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49화 (149/318)

<검신재생 149화>

149. 적어라. 살생부다.

일격필살(一擊必殺).

아니, 어쩌면 그건 이격필살(二擊)이었다.

팔비도(八飛刀)에 쏟아부은 강맹한 공격이 일격이다.

하나 비량은 혹시 몰랐기에, 마지막 수, 제 이격까지 준비했다.

그것이 옳은 결정이었다.

‘어마어마한 놈이다. 이놈은 지금 죽여야 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본곡은 이놈을 막기 위해 전력을 동원해야 할 것이다!’

팔비도가 튕겨나고, 그 호흡의 찰나를 노리는 두 번째 이격(二擊).

강맹한 기파에 천무백은 마치 벽력탄이라도 터지듯이 뒤로 훌쩍 날아갔다.

강기를 그대로 쏟아부었으니, 상반신이 아예 통째로 뜯겨 나갔으리라.

그제야 긴장으로 빳빳하게 날이 선 감각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비량은 검을 거둬들이며 내심 한숨을 쉬었다.

한데 그때였다.

탓.

“……!”

벽을 부수면서 멀리 날아간 천무백이, 무너진 벽 사이로 걸음을 내디뎠다.

비량이 멍한 시선으로 천무백의 행동을 쫓았다.

천무백의 가슴께에 어려 있는 섬광과도 같은 새하얀 빛.

빛 너머의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을 뿐, 생채기 하나 입지 않은 모습이었다.

가슴께에 어린 새하얀 빛은 이내 후광처럼 번져가더니, 천무백의 전신을 장막처럼 둘렀다.

비량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떨렸다.

방금 전, 능허가 실토한 내용이 머릿속에 벼락같이 스쳤다.

‘창천검신의 후인…….’

그런 얘기가 혈귀곡 내에서도 돌았다.

창천검신의 독문무공인 귀곡광애와 건곤창응보를 사용하는 모습을 봤다는 것.

하나 비량은 그런 주장을 일축했었다. 검존은 중원에 없고, 제자도 기르지 않았는데 어찌 약관도 안 된 놈이 창천검신의 유지를 이었겠는가.

하여 능허가 실토한 바도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하게 현혹하는 말인 줄 알았건만.

비량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귀곡광애…….”

그래, 저것이다.

저것이라면, 자신이 있는 힘껏 쏟아 낸 일격을 막아 낼 수밖에 없으리라.

무수히 많은 공격.

마교의 전설적인 존재들이 쏟아 낸 모든 공격이 저 빛에 막히지 않았나.

“역시, 손을 보니 알겠군. 검객이 맞았었네.”

천무백에게도 등골이 싸늘해지는 공격이었다.

팔비도를 쳐 내자마자 호흡과 호흡, 초식을 연결하는 투로, 그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예상치 못한 검

비량이 비도술을 쓰는 무인이라 여겼을 텐데, 그런 판단을 뒤집는 검격이라니.

만일 천무백이 비량의 손에 잡힌 근육을 보고, 검을 잡은 손임을 짐작하지 않았다면.

천무백도 귀곡광애를 펼치기 전에 제법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으리라.

천무백의 중얼거림으로부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깨달은 비량은 눈앞이 일순 암울해졌다.

‘정신없이 비도를 쳐 내는 순간에도, 내 손에 잡힌 근육을 봤다고?’

사람이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비도 하나도 아니고, 팔비도다. 여덟 명의 절정무인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던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와중에 자신의 손을 살피고, 예상했다고?

비량은 불쑥 생소한 감정이 치밀었다.

이내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은 비량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두려워한다고? 이 비량이? 팔비검객, 이 비량이?’

비량은 애써 그 감정을 부정했다.

하나 천무백이 검을 뽑고 한걸음 내딛는 순간, 다시금 두려움이 솟구쳤다.

천무백이 진득하게 웃었다.

“나도 있는 힘껏 싸워 주마.”

비량은 어쩌면 천무백으로부터 그런 말을 들은 자신을 자랑스러워해야 할지도 모른다.

여태껏 천무백이 저런 말을 하며 싸움에 임했던 적은 없었으니까.

천무백의 전신이 공명하듯 진동했다.

비량은 입술을 질끈 깨물어 피까지 내며, 단전에 남은 모든 내공을 긁어모았다. 기경팔맥이 찢어질 것 같이 격렬하게 내달리는 내기. 사실 단전에 쌓은 내기는 오랫동안 쌓이면서 신체 일부가 된다. 뇌와 심장이, 내기를 신체의 한축으로 여긴다.

한데 그 모든 내기가 단번에 발출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마치 신체의 일부가 사라지는 듯한 극통이 전신에 전해진다.

비량은 그런 상태에 빠지면서도, 검에 기운을 담았다.

동시에 검이 곧게 뻗었다.

살을 떠난 화살처럼 쾌속한 속도에, 거력(巨力)이 실린다.

콰아아아아앙!

폭음과 함께 검을 중심으로 소용돌이가 휘몰아쳤다. 바닥의 나무가 우드득 소리를 내며 뜯겨 올라오고 엄청난 풍압이 전해진다.

풍압만으로도 사람을 짓뭉갤 정도로 강맹한 위력.

천무백은 솔직히 그쯤 돼서 인정했다.

‘정마대전 때 이놈을 본 것 같은데.’

얼핏 본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정파의 무인들을 학살하다가 창천검신이 나타나자, 곧장 비도를 뿌리고 꽁무니를 뺐던 요상한 놈.

그때도 절정에서 최상이었고, 시간이 흐른 지금은 완벽한 입신지경에 오른 절대자.

천무백은 머릿속에 남아있는 모든 잡념을 떨쳐 냈다.

웬만해선 인질로 잡아 이것저것 캐내 볼 생각이었지만.

애석하게도 그러려면 쉽지 않은 일.

‘죽인다.’

검에 살의(殺意)가 담긴다.

검이 가지는 가장 순수하고도, 악마적인 본질이 담긴다.

검이 가장 본질에 닿는 순간.

천무백의 검에서 피어나는 건 천둔검법이었다.

그 검에 모든 게 담긴다.

전신이 진동했다.

웅웅웅웅웅웅웅!

상단전이 열려 경천혼공이 항마의 기운을 왈칵 토해냈다.

프스스스스!

하단전이 활짝 열려, 똬리를 틀고 있던 극음지기가 머리를 치켜들고 기경팔맥으로 내달린다.

그리고.

욱신.

심장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새하얀 선기의 끈이 밝게 빛나며 상단전과 하단전을 이어 준다.

경천혼공의 항마기(降魔氣)와 빙백신공의 극음지기가 서로 조심스럽게 만나면서, 동시에 천무백의 양손을 향해 서로 내달린다.

천무백의 두 눈에 희열이 담겼다.

터져라, 터져라.

전신을 두드리고 또 두드려, 한계까지 모든 기운을 밀어낸다.

천무백이 눈을 번뜩였다.

강기로 소용돌이치는 비량의 검을 보며 오히려 몸을 앞으로 내달렸다.

압도적인 싸움을 지켜보던 능허는 말도 못 하고 경악했다.

마치 천무백의 모습이, 검을 향해 돌진하는 듯한 행태였으니까.

한데도, 이상하게도 능허의 머릿속엔 위기감이 들지 않았다.

검을 향해 돌진하는 천무백의 모습에게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기 때문일까.

닿는 모든 걸 찢어발길 강기의 폭풍이 천무백을 감싸는 그 순간에도.

능허는 천무백이 죽을 거란 생각이 단 조금도 들지 않았다.

‘거, 존나게 잘 싸우네.’

그런 태연한 생각이 들 정도로.

천무백의 얼굴 역시 태연했으니까.

콰직!

“……!”

비량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모든 기운을 쏟아냈다. 칠십 평생을 모아오는 내공을, 단 한줌도 남기지 않고 쏟아낸 강기다.

한데 그 모든 강기들이……

‘막혔다.’

저 새하얀 귀곡광애에 막혔다.

천하제일의 호신강기.

그 명성이 체감됐다.

애석하게도 감탄은 늦었다. 항마의 기운이 실린 천무백의 검이 가슴을 관통했다.

관(貫)의 개념이 담긴 검.

모든 걸 뚫어버리는 관통력에, 비량의 호신강기는 허무하게 깨졌다. 단전을 찢어발기며 박혀 버리는 천무백의 검에 피를 토했다.

하나 그 순간에도 비량은 비척거리며 천무백의 몸을 덮쳤다.

‘죽인다. 죽여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죽어 가는 와중에도, 마지막 동귀어진이라도 할 속셈이었다.

하나 그의 몸은 땅에 박힌 것처럼 꼼짝도 못 했다. 다리를 움직여야 한다. 움직여서 몸을 던져, 천무백을 덮쳐야 한다.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얼어붙어?’

어느 순간부터 아무 감각도 들지 않는 하반신.

비량의 시선이 서서히 아래로 향했다.

이내 그는 더는 경악성도 내뱉지 못하고 그저 허탈한 미소만 지었다.

말 그대로, 두 다리가 얼어붙은 채 바닥에 박혀 있었다.

천무백의 왼손에서 새하얗게 올라오는 극음지기를 본 순간,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알 수 있었다.

“검에는 항마의 기운을 살고, 손에는 극음지기를 싣는다. 강호가 열린 이래, 이런 일이 있던가?”

“없었지.”

천무백이 담담하게 말했다.

“제법 좋은 실력이었고 좋은 무공이었다. 다만 극마에 이르지 못한 것이, 네 패배의 유일한 이유다.”

담담하게 쏟아지는 천무백의 말을 들으며 비량은 서서히 눈을 감았다.

극마에 이르지 못했기에 졌다.

그 말은 돌려 생각하면, 극마지경에 올라야만 천무백을 이길 수 있단 얘기니.

천마만이 상대할 수 있단 뜻.

‘참으로…… 광오하구나.’

비량의 몸이 떨어졌다.

* * *

천무백은 태연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능허에게 다가갔다.

“무슨, 무당에 있는 영약이란 영약을 다 먹었습니까? 왜 괴물이 되셔서 나타났습니까.”

“능허야, 어째 넌 멀쩡하다? 고문이라도 당할까 봐 미친 듯이 내달려 왔는데.”

“오, 그거 감동인데요.”

“말 돌리지 말고.”

“고문당하기 전에 싹 불었습니다.”

“싹 불어?”

“주군에 대해서 다 말했죠.”

“와……새끼 입 진짜 가볍네.”

“아니. 저 고문당하면 앞으로 주군 일 하시는데 도와주지도 못하고, 몸만 상합니다. 어차피 주군이 와서 이놈 죽일 게 뻔한데, 어차피 알아도 상관없지 않습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닌데.

천무백은 묘하게 싹트는 감정에 오히려 날선 감각이 차분하게 가라앉음을 느꼈다.

천무백은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넋 놓고 있는 장 총관에게 시선이 향했다.

“어이.”

“……네.”

하늘 같았던 수뇌부.

혈귀곡에 있는 다섯 명의 절대자 중 하나가 죽었다.

그 죽음을 목격한 이상, 장총관은 모든 의욕이 싹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무슨 수를 써도 천무백을 이길 수 없음이 뼛속까지 각인됐다.

“너, 지금 당장 무당에 간 놈들보고 다 오라고 해.”

“……네?”

“못 들었어? 신호탄을 터뜨리든 해서, 소식을 전하라고. 뭐 가령 여기가 위험에 처했으니, 살려 주십쇼! 하는 신호 말이야.”

“…….”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흠. 신호탄이 아니라면, 전서구든, 전령이든 될 수 있는 건 다 준비해라.”

“무당이 가까우니 신호탄을 보면 곧장 올 것입니다.”

장총관은 저도 모르게 극존대로 대답했다. 자신을 살려둔 이유가 있는 것 같았다. 장총관은 그 실낱같은 희망을 느끼자, 살고 싶다는 욕망이 덜컥 솟구쳤다.

“아니, 호북성 전체가 볼 수 있는 신호탄이 어디 있겠어?”

“호북성 전체?”

“호북성에 혈귀곡 근거지가 여기 산장 하나일 리는 없고.”

“……!”

“얼마나 돼?”

“그, 그것이…… 호북성 전체에 퍼진 수효는 오백여 명이 넘습니다.”

“여기 죽은 비도 쓰는 노인네 같은 놈은?”

“그분에 필적하시는 분은 무당에 계신 육성 어르신뿐입니다.”

“육성이라? 이 새끼들. 마인들 주제에 어디 제 이름 앞에 별을 붙이고 지랄이야.”

천무백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럼 별건 없군. 그 오백 명이 다 볼 수 있게 소식을 전해.”

“네?”

“여기가 위험에 처했으니, 구하러 와 주십쇼. 하고 소식 전하라고. 모두 올 수 있게.”

“……!”

장 총관은 말을 잃고 천무백을 쳐다봤다. 천무백의 말뜻을 자신이 정확하게 이해한 게 맞다면…….

옆에 있던 능허 역시 말뜻을 이해했는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아니, 주군. 왜 그 오백 명을 불러 모으는 겁니까? 설마……?”

천무백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얼마나 좋냐. 귀찮게 찾으러 갈 필요 없이, 내 목숨 가져가 주십사 하고 달려오다니!”

장총과는 차마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호북성에 퍼진 오백 명의 혈귀곡.

그 모두를 불러 모은다는 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여기서 죽여 버리겠단 뜻.

순간 지독한 두려움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런 그에게 천무백이 어디선가 붓과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적어라.”

“무, 무엇을요?”

“네가 알고 있는 혈귀곡의 모든 무인을.”

“……!”

천무백의 목소리가 짙게 깔렸다.

“네놈들이 오성이니, 육성이니 별을 붙여서 같잖게 부르는 놈들의 별호와 이름, 익힌 무공, 특성까지. 아는 대로 싹 적어. 아니, 정체를 숨기고 강호에서 활동하는 놈들도. 혈귀곡에 속해 있다면 모두 적어라. 많이 적을수록, 네놈이 살아날 확률도 생길 터이니.”

그걸 왜 적는가.

그 명단이 왜 필요한가.

장총관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적어라. 살생부를.”

어둠 속에서 새하얀 미소가 호선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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