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57화>
157. 꼴 받게 하잖아.
천무백은 포천산장에 도착했다.
한때 제법 세력을 떨쳤던 문파답게 장원이 넓었다. 확 트인 시야 너머로 무당산의 아름다운 경관이 뻗친다.
“꽤 좋은 자리야.”
무당산 인근에 있으면서도 호북 곳곳으로 뻗어 나갈 교통의 중심.
대로가 뻗어 나가고, 조금만 나가면 수로 역시 이용이 가능하다. 사람이 오가고 물자가 오가기엔 좋은 자리다.
수비에도 용이하다. 산장으로 오는 길은 좁다. 담벼락은 성벽과도 같았으며, 문은 강철이다.
“꼭 여기여야만 합니까?”
능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시선이 담벼락 위에서 펄럭이는 청성표국의 깃발에 닿았다.
“여기만 한 매물이 어딨다고?”
“여기만 한 매물이 없긴 하죠.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 다 뒈졌는데, 누가 여길 살려고 합니까.”
“그래서 싸게 구했잖냐.”
“싸게 구하기는…… 그냥 문서 들고 가서 관아에서 도장 콱 찍은 거 아니요.”
“근데 이 자식이 왜 이리 꼬박꼬박 말대꾸야?”
천무백이 눈을 부라리자 능허가 태연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야 당연히 최고의 선택인 것 같아 칭찬하려고 천천히 밑밥 까는거죠. 여길 표국의 장원으로 쓴다는, 어떻게 이런 생각을 다 하십니까?”
“능허야, 세상 살다 보면, 아낄 때 아껴야 하는 법이니라.”
“…….”
능허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한 말로 자신이 누구한테 말싸움으로 진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흑심방의 간부였을 땐, 입담 한마디로 웬만한 놈들 복장을 뒤집혀서 쓰러뜨린 적이 몇 번이었나.
하나 천무백은 강적이었다.
‘내가 복장이 뒤집히겠어.’
대놓고 비아냥댔는데, 그걸 저렇게 받아치는 모습을 보라.
그것도 제 아들이나 조카뻘인 놈이. 인생 교육해 주는 것 마냥…….
“그래도 조금, 그렇지 않습니까. 여기에 귀신이 얼마나 있을지 알고.”
“뒈지기 싫으면 튀어나오겠냐.”
“……뭐, 하긴 그렇겠죠.”
능허가 고개를 선선히 끄덕였다.
포천산장.
이곳은 곧 청성표국의 호북 분타 중 하나로 재탄생할 것이다.
포천산장의 지리적 입지는 당금 여기 호북에서 구할 수 있는 장원 중 최고였다.
다만 여기서 사람들이 우수수 죽어 나갔다는 게 문제였다.
무림의 장원은 비교적 그런 점이 덜하다지만, 사람 한두 명만 죽어도 집값 내려가는 건 당연한 이치가 아니던가.
“주군이 여기 주인인 거 아는데, 그깟 귀신 놈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튀어나오겠습니까.”
“나오고 싶으면 나오라고 해. 또 죽여 주지.”
“…….”
여기에 귀신이 있다면, 다 천무백에게 죽은 놈들이니.
복수하러 귀신으로 나오는 건, 그놈이 그냥 미친놈일 것이다. 아니, 미친 귀신이겠지.
하나 표국 사람들이 찜찜해 할 수도 있으므로, 천무백은 수를 썼다.
“나무아미타불…….”
“무량수불…….”
나한각주가 나한승들을 데리고 염불을 외우며 비교적 축소된 위령제(慰靈祭)를 펼쳤고, 무당의 도사들도 일제히 내려와 원귀를 달랬다.
천무백의 부탁에 강호의 양대북두. 북숭소림과 남존무당이 힘을 합쳐 제례를 펼치는 것이다.
원래라면 들어주지 않을 부탁이다.
원혼을 달래 주는 거야 무당이나 소림이나 늘 해 오는 일이지만…… 그 원혼이 다름 아닌 지독한 마인들 아닌가?
하나 진청진인과 무소선사는 부탁을 듣고 무릎을 '탁' 쳤다.
‘과연 대의를 품은 협객이로다! 적으로 만난 마인들마저 궁휼히 여겨 위령제를 부탁하다니! 아아. 그것도 모르고 나는 그저 마인들이 죽었다고 기뻐만 했으니, 무당의 도를 닦는 이로써 이 얼마나 한심스러운 자태였던가!’
‘빈승은 아직도 불심이 깊지 못하나 봅니다. 천룡검협이야 말로 진정한 부처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긴 했지만.
여하튼 일은 잘 풀렸다. 표국 사람들도 찜찜한 감정을 덜었고. 오히려 보기 힘든 무당의 도사와 소림의 승려들이 위령제를 펼쳐 주니, 감격한 얼굴이었다.
“과연 도련님이십니다.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 내다니요.”
그때 장노가 다가왔다.
제갈세가와 근방을 오가며 분타 설립에 열을 올리던 장노는, 이곳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다.
“무당의 호의입니다.”
“설령 호의라고 해도, 이렇게까지 해 주지는 않습니다. 호북과 하남을 통하는 모든 표물과 표행 독점이라니. 소식을 들은 국주님과 부국주님도 크게 기뻐하고 계실 겁니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장노의 시선은, 어느새 장성한 손주를 보는 듯 따스했다.
“장노.”
“예.”
“아니, 스승님이라 불러야겠군요.”
“스승님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도련님이 스스로 성장하신 것이니까요.”
천무백은 희미하게 웃었다.
‘뭐지?’
천무백의 미소를 본 장노는 무언가 위화감을 느꼈다.
여전히 맑고 따뜻한 눈빛이다.
하나 그 너머 강렬한 무언가가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장노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침묵했다.
“장노께서 먼저 말해 주실 때까진, 전 장노를 계속 신뢰하고,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
“아, 그리고 저번에 정말 실례지만, 홀로 초식을 수련하는 과정을 봤습니다.”
장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림의 금기인 수련 장면을 훔쳐봐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마음속에서 피어오르는 그 불길함은, 수십 년을 강호에서 도주하며 살았던 그때의 감정을 생생하게 일깨웠다.
“세 번째 초식이었던가요? 거기선 투로를 조금 낮게 잡으셔야 합니다. 상대를 밑에서 위로 찔러 뼈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다는 느낌이죠. 그게 없으면 검이 살지 않습니다.”
“그 무슨…….”
“준비되시면 말씀해 주세요.”
천무백은 그리 웃으며 등을 돌렸다.
하지만 장노는, 그 뒷모습을 잡지도, 아니 아예 바라보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장노를 뒤로한 채 걷자, 능허가 쪼르르 달려왔다.
“넌 궁금한 게 많은 거냐. 엿듣는 게 취미인 거냐.”
“이왕이면 전자로 해 두죠.”
“나이도 많이 먹었으면 사람이 좀 진중해야지.”
“나이도 적게 먹었으면 윗사람 좀 공경해야죠.”
빠악!
“……진중해지겠습니다.”
잔뜩 골이 난 표정의 능허를 보며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마류칠종에 대해 잘 아느냐?”
“알죠. 마교를 이루는 마도의 일곱 개 종단.”
“어둠 속에서 태동한 암종과 핏물 속에서 솟구친 혈종, 독무 속에서 걸어 나온 독종(毒宗), 미친놈들끼리만 모인 광종(狂宗), 그리고 마도 그 자체. 마종(魔宗).”
“……여섯 개인데요?”
“그래. 원래는 마류육종이었다.”
“어…… 잠깐 그러면, 빠진 한 군데가.”
“검에 미친놈들이 모인 검종(劍宗).”
“어째,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능허는 이번에 혈귀곡 관련 자료를 모으고 모으면서 천무백으로부터 마류칠종에 관한 얘기도 많이 들었다.
한데 이상하게도 검종에 관한 이야기는 낯설었다.
“검종이 마도에 포함된 건 추후의 일이지. 태생부터가 마도는 아니었던 놈들이다.”
“검종, 검종하니까 말입니다. 혹시 그 검종의 종주(宗主)가 그 유명한 패천검마(敗天劍魔), 그러니까 세상이 검마라고 하면, 딱 떠오르는 그 사람이…… 종주인 곳 아닙니까?”
“눈치가 빠르구나?”
“뭐, 강호 역사를 한 번쯤 들어본 사람들이라면 아는 얘기 아닙니까. 마도지만, 백도로부터 존경받았던 마도의 검객. 크으 멋지지 않습니까.”
“우리가 피 터지게 싸우고 있는 놈들이 마도 놈들이다.”
“그래도 검마는 백도무림의 숭앙도 받지 않습니까. 마도이면서도, 천마를 죽였으니까요.”
“…….”
“유명하잖습니까. 천마를 죽였으면, 본인이 직접 천마가 되고, 그 힘을 외부로 발출하려고 중원을 침략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홀연히 사라지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그 검마가 종주인 종단이라면, 더 유명하고 세력이 커야 하지 않습니까?”
“천마를 죽인 놈이니, 그 세력이 시간이 지나면서 힘을 유지할 수 있겠느냐.”
“아…….”
“철저히 분쇄되고 사라졌다. 그래도 패천검마를 따르던 검종의 당시 활약이 워낙 인상적이라, 세간의 사람들은 마류칠종이라고 지금까지도 기억할 따름이지.”
“흠. 그렇습니까. 근데 왜 갑자기 마류칠종 얘깁니까.”
“그냥, 잘 알고 있으라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알아야만 하는 순간이 올 테니까.”
능허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또, 또 선문답.’
하 이 자식. 하는 짓 보면 가끔 꼭 백 살은 먹은 노인네 같다니까.
능허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천무백의 말은 평소엔 명쾌하기 이를 데 없어, 이해하고 지시에 따르는 데 무방하지만.
가끔 이런 알쏭달쏭한 말이 나오면 아무리 이해하려고 머리를 부여잡아도 무리다.
능허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그저 갑자기 떠오른 의문을 얘기했다. 천무백이 어째서 마류칠종에 관한 비사를 다 아는가에 대한 의문은 진작 접었다.
“근데 왜 검마는 천마를 죽였을까요?”
“뻔하지. 웬 외부인이 칼질 하나 잘한다고 설쳐대니까. 천마가 질투하겠지.”
“에이? 천마가 말입니까? 천하제일악인인데 설마 속까지 좁겠습니까.”
“네가 봤어?”
“네?”
“천마놈이 꼴 받게 하잖아. 약해 빠진 새끼가.”
“……?”
* * *
천무백과 능허는 곧장 복건으로 향하는 여정에 올랐다.
무당에서의 일이 제법 오래 걸렸지만, 흑회가 열리는 시간까지 여유는 충분했다.
하지만 강호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니, 가급적 빨리 이동하는 게 좋았다.
먼저 복건에 도착해서 분위기를 살피는 것도 중요하고.
“그래도 밥은 먹으면서 가야죠.”
능허가 실실 웃으며 점소이를 부르곤, 온갖 음식들을 시켰다.
그 음식들이 하나같이 제법 가격이 나가는 거라,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너 돈이 어디서 났다고?”
“저 연화루 루주입니다. 이깟 푼돈쯤이야.”
“그게 왜 네 돈이야?”
“네?”
“연화루 진짜 주인이 누군데?”
“…….”
능허가 서운한 표정으로 침묵하자,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새끼. 좀 장난친 거 같고 삐지긴. 맘대로 해라. 돈도 맘대로 못 쓰겠냐.”
“흐흐. 우리 주군, 통이 크시다니까.”
고작 음식 몇 개로 통이 크단 소리를 하다니.
‘능허야. 너도 참 소박해졌구나.’
그래도 은근히 기분은 좋지 않은가. 돈 맘대로 써도 된다니.
“근데, 이제 슬슬 올 때가 됐습죠.”
“…….”
“이 양반도, 우리 주군 안 본 지 한참됐더니 빠졌네요. 약속 시각에 늦곤…….”
“안 늦었습니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였다. 객잔 한쪽에서 사내가 불쑥 일어나 다가왔다.
능허의 얼굴에 반가움이 번졌다.
“이야. 우리 임홍 분타주! 여기 호북에서 뵙니, 더 반갑소!”
“오랜만이오, 독안사. 그쪽 명성이 자자하던데.”
“흐흐. 어서 앉으시오.”
모습을 드러낸 건 바로 하오문의 섬서 분타주 임홍이었다.
임홍은 천무백에게 허리를 깊이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천룡검협.”
“않으시오.”
“네.”
천무백이 임홍을 이곳까지 불러들인 건 두 가지 이유였다.
하나는 강호 전체에서 벌어지는 흑도들의 움직임.
흑도와 가장 밀접한 게 하오문이고, 강호 전체를 보려면 적어도 임홍급은 되는 인사가 필요했다.
그리도 둘째 이유는 암진혜검의 구결 때문이다.
하오문과 정보 교류를 하며 협력하는 대가로, 암진혜검의 구절을 알려주기로 했으니까.
하나 천무백의 얼굴에 떠오른 건 반가움이 아니었다.
“내가 혼자 오라고 했던 것 같은데…….”
“……!”
임홍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천무백의 싸늘한 목소리.
그 목소리를 들은 걸까.
다른 식탁에 앉아있던 중년의 사내가 덜컥 일어나 다가왔다.
사내는 호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갑소, 천룡검협. 본인은…….”
“하오문주겠지.”
“……!”
천무백의 싸늘한 눈빛이 사내, 아니 하오문주에게 닿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