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3화 (153/318)

<검신재생 153화>

153. 보고 싶었어요.

무명은 어째서 자신이 이런 꼴이 됐는가 곰곰이 생각했다.

“개같은 말코놈들……!”

무천악의 검격에 단전에 심각한 내상을 입은 게 첫째 이유요.

둘째는 대청진인의 검에서 펼쳐지는 태극혜검에 왼팔이 잘렸다는 점이다.

천하의 무명도 팔이 잘리고, 단전이 다치면 당장 몸을 정비해야 한다.

하나 대청진인의 검은 무당 특유의 능유제강(能柔制强: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제압한다)이 아니었다. 적건회 특유의 지극히 실전적이고 흉흉한 살검에, 태극혜검이 담긴 기묘한 것이었다.

천하의 무명도 그걸 버텨 낼 도량이 없었다.

대부분 산장으로 복귀해 남은 인원도 얼마 없어 숫자에서도 밀린다.

상태가 좋지 않으니 대청진인을 죽이기는커녕, 자신이 죽을 위기다.

결국, 무명은 도주를 선택했다.

입신지경의 절대자가 작심하고 도망치면, 그걸 쫓는다는 것 자체가 같은 입신지경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단숨에 대청진인을 따돌린 뒤 몸을 내뺀 무명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이대로 복귀해 봤자, 내 목은 온전할까?’

무당에서 암약했던 계책의 책임자는 본인.

최선도 실패했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차선도 망했다.

이제는 살아서 도망치는 게 목표.

모든 계획이 어그러졌다. 살아 돌아간다 해도 엄격한 곡의 규율에 따르면, 내 목이 과연 온전할까?

‘비량, 그 양반은 적어도 내 편이니 도와주겠지만…… 으으. 나머지 놈들은!’

죽는다.

자신에게 책임을 물어 죽을 게 분명하다. 하니 뭐라도 면죄를 받을만한 걸 얻어 가야 한다.

무명은 무당을 벗어나기 전에, 난암궁을 노렸다.

‘태극혜검을 비롯한 비급을 불태우던지, 최소한 신령부라도 가져가야겠다!’

무당의 성물이자 송문고검, 장문령부(掌門令符)과 더불어 무당삼보(武當三寶)에 포함되는 신령부(神靈符).

오히려 태극혜검 같은 절기의 비급보단, 신령부가 훨씬 중했다.

‘무당의 내분이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틈을 타 적어도 신령부만큼은 확보하란 명이 있었으니까!’

그러면 적어도 목숨은 보전할 터.

무명은 무당산의 깊숙이 숨었다. 당장 줄줄 새는 내공도 틀어막아야 했고, 지금 몸 상태로 멀리 도망치기는 글렀으니까.

그가 작심하고 몸을 숨기니, 추적대는 쫓지 못하고 갈팡질팡했다.

오히려 무명은 혼동을 줄 수 있는 흔적을 틈틈이 남겼다.

다른 방향으로 무당과 적건회의 무인들을 유인하기 위함이었다.

“저쪽으로 향했다! 저쪽이다!”

의도대로 추적대들은 무당을 나와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인원이 충분히 빠져나간 걸 확인한 무명은 곧장 움직였다.

내상을 입은 몸임에도, 어차피 이대로면 죽을 게 자명하니. 무명은 작심하고 경공을 극도로 운용했다.

신령부와 온갖 비급이 모여져 있다는 난암궁, 그중에서도 깊은 비고(祕庫)가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

째애애애앵!

별안간 쇄도해 오는 검격에 무명이 급히 경로를 틀었다.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스쳐 가는 검.

무명은 눈앞에 드러낸 검객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무당의 무공도 아니요, 그렇다고 오랫동안 봐왔던 적건의 무공도 아니다.

무명은 곧장 일장을 내질렀다.

쩌저저적!

하나 상대는 힘들지 않게 막아 냈다. 무명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적어도 무천악과 비슷한 무위. 단전에 검을 박아 심각한 내상을 입힌 무인과 동급이라면. 짧은 시간 내에 처리할 수 없다. 하물며 지금은 부상 중이지 않은가.

불현듯 익숙한 검로에 무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세섬도 무용이냐? 제갈가에서 식충이 짓이나 한다던 그 놈?”

적어도 무당뿐 아니라 호북성에서 내로라하는 무인들에 대한 내용은 자세히 파악하고 있기에, 상대가 누군지 금방 파악했다.

“흥. 빌어먹을 제갈 씨 놈들. 네놈들도 곧 끝장내 주마!”

무명은 그리 말하며 다시 한번 일장(一掌 )을 내질렀다.

속이 뒤집히는 고통과 함께 쏟아 낸 강력한 마기에 무용이 급히 피했다. 한번 몰아붙인 무명은 이참에 끝장낼 기세로 파고들었다.

“이노옴!”

무용이 마치 미꾸라지처럼 재빠르게 무명의 조공을 피해 빠져나갔다.

그러다 문득.

무명은 자신을 끌어들인다는 생각이 퍼뜩 들어 멈춰 섰다.

하지만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쿠구구구구!

“수가기문도!”

무명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탄식이 터져나왔다.

무당에 설치된 약식 수가기문도.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무명은 그걸 피하고,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정상적인 몸 상태였을 때라고 가정한다면.

심지어 지금 수가기문도는 절대 평범하지 않고, 약식이라고 경시할 수도 없다.

태상가주를 제외하고 현시점에서 수가기문도에 있어 가장 권위가인 제갈설아가 직접 실시간으로 대응하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도화선을 건드려야 발동되는 기관진식도 수가기문도의 명성에 걸맞게 분명 위험하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건, 제갈설아가 틈틈이 상황을 보며 실시간으로 기관진식을 탄력 있게 작동시키는 것이다.

“이이이익!”

어디선가 날아오는 수백 개의 철편이며, 날붙이며, 독무(毒霧:독안개)까지.

도대체 어디서 기관이 발동되는지, 어디가 함정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뿐이랴. 거기에 천세섬도 무용은 기관진식에 영향을 받지 않고 틈새를 집요하게 노렸다.

이 모든 게 제갈설아가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수가기문도를 운용하는 결과였다.

입신지경의 절대자가 빠져나갈 수 없는 거대한 함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케흐윽!”

입에서 한웅큼의 핏덩어리를 토한 뒤. 무명은 붉게 충혈되다 못해 혈관이 터져 피눈물을 흘리는 눈을 부릅떴다.

‘끝났구나.’

죽음이 목전까지 임박했음을 느꼈다.

하나 그 최후가 너무 허무하지 않은가. 입신지경 절대자의 죽음이 고작 기관진식에 갇혀 죽는 것이라니.

무명이 이를 악물었다.

정면의 여린 신형이 망막에 맺혔다.

“오냐, 오냐! 가는 길에 제갈 씨 정도 길동무로 삼아줘야지!”

무명이 남은 힘을 쥐어짰다. 의도를 눈치챈 제갈설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무명의 몸이 새하얀 잔상을 남기며 쭉 늘어났다. 제갈설아가 황급히 기관진식을 발동했다.

무수히 많은 검과 날붙이들이 무지막지하게 쏟아졌지만,

무명은 급소만 보호한 채 몸을 내던졌다.

‘동귀어진!’

무명의 손아귀가 망막에서 크게 확대됐다. 수많은 사람의 심장을 터뜨려 버린 가공할 조공.

‘막을 수 없어.’

이제 갓 후기지수로 강호에서 이름을 떨칠 그녀로선, 입신지경의 절대자를 막을 수 없었다.

새빨간 손톱이 공간을 가르고, 단숨에 그녀의 머리통을 움켜쥘 듯 확대된다.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에서 피를 흘리는 상태라고는 생각지도 못할 가공할 속도. 제갈설아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충격이라거나, 내상이라거나, 벌레에게 물렸을 때 약간의 따끔함 같은 것도.

“……!”

감았던 눈이 스르르 올라갔다. 눈앞에선 피안개가 펼쳐졌다. 하나 그녀에게 닿은 핏방울은 단 조금도 없었다. 전율스러울 정도로 가공했던 무명의 손이 부러지고, 얼굴에 검을 박은 사내의 등이 서서히 보였다.

콰직.

입을 뚫고 목젖을 관통한 검을 그대로 뽑자 무명의 몸이 스르르 무너졌다.

“늦지 않게 오겠다고 했는데, 조금 늦은 것 같아 미안하오.”

새하얗다 못해 유난히 창백하게 질린 얼굴. 시퍼런 핏줄이 그대로 드러나는 얼굴에서 흘러나오는 차분한 목소리.

그리고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같이 깊은 눈동자.

방금까지 머릿속을 지배했던 두려움이란 먹구름이, 서서히 걷혀지고 햇살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제갈설아는 불현듯 옛말이 떠올랐다.

처음 만나면 우연이요, 두 번 만나면 인연이고, 세 번 만나면 운명이라고.

하물며 검왕곡에서 처음 도움을 받았고, 무당으로 향하는 길에서 자객의 습격으로 두 번째로 구함을 받았으며, 지금 세 번째.

단순히 만나는 것도 아닌, 구명을 받았다.

고작 하루인데.

제갈설아는 맥동하는 가슴에, 저도 모르게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대로 말이 튀어나왔다.

“보고 싶었어요.”

헛소리였지만, 헛소리가 아닌 진담이었다.

* * *

무위자연을 추구하는 무당답게, 장례식은 거창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만큼은 엄숙했다.

능허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몸은 괜찮소? 주군?”

“내가 너한테 그런 걱정 어린 소리를 듣다니, 네가 보기에도 영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나 보다.”

“그야 당연하지 않소. 당장 뒈질 사람처럼 얼굴빛이 창백한데. 핏줄이 보일 정도 아니요. 핏기 하나 없는 얼굴인데.”

“끙. 큰 힘에는 큰 대가가 따른다더니…….”

천무백의 미간이 좁혀졌다.

포천산장에서의 연이은 격전으로 천무백의 몸 상태는 영 말이 아니었다.

상단전이나 하단전은 운기를 통해 안정적으로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중단전은 달랐다.

가냘프다 못해 중간중간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해진 상태.

문제는 선기의 띠가 연약해질수록 띠가 둘러싼 심장에 불가피하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이거야 원. 제갈설아에게 말해서 악인봉행진을 다시 써야 하나.’

그러나 위험이 크다. 선기가 폭주하듯 요동치면, 지금 상태론 중단전이 당장이라도 파괴될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아직 위험한 건 아니니.’

빙백신공이나 경천혼공, 둘을 동시에만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얼굴에 핏기가 없는 거야 심장 부근이 영 안 좋으니, 지금이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몸 상태가 뭐 중요하겠냐, 능허야. 죽은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데.”

“참, 역설적인 일 아니요? 주군.”

이번 혈사에서 죽어간 이들을 기리는 합동 제례를 보며 능허가 혀를 찼다.

“무당 장문인이란 사람은 흉수가 누구인지 알고, 어디 있는지 아는데도, 적건회를 내치려는 명분 때문에 내버려 뒀던 거 아니오.”

“나중에 처리할 수 있으리라 여겼겠지.”

하지만 어림도 없는 얘기다. 적건회를 내친 무당이 무명을 이길 수 있을까. 무명 하나라면 모를까. 무명의 뒤에 있던 비량과 호북성에서 암약하고 있던 혈귀곡을 어찌 처리하겠나.

치명적인 오판이자 실책이었다.

무명은 대청진인의 예상보다 훨씬 더 강한 무인이었고, 끝내 무당은 큰 피해를 보았다.

한데 역설적인 이야기는.

“적건회의 무사들 중 사 할이 죽었고, 나머지 이 할은 다시는 검을 잡을 수 없는 부상에 단전이 망가졌다지 않습니까. 참.”

보통 흑도는 정파를 좋아하지 않는다. 능허도 마찬가지다. 본래 구파일방을 비롯한 백도무림에 반감이 있는 능허의 목소리엔 냉소가 잔뜩 묻어나왔다.

“그리도 내치려던 적건이 무당을 또 구하지 않았습니까.”

능허의 말대로 역설적인 일이었다.

무당의 제자도 많이 죽었지만, 적건회에 비해선 그리 많은 수도 아니었다.

적건회는 사실상 괴멸 직전까지 이르렀다.

암암리에서는 그런 말이 돌았다. 절반의 무사가 이탈했으니, 결국 대청진인의 뜻대로 됐다고.

어찌 됐건 가장 큰 피해를 본 건 적건회를 비롯한 무학파 무인들이니.

적건회를 적대하던 도학파의 입장은 크게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 서로 파벌을 나눠 싸울 때가 아니긴 했다만.

무당에 감도는 분위기는 심각했다.

“모든 게 빈도의 탓입니다.”

“……커흠, 험흠.”

대청진인이 나타나자 능허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천 공자님.”

“예.”

“잠깐, 얘기를 나누실 수 있겠습니까?”

천무백은 대청진인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죄책감이 묻어남과 동시에 초탈한 빛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 뒤로, 언뜻 태극이 비친다.

천무백은 쓰게 웃었다.

‘삶은 후회하면서 깨닫는 법이지.’

다치고 나서야 태극을 깨닫는 것도, 무당에게 있어선 어쩌면 필연적인 일이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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