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48화>
148. 안내할 놈 하나는 있어야지.
포천산장(抱川山莊)은 무당과 제갈세가가 장악한 호북성에서도 제법 세력을 떨치는 문파였다.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끼어들기 애매모호한 일을 해결하는 일종의 용병업을 하며 호북성에서 입지를 다졌다.
포천산장의 내부가 오늘은 유난히 분주했다.
절반의 인원이 칼을 찬 채 갑작스레 빠져나가고, 남은 이들은 산장을 정리하고 있었다.
마치 이곳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갈 것처럼.
“갑자기 계획에도 없던 무당을 친다니. 젠장!”
산장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관리하던 장 총관은 욕지기를 내뱉었다.
“이럴 거면 산장으로 위장을 왜 해? 어차피 무당을 칠거면, 다 필요 없는 건데!”
육성(六星)으로 불리는 조직의 우두머리 중 하나가 신호탄으로 산장의 무사들을 불렀다.
장 총관은 그게 불만이었다.
‘하여간 암종 놈들은. 다짜고짜 싸우는 걸 아주 좋아한단 말이야.’
혈종 출신들이 기껏 치밀하게 계략을 짜놓으면, 암종놈들이 그것들을 다 망치기 일쑤였다.
중경성에서도 암종 출신이었던 십성(十星)이 비다라들을 다 잃고 죽었다던가. 그쪽에서의 사업은 시작도 못 했고, 오히려 적들이 정의맹을 창설하며 뭉치기 시작했으니. 다 글러 먹은 일이다.
지금 무당을 공격한다는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다 엎어진 것이군.’
절반의 무사들이 갔으니, 무당은 오늘 불타고 멸문당할 것이다. 다만 여기도 언젠가 발각될 터이니, 일단 피해야 했다.
“어서어서 움직여! 빨리!”
그리 휘하 무사들을 재촉할 때.
별안간 산장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장 총관의 고개가 휙 돌려졌다.
“뭐야?”
지금 상황에서 문지기가 문을 열어 줄 리가 없을 터.
“누구냐!”
문을 열고 나타난 건 처음 보는 녹의장포를 입은 젊은 청년이었다.
아니, 젊다고 보기엔 더 어려 보였다.
한데 쉬이 무시하기 힘든 분위기가 느껴졌다.
털썩!
이어 열린 문 사이로 툭툭 쓰러지는 문지기의 모습에 장 총관은 표정을 굳혔다.
“너, 누구야?”
“누구인지 물어볼 땐, 본인 소개부터 하시지.”
“여기가 어디라고? 여긴 포천산장이다.”
“흐음. 여기서는 산장으로 위장한 건가?”
“……!”
장 총관의 눈이 흔들렸다.
‘알고 왔구나!’
포천산장이 호북성에서 자리를 잡은 건 무려 20년.
그동안 여기가 혈귀곡의 위장조직인 걸 파악한 사람은 몇 없었다.
기껏해야 개방의 거지들이 냄새를 맡고 온 적이 한두 번 있지만, 모두 이미 삼도천을 건넜다.
“너, 지금 혼자 왔어?”
“데리고 온 사람들은 있지만, 저 밑에 내버려 뒀다.”
“……동료가 있는데 너 혼자 들어왔다고?”
“너희들 도망가는 거 잡아놓으라고 해 놨거든.”
슬금슬금 모여든 무사들 사이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몇몇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이 보기엔 천무백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 탓이다.
하나 장 총관은 천무백에게서 느껴지는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깨달았다.
‘빙공 고수인가?’
하단전에서 느껴지는 극음지기. 그것만 봐도 상당한 고수였다. 하나 무언가 장 총관의 신경을 툭툭 건드리는 게 있었다.
‘너무 여유롭다.’
그걸 누군가는 어린놈의 자만심이라 보겠지만, 장 총관은 그러지 않았다.
실제로 장 총관의 불길한 낌새는 맞아 떨어졌다.
슬그머니 모여들던 무사 중 하나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 목을 부여잡고는 몸을 비틀더니 털썩 쓰러졌다.
“큭, 커허어억!”
“……!”
장 총관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갑자기 쓰러진 무사에게 무사들이 화들짝 놀라 다가갔다. 모여든 무사들 사이에서 하나둘씩 똑같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제목을 벅벅 긁어가며 쓰러졌다.
질린 얼굴로 신음을 내뱉으며 쓰러지는 광경에 절로 몸에 오한이 돌았다.
쿵! 쿵! 쿵! 쿵!
장 총관이 비명처럼 소리를 내질렀다.
“독, 독…… 독이다!”
독밖에 없었다. 저런 독은 극독이다. 단순히 기절해서 쓰러진 게 아니라, 모두 피거품을 물며 죽었다.
엄청난 극독이다.
‘대체 언제?’
언제 이 많은 무사가 중독됐단 말인가?
보통 무사라면 제 몸에 독이 들어오면 금방 알아차린다. 적어도 여기 모여든 무인들은 정예였다.
“이 간악한! 독을 쓰다니!”
“네놈들의 피를 칼에 묻히긴 아까워서.”
사내, 아니 천무백은 심드렁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이거 너희들이 쓰던 독이야. 중경성에서.”
“…….”
“당준파가 만든 석독인데, 효능은 참 유용하군.”
장 총관은 이를 으득 갈았다.
사색이 된 그는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국 칼을 꺼냈다.
천무백이 한걸음 다가왔다.
“백도 놈들이 협객으로 치켜세우더니, 하는 짓은 흑도나 다름없구나!”
“와. 마인 놈들한테 그런 소릴 들으니 새삼 신기하네. 네가 지금 내공이 고강해서 중독 안 되고 버티고 있는 거 같지? 그냥 내가 너한테 뿌리지 않았을 뿐이야.”
“…….”
그 말에 장 총관은 입을 다물었다.
실제로 장 총관은 제 몸이 중독되지 않은 걸 확인하곤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에게는 독을 쓰지 않았다.
그 말은 내공을 써서 독을 퍼뜨리는 걸 조절할 정도로 고강하다는 의미.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경지다.
천무백은 느긋한 얼굴로 걸어왔다. 그 순간 정면에서 바람이 훅 불었다.
장 총관이 쭉 늘어나는 것처럼 천무백의 가슴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과연 이 산장을 총괄하는 총관답게, 정직하지만 위력적인 깔끔한 동작이었다.
까가강!
두 검이 강하게 얽혀들었다.
천무백은 우뚝 선 채 검을 순식간에 뽑아 휘둘렀다. 장 총관의 검을 가볍게 튕겨 내며 순간적으로 파고들어 복부에 주먹을 꽂았다.
“커흑!”
장 총관은 허리를 절반 가까이 숙이며 비틀거렸다. 칼을 잡은 손목에서 전해지는 아찔한 충격에 온몸이 저릿저릿한데, 복부에 꽂힌 주먹에 오장육부가 깡그리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천무백이 말했다.
“그래도 몸은 튼튼하구나.”
장 총관은 허리를 펴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그었다.
사타구니부터 정수리까지 노리는 일도양단의 기세.
쩌엉!
하나 검이 울면서 부러지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 장 총관은 더는 싸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천무백의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에 장 총관의 눈이 가늘어졌다.
살기가 느껴지지 않는 미소다.
“왜 나만…….”
자신은 중독되지도 않았고, 천무백의 칼솜씨를 보건데 이미 일검을 내질렀을 때 자신의 목을 베고도 남았을 실력이다.
한데 살려 줬다.
천무백이 진득하게 웃었다.
“대가리한테 안내할 놈 하나는 있어야지.”
* * *
사실 천무백에게 장 총관이 필요하진 않았다.
어차피 능허가 있는 곳을 향해 가면 그만일 터.
능허에게 감시역을 맡길 때부터, 지금 같은 사항을 가정했다.
그래서 추종향(追從香)을 뿌려놨다.
그렇게 대단한 추존향은 아니다.
천리추종향이니, 만리추종향이니 하는 보물과도 같은 건 아니고.
구하고자 마음먹으면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는, 굳이 따지면 한 백리추종향쯤 될까.
하나 상단전의 개발로 오감을 넘어선 초감각에 가까워진 천무백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천무백은 이 향을 쫓아 호북성에서 암약하는 본거지를 찾은 것이다.
‘이왕 여기서 혈귀곡 놈들하고 한바탕 할 거면, 깡그리 없애버려야지.’
굳이 장 총관을 살리지 않아도 천무백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다만 그를 살린 건, 따로 쓸 곳이 있어서였다.
여하튼 장 총관이 추존향이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가는 걸 지켜본 천무백은, 일단 장 총관의 목숨을 더 연명시켜 주기로 결정했다.
“허어…… 천룡검협. 여기까지 찾아왔는가?”
반겨 준 건 능허를 잡아 온 약초꾼, 오성(五星) 비량이었다.
그러나 썩 살가운 인사는 아니었다.
천무백을 알아본 그가 다짜고짜 비도를 뿌렸다.\
쉐에에엑!
“거, 인사 한번 살벌하군!”
말은 그리했지만, 태연하게 서 있을 수는 없었다. 날아오는 여섯 개의 비도는 맹렬한 파공성을 내며 육박했다.
천무백은 한 차례 호흡을 고르고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까가강!
단숨에 세 개의 비도를 후려치며 튕겨내자, 나머지 세 개의 비도가 허공에서 방향을 급격하게 틀었다.
천무백은 비도와 연결된 미세한 끈을 봤다.
그것은 물리적으로 연결된 게 아니다.
‘내공으로 비도를 조종해?’
생각보다 더한 고수.
이미 이곳에 가까워지면서 고강한 내공과 존재감은 익히 느꼈다.
대청진인이 몰래 만나던 도인으로 분장한, 그 무명도인이란 놈보다 훨씬 강하다는 건 진작 느꼈다.
그러나 내공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가늘게 발출해 비도를 조종하는 건, 단순히 내공만 고강하다는 게 아니라 그 운용능력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
하물며 속도는 쾌속했다. 그 속도를 조종한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까앙! 깡! 까앙!
한 번씩 쳐 낼 때마다 손목을 통해 전해지는 묵직한 충격은, 담긴 힘도 만만치 않음이다.
여섯 개의 비도를 상대하는 건, 마치 제각각의 여섯 명의 무사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거기에 두 개의 비도가 더 추가되어서 끊임없이 천무백을 공격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여기서 상대의 무공을 체감하고 절망했을 것이다.
그만큼 혈귀곡의 수뇌부 오성 중 하나인 비량은 확실히 위협적이다.
하나 천무백은 오히려…….
‘웃어? 웃는단 말인가?’
비량의 눈이 부릅떠졌다. 천무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힌 걸 목격했다.
실제로 천무백은 오히려 기쁜 감정이 불쑥 들었다.
‘이거, 의외로 엄청난 거물이겠는데.’
지금껏 맞이해 본 적 중에 가장 강하다.
강호가 어디든 그렇겠지만, 마인들은 강함을 숭상하는 경향이 더 짙다.
강하다는 건 곧, 더 높은 서열이란 점.
천무백은 혈귀곡의 중심에 한층 가까워짐을 깨달았고, 절로 흥이 난 채로 검을 휘둘렀다.
무려 여섯, 아니 여덟 개의 비도를 상대로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걸 본 비량의 얼굴에 경악이 번졌다.
효과적이다.
마치 어느 방향으로 올지 모두 아는 것처럼 쳐낸다.
그렇다고 상대의 기력을 소모시키고 있단 생각도 들지 않았다.
팔비도(八飛刀)가 모두 똑같이 빠르고, 똑같은 힘이 담기지 않는다.
어떤 건 허초였고, 어떤 건 매서운 살초였다.
한데 천무백은 그것에 맞춰 적절하게 효과적으로 힘을 배분해 비도를 마음껏 쳐 냈다.
비량의 등에 식은땀이 흥건해졌다.
‘이대로면 내가 먼저 힘이 빠진다!’
허공에 날아다니는 비도 한 자루를 조종하는 것도 상당한 집중력과 내공을 요한다.
지금 비량은 팔비도를 동시에 다루면서 자신이 쓸 수 있는 한계치까지 모두 쏟아붓고 있었다.
빨리 끝내지 못한다면, 결국 먼저 기력이 다해 쓰러질 건 자신일 터.
‘일격필살밖에 없구나!’
일격필살이 왜 일격필살이겠는가.
상대를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위력.
문제는 그 한 번에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죽는다.
하나 지금 비량은 꺼내야만 하는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다.
고오오오오!
비량의 주위로 기운이 일제히 몰린다.
‘이것 봐라?’
쾌속한 속도로 비도를 쳐 내던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강하게 몰리는 기운.
심장이 울렁일 정도로, 강한 압박에 천무백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동시에 튕겨 냈던 팔비도가 비량의 손안에 들어가더니, 이내 거센 기운과 함께 발출됐다.
천무백도 이번엔 쉽지 않겠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모든 기운을 여덟 개의 비도에 담은 것처럼 강맹한 위력이 천무백을 덮쳤다.
천무백 역시 진지한 얼굴로 벼락처럼 검을 휘둘렀다.
막아 내는 검을 통해 전신에 전해지는 충격에 천무백도 신음을 삼켰다.
비량이 모든 기세를 담은 필살의 수인만큼, 천하의 천무백에게도 부담이 가해졌다.
하나 그뿐이었다.
‘그래 봤자 비도일 뿐이다!’
천무백 역시 경천혼공을 극성으로 운용하며 그대로 여덟 개의 비도를 모두 후려쳤다.
까아아앙!
한데 그때였다.
천무백의 동공이 흔들렸다.
튕겨 낸 팔비도 사이로 새하얀 검이 불쑥 튀어나온다.
그 쾌속한 속도를 본 천무백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구겨졌다.
‘늦었다.’
팔비도를 힘껏 후려치느라 모든 내공이 그리 실린 순간.
천무백의 가슴에 검이 박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