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56화>
156. 뻔뻔한 남자, 천무백.
그야말로 정적이란 게 이런 것일까.
대청의 얼굴에는 황망함이 어렸고, 진청은 넋이 나간 얼굴로 신령부가 담겼던 상자를 매만졌다. 그 모습이 처연하기 짝이 없어 가슴이 아릴 정도였다.
천무백도 애써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신령부가 몸속에 스며드는 듯한 느낌을 확실히 받았다. 아니, 확신했다.
분명 중단전으로 들어왔다.
선기의 띠가 반응하면서, 마치 신령부를 흡수한 듯한 일련의 과정.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신령부의 글귀가 둥둥 떠다녔다.
“갑자기 먼지가 되어 삭아 버리다니…….”
“이게 말이나 됩니까? 사형. 사형께서 장문인 직에 오르실 때, 무당삼보를 직접 넘겨받으시면서 만지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분명 관리가 엄청나게 잘 되어 있었는데, 갑자기 왜 삭아버린단 말인가?”
“무엇이 다르지요?”
“그땐 내가 만졌고, 지금은 천룡검협께서 만지셨지.”
순간 천무백에게 허망한 시선이 향했다.
그 순간, 천무백은 결심했다.
무당삼보.
중원 도학의 오성물.
무인들에겐 쓸모없을지는 몰라도, 도학을 익힌 이들에겐 도저히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엄청난 보물.
‘내 몸에 들어왔다는 거 들키면 안 된다.’
물론 천무백이 의도해서 신령부를 빼앗은 것도 아니다.
하나 사람 심리란 게 그렇지 않은가.
천무백은 무수히 많은 전생의 경험으로 분명 느꼈다.
여기선.
“당최 무슨 영문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뻔뻔해지기로.
천무백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라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지금 몹시도 당황하고 황망해하는 걸 억지로 참는 것처럼 보였다.
대청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소식을 들은 선기를 다루는 네 명의 도인이 거처에 들이닥쳤다.
이야기를 들은 도인들은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다.
“신령부에는 신비한 힘이 깃들었다고 전해지지요. 가령 신령부로 병자를 치유하고, 썩은 물을 정화했다는 설화들처럼.”
“지금도 신령부에 담긴 술법이란 얘기입니까? 선배님들.”
“그럴 수도 있지요. 신령부는 그 연원을 알 수 없는 무척 오래된 부적이지요. 한데 지금까지 아무리 관리를 잘했다고 해도, 그 상태가 몹시도 좋았습니다. 아마 상태를 보전시켜 주는 일종의 술법이 걸려 있었던 게 아닐까 싶습니다.”
“하면, 지금 그 술법이 풀린 것이고요?”
그럴듯한 얘기였다. 천무백도 자신의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저런 술법은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신병이기에 종종 걸려 있기도 했으니까.
“그러면 어째서 술법이 풀렸냐는 것인데…….”
다시금 천무백에게 시선이 향했다.
천무백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상단전이 열린 영향력.
주위의 외기에 영향을 끼쳐, 보는 이로 하여금 알 수 없는 호감을 느끼게 하는 천무백만의 마력.
천무백이 대놓고 그 기세를 내보이자, 대청은 그저 허허 웃었다.
‘이제야, 저 어린 나이처럼 보이는구나.’
소의 눈망울처럼 순진한 눈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난처함이 여기까지 물씬 느껴진다.
지금껏 크게 보였던 협객이 제 나이대처럼 보이는 모습에, 대청진인은 저도 모르게 흐뭇한 감정이 일었다.
아무리 봐도 천무백이 무언가 한 것은 아니다.
저 얼굴로 어찌 거짓을 말하겠는가.
“아마 천 공자의 선기에 반응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천공자가 가진 선기와 신령부에 담긴 신묘한 힘이 서로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요.”
사실 이유는 추측할 수밖에 없기에, 이야기는 맴돌 수밖에 없었다.
하나 천무백은 그 말이 일견 옳게 느껴졌다.
신령부의 글귀를 읽자마자, 중단전의 선기가 요동쳤으니까.
그건 기묘한 기분이었다. 선근경의 구절을 처음 외웠을 때처럼 몸이 붕 뜨는 부유감. 동시에 온몸에 도는 활력까지.
“죄송합니다. 제가 쓸데없이 건들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군요.”
진청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신령부에 관해 얘기를 나누고자 들고나온 것이니, 이것도 일종의 연이고, 운명이겠지요.”
연(緣)과 운명.
그 말을 들은 순간 천무백은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이리될 운명이라.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진청이 한 말이었지만, 천무백은 어쩐지 그 말이 강렬하게 화인처럼 가슴 속에 박히는 기분이었다.
‘운명이라. 하기야. 그럴 수도 있겠지.’
천무백은 운명론자가 아니다. 하나 때론 살다 보면 정말 강렬한 운명의 끈을 느끼곤 한다. 그건 논리적으로 설명 불가능한 불가해(不可解)였다.
진청진인이 씁쓸한 표정으로 애써 웃어보였다.
“어쩌면 다행이군요. 신령부가 사라졌으니, 혈귀곡 놈들이 다시 무당을 노릴 확률도 적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다만 추후에 장로들에게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입니다만…….”
“으흠. 신령부에 담긴 힘을 혈귀곡에서 밝혀 낼 가능성도 이제 사라졌으니까요. 비다라가 지금보다 더 위협적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지요.”
그 순간 천무백은 퍼뜩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신령부에 무언가 비밀이 담겨 있던 건 맞다.
혈귀곡은 비다라가 선기에 약하다는 걸 알고, 신령부를 연구해 비다라를 선기에 영향 받지 않는 술법으로 재탄생시킬 생각이었다.
하면 앞으로 신령부와 같은 오성물을 계속 노릴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거야 좋은 일이군. 혈귀곡이 오성물의 행방을 쫓고, 내가 그들을 쫓으면 결국 오성물의 행방도 내가 알게 되는 일이니까.’
그야말로 좋은 일 아닌가.
하나 그러려면 혈귀곡과 계속해서 부딪쳐야 한다.
만일 혈귀곡이 작심하고 숨어들면, 그걸 찾기 어려운 건 이미 진즉 경험했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모습을 드러내게끔 충동질하는 방법은.
“제가 신령부를 받았다는 소문을 은연중에 퍼뜨리시지요.”
“예?”
“하면 혈귀곡이 더는 무당이 아닌, 나를 찾아오지 않겠습니까?”
“……!”
좌중의 시선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의 얘기에 잠깐의 정적이 맴돌고, 그 정적을 깬 건 대청진인의 한숨 어린 목소리.
“대체…… 대협은…….”
“무당에서 신령부가 사라졌다고 한들, 혈귀곡이 그걸 믿을 리가 없습니다. 차라리 저에게 넘겼다고 하는 게 낫겠지요.”
“그리되면, 대협께서 위험하실 거요.”
천무백이 싱긋 웃었다.
“강호에 뛰어든 순간부터, 나는 위험과 함께하고 있습니다.”
“…….”
대청진인뿐 아니라, 진청과 추혼삭의 닫힌 입술도 살짝 벌어졌다.
그저 넋이 나간 듯한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얼마의 정적이 흘렀을까. 대청은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듯이 얼굴을 쓸어 올리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대협은 정말…… 협객이십니다.”
“아닙니다. 신령부가 갑자기 사라진 것도 제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으니까요.”
천무백이 그리 말하자 곳곳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대청진인은 굳건한 천무백의 표정을 보며 그저 길게 장탄식을 토했다.
‘정녕…… 태극이 이 사람을 감싸고 있구나. 이 무당을 위해, 저리 행동하고, 저리 생각하고, 저렇게 말할 수 있다니. 아아.’
하나 대청진인은 그럴 수 없었다. 저 젊은 청년이,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있는 게 아닌가.
강호의 선배로서 마땅히 마(魔)와 악(惡)에 대항하여 분연히 일어서야 하는 건 본인들의 몫이 아닌가.
‘적어도 도움을 줘야 한다.’
대청진인은 그리 생각하며 진청을 바라봤다. 진청도 마침 같은 생각이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이걸 받아 주시오.”
대청이 건넨 건 작은 함에 싸여 있는 환단이었다.
‘영약인가?’
천무백의 머릿속에 당장 떠오른 건 소림의 대환단, 그리고 무당파의 태청단이었다.
‘태청단 특유의 향은 없는데?’
하지만 전생에서 수도 없이 태청단을 먹어 본 천무백이다.
당장 떠오르는 기억만 나열해도 한 소쿠리는 나올 것이다.
하니 이게 태청단이 아님을 진즉 눈치챘다.
“본래 선인(仙人)이 되는 수행법 중엔 연단술(練丹術)이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개인의 수행으로 선인이 되는 방향으로 발전해왔지만, 그래도 연단술로 선인이 될 가능성 역시 부정하지 못하지요.”
“그렇다면…….”
“예.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선배가 선인이 되기 위해 연구해 온 연단술로 만든, 선단(仙丹)입니다.”
“…….”
그거 사기 아니야?
천무백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지만 겉으로는 표출하지 않았다.
무당에서 오랜 기간 동안 연구해 온 연단술로 제조한 선단이라니…….
‘확인해 보면 되겠지.’
천무백은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
“우리 선배들께서, 대협의 몸을 살피신 이후, 이 선단을 기꺼이 내주었습니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어쨌거나 그 네 명의 도인은 확실히 선기를 다룰 줄 아는, 대단한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이 내어 준 것이라고 하니, 분명 효능이 있을 터.
생각해보면 내공을 증진해 주는 영약은, 구하고자 하면 못 구할 것도 없었다. 어마어마한 돈이라거나, 수많은 연줄이라면.
하지만 선단은 그렇지 않지 않은가. 오로지 무당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소한 가치.
“무당의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아닙니다. 홀로 대의를 품고 협객행을 하시는 대협껜 부족할 호의입니다.”
천무백으로선 어차피 혈귀곡과 싸워야 하니, 신령부에 대한 얘기를 한 것뿐이다. 실제로 제 몸에 신령부가 흡수됐으니 틀린 말도 아니고.
그것이 이리 오해가 되어 선단을 얻게 됐으니, 나쁜 일은 아니다.
다만.
“그러면 일단 무당에서 저에게 해 온 의뢰는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습니다.”
“예?”
“청성표국에 의뢰한 전대 장문인, 현엽진인의 비다라 치유에 대한 건은 완료됐습니다. 그렇죠?”
“그렇소. 고맙게 생각하고 있소. 덕택에 스승님이 가시는 마지막 길을, 후회 없이 볼 수 있었으니까.”
“자. 그러면, 의뢰에 대한 보상을 받을 때가 된 것 같군요.”
“…….”
순간 좌중이 침묵에 빠졌다.
선단을 받은 건, 그거야 무당의 호의가 아닌가?
계약한 건, 계약서대로 받아야지. 암.
“자. 뭘 주시겠습니까?”
이왕 뻔뻔해진 거, 천무백은 더 뻔뻔해지기로 했다.
* * *
“예?”
“뭘 그리 얼빵한 표정이야?”
“아니, 그러니까…… 청성표국의 분타를 무당산 아래에 설치한다고요?”
“응.”
비단 무당뿐인가. 이미 호북성 지점을 설치하는 것에 제갈세가의 비호를 받는다. 거기에 이제 무당까지 표국의 뒤에 있음을 표방한 것 아닌가.
“거기에……. 호북성과 하남을 오가는 모든 표물과 표행은 청성표국을 통한다고요?”
사실상 독점 아닌가.
무당이라면 관련된 문파와 상단, 그리고 관아까지 수도 없이 많다. 그 사이를 오가는 서찰과 물건들은 거의 매일같이 있을 정도다. 그 모든 것들을 청성표국이 독점한다는 것.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능허도 잘 알았다.
도대체 무슨 짓을 해야 저런 계약을 따온단 말인가?
능허가 숫제 사기꾼 바라보는 시선이자, 천무백은 귀찮은 기색으로 손을 휘휘 저었다.
“됐고 서찰이나 써서 장노에게 전해. 장노가 알아서 진행할거다.”
천무백은 이제 일을 마무리하고 흑회에 참여하기 위해 복건으로 갈 생각이었다. 표국의 일은 장노와 천유하가 잘 알아서 진행하리라.
“아, 그리고 서류는 다 정리했지?”
“예. 마쳤습니다. 포천산장에 있던 혈귀곡 관련 자료들, 소각되기 전에 다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천무백은 서류를 받아들여 휙휙 넘겼다. 능허의 필체가 분명한 글자들로 제법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다.
혈귀곡을 추적할 중요한 단서다.
“생긴 거에 어울리지 않게 글자는 잘 쓰는구나.”
“이래 봐도 제가 책 좀 읽었지 말입니다.”
“좀만 칭찬하면 아주 어깨가 우화등선하지?”
“허. 논어는 읽어 보셨습니까?”
천무백이 능허와 실없는 내용으로 투닥거릴 무렵.
제갈설아가 조금 떨어져서 쭈뼛댔다.
그 모습이 무언가 할 말이 분명해 보이는데, 시선을 이리저리 두는 꼴을 보니 천무백이 답답할 지경이었다. 결국, 천무백이 다가갔다.
“무슨 할 말 있소?”
“그…… 복건으로 간다고 들었어요.”
“그리됐소.”
“애석하지만, 저는 아버지께서 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리셔서요.”
“그런가. 아쉽게 됐구려.”
“아쉬워요?”
“이번에 많은 도움이 됐소. 고맙소.”
천무백의 담백한 말에 제갈설아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 아쉬우면 같이 복건까지 가고요.”
“아버지가 찾는다 하지 않았소?”
언제 환한 웃음을 지었냐는 듯, 제갈설아의 얼굴이 지친 강아지 마냥 축 쳐진다. 그러다가 한참 고민하고 갈등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무언가를 건넸다.
“저 역시 공자님께 여러 번 목숨을 구명 받았어요. 검왕곡에서, 무당 오는 길에, 그리고 무당에서. 그 은혜를 잊을 순 없어요.”
제갈설가의 인장이 찍힌 명패(名牌)였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소림면패와 같은 거죠. 공자님이 간절한 도움이 필요할 때, 제갈세가는 언제든, 어디서든, 반드시 그 은혜를 갚을 거예요.”
“…….”
“이거는 세가의 입장에서 보은을 갚겠다는 뜻이고, 이건……. 제 개인적으로 은혜를 갚고자 하는 것이에요.”
그러면서 제갈설아는 제 머리에 꽂았던 비녀를 쑥 뽑았다.
“언제든지 말해요. 은혜를 갚는 일이라면, 부탁하는 뭐든 들어줄 테니까. 무.엇.이.든.지.”
유난히 무엇이든지를 강조하는 제갈설아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