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5화 (155/318)

<검신재생 155화>

155. 아니, 이게 삭아 버렸네?

천무백은 장문인의 거처에 들었다.

거처에는 대청진인과 진청진인, 한켠에는 추혼삭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새 또 날카로우졌군.’

추혼삭을 본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그간 비무에서 얻은 깨달음을, 마인들의 습격에서 실전으로 잘 정리했는지 날카롭게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을 보는 듯했다.

천무백은 추혼삭이 이곳에 있는 것 자체가 대청진인의 마음이 확연하게 바뀌었음을 느꼈다.

애당초 적건회의 인물과 같이 있는 것 자체도 싫어하던 게 대청진인이 아니던가.

“오셨군요, 대협.”

“소식을 받고 바로 왔지만, 제가 가장 늦은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우리도 이제 막 모여서 찻물을 우리고 있었으니까요.”

대청은 찻잔을 건네며 담담하게 말했다.

“내일이 되면 빈도는 무당에서 파문될 것입니다.”

“…….”

“그것만이 지금 무당이 쪼개지지 않고, 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겁니다.”

대청진인은 스스로 파문당하는 선택을 하며 모든 책임을 오롯이 홀로 짊어질 생각이다.

‘지금은 그의 뜻이 맞다. 적건은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증명했으니까.’

문제는 과연 이게 영원할까?

앞으로 또 한 세대가 지나면, 오늘과 같은 일이 무당에서 일어나지 않을 보장이 있을까?

오히려 이번 일로 적건회의 영향력은 어마어마해질 터.

고이면 썩는다는 그 절대적인 격언은 백도무림이라고 자유롭지 않다.

대청진인이 파문을 선택하기 전, 왜 그리 고민했는지 이해됐다.

무당이 무당의 도를 잃을까 봐.

천무백의 눈을 본 대청진인이 슬며시 웃었다.

“적건회 역시 태극입니다.”

“…….”

“천악 형님께서 마지막에 무당을 지키실 때, 보여 준 건 태극이었지요. 나는, 나만이 태극을 품고, 무당의 도만이 태극을 품을 수 있으리라는 오만한 생각에 잡혀 있었지요. 적건 역시 태극이니, 무당이 도를 잃을 리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물론 저리 생각할 수 있다. 하나 여러 번 전생을 살아본 천무백은, 저 말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려스러웠다.

무당의 무공이 곧 태극을 상징하는 것일 따름이지, 누구에게나 태극이 있다.

그러나 무당의 태극이 주목받는 이유라면, 완벽한 균형, 곧 순리이기 때문이다.

마인들에게도 태극이 있다. 다만 흰색과 검은색 중에서 검은색이 전체를 물들인 태극, 곧 마도다.

적건회의 태극은 흰색과 검은색이 아닌, 여러 색이 섞인 태극이다.

‘하긴, 어쩌면 작금의 무당에 있어 적건회와 함께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곧 흉흉한 일들이 계속 벌어질 터이니.’

한데 그때였다.

침묵하고 있던 추혼삭이 얘기했다.

“적건회 역시 무당을 떠날 것입니다.”

“……!”

사전에 얘기를 나눈 적이 없었는지 대청과 진청의 얼굴에 놀라움이 번진다.

추혼삭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장문인께서 우려했듯, 가까운 미래에 오늘날과 같은 반목이 생길 것입니다. 현재는 여기 천룡검협이 도움을 줘서 다행히 잘 풀렸지만, 그때는 과연 괜찮을까요?”

추혼삭은 천무백이 걱정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냈다.

“지금 적건회가 가진 태극이 무당의 태극과 다를 바 없다 해도, 바탕 자체가 다릅니다. 언젠가는 분명 갈등이 생기고 반목이 심해질 것이며, 종국에는 무당과 적건이 이 무당산을 차지하기 위해 싸움을 벌이겠지요.”

“……부회주.”

“하여 적건회는 이번에 무당을 떠날 것입니다.”

단호한 의지.

대청진인은 두 눈을 감았고, 이제 대신하여 장문인 자리에 오를 진청진인은 묘한 얼굴이었다.

“좋은 결단이십니다.”

하나 천무백은 추혼삭의 결정을 환영했다.

“제가 주제넘게 나서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추 부회주의 의견은 옳습니다. 더구나 지금 호북성에서 무당을 위협할 세력은 없으니, 적건회가 빠져나간다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입니다.”

“위협할 세력은 없다?”

“제가 다 처리했습니다.”

“……!”

천무백은 간략하게 포천산장에서 일어났던 일을 얘기했다.

그 얘기를 들은 좌중의 입이 쩍 벌어졌다.

천무백을 쳐다보는 그들의 시선에 믿기 힘들다는 듯한 감탄이 어려 있었다.

“그 많은 혈귀곡의 마인들을 어찌…….”

“정녕 대협께서는…….”

그 누구도 근거지를 찾지 못하고, 위장조직을 눈치채지 못한 호북성 내 혈귀곡 세력.

그걸 찾아 일망타진했다는 뜻이 아닌가?

“이 모든 건 소림의 나한각주께서 도와주셔서 그렇습니다.”

천무백은 그리 덧붙였지만, 좌중은 내심 속으로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토록 대단한 일을 했건만, 이런 겸양이라니…….’

강호에 소문이 난다면, 그 명성이 천하를 울릴 협객행이다.

한데 그걸 지금까지 밝히지도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소림에게 공을 돌리는 행동을 보라.

대청진인은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이토록 넓은 가슴을 품고 있는 사람을, 나는 내 욕심으로 이용하려 했었다니. 진정 부끄럽구나.’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자신은 그저 저 어린 협객을 이용하려 불러들인 것인데.

그 협객이 끝내 무당을 위해 행동했다.

어떤 이유가 있어서 그랬겠는가. 그것이 옳은 길, 곧 정도(定道)라 굳게 믿고 행한 것이리라.

“과연…… 대협은 진정 협객이시오.”

물론 천무백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긴 하다.

무당을 위해서 했던 일은 아니다. 하나 결과가 명백했다. 무당과 아무런 연고가 없던 천무백이 결과적으로 무당을 이롭게 해준 게 아닌가.

이 살얼음판 같은 강호에서 이유없는 호의는 없다.

하나 대청과 진청은 천무백의 호의에서는 특별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굳이 이유라면, 그것이 곧 협이라는 믿음 때문이겠지.

대청이 감격한 눈빛으로 천무백에게 포권을 취했다.

“무당의 은공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천무백은 조금 머쓱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청은 그런 천무백의 표정마저도 겸양에 부끄러워하는 모습처럼 비쳤다.

“하지만 추 부회주, 무당을 떠난다면 갈 곳이 있으시오?”

“……차차 찾아봐야지요.”

적건회가 무당을 떠난다 해도, 다른 곳에 둥지를 트기가 힘들다.

현재 적건회는 절반이 죽거나 다쳐 팍 쪼그라든 상태.

그래도 하나의 문파를 개파할 정도의 힘은 있으나, 오히려 그것 때문에 쉽게 자리 잡지 못할 것이다.

기존에 있던 문파들의 견제는 당연하니까.

때마침 천무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중경성으로 가시지요.”

“중경성 말입니까?”

중경성은 예상치 못했는지 추혼삭의 얼굴에 떨떠름한 기색이 올라왔다.

천무백이 씩 미소 지었다.

적건회.

정마대전 때 무당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협객들의 회(會).

그리고 지금에 있어서 이들 모두가 정마대전 용사들의 후인.

적합하지 않은가?

“중경엔 그대들과 같은 협객이 모인, 정의맹이란 곳이 있습니다.”

천무백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40년 전의 적건은 무당을 지켰으니, 당신의 적건은 강호를 지키십시오.”

추혼삭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정의맹의 맹주가 영웅으로 유명한 투신 곽용이라는 사실. 소림에서 지지를 했고, 이야기를 들은 진청진인도 무당의 이름으로 정의맹 결성을 지지하겠다는 얘기를 넌지시 한 상태.

그 뜻이 아름답고, 개인적으로 무천악의 복수를 원하는 추혼삭으로선 꽤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적건회의 무사들과 상의하겠다고 했으나, 천무백은 웬만해선 승낙하리라 생각했다.

‘곽용에게 서찰 하나 부쳐놔야겠군.’

다름도 아닌 적건회니, 정의맹 입장에서는 상당한 수준의 타격대 하나를 얻는 셈이나 다름없다.

자연스럽게 정의맹을 주축으로 혈귀곡에 대항하는 세력이 이뤄질 것이고, 소림과 무당이 정의맹에 힘을 보태준다면 백도무림의 확실한 연합체가 되리라.

어느 정도 얘기가 정리되자, 진청진인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무언가를 들고 왔다.

“아무래도 이번에 마인들이 노린 게 이게 아닐까 싶습니다.”

“무엇입니까?”

“신령부. 무당삼보중 하나입니다.”

“신령부를요?”

천무백은 고개를 모로 꺾었다.

본래 혈귀곡의 목적은 무당과 적건 사이 내전을 일으켜 강호 일에 끼어들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한데 무명은 모든 일이 틀어진 상태에서도 무언가를 노리는 것처럼 파고들었다.

천무백 역시 그것이 의아했는데, 목적이 신령부라니.

“신령부는 무당삼보이긴 하나 혈귀곡에서 노릴만한 물건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당삼보는 송문고검, 장문령부, 신령부를 이른다.

하나 이것들은 무당삼보란 거창한 명성과 달리, 실질적인 보물은 아니다. 차라리 영약이나 태극혜검과 같은 비급을 노렸다는 게 설득력 있었다.

장문령부는 곧 무당 장문인의 권한을 상징하는 일종의 옥새와도 같았고, 송문고검 역시 명검축에 드는 좋은 검이나 검에 얽힌 역사적인 연원 때문에 보물 취급을 받는 것.

신령부 역시 무당산에 처음으로 도관을 열었던 도인이 가지고 온 부적이라는 전설과 상징성 때문에 보물이 된 것이다.

한데 다른 곳도 아닌 혈귀곡에서 이걸 노렸다?

진청진인이 조용히 얘기했다.

“지금 비다라는 아마도 혈귀곡에서 상당히 오랜 기간 준비한 무기였을 겁니다. 하지만, 저희 선배 도인분들께서 선기를 이용해 그 비다라를 억제했고, 대협께선 끝내 치료에 성공하셨지요.”

“그렇습니다.”

“혈귀곡 측에서도 비다라가 선기에 제어될 수 있음을 알게 됐으니, 그에 대한 대비책을 준비하지 않겠습니까?”

확실히 그럴듯했다.

혈귀곡에서도 비다라를 강호를 엉망으로 만들 비장의 수라고 여겼을 게 틀림없다.

아마도 어마어마한 자금과 시간을 들이부었겠지. 쉽게 포기하기엔 비다라의 가치가 무섭다. 당연히 선기에 억제되는 약점을 극복하는 대비책을 준비할 수 있다.

“하면, 이 신령부를 그런 이유로 노렸다는 겁니까?”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그리 예상됩니다. 신령부에 적힌 글귀는 해독이 어려운 상고시대의 문자. 무당에 도관을 처음 열었던 전설 속의 도인께서는 이 신령부의 신비한 힘으로 뭇 중생들을 구제했단 전설이 있으니까요.”

“그야…… 그렇긴 합니다만.”

진청진인은 조용히 상자를 열었다. 고급스럽게 잘 보관된 신령부는 그 명성에 걸맞지 않게 볼품없는 모습이다.

하긴 상고시대의 글귀가 적힌 부적이 지금까지 내려져 오는 것만으로도 기적인 일이니까.

“저희도 처음엔 이게 목적이 아니리라 생각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대협께서 비다라를 치유하는 그 선기의 원인이 전진교의 오성물인 선근경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천무백이 화산에서 선근경을 쟁취하기 위해 비무전을 벌였던 건 유명한 얘기니, 천무백은 순순히 인정했다.

그러자 진청진인이 과연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혈귀곡도 이 신령부를 노린 것입니다. 오성물 중 하나인, 이 신령부가 가진 힘.”

“……!”

“이 힘을 혈귀곡에서 노렸던 게 아닐까. 그 힘을 연구해 비다라가 선기를 이겨 낼 방법을 찾아내려 했던 게 아닐까.”

“잠시만요. 오성물에 이 신령부가 포함된단 말입니까?”

예상치 못한 대답에 천무백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성물.

선근경이 포함되는 다섯 개의 성물. 천무백의 물음에 진청이 옛날 얘기를 해주는 노인처럼 미소를 띠었다.

“예. 본래 오성물이라 하면, 이제는 사라진 전진교의 다섯 성물을 가리키나, 원래는 그렇지 않습니다. 중원 도맥의 시작점부터 전해져 온, 신령스러운 다섯 물건을 오성물이라 하지요. 훗날 전진교가 맹위를 떨치며 도맥의 오성물이, 전진의 오성물이라 잘못 알려졌을 뿐입니다.”

“…….”

예상치 못한 오성물의 발견에 천무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진교의 역사가 길긴 하지만, 중원 도맥의 역사는 그보다 더 깊었다.

하니 전진교의 오성물이 아니라, 중원 전체를 통틀어 오성물이라 칭한다면.

아마 이 신령부도 그만한 가치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여기 적힌 상고시대의 글귀는 우리가 해독조차 어려우니 문제입니다. 이 글귀를 해석한다면, 전설 속에 내려져 오는 신비한 힘이 무엇인지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검고 흐린 모습의 하나의 알이 곧 세상이요, 그 세상에 한 존재가 웅크리고 있노라.”

“……!”

진청과 대청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이 신령부에 적힌 글자를 보고 읽었기 때문이다.

하나 그들이 뭐라고 놀랄 새도 없이, 그때 신령부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비단 신령부뿐만이 아니었다. 글귀를 읽던 천무백의 가슴 부근에서도 투명한 빛이 흘러나왔다.

“무슨?”

갑자기 일어난 괴현상에 좌중은 입을 쩍 벌렸다.

하나 천무백 역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 못 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신령부에 적힌 상고시대의 글자들이 읽지 않아도, 머릿속으로 파고들었다.

그 글자 하나, 하나가 파고들 때마다 천무백의 신형이 크게 움찔거렸다.

천무백은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선근경!’

선근경의 구절을 처음 외웠을 때,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글자가 둥둥 떠다니던 느낌.

그리고 그 모든 글자가 머릿속에 각인 됐을 때.

모든 빛이 사라졌다.

“어…… 어!?”

대청과 진청의 대경실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령부가 먼지가 되어 사르르 사라지고 있었다.

아니, 그렇게 보였다.

천무백은 알았다. 그 신령부가 먼지가 되어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 뿐, 제 심장으로 파고들고 있음을.

이윽고 시간이 지나 상자에 담긴 신령부가 통째로 사라졌을 때.

좌중의 정적을 깨고, 천무백의 목소리가 조금 떨떠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니, 이게 삭아 버렸네?”

대청과 진청, 그리고 추혼삭의 황당한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

아니, 뭐 어쩌라고.

이게 제멋대로 내 몸에 들어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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