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50화 (150/318)

<검신재생 150화>

150. 무당을 지키는 검.

푸드득.

전서구가 끊임없이 하늘로 솟구쳤다.

천무백은 장 총관을 감시하던 능허에게 물었다.

“뭐 특별한 거 없디?”

“네. 특별히 암호 같은 내용은 안 적혔습니다. 천룡검협이 습격했으니 급한 지원을 요청한다. 딱 이 내용만 썼더라고요.”

만일 이상한 문구가 적혔으면 서로 통하는 암구호일지도 모른다.

장 총관의 필체로 정확한 내용만 적었으니, 호북성 곳곳에 퍼져 있는 혈귀곡의 잔당들이 이리로 모여들 터.

천무백이 진심으로 기꺼운 표정을 짓자, 능허가 잔뜩 골이 난 얼굴로 딴죽을 걸었다.

“그거 아십니까?”

“뭘.”

“주군도 곽천후 그놈만큼 싸움 좋아하는 거 말입니다.”

“내가 그런 정신머리 없는 싸움꾼인줄 아느냐.”

“진짜로 오백여 명 정도 되는 놈들을 다 때려잡을 겁니까?”

천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오백 명이라……. 한 성에 오백 명의 무인이라면. 하남에서 소림을 습격했던 숫자와 비슷하군.”

“그때와 다르잖소. 응? 그때 어디 오백 명을 주군 혼자 잡으셨을까. 소림의 나한승들이 한 삼 할은 때려잡았고, 소림에 머무르던 무인들이 이 할은 때려잡았으니. 주군이 잡은 건 오 할쯤 되지 않소.”

능허의 말은 일견 옳았다.

천하의 천무백이어도 오백이란 숫자가 전력으로 부딪쳐 오면 불가능이다.

하나 그건 일단 예시가 잘못됐다.

우선 지금의 천무백은, 소림흉사 당시의 천무백과는 완전히 달랐다.

아슬아슬하게 몸의 균형을 유지하던 그때와는 다르다.

지금 강호 역사상 누구도 오르지 못한 경지에 닿아 있었다.

기존의 절정에서 입신지경에 접어드는 경지와는 궤를 달리하는 유일(有一).

상단전.

하단전.

그리고 두 개의 단전을 잇는 중단전.

전신의 단전을 모두 활용하는 전무후무한 경지.

내공의 총량을 떠나, 세 개의 단전을 활용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이점이다.

특히 경천혼공의 항마의 기운과 빙백신공의 극음지기는 서로 완전히 다른 종류.

그 둘을 동시에 사용한다는 장점은, 적어도 천무백이 지금 입신지경의 고수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비량을 격살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리고 지금 나한승들도 있어.”

“네? 나한승이 있다고요? 무당에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라?”

“내가 데리고 왔다.”

“엑? 어딨습니까?”

“밑에. 도망치는 놈 있으면 잡으라고 막아놨지.”

“아니, 미치…… 시지는 않으신 것 같고.”

능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반응아닌가.

천무백과 비량의 대결은 능허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격전.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팔비도와, 그 사이로 번뜩이던 비량의 검.

모든 기운을 쏟아내고도, 다시 한번 천무백에게 강맹한 일격을 날리던 비량의 모습.

다시 머릿속에 떠올려 봐도, 능허로서는 감히 닿을 수 없는 경지에 있음이 분명했다.

천무백은 비량의 경지가 어느 정도인지는 대충 예상은 했으리라.

그런데도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혼자 올라와?

그 이해할 수 없는 처사.

“뭐, 석독은 이제 다 썼으니. 능허야, 내려가서 나한승들 다 올라오라고 해라.”

“왜 혼자 안 싸우고 그러십니까?”

“나도 팔이 두 갠데 어쩔 수 있겠느냐. 아까는 석독이 있어서 혼자 기세 좋게 올라온 거고. 지금 몸 상태도 썩 좋은 편도 아니다.”

“아주 건강해서 강철도 씹어 드실 거 같은데요.”

“그래. 너 패는 데는 이상 없을 것 같은데.”

“후딱 다녀오겠습니다.”

후다닥 밑으로 내려가는 능허의 등에서 시선을 떼고, 천무백은 눈을 감았다.

실제로 현재 몸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거 참. 아직도 아슬아슬하네.’

심장을 주위로 배배 꼬인 선기의 띠는 아주 가늘다 못해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연약했다.

머리카락보다 조금 두꺼운 굵기여서, 경천혼공과 빙백신공의 양 내기가 저 선기의 띠를 타고 움직이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강한 압박감을 느꼈다.

이게 평범한 내상이었다면 운기조식을 통해 충분히 안정시킬 수 있을 터.

하나 선기는 운기조식으로 통제할 수 없었다. 그나마 선근경의 구절을 외우며 진정시키는 것이 전부다.

‘이거야 원. 한번 써먹고 말거면, 아무 의미가 없는데.’

지금으로선 아까처럼 두 단전을 동시에 활용하기엔, 선기의 띠가 끊어질까 우려된다.

사실 끊어지는 것이 문제라면, 천무백은 위기에 처한 순간 망설임 없이 사용할 것이다.

문제는 선기가 심장이 중심이 된 중단전에 띠를 형성했다는 점.

띠가 끊어지면 심장에도 충격이 가리라는 건 자명하다.

“뭐, 진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만.”

천무백의 목적은 승리하는 게 아니다.

“들어오는 놈 전부를…….”

완전한 절멸(絶滅).

하여 천무백은 밑에 있던 나한승들을 불러 모았다.

천하의 천무백도 팔이 여덟 개인 괴물이 아닌 이상, 모든 적을 상대할 수 없다.

중간에 여차하면 도망치는 인원도 나올 터이니.

이쪽도 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았다.

“저, 정리 다 했습니다.”

그때 전서구를 다 날려 보내고, 마저 혈귀곡에 속한 이들의 명단을 다 적어 낸 장 총관이 소위 ‘살생부’를 들고 왔다.

천무백은 살생부를 펼치고, 품에서 서류를 꺼냈다.

일전에 제갈선으로부터 받아 온 마인들 명단과 비교했다.

“이건 뭐, 그냥 마교 놈들이 이름만 바꾼거군.”

강호에 한 번씩 모습을 드러냈던 혈종, 암종 출신의 마인들은 여지없이 장 총관이 적은 살생부에 적혀 있었다.

마교의 잔당들로 이뤄진 파생조직이 아니라, 사실상 마교의 또 다른 이름이나 다름없다.

“문제는 새외에도 이만한 놈들이 있을 터인데.”

단지 혈귀곡 하나.

그 하나만으로도 강호가 이리저리 요동치고 있다.

소림은 멸문할 뻔했으며, 무당은 지금 그에 근접한 싸움을 치르고 있다.

천무백으로선 과거 마교의 절반도 안 되는 일부인 혈귀곡이, 이 정도란 사실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거의 다 죽여 놨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40년 만에.’

정파는 겨우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거나, 그때에 근접하는 정도에 이르렀는데.

반면 마도는 오히려 과거보다 더 강해졌다. 적어도 지금 혈귀곡의 무력은, 마류칠종 중 두 개 종단이 합쳤다고 보기엔 어마어마하다.

천무백으로선 날 선 경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천무백은 혈귀곡의 마공에 집중했다.

소림에서부터 특별함을 느낀 마기였다.

마기의 장점인 폭발적인 파괴력과 지독히도 빠른 성장에.

마치 정종의 심법과도 같은 정순함이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런 게 나왔다면, 순식간에 세를 회복하다 못해 더 발전하는 것도 이해가 가.’

당장 지금 처리한 비량도 예상보다 더한 고수.

절정에서 입신지경으로 넘어가는 것이, 단순히 오랜 수련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깨달음은 기본이며, 그 바탕이 되는 상승의 무공 역시 필요했으니까.

‘여러모로 골치 아픈 놈들이 되어 적으로 나타났구나.’

천무백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살생부를 내려다 봤다.

어찌 됐건 지금 천무백이 할 수 있는 건 딱 하나다.

당장 그들이 가진 힘에 접근하는 건 무리.

하지만.

“한 명씩, 전부 죽인다.”

살생부에 적힌 수많은 명단.

그 명단을 하나씩 제거하다 보면, 진실에 가까워질 터.

살생부를 내려다보는 천무백의 눈이 싸늘하게 번뜩였다.

* * *

팡, 팡팡!

하늘에 터지는 폭죽을 보고 무명은 얼굴을 구겼다.

“산장에 습격이 있다고?”

하필 지금 이 시점에서 말인가?

무언가 일이 잘못 돌아간다고 단단히 느낀 무명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금만.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이대로 무당을 멸문시킬 수 있을 터인데!

‘젠장. 대청이나 무천악 놈. 둘을 잡으려면 시간도 꽤 걸릴 테고.’

둘 다 입신지경에 가까운 고수일 뿐. 이미 입신지경에 오른 자신이 질 리는 없다. 시간문제일 따름이다.

문득 무명은 주위에 천무백이 어느 순간부터 안 보이는 걸 깨닫고 우뚝 멈춰 섰다.

“설마?”

자신에게 무당삼걸을 제외하고도 감시자 하나가 더 붙었다는 걸 떠올린 무명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무당을 완전히 멸문시킬 생각으로 불러 모은 무사들.

사실상 현재 가용 가능한 인원 중 팔 할에 이르는 전력.

이들이 빠진 사이 산장이 습격받았다면…….

‘그 노인네가 당할 사람은 아니다만…….’

저 신호탄까지 쏜 걸 보니, 심상치 않은 상황이리라.

무명은 결국 결정을 내렸다.

“1조부터 4조까진 이대로 당장 복귀한다! 5조는 자하궁으로 가는 길을 열어라!”

무명의 심정이 뒤틀렸다.

‘천룡검협, 그놈이 끼어들고부터 뭐 하나 제대로 돌아가는 게 없구나!’

이가 으득으득 갈렸다.

최선은 무당과 적건의 내분으로 자멸이요, 차선은 직접 무당을 멸문시켜 혈귀곡에서 탐내는 비급과 보물을 강탈하는 것.

무명은 여기서 차선을 택하고, 당장 그의 상관이나 다름없는 비량의 계획을 뒤엎으며 이렇게 무인들을 끌고 나왔다.

한데 그 계획마저 틀어지게 생겼다.

‘이젠 차선도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겠다.’

무당을 멸문시킨다는 차선은 이미 물 건너갔다.

당장 대청진인과 무천악 둘을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무명으로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쩔 수 없다. 신령부와 태극혜검 같은 비급이라도 가져가야 내 목이 온전하겠다.’

무명은 거침없이 자하궁으로 내디뎠다.

물론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휘하에서도 꽤 실력 있는 수하들이 무천악과 대청진인을 막는 사이.

무명을 막을 수 있는 자는 무당에서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이 간악한 마졸 놈이, 감히 어딜 무당을 범하려 하느냐!”

“……하!”

고작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어린 제자들이 우르르 몰려 길을 막는 꼴을 보면, 무명은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기껏해야 한두 명이 일대제자요, 대부분이 이대제자인 조무래기들.

“네깟 마인 놈이 범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무명은 거침없이 살수를 뿌렸다. 절정도 되지 못한 조무래기들이 대부분이니, 입신지경에 오른 그의 조공을 단 한 번이라도 막을 수준은 아예 없었다.

콰직!

서너 명의 가슴팍이 뜯겨나가며 실 떨어진 인형처럼 쓰러졌다.

“이노오옴!”

그때, 제법 매서운 검격이 불쑥 들어왔다. 하나 무명의 입가엔 오히려 조소가 피어올랐다.

“흥. 제법 검로를 볼 줄 알다만, 사람 보는 눈은 없구나! 그게 네놈의 명줄을 재촉하는 일이로다!”

제자중 몇 안 되는 일대제자, 유상의 검격을 발끝으로 가볍게 차올리며 틀어 버린 뒤.

무명은 심장을 단번에 뜯을 기세로 조공을 펼쳤다.

“유상아!”

저 멀리서 여섯 명의 마인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던 대청진인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가 아끼는 일대제자중 하나이며, 추후 무당의 미래로 불릴만한 재능.

그러나 지금 저 무시무시한 조공을 막을 수는 없다.

대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진작 죽였어야 했다! 이 정도로 가공할 악적일 줄은 몰랐다. 내 실수로다. 내 실수가 무당을 죽이고 있어!’

도인으로 분한 무명의 단전에 있는 마기를 진즉 느꼈었다. 하여 무당삼걸을 감시자로 붙였고, 적건회를 내친 뒤 제거할 생각이었다.

그게 실수였다. 치명적인 실수였다. 그저 적건회를 내치겠단 생각 때문에 내린 자신의 오만한 오판 때문에, 죄 없는 무당의 제자들이 죽어 나간다.

콰득!

살이 뜯겨나가는 섬찟한 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끼던 제자의 마지막 분투만큼은, 제 두 눈으로 담고 싶었기에 대청은 가로막는 적을 밀쳐 내며 눈을 부릅떴다.

피보라가 자욱하게 퍼졌다.

“……!”

한데 유상은 먼지를 뒤집어쓰며 바닥을 구를 뿐, 죽진 않았다. 대청진인은 유상 대신 무명의 공격을 받아낸 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눈동자가 떨렸다.

“적건…… 회주?”

무천악이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무명의 공격을 막았다.

왼쪽 어깨가 무명의 손아귀에 절반쯤 뜯겨나갔다.

“노옴!”

무천악의 검이 벼락처럼 솟구쳤다.

어디서 나온 힘일까. 그 전율스러웠던 무명이 침음을 삼키며 뒤로 두 발짝 물러났다.

무명의 얼굴에도 당황스러운 기색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지극히 실전적인 검.

무천악의 검을 표현하자면 그랬다.

오로지 빈틈만을 집요하게 노렸고, 물어뜯었다. 거창한 도(道)나 이치가 초식에 담기진 않았다.

살검이었다.

그저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검. 그저 찌르고, 베기 위해 존재하는 검.

흡사 살수의 검이 저러할까.

적으로부터 지키겠다는 방어기제.

그 기제가 적극적인 공세로 전환되어 발전된 적건회만의 무공.

너무나 실전적이고, 살기가 너무 강해.

적건회가 무당이 된다면, 무당을 장악하게 된다면, 무당은 무당이란 도를 잃을까 봐, 그리도 걱정했던 검이다.

한데, 그 검에서 대청진인은 봤다.

“태극…….”

분명 찌르고 베는 검이건만, 검의 궤적은 어느새 둥근 원형을 그렸다.

그려진 원형은 살아 숨 쉬듯, 모든 걸 빨아들였다.

주위의 모든 걸 빨아들여서일까. 둥근 원으로 이뤄진 궤적은 수많은 색을 지녔다. 검은색, 흰색, 푸른색, 붉은색.

한데 그 모든 것이 이질적이지 않고, 서로 조화롭게 어울린다.

같이 나선처럼 꼬이며, 물들이고 합쳐진다.

마치 조화롭게.

“태극이…… 어째서.”

무당의 검을 익히고, 무당의 도를 닦아야만 펼쳐 낼 수 있는 태극.

자신이 태극혜검으로 펼쳐 내는 태극이고, 무당의 어린 제자들이 만들어 내는 태극이다. 다른 게 없다. 무당의 검이다.

‘대체 어떻게?’

그 순간.

무명의 복부에 무천악의 검이 벼락처럼 박혔다.

확실한 차이.

입신지경에 오른 무명과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무천악과의 차이는 분명하다. 하늘과 땅 차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벽은 확실했다.

그러나 이 순간에, 무천악의 태극은 무명의 복부에 박혔다.

하지만…….

대청은 저도 모르게 태극혜검을 뿌리며 무명을 향해 쇄도했다.

무명의 날카로운 손아귀가 무천악의 목을 움켜잡았다.

무천악의 처연한 미소가 대청의 망막에 맺혔다.

“말했잖은가…….”

“……!”

그의 얼굴에 태극이 천천히 떠올랐다.

“나는,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고.”

무천악의 목이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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