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47화 (147/318)

<검신재생 147화>

147. 역사는 변하지 않는 법.

약초꾼 비량은 성큼성큼 걸었다.

험한 산길이지만 노회한 약초꾼인 그가 걷는 길이 곧 길인 법이었다.

듬직한 덩치에도 발걸음은 얼마나 조심스러운지, 나뭇가지 밟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은밀하고도 빠르게 나무 사이를 오가며 모습을 숨긴 비량은 단숨에 봉우리 하나를 넘었다.

‘흥. 저 다비노괴 놈의 눈에서 벗어나는 놈이니 제법 한가락하겠지. 여기 멀리서 감시하는 걸 보니까 제 실력의 한계도 아는 것 같은 놈이긴 하다만…….’

비량은 별안간 속이 뒤틀렸다.

‘혈사문은 멸문된 놈들을 다시 모아 일으키는 데 십 년이 걸렸고, 비다라도 수십 년을 연구하다가 소림의 불경을 얻은 후에야 완성했다. 여기 무당도 오랜 기간 암약해 왔고, 근래에 성과가 보인다. 그러나 이 모든 게, 단 한 놈 때문에 무너지고, 무너지려 하고 있다.’

천룡검협 천무백.

그들이 세운 계획에 없던 단 하나의 변수.

변수가 모든 일을 망치고 있었다.

혈귀곡의 오성(五星)중 일인으로써, 비량은 천무백이 진심으로 싫었다.

하물며 이번 무당 일은 자신이 직접 관여하며 지휘했다.

여기에 끼어든 천무백에게 뒤틀린 감정이 들었다.

‘보아하니 저 외팔이 놈은, 천무백이 곁에 달고 다니는 독안사 놈이렷다!’

천무백에 대한 정보는 혈귀곡에서도 최선을 다해 모았다.

그럴수록 천무백에 대해 비밀이 풀리기는커녕, 의문만 더 쌓였다.

‘방에 틀어박혀 악기나 연주하고, 서화나 그리던 비루한 한량이 이렇게 날뛸 수가 있다고?’

과거까지 샅샅이 캐내도 마찬가지다.

‘본곡의 적은 정파의 내로라하는 고수들보단, 그놈이 진짜다.’

처음엔 청성표국을 무너뜨릴까도 생각했지만, 실속이 없었다.

제갈세가가 수가기문도를 설치했단 소문이 자자하고, 실제로 확인해 본 결과 소문이 맞았다.

그게 약식이니, 노리지 못할 건 아니다만.

이쪽의 피해도 클 것이 자명하고, 그만한 피해를 감수할 정도로 이득이 클 것인가는 의문이었으니까.

구파일방도 아니고, 수가기문도로 보호되고 있는 표국을 공격해서 얻을 이득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저 독안사 놈을 잡으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천무백의 강호행에서 한번도 곁을 떠나지 않은 충실한 심복.

그를 잡는다면, 뭔가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한 비량이 봉우리에서 머리를 불쑥 드러냈다.

“응?”

없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있던 그림자가 사라졌다.

비량의 눈이 가늘어지는 순간, 뒤에서 파공성이 대기를 갈랐다.

쉐에에엑!

비량이 몸을 팽그르르 돌았다. 손이 흐물거리며 움직이더니 쇄도해오는 검면을 툭 쳐냈다.

간단해 보이지만, 쾌속한 찌르기의 경로를 한 번에 틀어버리는 상승의 공부였다.

“니런, 썅! 고수잖아?”

능허의 얼굴이 괴팍하게 일그러졌다.

“흥. 네놈, 천룡검협의 그 따까리인, 독안사 놈이렷다?”

“뭐? 따아아아까리? 따까리? 천하의 능허가 따까리?”

구겨진 얼굴이 더 보기 흉하게 구겨졌다.

“따까리는 무슨! 어? 같은 목적을 두고 걸어가는 협력관계다. 이 새끼야!”

까가가가강!

능허의 검이 어지럽게 춤을 췄다.

비량은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내는 검격을 손등으로 툭툭 쳐대며 튕겨냈다. 하나 내심 혀를 내둘렀다.

‘한낱 흑도 출신이라 들었건만. 검 쓰는 솜씨는 웬만한 정파 조무래기들보다 훨씬 낫구나!’

감탄을 일으키는 칼솜씨.

하나 비량에겐 감상에 그칠 뿐이었다.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유효타가 들어가지 않자 능허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비량이 검을 크게 쳐내며 물었다.

“같은 목적이라면 뭘 말하는 거지?”

“뭐긴, 뭐야. 너 같은 혈귀곡 놈들 싹 다 죽이는 거지.”

“그거 안타깝군.”

“안타깝기는 지랄을 해요. 네놈들 모가지가 안타깝겠다.”

능허는 내심 허세를 부렸지만 속은 달랐다. 도저히 공격이 먹히지 않는다. 격차를 절실하게 느꼈다.

‘썅…… 감시만 잘하고 있으라더니. 하여간 그 양반이 시키는 일 중엔 쉬운 게 하나도 없어.’

웬일로 쉬운 일을 시킨다더니. 하긴. 진짜로 감시만 하라고 했던 의미였겠는가. 능허는 천무백이 시킨 일이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천룡검협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 같으니, 네놈은 나랑 같이 가야겠구나.”

“같이 가긴, 어딜 가. 당과 사준다고 애새끼들 꼬드겨서 납치하는 개자식…….”

퍼억!

기습적으로 혈도를 찍어 누르자, 능허는 허리가 쭉 펴지며 뻣뻣하게 굳은 채로 일자로 쓰러졌다.

비량은 혀를 쯧쯧 찼다.

“본곡에 가서, 네놈이 아는 걸 모두 다 토해낼 때까지 고통스러울 거다.”

축 늘어진 능허를 한 손으로 들었기에, 고갤 숙인 능허의 눈동자가 묘하게 번뜩이는 걸, 비량은 보지 못했다.

* * *

갑작스러운 굉음과 타오르는 붉은 빛을 보고 좌중은 표정을 굳혔다.

아스라이 들려오는 비명과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

무엇인지 깨달은 대청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습격이다.”

40년 전.

정마대전 때 무당파가 마교에게 습격당한 이래.

단 한 번도 무당의 본산을 공격해 온 적은 없었다.

그만큼 지금은 일대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모두 곧장 본산을 향해 내달렸다.

거리가 적잖이 멀었지만, 하나같이 경지에 오른 고수들이기에 경공을 펼치자 순식간에 본산에 도착했다.

본산에서는 곳곳에서 싸움이 발생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흑의 장포를 둘러 입은 흑의인들의 공격에 당황했는지, 무당이 밀리는 모습이었다.

다행히 한편에 있던 나한승들이 싸움에 끼어들어 무당파가 급격하게 무너지지 않은 듯 보였다.

“혈귀곡입니다.”

“저 간악한 놈들이, 끝내 무당을……!”

대청진인이 단숨에 손을 뻗었다. 강맹한 기파가 쏟아져 마침 달려들던 흑의인 하나를 그대로 죽였다.

대청진인과 진청진인이 싸움에 끼어들자 눈에 띄게 흑의인들이 밀려났다.

하나 천무백은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봤다.

다들 갑작스러운 기습에 황망한 얼굴이었지만, 천무백은 오히려 얼굴에 후련함이 묻어났다.

태연하면서도 담대한 태도. 습격에 당황하던 제갈설아도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됐으니, 놈들의 계획이 엎어진 건 분명하오.”

“계획이 엎어지다뇨?”

“내가 아는 혈귀곡은, 솔직히 말해 지금의 무당을 단신의 세력으로 엎을 만큼 강하오.”

“…….”

제갈설아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대청진인이 싸움에 끼어들었음에도, 흑의인들의 습격은 집요하고 노골적인지라, 무당의 제자들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천무백의 말대로였다.

혈귀곡이 마음만 먹었다면, 무당을 무너뜨리는 건 일도 아니다.

“하나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던 건…….”

“지금 무당을 쳤다간 백도무림이 뭉칠 테니까.”

“……!”

“소림을 쳐서 무림에 경각심을 일깨웠고, 그걸 근거로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소.”

“맞아요.”

“거기에 무당까지 공격한다? 대놓고 백도무림 보고 뭉치란 얘기지.”

“그래서 원래 목표는 무당과 적건을 갈라놓는다?”

“맞소. 무당이 적건을 내치려고 하면, 적건도 호락호락하게 나가진 않을 터. 내전이 벌어질 테고, 무당은 제 살 갉아먹기가 될 터이니. 자멸할 것이고, 강호에 일대사건이 벌어져도 나서지 못하겠지.”

제갈설아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로선 천무백의 말이 어려운 게 아니었으니까.

“알겠어요. 지금 습격해 온 것도 말이죠. 전대 장문인을 공자님께서 치료하시고, 무당이 적건회를 내칠 명분이 사라졌어요. 심지어 흉수가 적건도, 무당도 아닌 게 밝혀졌으니 결국 외부의 적이 나타났다는 얘기고.”

“외부의 적이 나타나게 되면 서로 치고받던 사람도 뭉치기 마련이지.”

정파들 사이에서도 분쟁과 전투가 발생해도, 마교가 준동하면 뭉치는 원리와 같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지금 습격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었다.

일이 틀어지면, 그대로 물러나면 될 일.

천무백의 말대로 이렇게 습격한다는 건, 곧 백도무림보고 뭉치라는 얘기나 더 되겠는가. 하니 혈귀곡이 원하는 무언가가 무당에 있다는 것.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당을 끝내 멸문시키고, 원하는 걸 가져가겠다는 뜻이다.

“그럼 막아야겠네요.”

“부탁하오, 소저.”

“……네?”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난 내 일을 하러 가겠소.”

그리 말하며 천무백은 검을 꽉 쥐었다.

“혹시…….”

“저놈들이 이리 몰려나왔으니, 저 마인들이 머무르던 곳은 텅 비어 있겠지.”

“……!”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가 기함했다.

“거기가 어디인지 알고요?”

“능허가 기특하게도 본거지를 찾았소.”

“맙소사. 지금 저놈들의 본거지로 가겠다고요? 위험해요! 무당을 습격한다고 인원을 빠져나 왔겠지만, 그렇다고 텅 비어 있진 않을 텐데!”

“걱정하지 마시오. 내 생각이 있은즉. 소저께서 무당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되어 주시오.”

“제, 제가요?”

“무당엔 소저가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비장의 수가 있지 않소?”

“……수가기문도!”

“기관진식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소저요. 호위무사를 데리고 가서, 진식을 이용해 저들을 막는데 도와주시오.”

“알겠어요.”

갑작스러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제갈설아는 다부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래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대답하는 목소리가 미묘하게 떨렸다. 천무백이 가볍게 웃어주며 제갈설아의 어깨를 두들겼다.

“걱정하지 마시오. 수가기문도라면 능히 고수를 막을 수 있고, 소저가 무용이란 호위무사를 잘 이용하여 진식으로 마인들만 끌어들이면 막을 것이오. 그리고, 곧 늦지 않게 오겠소.”

마지막 말에 제갈설아는 용기가 생겼다. 다부진 얼굴로 급히 무용과 함께 움직였다.

천무백은 이어 한쪽에서 싸우고 있는 무소선사를 불렀다.

“무소선사!”

“천 공자!”

무소선사는 호쾌한 일장으로 적의 가슴팍을 우그러뜨렸다.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일전 소림에서 봤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였다.

다가온 무소선사에게 천무백이 품에서 소림면패를 꺼냈다.

“소림면패에 의거, 정식으로 그대에게 나한승을 지휘할 권한을 요구합니다.”

“……!”

“나한각주. 소림면패의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데, 거부하시겠습니까?”

소림면패는 나한승의 지휘권을 요구할 수 있다.

하나 반드시는 아니다. 나한각주가 그걸 거부하면, 그대로 끝이다.

“천 공자, 무슨 생각입니까? 나와 내 휘하의 나한승들은 여기서 죽을 때까지 싸울 겁니다. 도망치지 않습니다. 한데 어째서 권한을 요구하십니까?”

“나한승이 싸울 곳은 여기가 아니오. 지금 혈귀곡 놈들의 본거지를 치러 갈 겁니다.”

“……!”

무소선사의 동공이 크게 확장됐다.

갈등하는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대청진인이 싸움에 끼어들었다지만, 마인들의 공격으로부터 오히려 밀리는 모양새.

여기서 나한승까지 빠진다면, 일은 어떻게 돌아갈지 모른다.

솔직히 무소선사는 천무백의 생각이 틀렸다고 여겼다.

여기서 적의 본거지를 친다?

그러다가 여기 무당이 무너질지도 모르는데?

“생각을 재고하시지요. 천 공자께서 여기서 싸운다면, 능히 모든 적을 물리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없어도 가능합니다.”

천무백이 그리 말하며 시선을 돌렸다. 무소선사도 천무백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 방향에서는.

“무당을 지켜라!”

무천악과 추혼삭을 필두로, 이마에 붉은 띠를 맨 적건회 무사들이 있었다.

천무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 * *

비량은 어이가 없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라.”

“어, 그러니까. 천무백 고놈은 창천검신의 후인이라니까. 그렇다고 검존의 제자는 아니고, 창천검신이 말년에 제자 한 명을 또 뒀나 봐.”

“……창천검신?”

“야. 그리고 뿐만 아니라 빙공도 쓴다? 장난 아니야. 저번에는 강도 그냥 얼려 버리더라니까?”

“……빙공을 쓴다고?”

“소림하고도 연이 깊어. 소림면패 알지? 소림면패! 그거 보고 종남도 기겁하던데. 천무백 고놈 자식이 말이지. 소림면패도 들고 있어서 소림사 중놈들도 천무백 말에 끔뻑 죽어.”

“허어…….”

“뿐이야? 화산의 장문인하고 장로들도 천무백 그 자식이 협객인 줄 안다니까. 쯧쯧쯧. 정파 놈들의 눈은 옹이구멍이나 다름없어. 무슨 천하의 대협객을 보는 것처럼 쳐다보는데…….”

“잠깐. 잠깐.”

비량은 끝도 없이 능수능란하게 이어지는 능허의 말을 막아 세웠다.

그는 머리가 지끈거렸다.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그러니까, 네놈 말은…… 천무백이 창천검신의 후인이며, 빙공도 쓰고, 소림면패를 갖고 있어 소림을 움직일 수도 있으며, 화산의 장문인과 장로들도 그를 지원하고 있다?”

“아, 그렇다니까. 요즘엔 제갈세가의 그 아가씨하고 사이가 묘한 게, 뭐 조만간인 거 같더라고. 듣기론 태상가주하고 뭔 얘기를 나눴다는데.”

“…….”

쭉 이어진 이야기에 비량은 머리를 짚었다.

하나같이 믿기 힘든 사실들이지 않은가.

젊은 무인 한 명의 영향력이 어마어마하다. 이게 정말이라면, 혈귀곡은 예상보다도 더 큰 적을 마주하고 있다.

“이노옴! 어디서 거짓을 늘어놓느냐. 일부러 판단을 흐리게 하려고, 거짓을 말해?”

능허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얼씨구? 다 말해 줘도 지랄이네.”

“그게 이상하단 말이다! 고문 하나 하지 않았는데, 순순히 아는 걸 다 분다고?”

“고문당하면 아프잖아. 팔 하나, 눈 한짝 없는 사람에게 고문이라니, 거 참.”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이렇게 순순히 말하는 걸 다 믿으라고? 무슨 속셈이더냐”

“속셈은 무슨…….”

의자에 묶여 있던 능허가 고개를 반쯤 숙였다가 피식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똑바로 약초꾼을 바라봤다.

“속셈이 뭐가 있겠어. 알아도 다 상관없어.”

능허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콰아앙!

멀리서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

“어차피, 너희들 여기서 다 뒈질 거거든.”

천무백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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