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4화 (154/318)

<검신재생 154화>

154. 포기가 빠른 남자.

대청진인은 하룻밤 새 몇 년은 더 늙은 것처럼 푸석한 얼굴이었다.

마음고생이 훤히 드러나는 모습이다.

대청진인이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좀 걸으실까요? 대협.”

“네.”

대청은 앞장서지 않았다. 한쪽으로 비켜선 뒤, 천무백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언뜻 보면 부자지간으로 보일 정도로, 적당히 거리가 있으면서도 어색하지 않은 발걸음이었다.

천천히 거니는 둘의 발걸음과 달리 무당은 부산했다.

합동제례가 끝나고, 이곳저곳을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어린 제자들과 적건의 무사들이 눈에 비쳤다.

불과 얼마 전까지, 서로 각을 세웠던 두 집단이 자연스럽게 얽혀 있었다.

병상 위에 누워 있는 적건회 무사를 치료해 주고 간호해 주는 건, 무당의 어린 제자들이었다.

스승이나 사형제를 잃고 울분을 참지 못하는 어린 제자를 위로해 주는 건, 적건의 나이든 무사들이었다.

그래서일까.

둘의 걸음은 느릿해졌다. 대청은 분명 할 말이 있어서 천무백을 찾아왔지만, 침묵했다. 천무백 역시 굳이 말을 재촉하진 않았다.

천무백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대청진인이 어떤 마음인지 보였다.

어떤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 어떤 고민을 심중에 품고 있는가. 짐작됐다.

그러다 문득, 여전히 보수가 이뤄지지 않은 자소궁 앞에 지날 때쯤에.

천무백이 우뚝 멈춰 섰다.

“처음 무당에 왔을 때도, 이리 걸었던 것 같습니다.”

“……그랬지요. 그때도 빈도가 대협과 함께 산책했었지요.”

천무백이 가볍게 웃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다르군요.”

“…….”

“그때 장문인께선 저에게 등을 보이며 앞서 걸어 나갔습니다.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요.”

대청진인은 대답하지 않고 천무백을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그때는, 빨랐습니다. 목적지를 향해 빨리 가야 하는 것처럼, 주위에 시선을 두지 않고 걸었습니다.”

지금은 달랐다. 주위를 둘러보며 시선을 멀리 보며, 시야를 넓게 하며, 목적 없이 거닐었다.

“목적이 없다기보단, 주위의 모든 것들이 곧 목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주위의 모든 것들?”

침묵하던 대청진인은 무언가 느낀 바가 있는지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천무백이 멈춰선 채, 뚜렷한 눈빛으로 대청진인을 쳐다봤다.

“무당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목적…….”

“도를 닦아 우화등선하는 것? 자연의 뜻을 깨닫고 육을 탈피하는 것?”

대청진인은 두 눈을 감았다. 그러다 서서히 눈꺼풀이 올라가며 입이 열렸다.

“……태극.”

태극(太極)

조화로움이자, 곧 균형.

천무백은 일전에 여기서 대청진인의 얼굴에서 태극이 사라지는 걸 목격했다.

“태극을 잃는다는 건 곧 균형을 잃는다는 것이고, 이건 순리를 거스른다는 뜻이겠죠.”

“……그렇습니다, 대협.”

“장문인께선 순리를 역행하셨고, 무당은 그로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습니다.”

“…….”

담담하나 말은 비수가 되어 대청진인의 가슴에 여지없이 박혔다.

장로들이 쉬쉬하던 내용.

애써 티를 내지 않던 그 내용을 천무백이 정면으로 들이박은 것이다.

하나 의외로 대청은 속이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고 다시 걸었다. 천무백 역시 같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장문인?”

“장문인께서 오셨습니까.”

천무백은 주위에서 쏟아지는 날카로운 시선에 쓴웃음을 지었다.

대청진인이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적건회가 머무르는 전각.

적건회 무인들이 대청진인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하나 추혼삭은 담담하게 나와 대청진인을 맞이했다.

“회주께서도 기다리고 계셨을 겁니다.”

그 말에 대청진인은 합장하며 전각 안에 들어섰다.

좋은 나무로 잘 짜놓은 관.

그리고 그 안에는 무천악의 시신이 놓여 있었다.

깨끗하게 염을 했는지, 곱게 잠이 든 것처럼 평안한 모습이었다. 천무백도 들었다. 무천악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형님…….”

대청진인은 슬픈 눈빛으로 무천악의 시신을 매만졌다. 그 행동이 얼마나 처연한지, 조금은 날선 얼굴이었던 추혼삭 역시 착잡한 표정이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깊게 가라앉은 정적 사이로 대청진인의 흐느끼는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다 짊어져야 합니다. 모든 게 내 책임이어야만 합니다.”

대청진인은 속개라도 하는 듯이 얘기했다.

“…….”

그래야만 했다. 그는 장문인이다. 무당의 최정점.

무결해야 하며, 순백이어야만 한다.

문파에서 장문인의 권력은 공고해야 하며, 그 위명 역시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랬기 때문에, 그가 그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된다.

이번 일은 명백히 순리를 역행했다.

장로들 사이에서도 장문인에 대한 책임론이 거세게 솟구칠 것이다. 특히 무학파 장로들 중심으로. 그러나 장로 중에도 장문인에게 책임 문다는 자체를 받아들이기 힘든 부류도 분명히 존재한다.

장문인이 책임진다는 것 자체가, 그 문파가 잘못됐음을 인정하는 꼴이니까.

하면 또 반목이다. 또 갈등이다.

“그래요. 그러니, 내가 다 책임져야 합니다. 모든 것이 무조건 제 잘못이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순리라고 생각하십니까?”

“균형을 맞추기 위한 순리이지요. 대협과 얘기를 나누고나서야 제가 마지막까지도 아집에 잡혀 있었단 걸 깨달았습니다. 오로지 내가 아니면 무당이 안 된다는, 나만이 무당의 도를 지키고 좇을 수 있노라는…… 지독한 아집 말이지요.”

침잠하게 가라앉았던 눈이 점차 맑은 빛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그 너머에 옅었던 태극이, 점점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하면 물러나실 생각입니까?”

애당초 천무백은 대청진인이 자신을 찾아왔을 때부터.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곧장 깨달았다.

바로 무당 장문인 자리에서 내려오는 것.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번에 대청진인이 행했던 모든 행위가 샅샅이 밝혀질 것이고 거센 책임론이 생기리라.

더구나 적건회는 끝내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 자신들의 가치를 증명했다.

40년 전의 의지가 변하지 않았음을 강호 만방에 널리 알렸다.

하니 적건과 무당은 이제는 하나처럼 굴러가야 하며, 둘 사이의 알력은 줄어들 것이 자명하다.

적건의 무사들과 무당파 제자들은 전우를 넘어 형제 같은 우애를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장문인 자리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이 젊은 사내가 벌써 내려온다는 건…….’

곧 무당의 실책을 의미하며, 비록 적은 숫자지만 적건회의 영향력이 무당 내에서 어마어마하게 커진다는 건 누구나 예측할 수 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다. 적건은 무당을 지키는 검이며, 무당을 적으로 돌릴 일이 없음을 천무백 역시 확신했다. 부회주 추혼삭이나, 그 휘하의 무사들은 모두 무당을 위해 싸웠으니까.

하지만 많은 시간이 흘러서 결국 뜻이 변한다면?

아마도 무당은 무당의 도를 잊을 것이다.

적건의 검이 곧 무당이 되리라.

천무백은 대청진인을 바라봤다.

깊이 고뇌하던 얼굴이 점점 밝아졌다. 결국, 그의 행동이 잘못된 건 확실하나, 그 의도와 목적은 분명 무당의 도를 지키기 위함인 건 틀림없다.

천무백을 바라보는 대청진인의 눈이 밝게 빛났다.

‘무당보다 더 태극과도 같은 사내.’

하여 지금 대청진인은 천무백과의 대화를 원했다. 왜인지는 몰랐다.

천무백과 대화를 나누면, 답답한 마음이 풀릴까 싶었던 생각일지도.

결과적으로 옳은 결정이었다.

‘한낱 나이는 중요치 않구나. 이 사람이야말로, 태극 그 자체이며, 천하제일의 협객이며, 풍운아로다.’

천무백에게서 많은 걸 보고, 느끼고, 배웠다.

대청진인은 마음을 굳혔다.

“장문인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겠습니다.”

옆에 침묵하고 있던 추혼삭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천무백의 표정 역시 묘해졌다.

내가 아니면 무당의 도를 좇지 못한다, 그 뜻인가? 아직도 저 멀리 목적 하나만을 보고 있는가?

하나 그 의문과는 달리 대청진인의 얼굴에 떠오르는 태극은 점점 진해졌다.

이윽고 대청진인의 입이 열렸다.

“나는, 무당파에서 파문(破門)당할 것입니다.”

* * *

“정녕 그리하셔야겠습니까?”

진청진인의 물음에 대청진인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부탁함세. 사제.”

“장문인…… 아니 사형, 죄를 뉘우치고, 제자들과 적건의 무인들 앞에서 사과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아니야. 그래선 안 되네.”

대청의 단호한 말에 진청은 입을 다물었다.

그 말뜻은 진즉 이해했다. 단순히 자리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완전한 파문(破門) 당하는 것.

무당에서 적을 내린다는 것 아닌가.

이 같은 조치가 알려지면, 오히려 적건회 무사들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라는 반응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파문이란 곧 단전을 폐하고 내쫓는 것일진대…….

“그건 봐주게. 죄를 갚기 위해, 그리고 무당을 지키다 부러진 검인, 우리 형님을 위해서라도. 균형을 되찾아야 하네.”

“균형 말입니까?”

“태극에는 흰색과 검은색이 있지. 한데 작금의 강호를 커다란 태극으로 보면, 이 검은색이 흰색을 물들이고 있네. 종국에는 끝내 완전히 검게 변할 걸세.”

태극.

흰색은 백도 무림이요, 검은색은 곧.

“마도…….”

“그래. 천룡검협이 그리 말하더구나. 현재 강호가 직면한 위기는 모든 이가 느끼고 있는 바보다 더 거대한 악이라고. 이미 균형은 마도 쪽으로 무너져있으니, 태극을 품고 있는 무당이 균형을 맞춰야 하지 않겠냐고.”

“하면…… 사형께선 혈귀곡 놈들을 추적하겠단 뜻입니까?”

“그래. 그것이 순리라면. 검게 물드는 마도를 원래대로 되돌려놓기 위한 순리라면 행할 생각이네”

“하면 같이 하시지요. 장문인 자리에서 내려오기만 하시고, 속죄하신단 뜻으로 타격대의 대장을 맡아 강호로 나서시는 게 훨씬 낫지 않습니까. 무당에서 파문당하다니요.”

대청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난 중원 밖으로 나갈 걸세.”

“새외로 말씀입니까?”

“천룡검협, 그 친구가 그리 말하더군. 중원은 자신이 어떻게든 해 보겠으니, 새외로 가 달라고. 대단한 자신감이 아닌가. 이 넓은 중원을 홀로 담담하게 지켜내겠다고 하는, 그 담대한 대의(大義)라니.”

“…….”

“그 어린 청년이 순리를 행하고 있네. 나 스스로 순리를 역행하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게 내가 태극을 되찾고, 순리대로 균형을 이루는 유일한 길일세.”

진청은 입을 다물었다. 맑은 정광이 가득한 대청진인의 눈에선 현기가 느껴졌다. 그 어린 시절. 무당의 최고 기재로 든든하게만 느껴졌던 대사형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자네에게 미안하네. 너무 큰 짐을 맡겼어.”

“후우. 큰 짐이지요. 아주 큰 짐이에요. 하지만, 한번 잘해 보겠습니다.”

“무당의 도를 잊지 말아 주시게. 사제, 아니. 장문인.”

“…….”

대청은 그리 말하곤 찻물을 들이켰다. 여러 제례가 끝나면 곧 파문이 공식 발표될 터. 사람이라면 심적으로 초조할 만도 한데, 대청진인은 그저 여유로운 얼굴이었다.

그러다 문득 물었다.

“천룡검협은 어디에 계신가?”

“그, 도인분들께 물어볼 게 있다고 해서 자리를 마련해드렸습니다.”

“도인들께?”

“예. 선기에 관해 물어볼 게 있다고…….”

* * *

천무백이 네 명의 도인들을 찾은 건 간단한 이유였다.

마치 내기를 다루는 것처럼 선기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네 명의 도인들.

그들에게서 지금 중단전의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였다.

도인들 역시 천무백을 보고 신기해했다.

“허어. 도를 닦지도 않은 이가 선기를 품었다니.”

“과연 만류귀종이란 말이 옳은가. 검을 갈고 닦으면 그 도를 얻고, 선기를 다루게 되는 것일지니…….”

천무백은 제 몸을 뜯어 살피는 도인들을 가만히 내버려 뒀다. 신선 같은 풍모의 노인들이 천무백의 몸을 이리저리 만지는 모습이 꽤 재밌는 광경이었다. 곁에 있던 능허는 그 꼴이 우스운지 피식 웃었지만, 반면 제갈설아의 얼굴엔 걱정이 떠올라 있었다.

포천산장에서의 전투 이후 천무백의 안색은 새하얗다 못해 핏줄이 보일 정도로 창백하게 질린 상태를 계속 유지 중이었다.

하니 걱정이 될 수밖에.

“그래요. 이 선기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싶다는 것이지요?”

드디어 도인이 본론에 들어가자 천무백이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선기를 다루는 방법. 그것만 안다면 어떻게든 천무백은 행할 생각이었다.

하나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너무 원론적인 얘기들이었다. 속세와 연을 끊고 도를 닦고, 살생을 금하며…….

그리고 마지막에 들려오는 소리에 천무백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모든 육식을 금해야 하오!”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능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서로 같은 생각이 스친 듯했다. 능허가 단호하게 말했다.

“포기하시죠, 주군.”

“그래. 포기하자. 이건 아니다.”

육식은 못 참지.

“생각보다 포기가 빠른 남자십니다.”

“누구보다 과감한 결단력의 남자라고 생각해라.”

매번 애늙은이 같고 어른처럼만 느껴지던 천무백이 툴툴대는 모습에, 제갈설아는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제야 제 나잇대 모습처럼 보였으니까.

하나 천무백은 진지했다.

‘무공이 아무리 내가공부가 중하다고 한들, 육체의 굳건함과 바탕은 당연히 기본이 되어야 한다. 육식을 금한다는 건 이걸 포기하겠단 뜻이지. 무학파 장로들이 도학파를 싫어하는 이유가 이거였네.’

물론 그게 진짜 이유는 아니었지만.

“뭐 육식하지 않는다고 선기를 다룰 수 있는 건 아닐 테고.”

육식하지 않는 건 그저 기본적인 것일 뿐.

도인들이 말하는 건 지극히 원론적인 얘기였다. 도경을 읽고 수양하며 도를 닦는 것.

애석하게도 혈귀곡이란 적을 맞이한 천무백으로선, 행할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그리고 예상보다 그 방법은 가까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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