라더니, 벌써 이 정도인가.’

불현듯, 지금 자신이 싸우면 이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그 의문이 들자마자, 천무백의 무심한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호승심과 객기는 종이 한 장 차이요. 상황 봐 가면서 기세를 갈무리하시오.”

“……크흠, 흠.”

곡지흠은 애써 헛기침했지만, 가슴 한쪽이 싸늘해졌다.

순간적으로 기질이 거칠어지긴 했으나, 고수일수록 내공과 기운을 잘 갈무리하며 숨기는 편이다. 잠깐 호승심으로 기세가 일어났다고 한들, 아주 미세한 변화다. 한데 그걸 곧장 알아채다니.

‘이거, 후기지수라고 생각하면 안 되겠어. 적어도 최소한 동배분의 강호인을 상대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곡지흠은 호흡을 고른 뒤 말했다.

“하면 내가 찾아온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답은 정해져 있소. 불가(不可).”

한 치의 반론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서릿발처럼 단호한 어조.

무언가 협상할 구석이라도 있지 않을까 했던 곡지흠은 말문이 턱 막혔다.

그야말로 철벽을 세운 느낌이니까.

“어차피 임홍 분타주를 통해 구결은 나에게 전해지오. 그건 알고 계시지 않소?”

“그것과 다르니까, 직접 찾아온 건 아닌가?”

천무백이 묘한 미소를 짓자, 곡지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여간내기가 아니군.’

얼굴만 봐선 귀하게 자란 곱상한 귀공자 그 자체인데, 하는 짓을 보면 무슨 노인네를 상대하는 것처럼 의뭉스러웠다.

“솔직히 말하리다. 임 분타주의 무공 수준이 그리 높지 않아, 전달되는 과정에서 그 구결에 담긴 묘리가 잘못 파악되는 경향이 있소.”

“그것 때문에 수련하다가 막히셨나보군.”

천무백은 제 예상이 맞아떨어지자 고개를 순순히 끄덕였다.

하오문 최강의 절기답게, 암진혜검은 그저 구결만 줄줄 외운다고 완성할 수 있는 무공이 아니다.

구결에 담긴 오묘한 뜻을 해석하고 품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천무백은 더 단호했다.

“불가.”

“어째 협상의 여지가 없소?”

“내가 임홍에게만 전해 주는 이유는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거야…… 후우. 어차피 이대로 실적을 계속 쌓으면, 임홍 분타주가 내 뒤를 이어 문주가 될 일은 자명한 일이오.”

그 말에 옆에 있던 임홍의 눈이 부릅떠졌다.

물론 자신이 차기 문주의 강력한 후보라는 건 직감하고 있었지만,

곡지흠이 공인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제야 임홍은 이해했다.

천무백이 자신에게 구결을 알려 준다는 것의 진의가.

‘이 작자, 날 하오문주로 세워 하오문을 장악할 속셈이구나!’

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천무백의 얼굴은 멀리서 보면 그저 아름답단 생각이 들 정도로 잘 생겼지만, 곁에서 보는 임홍은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설마 섬서성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의도한 것인가?’

협력관계라지만, 사실상 주종관계라고 느껴질 정도로 천무백의 지시를 수행 중이다. 한데 자신이 하오문주가 된다면? 하오문이 천무백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이다.

안 된다. 하오문이 어느 한 무인의 손에 들어간다면 안 된다.

그제야 천무백의 속셈을 깨달은 임홍은 몸이 떨렸다.

한데, 한데…….

‘거절할 수가 없구나!’

암진혜검의 구결을 곡지흠에게 전해 주면서, 자신 역시 암진혜검을 익히게 됐다.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최고 절기의 구결이 머릿속에 화인처럼 새겨졌다.

알면서도, 거부할 수 없다.

‘그야말로 독이 든 술잔이지만…….’

임홍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실 수밖에 없다. 마시면 너무나 달짝지근할 걸 아니까.

한편 천무백은 곡지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어차피 흐름상 임홍이 차기 문주가 될 건 자명한 일이지만.’

문주가 사실상 인정하고 후계자로 삼는다면, 더 확실한 일이다.

그러나 천무백은 아직 마음에 차지 않았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소, 문주.”

“……?”

“암진혜검의 구결은 임홍 분타주와의 계약 때문에 성립된 것일 뿐. 나는 하오문과 계약한 게 아니라, 임홍과 계약했소.”

“그 말인즉슨…….”

“그쪽도 원하면, 나한테 구결을 사던가.”

“……!”

곡지흠은 침묵했고, 임홍은 허탈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임홍과의 정보교류에 대한 구결을 전해 주는 건 여전하고, 내가 그 구결을 직접 받으려면 역시 따로 무언가 내놔야 한다는 뜻이오?”

“정확하오. 여기 섬서와 하남만 책임지는 임홍과 달리, 문주만 취급할 수 있는 정보도 있을 것 같은데.”

“……아주 벗겨 먹지 그러시오?”

“가능하면 그러고 싶소.”

뻔뻔한 천무백의 태도에 곡지흠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젠 미래의 하오문이 아니라, 현재의 하오문도 손아귀에 넣겠다는 뜻인가.’

곡지흠은 본뜻을 알면서도 마른침을 삼켰다.

그만큼 암진혜검이 가지는 가치는 어마어마했으니까.

곡지흠은 눈을 질끈 감고는 말했다.

“좋소. 그러지.”

“먼저 그쪽이 내가 원할 만한 정보를 가졌는지 궁금한데.”

“후우. 이번에 모이는 흑도들에 대한 정보는 여기 임홍분타주가 다 준비했더군.”

“…….”

“하지만 내 귀에 들려온 특별한 소식이 있지.”

“말해 보시오.”

“이번 흑회에 모이는 인물 중, 어마어마한 인물이 둘이 더 있소.”

“둘?”

곡지흠은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장강수로채주 하왕(河王), 녹림총채주 거력왕(巨力王)이 참여하오.”

순간, 객잔이 조용해졌다.

* * *

계약은 성립됐다.

천무백은 곧장 곡지흠에게 암진혜검의 구결을 전해 줬다. 물론 임홍에게도 마찬가지다.

둘이 이해하는 바는 확연히 달랐다. 임홍은 아리송한 얼굴이었지만, 곡지흠은 당장이라도 뭔가 깨달은 게 있는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웅얼거렸다.

이처럼 같은 구결이어도 가진 재능과 실력에 따라 깨닫는 바다 다른 법이다.

천무백이 곧장 구결을 전해 줄 정도로, 곡지흠의 정보 놀라운 것이었다.

‘장강의 수로채를 일통한 하왕과, 녹림을 일통한 거력왕이 모인다.’

그들도 크게 보면 흑도의 한 축이지만, 각자 활동영역이 뚜렷하다 보니 겹칠 일이 별로 없었다.

수적들은 강 위에서, 녹림은 산 위에서, 그리고 흑도는 뒷골목에서.

태룡방이 주도하는 이번 흑회에 저 둘이 참가한다는 건, 심상치 않은 일이다.

‘말 그대로 흑도일통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혈귀곡과의 싸움 중에 흑도가 일통된다면?

‘골치 아프게 됐군.’

천무백이 미간을 좁힐 때, 팔자 좋게 늘어진 능허가 시선을 돌리며 히죽 웃었다.

“여, 꼬마야. 뭐 할 말 있느냐.”

객잔 주인에게 잡혀간 꼬마가, 어느새 튀어나와 호기심 어린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아저씨들, 흑도 아니죠?”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한데 그 시선이 천무백을 향했기에,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란다.”

“흐음. 확실하져? 오라버니는 아닌 거 같긴 한데…….”

팔짱을 껴며 능허를 쳐다보는 눈치에, 능허가 순간 울컥한 표정을 지었다.

“야, 왜 날 봐.”

“아저씬, 흑도 같은데…….”

“아니라니까?”

“진짜져?”

“왜 그러느냐, 꼬마야.”

“그럼, 흑도가 아니면 협객이에요?”

흑도가 아니면 협객.

참으로 간단한 이분법이지만, 강호를 모르는 어린아이에게 그렇게 비칠 수도 있으리라.

능허가 조금 떨떠름하게 고갤 끄덕였다. 어쨌든 여기 있는 천무백은 강호에서 대협객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그렇다.”

“그러면, 여기 나쁜 흑도들 좀 잡아 주세요!”

흑도를 잡아 줘?

천무백의 얼굴에 일순 의문이 떠올랐다.

무당과 제갈세가가 확연한 영향력을 끼치는 호북에서, 흑도가 있다?

“뭐, 잡놈들이겠죠. 큼직한 흑도는 아니고, 대충 서민들 등골 빼먹는 잡다한 놈들.”

능허가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하긴. 그놈들은 흑도라고 보기엔 그냥 양아치들이다. 정파에서도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는 조무래기.

하나 이 어린 꼬마아이가 대뜸 부탁하는 모습을 보니, 제법 원한이 쌓인 건 분명해 보였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뭘 줄 수 있느냐, 꼬마야. 이유 없는 호의는 없고, 호의를 받을 땐 그만한 대가를 줘야 한단다.”

여자아이는 일순 멈칫하곤, 턱에 검지를 갖다 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이 꽤 깜찍해서 능허도 허허 웃었다.

“음, 맞는 말이네여. 잠깐만요!”

여자아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쪼르르 달려가, 안절부절못하며 여길 바라보는 제 아버지에게 무언가 속삭였다.

이내 환해진 얼굴로 아이는 쪼르르 달려왔다.

“우리 객잔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제 돼지구이를 해 주신대여!”

생각을 간신히 정리한 곡지흠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아이의 모습이 워낙 깜찍하기도 했거니와, 돼지구이 하나로 부탁을 들어주리라 믿는 저 순진함이 귀여웠다.

‘암진혜검 구결로 아주 속옷까지 다 벗겨먹는 양반인데. 도움도 안 되는 그런 귀찮은 일을, 저 돼지고기 하나로 해 줄 거라 믿다니. 역시 아이들이란…….’

하나 예상과 달리 천무백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거 좋구나. 아주 훌륭한 보상이로구나.”

그 모습이 마치 노인이 제 손녀딸을 보는 듯 흐뭇한 웃음이었다.

“…….”

곡지흠은 반쯤 놀란 표정, 그리고 묘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의외의 모습을 목격한 것 같았다.

“능허야.”

“네.”

“밥 먹고 후딱 주위 흑도, 아니 양아치 애들 확인이나 해봐라.”

“……엑? 진짜로 하실려고요?”

능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아는 천무백은 지극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이다.

모든 행동에는 그 이유가 충분했다. 한데 지금 이 꼬마 아이의 부탁이 대체 무슨 대가가 된단 말인가. 저 돼지구이?

“전쟁터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아느냐?”

“뭐, 잘 싸우는 거 아닙니까. 하늘에 닿은 전술? 전략?”

“아니. 그것들보단 중요한 건 보급이다.”

“아하, 보급. 그렇지요. 보급이 중요하지요.”

“만일 보급이 불가하다면, 최선은 현지보급이다.”

“현지보급이요? 약탈 말입니까?”

천무백이 웃었다. 왠지 모르게 그 웃음이 섬뜩하게 느껴진 능허는 주춤 물러섰다.

‘이 양반이 대체 뭘…….’

그간 천무백을 곁에서 본 능허는 이 서늘한 감각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 인간.

또 무슨 속셈을 꾸미고 있다!

“우리 둘이 흑회에 참여하면, 면이 안 서지 않겠냐? 중원 전토의 흑도가 모이는데.”

“어? 그러면 흑심방에 연락해서 화웅놈 보고 애들 좀 데리고 오라고 할까요? 시간이 되려나?”

“보급이 여의치 않을 땐 현지보급으로 해결해야지.”

“네?”

“여기서부터 강소성을 거쳐 복건으로 가는 길이 멀고도 멀고, 그 사이의 도읍과 도읍은 수도 없이 많을 터이니, 하면 흑도가 어디 한둘이겠느냐.”

“……네?”

“현지 보급해야지. 흑도들이나 주우러 가자.”

아니.

무슨, 흑도가 물건인가. 주우러 가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