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8화 (158/318)

<검신재생 158화>

158. 좀 치네?

하오문주, 곡지흠(谷智鑫)은 이제 오십이 넘은 중늙은이다.

흔히 무림인을 떠올리면, 가진바 내공으로 늙지 않고 오래 산다고 생각한다.

하나 그건 틀린 말이다.

오히려 무림인만큼 요절하기 쉬운 사람들이 있을까.

스무 살 안팎으로 강호에 나서는 후기지수 중 열에 여섯은 죽고, 두 명은 중상을 입어 거동조차 못 한다. 살아남는 사람은 대략 두 명 정도. 그것도 한 명은 두려움에 질려 다시는 영영 강호에 나서지 못한다.

그러니 무림인이 오십을 넘어 환갑이 다 됐다는 건.

그만큼, 살벌한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았단 뜻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는 강하다!”

“예예, 알지요. 암 알지요.”

“임홍 분타주, 자네도 열심히 수련하면 나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걸세.”

“네, 존경합니다. 문주님.”

“핫핫핫핫!”

임홍이 저를 한심한 눈빛으로 쳐다본다는 것도 모른 채, 곡지흠은 그리 웃었다.

이리 보면 나잇값 못하는 노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자부심을 느낄 정도로 곡지흠은 강했다.

통나무처럼 굵은 팔다리와 바다처럼 쩍 벌어진 어깨, 툭 불거진 태양혈, 정광이 흐르는 눈동자.

환갑이라 보기 힘들 정도로 건장하다 못해 강해 보이는 외형.

강호에서 오래 살아남은 곡지흠은 강했다.

단 한 줄기의 깨달음만 더해질 수 있다면, 당장이라도 입신지경에 들어설 수 있는 고수.

그런 곡지흠을 임홍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하오문도 답지 않게 무(武)를 숭상하는 무인. 하오문에 어울리진 않으나, 오히려 그런 그의 성정과 실력이 작금의 하오문을 이만큼 키워 놨겠지.’

전대 하오문주가 창천검신의 의뢰를 수행하다가 객사하고, 하오문은 크게 흔들렸다.

‘자칫하면 흑도에 잡아 먹힐 뻔했으니까.’

하오문과 흑도는 서로 밀접한 면이 크다. 활동 영역과 바탕이 되는 힘이 기본적으로 약자들, 그리고 뒷골목에서 나오지 않는가.

정마대전 이후로 흑도는 성세를 구사했고, 하오문은 문주를 잃고 흔들렸다.

한데 그런 하오문을 굳건하게 지킨 이가 바로 곡지흠이다.

하오문답지 않은 타고난 호전성을 가진 무인. 하류인생이라기보단, 뭇 무림인들의 호감을 살만한 전형적인 호인이다.

“어떻던가? 그 양반 강하던가?”

“……문주님. 설마 혹시……?”

“혹시 뭐? 자네 왜 눈을 그리 떠? 내가 설마 그 천룡검협을 잡아먹을까. 아직 어린 친군데.”

“…….”

임홍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잡아먹을까가 아니라, 뒈지게 처맞고 잡아 먹힐까가 우려되니까 그렇죠.’

물론 임홍은 곡지흠이 그렇게 자신처럼 처참하게 처맞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들려오는 소식에 불안감이 싹트는 것도 당연하다.

“호북성 내 거의 오백여 명이나 되는 무인들이 일시에 증발했습니다.”

“그 정보는 들었네.”

장난기 가득했던 곡지흠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곡지흠이 임홍을 따라 호북성으로 가는 이유는 천무백과의 만남을 기대하는 점도 있지만, 더 중한 이유는 바로 소식 때문이다.

무림 방파, 표국, 의방 가릴 것 없이 모두 증발했다.

그것도 오백이나 되는 수효가.

이건 쉽사리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야말로 일대의 대사건.

정보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곡지흠이 직접 나섰다.

“천룡검협이 그랬다는 소문이 있던데 말이야. 오백인의 무인이 모두 혈귀곡의 암중 세력이었단 얘기도 있고. 무당이나 제갈세가가 조용히 묵인하는 이유도 그것이라는 추론은, 어떻게 생각하나?”

곡지흠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임홍은 언제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냐는 듯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무리 호인(好人)이어도, 정보 집단인 하오문주였다.

“앞마당인 호북성에서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무당과 제갈세가는 조용합니다. 무당은 안에서 무슨 사건이 벌어진 듯하여 외부에 신경을 쓸 수 없는 것처럼 보이나, 제갈세가는 그게 아니지요. 최근 제갈세가의 여식과 천룡검협의 사이가 돈독하다는 소리가 있으니…….”

“하여 제갈세가가 묵인했다? 일을 벌인 사람이 천룡검협이라면?”

“그가 아니라면, 제갈세가가 조용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곡지흠이 턱을 쓰다듬었다.

“흐음. 천룡검협이 그리 큰 인물이란 말이지.”

“그럴만한 사람입니다. 본래 성정과는 달리 소문이 이상하게 나버렸으니…….”

“본래 성정?”

“강호를 지키는 대협객이란 소문이 퍼지는데, 그게 참…….”

임홍으로선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아직도 처맞고 장보도를 강탈당한 때를 떠올리면 온몸에 치가 떨린다.

“여하튼, 천룡검협. 그자를 만나면 모든 목적이 해결되겠군. 진즉 만나보고 싶었는데, 어딜 이리도 돌아다니는지 원.”

“……문주님. 주제넘지만, 하나 조언 비슷한 거 해 드려도 됩니까?”

“무엇인가?”

“절대로, 경시하지 마십시오.”

임홍으로선, 하급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었다.

* * *

“곡지흠이라 하오. 양상군자(梁上君子)란 별호로 불린다오.”

들보 위의 군자라.

“어울리진 않소.”

천무백은 단호하게 말했다.

양상군자란 본래 들보 위의 좀도둑, 또는 쥐를 이른다.

“하하하. 내가 한낱 도둑놈이나 쥐새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그리 부르더이다. 도둑질은 해 본 적도 없소만.”

곡지흠의 외양은 일단 좀도둑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자란 단어를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로, 호인상이었다.

실제로 천무백이 느낀 바도 그와 같았다.

무인.

하오문답지 않은 전형적인 무인.

어째서 하오문에서 이런 사람이 나왔을까, 싶기도 하지만.

천무백은 그 얼굴에 남은 옛 모습을 엿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수곡가 출신이시오?”

“……!”

호쾌하게 웃던 곡지흠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굳어졌다.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빛이 떠올랐다.

‘그걸 어찌?’

이제는 사라진, 감숙성의 천수곡가.

자신의 본가를 안다는 사실에 곡지흠은 말문이 턱 막혔다.

바로 옆에 있는 임홍도 모르는, 이제는 다 흙으로 돌아간 전대의 선배들만 아는 사실이 아니던가.

곡지흠은 눈을 가늘게 뜨고 콧잔등을 실룩였다.

그런 그를 보며 천무백은 속으로 웃었다.

‘그 기녀들 치마폭에서, 건들지 말라고 설쳐대던 까까머리 놈이 머리가 굵어졌구나.’

천수곡가는 정마대전의 피해자였다.

감숙성에서 제법 세력을 떨치는 무가였는데, 꼿꼿하고 호방한 무가로 제법 명성이 높았다.

정마대전 초창기, 마교에게 곧장 공격받았다. 당연히 천수곡가는 항복하지 않고 모든 걸 다 걸고 싸웠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곡가의 핏줄.’

당시 뒤늦게 소식을 듣고 도착한 천무백이 구했던 작은 아이가 바로 곡지흠.

상황이 급했고 천무백이 돌봐 줄 수는 없기에 근방 하오문에 소속된 기루에 맡겼었다.

그때 이후로 기녀들 사이에서 자라는 것만 멀리서 봤지, 그 아이가 이리 커서 하오문주가 되었을 줄이야.

반가운 마음이 불쑥 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나 그렇다고 한들, 천무백은 전생의 인연을 현생과 연관 지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하오문주께서 직접 날 찾아온 연유가 무엇인지 알 것 같소만.”

“……알 것 같다?”

“호북성에서 갑자기 죽은 놈들은 다 혈귀곡의 끄나풀들이오.”

“…….”

곡지흠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표정에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눈빛에 어린 놀람마저 숨길 수는 없었다.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눈빛이구나.’

놀람의 원인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자신이 온 연유를 지금 곧장 파악했다는 직관력.

두 번째는 그 사건이 천무백이 벌인 게 맞다는 사실이다.

“거 실망이군. 하오문 정도면, 그놈들이 혈귀곡의 암중세력임은 다는 아니더라도 한둘쯤은 알아야지.”

“……그 무슨.”

“이러면 우리의 협력관계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봐야 할듯한데.”

천무백의 말에 옆에 있던 임홍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대협.”

“임 분타주. 내가 협력을 제안한 건 그대요.”

“네. 맞습니다. 지금까지 서로 잘하고 있지 않습니까.”

“한데 하오문주가 여길 날 찾아온 건, 그대의 의지는 아닐 것 아니오?”

“그야…….”

“말해 보시오. 문주. 날 찾아온 연유가 단지 이번 사건에 관한 확인 차는 아닐 것이고. 아마도…… 암진혜검 때문이겠지?”

암진혜검.

지금은 실전된 하오문 최강의 절기.

천무백은 이 암진혜검을, 하오문의 협력을 얻는 대가로 제시했다.

매번 충분한 정보가 들어올 때마다 천무백은 암진혜검의 일부 구절을 조금씩 알려 줬다.

아마 이게 문제였을 거다.

‘완전한 암진혜검의 입수, 또는 임홍을 거치지 않고서 직접 구결을 전수 받겠다는 의도.’

천무백은 코웃음을 쳤다.

굳이 임홍에게만 구결을 알려 주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구결은 하오문주인 곡지흠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간다.

하나 구결을 아는 이가 직접 전수하는 것과 그걸 중간에 한 명을 거쳐서 들어오는 건 전혀 다르다.

천무백은 엄연히 모든 구결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상태에서 임홍에게 전수한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임홍은 그 이해도가 다르다는 점.

결국 곡지흠이 임홍에게 듣는 암진혜검은, 틀림없는 정확한 구결이긴 하나 그 안에 담긴 오묘한 뜻까지는 얻지 못한다.

그걸 천무백이 알면서도 임홍을 통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오문주는 자신의 손으로 쉽게 다룰 만한 인물이 아니리라는 예상.

그리고 둘은 하오문주를 손쉽게 다룰 수 없으면, 차라리 임홍을 차기 문주로 밀어주자는 의도.

당연한 일이다.

암진혜검은 하오문 최강의 절기, 곧 문주만이 익힐 수 있다.

하나 임홍은 천무백에게 직접 구결을 전해 받아, 그 모든 구결을 알게 된다.

섬서분타를 책임지는 분타주, 동시에 하남에서도 외연을 확장하는 책임자.

암진혜검의 전수자, 거기에 천무백과의 인맥까지.

강력한 차기 문주 후보다.

“내 계약은 임홍 분타주를 통해 구결을 넘기는 것뿐. 더 바라지 마시오.”

“계약은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공자.”

탁자에 앉으려고 의자를 빼자, 천무백이 발을 툭 걸어 의자가 탁자에서 빠지지 않게 막았다.

“……!”

곡지흠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였다. 동시에 곧장 기세를 일으켰다.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의자를 통해 전해지는 내공.

한낱 목제의자를 통해 의지와 내기를 전달하는 상승의 공부.

‘기 싸움이라도 하자는 건가.’

기녀들 품에서 엉엉 울던 어린 애의 얼굴이 겹쳐 보인 천무백은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걸 참지 못했다.

‘웃어?’

여유로운 웃음이다.

내심 제대로 한 방 먹여 줬다고 생각했던 곡지흠의 눈빛이 딱딱해졌다.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온몸에 소름이 올라왔다.

“좀 치네?”

“…….”

“그럼 나도 좀 친다?”

친다.

그 말이 왜 이리 섬뜩할까.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은 손으로 의자에 내기를 흘려보내 뜻을 전달했다면.

천무백은 의자에 갖다 댄 발을 통해, 내기를 전달했다.

그 내기에 담긴 건…….

‘내가중수법?’

문자 그대로였다. 내가중수법을 통해, 곡지흠의 내부를 그대로 ‘쳤다’.

“크읍!”

그 아찔한 고통이 전해지는 순간, 곡지흠은 욕지기가 치솟았다.

‘이게 좀 치는 거야? 사람 죽일 정도로 치는 거지!’

곡지흠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이 정도는 숫제 기 싸움으로 치부할 게 아니다.

더구나 자신이 배분으로 따지면 훨씬 선배가 아닌가.

‘제기랄. 한판 붙으시려고 하겠군.’

곁에 있던 임홍은 곡지흠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탄식을 터뜨렸다. 그때.

“그만! 멈춰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

마치 병아리가 삐약대면 나오는 소리 같을까. 이목을 집중시키는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곳엔 웬 꼬맹이가 팔짱을 끼고 볼에 바람을 불어 넣은 채 째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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