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2화 (152/318)

<검신재생 152화>

152. 천하제일청소부

“장 총관아.”

천무백은 목소리를 크게 내는 편이 아니다. 비교적 차분하고 작은 목소리였는데, 놀라운 점은 어디에 있든 마치 귀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또렷하다는 것이다.

전각 안에서 혈귀곡에 관한 모든 서류를 능허와 함께 정리하고 추려 내던 장 총관은 머릿속에 박히듯 선명한 목소리에 허리가 빳빳하게 펴졌다.

능허가 혀를 쯧쯧 찼다.

“거참. 사내새끼가 이렇게 간담이 작아서야. 응? 나는 저 양반한테 대든 적도 있는데. 쯧쯧쯧. 이보시게. 사내라면 무공이 아니라 간댕이를 믿고 살아야 한다니까.”

물론 그런 얘기가 장 총관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장 총관은 경기라도 일으키는 것처럼 벌벌 떨며 밖으로 나갔다.

“으으음!”

굳게 다문 입술 사이를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어린애처럼 끔찍한 비명이라도 내지르고 싶은 심정이다.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마도(魔道)를 걷는 마인으로 끔찍한 광경은 수도 없이 봐왔다.

시체로 쌓인 산?

그게 뭐가 대수겠는가.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지금껏 봐온 시체들의 산은 자신들이 죽인 적들의 모습이었지.

내 편이 죽어 시체 산을 쌓은 광경을 언제 봤겠는가?

‘이, 피에 미친 악귀 같은 놈······!’

천무백의 등을 바라보는 장 총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쓰러진 시신 중엔 눈에 익은 자도 있었고, 저와 비슷한 실력자도 서넛쯤은 되었다.

흉포한 마성을 아낌없이 터뜨리던 마인들이 모두 한낱 싸늘한 시체가 됐다.

오성 비량을 상대해 놓고도, 마인들이 찾아오는 대로 족족 죽여 저리 만들었다.

가공할 신위(神威)에 장 총관의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악독한 마인도 천무백의 잔혹한 손속에 치가 떨렸다.

“부, 부르셨습니까.”

“저기 앞에 들어온 놈부터 이름 말해.”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살생부를 펼쳤다.

장 총관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마인들끼리 동료라는 개념은 그리 정답지는 않지만, 그래도 같은 편의 이름을 일일이 불러주는 행동에 죄책감이 들었다. 마치 사형수들의 이름을 불러 주며 사형선고를 내리는 기분이었으니까.

“맨 앞에 있는 놈이 수라검 임척도요, 바로 우측에 있는 작자가 삼침살(三針殺) 적모요, 그리고 옆에 있는 놈이······.”

긴 호명이 끝나자, 천무백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드디어 호북성 놈들은 다 왔네.”

장 총관의 몸에 소름이 쫙 올라왔다.

이게 마지막이다. 당장 자신이 아는 호북성 내에 암약한 혈귀곡 소속 마인들이 이제 저들이 전부다.

자신이 직접 살생부를 작성했고, 일일이 이름을 확인시켜줬으니까.

“다 빨간 줄 그어.”

“······!”

장 총관은 입술을 깨물곤, 살생부를 받아 그 이름들을 하나씩 죽죽 그었다.

그리고 문득, 가장 마지막.

호북성 마인 명부 중에 제 이름이 마지막에 적힌 걸 보고 우뚝 멈췄다. 자신이 적은 건 아니다. 제 필체가 아니다. 천무백이 적은 것이다.

장 총관의 고개가 툭툭 끊어지는 것처럼 부자연스럽게 들렸다.

때마침 내려다보고 있던 천무백의 시선과 허공에서 맞닿았다.

무덤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이름을 지워 줄지, 아니면 위에 빨간 줄을 죽죽 그을지는. 일이 끝나고 생각해 보지.”

도망칠 구석, 조금이라도 살려 줄 기미를 보여 준다면 사람인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이다.

애당초 생사를 초탈한 고수나, 도를 닦은 이가 아니라면 말이다.

거기에 천무백은 장 총관을 제 의도대로 마치 쓸모가 있는 것처럼 부렸고, 다 죽어 나가는 동료들과 달리 자신은 특별대우를 받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그 점 때문에 장 총관은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쩌면 살수도 있으리란 작은 희망에 천무백의 지시를 따랐다.

“자. 어디 보자.”

풍채 좋은 중년인.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적절히 인상 좋은 얼굴의 임척도는 정문 앞에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수라검 임척도. 곡내 서열 이십이성(二十二星). 청린표국의 국주로 위장, 호북성 내 혈귀곡 조직의 연락망임과 동시에 자금조달 담당. 가진바 무공은 절정에서도 상(上). 맞나?”

천무백의 또렷한 목소리에 임척도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당혹감이 잔뜩 묻어난 눈빛이 천무백 곁의 장 총관에게 향했다.

“장 총관, 아니 장광도! 네놈이 배신해?”

장 총관이 눈을 질끈 감았다.

“배신은 무슨, 나 살길 찾는 거요.”

임척도의 얼굴에 분노가 떠올랐다.

“너, 이 개 같은 새끼. 네놈의 살거죽을 벗기고 내장까지 오독오독 다 씹어 먹어 주마!”

“그건 우선 나부터 제치고 얘기하시고.”

호흡 사이를 절묘하게 끊고 들어오는 천무백의 말에 임척도는 입술을 깨물었다.

주위에 있는 시신, 장 총관의 배신, 피칠갑을 한 채 서 있는 천무백.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한 임척도는 탄식이 절로 나왔다.

‘아뿔싸, 실수로다! 천룡검협은 이미 입신지경에 오른 절대자구나!’

혹시나 했던 가정이 눈앞에서 드러나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잠깐, 설마······ 일이 다 이렇게 될 줄 알고 의도했단 말인가?’

순간 드는 생각에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장 총관을 통해 호북성 내의 마인들을 모두 죽이려고?’

교묘했다. 실로 교묘했다.

어쩌면 자신이 병력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심하는 것마저 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훤히 예측한 것일지도 모른다.

일부러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지원요청으로 혼동을 주고, 조심스럽게 행동할 것을 예측. 병력 일부를 나눠서 보내게 의도한 것이다.

“정녕 악독한 생각이고, 계획이로구나! 뱀 같은 놈이었어. 일이 이리될 줄 알고 그딴 식으로 서신을 보내?”

“뭐?”

예상치 못한 소리였는지 천무백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임척도가 어림도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흥. 이 간악한 놈. 그 세상사 모르는 귀공자 같은 순진한 얼굴로, 뒤에서 이딴 식으로 계책을 짜? 모를 줄 아느냐? 네놈이 이렇게 호북성 내의 조직을 각개격파하려고 서찰을 보낸 것 아니겠느냐!”

그 말에 천무백은 입을 꾹 다물었다. 순간 능허와 장 총관의 감탄한 시선이 쏟아졌다. 천무백이 침묵하자 능허는 조용히 혀를 내둘렀다.

“거. 무당 다녀오더니, 점도 볼 줄 아나. 대단한 양반이네. 진짜.”

물론 천무백의 속내는 전혀 달랐다.

‘아니…… 그냥 지들이 따로따로 와놓고 뭔 개소리를 하는 거야?’

덕택에 일이 편했다. 몸 상태도 정상이 아니었는데, 이 어마어마한 숫자가 전력으로 한 번에 부딪혀 왔다면.

솔직히 말하면 천무백은 일단 도주로까지 확보해놨다. 여차하면 도망치면서 추적해오는 놈들을 차근차근 죽이려고.

하지만 병력을 쪼개서 연이어 들어온 덕택에 중간에 휴식을 취하고 운기를 할 시간이 충분했다.

천무백이 어처구니없다는 미소를 짓자, 임척도가 검을 꽉 쥐었다.

“내가 손바닥 위에서 놀았구나!”

임척도는 천무백을 보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상대가 계책을 부려, 혈귀곡 마인들을 대부분 각개격파 했지만.

아직 남은 수효는 일백

아마 상대도 백에 달하는 마인과 싸우기 꺼릴 터.

혹시 몰랐다. 마지막 협상을 할 수 있을지.

“원하는 게 뭐지? 대체 왜 이러는 것인가.”

하나 천무백의 대꾸는 싸늘했다.

“원하는 거? 원하는 거라기 보단, 난 깨끗한 게 좋아.”

“깨끗한 것?”

“길거리에 오물이 있으면 냄새나고 눈살이 찌푸려지잖아.”

“이, 개자식이······.”

자신들을 오물이라고 빗대 표현한 것이니, 협상할 가능성은 전무(全無).

임척도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한데 보아하니······ 어느 정도 지친 것 같은데?’

임척도 역시 전투에서의 감각이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마인.

천무백의 상태가 어떤지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지쳤다. 분명 지쳤어. 하긴, 오성 어른과 싸우고, 아무리 각개격파라고 해도 이만한 마인들을 참살했는데······ 사람인 이상.’

그쯤 되자 임척도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적방주를 비롯해 조직의 우두머리들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했다.

‘단번에 끝내야 하오. 그 과정에서 서넛쯤은 목숨을 달리할지도 모르지.’

‘내가 희생하겠소이다.’

‘나도 여기서 까짓 죽겠소.’

‘내가 놈의 다리를 붙잡겠소.’

확실히 임척도의 예상은 정확했다. 녹록지 않은 강호 경험과 타고난 전투 감각.

실제로 천무백의 호흡은 거칠어졌고, 내기의 흐름도 부드럽지 않고 중간중간 끊겼다.

예상대로 천무백은 지쳤다.

오성과의 격렬한 싸움에 이어 밤새도록 물밀 듯 밀려오는 적들을 다 쳐냈으니까. 아무리 중간에 휴식을 취했더라도, 육체의 한계였다.

임척도가 신호를 보내자, 일곱 명이나 되는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일제히 궤적을 그리며 천무백에게 도달했다.

“죽엇!”

스스로 희생을 감수한 세 명이 궤적을 그리며 불쑥 솟구쳤다.

제 몸을 도외시한 채 날리는 공격.

한 명은 천무백의 하반신, 한 명은 오른팔, 한 명은 뒤를 노렸다.

하나같이 방어를 도외시한 채 쏟는 공격이니 지독히도 흉흉했다.

임척도는 한 박자 늦게 검을 머리 위로 세우며 쇄도했다.

저 셋은 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천무백의 손과 발은 잠깐 묶어둘 수 있으리라.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희생으로 천무백의 몸이 묶이는 짧은 찰나 머리를 쪼개 버리겠다는 판단.

천무백이 나무 밑동에서 일어나며 비교적 자유롭던 왼손을 휘둘렀다. 새하얀 서리 같은 기운이 뿌려졌다.

팟, 팟, 팟!

동시에 바닥에 널브러진 돌멩이 세 개를 발로 툭툭 차올랐다.

퍽! 퍽! 퍽!

돌멩이 세 개는 그대로 달려들던 세 명의 정수리에 정확히 박혔다.

“……!”

앞서 나갔던 세 명이 실 떨어진 인형처럼 푹 주저앉자 임척도는 당황스러웠다.

단순한 직선 궤적이었기에 저 돌쯤은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건만.

피하지 못했다. 하나 임척도는 이미 몸을 내던졌기에 망설임 없이 칼을 수직으로 그었다.

아니, 그으려고 했다.

“······!”

칼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몸이 뻣뻣하게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억지로 움직였다. 몸에서 끼기긱하는 소리와 동시에 직감했다. 이거, 틀렸다고. 잠깐의 흔들림. 찰나의 정지. 그것만으로 검의 궤적이 완전히 틀어졌다.

그 사이 천무백의 칼날이 번쩍였다. 목에서 따끔한 감각이 느껴졌다.

비스듬해지는 시야 사이로, 임척도는 제 손과 칼에 얼린 얼음 서리를 봤다.

‘빙공······.’

이윽고 머리가 뚝 떨어져 바닥을 굴렀다.

천무백은 거침없이 검을 휘둘렀다. 기세 좋게 달려들던 조직의 우두머리들이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툭툭 쓰러졌다.

그 끔찍하고도 비현실적인 광경에, 말단 수하 마인들 중 심약한 몇몇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알, 알려야 해! 이 소식을!”

누군가는 그리 소리치며 밖으로 향했다.

콰직!

“······!”

하나 그 의도는 달성되지 못했다. 문밖에서 불쑥 솟구치는 파릇한 민머리의 호쾌한 일장에 가슴이 쩍 벌어지며 쓰러졌다.

번지는 핏물위로 피에 젖은 승려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한승들은 모두 살계를 열고, 단 한 놈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모조리 죽여라!”

승려의 입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들 정도로 살벌한 어조와 함께 무소선사와 나한승들이 일제히 출구를 막아섰다.

나한승들이 본격적으로 싸움에 끼어들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이미 조직의 우두머리들을 천무백이 모두 죽였으니까.

“이놈들만 다 잡으면, 호북성도 청소가 다 된 건가.”

길거리는 깨끗해야 한다.

늘 걷는 거리에 말똥도 있고, 소똥도 있고, 쓰레기도 있고, 먹다 흘린 음식물도 있고, 누군가 토악질한 토사물도 있으면.

이 얼마나 더러운가.

“지금의 중원이 그래.”

최선은 길거리가 더럽혀지지 않게 하는 것이 우선이요.

하나 이미 더러워졌다면, 누군가는 그 오물을 치우고 깨끗이 거리를 닦아야 하지 않겠는가.

천무백은 길거리의 청소부를 좋아했다.

똥을 먹고 사는 들개들, 대갓집 앞마당을 청소하는 하인들, 음식물을 먹어 치우는 짐승들······.

거리의 청소부들이 있기에 거리는 깨끗하다.

“중원엔 청소부가 부족하도다.”

글쎄.

청소부가 부족하다기보다는.

“쓰레기고, 오물이고 너무 많아.”

어느 분야에서 특출한 업적을 세운 천재들에게 공통점이 하나 있다.

무언가 강박증처럼 보일 정도로 요상한 신념 같은 게 있다는 것이다.

천무백도 그렇다.

“이놈의 결벽증.”

거리가 깨끗하면 좋고, 중원 역시 깨끗하면 좋지 않겠나.

하여 천무백은 능히 결심했다.

거, 까짓것. 청소부가 되어 봉사하겠다고.

깨끗이 청소하다 보면, 혹시 아는가. 잘했다고 검극을 향한 실마리를 보여 줄지.

“하남은 정리했고, 섬서도 치워 냈고, 이제 호북도 거의 다 치웠는데도, 아직도 남은 오물이 참으로 많구나.”

천무백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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