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46화>
146. 나도 압니다.
무명도인은 늘 그랬듯이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마당을 쓸고, 찻잎을 따서, 차를 우린 뒤 멀거니 하늘을 바라봤다.
무위자연.
도가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생활.
그의 삶은 자연과 닿아있었다.
누가 봐도 도를 닦는 도사구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무명도인을 향해 누가 찾아왔다.
무명은 처소를 향해 다가오는 신형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오셨소, 비량.”
“허허허. 도사님, 이 약초꾼이 올 때마다 이리 반겨주시니 이거 고개도 못 들겠습니다.”
뒤에 망태기를 메고 있는 노인은 건강해 보이는 평범한 약초꾼이었다.
서로 안면이 깊은 사이인 듯, 무명도인은 자연스럽게 약초꾼을 처소로 안내했다.
“날이 상당히 더워지더이다.”
“그래도 산 위는 서늘하지요.”
둘의 대화는 마치 오랜 친우를 만난 듯 정겨운 마음까지 들었다. 하나 묘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냉막하기 이를데 없었다.
만일 누군가 둘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있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 알았을 것이다.
나누는 대화와 맞지 않는 입모양이었다.
즉, 대화를 나누며 전음을 통하는, 상승의 경지였다.
[천룡검협이 소림까지 데리고 왔다던데? 그것도 나한승들까지 이끌고. 대체 뭘 하는 거야?]
[별 거 아니야. 그 애송이놈이, 비다라를 어떻게든 해 보겠다고 중놈들한테 도움 요청하는 거지.]
[그 애송이가 중경성에서 비다라 한 놈을 어느 정도 제어하는 데 성공했어. 진짜로 비다라에서 구해 내면, 어떡하려고?]
[그럴 일 없어.]
무명이 그리 일축하며 웃었다.
“이 차가 곧 약이나 다름없으니, 약초보다 낫지요.”
[그리고 그리되면 뭐, 까짓 다 엎어버리면 되지.]
[엎다니! 이놈, 본곡에서 서열이 6위나 되는 육성이란 놈이, 그리 경거망동하느냐!]
[흥, 개소리하지 마시오. 당신네 혈종 출신들은 이래서 맘에 안 들어. 그냥 무당 놈들 싹 다 죽이고, 그 신령부하고 태극혜검 같은 비급들 싹 빼놓으면 되는 거 아니야?]
[우리가 바라는 게 고작 그깟 비급과 부적 따위냐! 우리가 원하는 건 정파놈들이 서로 의심하고 부딪치고 충돌하는 거다! 서로 혼란에 빠져야 해!]
[그래서 뭐? 잘 준비했던 혈사문은 사라졌고, 비다라를 이용해 정파 사이를 이간질한다는 계획도 천룡검협 그 애송이가 다 터뜨려서 개판이 되지 않았나? 그쪽 혈종 출신이 세운 계획 중 뭐 하나 잘된 거 있나?]
[······그래도 이번 일은 잘되고 있으니까, 경거망동하지 마. 보아 하니까 이미 감시자가 있더만.]
[무당 장문인 놈이 내가 도망치지 않게끔 지붕 위에 감시자 하나 붙여놨지.]
[하나라고? 둘 아닌가?]
[뭐? 두 명이라고?]
순간 대화가 뚝 끊겼다.
[지붕 위에 하나. 맞은편 봉우리에 제법 강한 외팔이 하나가 있던데?]
별생각 없이 얘기하던 약초꾼은, 딱딱하게 굳은 무명의 얼굴을 보곤 표정을 굳혔다.
[이런, 달갑지 않은 손님인가 보군. 그놈은 내가 처리하지.]
약초꾼이 그런 전음을 남기고 일어나 나갔다. 약초꾼이 곧장 나간뒤에도 무명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이미 지붕 위에 무당삼걸 중 하나가 자신을 감시하려고 숨어있음은 진작 알았다.
근데 하나가 더 있다고? 대체 언제부터?
그때였다.
쿠구구구구!
저 능선 너머에서 전해지는 둔중한 진동.
피부에 전해지는 이 칼날 같은 기운.
아무리 도인으로 분했어도 알 수 있다. 이건 비량의 본질과는 완전히 상극과도 같은 기운.
접근하기도, 만지기도, 맡기도 싫다. 자연지기와 유사하나 확연히 다른, 도인놈들만이 간혹 사용하는 빌어먹을 선기.
거기에 어마어마한 한기와, 냄새를 맡기만 해도 토악질이 쏟아지는 소림과 도가의 것이 합쳐진 듯한 항마(降魔)의 기운까지.
“대체 이 무슨?”
무슨 싸움이라도 났나?
위기감이 솟구쳤다. 방금전 새로 안 사실과, 피부로 전해지는 기운이 겹쳐 신경이 예민해졌다.
자신이 신경도 못 쓰던 또 다른 감시자 존재.
무려 수십 년.
무당의 한 축에서 버티고 버텨, 그 누구도 그가 마인이라고 생각 못 한다. 무명도 제 단전 깊숙한 데 숨어져있는 마기가 아니라면, 스스로를 영험한 도사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니 무당의 도인이라면, 자신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
벗어났다는 건, 무당이 아니라는 의미.
머릿속에 벼락이 쳤다.
현재 무당에 무당이 아닌 자. 누가 있나.
천룡검협, 제갈 씨의 계집과 호위무사. 그리고 그놈의 종놈.
‘날 감시하고 있었다고? 천룡검협이?’
추론이 그리 귀결되자, 무명은 일이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다음 전해지는 감각은 절정의 위기감.
뚝!
“······!”
머릿속에 있던 신경 하나가 뚝 끊어지는 감각.
아니, 평생을 달고 다녔던 신체 일부가 뚝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심장 한편이 허전해졌다.
‘설마······?’
무명의 눈동자가 거칠게 진동했다.
“비다라가, 끊겼다!”
심령으로 연결된 비다라와의 끈이 끊어졌다.
죽은 게 아니다. 죽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다.
술법 자체가 사라진 감각.
“누군가 비다라의 술법을 풀었다!”
단순히 비다라가 죽은 게 아니라, 아예 술법 자체가 풀렸다.
“설마, 천룡검협이 진짜로?”
그는 별안간 일어나 진동이 전해진 능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리되면······ 이리되면, 이런 제기랄.”
대계가 물거품이 된다. 현엽진인이 비다라에서 풀려났으면, 죽기 직전에 의식으로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충분히 설명할 터.
하면 적건회와 무당파의 갈등은 순식간에 봉합되리라.
두 세력의 갈등을 부추겨, 끝내 전쟁이 일어나게 만들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무당의 보물? 그딴 건 부수적인 것이다.
애당초 목표는 무당이 다시는 강호에 나오지 못하게, 내부에서 싸워 스스로 자멸하게 만드는 것.
“어쩔 수가 없구나.”
무명의 얼굴은 이내 한없이 차분해졌다.
“스스로 자멸하게 하는 혈종 놈듣의 계획이 틀렸다면, 내 뜻대로 해야지.”
자멸이 아니라, 자신의 손아귀로 절멸시킨다.
그리 중얼거리며 무명은 곧장 나갔다. 이제는 몸에 맞지도 않는 도사로서 살 필요가 없다.
쿵!
지붕에 숨어 있던 신형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무명은 예상했다는 듯이 곧장 손을 뻗었다.
카가가가강!
불쑥 솟구친 검이 무명의 손을 쳐냈다. 마치 칼날이 부딪치는 것처럼 불꽃이 튀었다.
“······!”
“무당삼걸 중 하나지? 제법이구나. 본좌의 조공을 막다니.”
“당신······ 도인이 아니군.”
“흐흐. 알면서 감시하고 있던 거 아니냐?”
무당삼걸.
장문인을 호위하는 세 명의 절정고수.
그중 명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간 이해할 수 없었다. 매번 차를 같이 마시고, 조언을 얻는 고매한 도인.
장문인은 왜 그를 감시하라고 했을까?
이제야 이해했다.
온몸을 둘러싸는 강력한 사특하고도 지독한 기운.
마기.
“마······ 인이구나!”
무명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왜 대청 그놈이, 날 감시하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느냐?”
명현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감시하라는 건, 대청은 이미 마인임을 최소한 예상했다는 의미다.
무당 내에 마인이 도인으로 분하고 있는 것인데.
감시만 하라고 한 것이다. 당장 치지도 않고.
‘어째서?’
떠오르는 의문.
그 의문을 읽은 무명의 눈빛이 빛났다.
“무슨 뜻이겠느냐? 네놈의 주인인, 대청놈은 내가 흉수임을 이미 알고 있었단 뜻이다.”
“······!”
“알면서도 내버려 뒀지. 왜? 내가 흉수인게 밝혀지면, 적건회를 칠 수가 없거든.”
“그 무슨 허황한 소리더냐!”
명헌은 인정할 수 없었다. 하면 알면서도 냅둔 이유가, 오로지 적건회를 내치겠단 생각 때문인가?
아무리 적건회를 싫어해도, 제 스승을 죽이고 비다라로 만든 마인을 어찌 가만히 내버려둔단 말인가.
“제 딴에는 적건회를 내친 뒤에, 날 잡아서 족칠 생각이었겠지. 그래서 네놈에게 내가 도망칠 수 없게끔 감시를 맡긴 거 아니겠느냐? 흘흘흘!”
명현은 더는 듣기 힘들다는 괴로운 표정으로 검을 내뻗었다.
무명이 코웃음 치며 그 검을 덥석 잡았다.
“······!”
“제대로 여물지도 않은 태극으로, 본좌를 벨 수 있을 것 같더냐?”
콰직!
검이 부러졌다. 내공이 잔뜩 실린 강맹한 검이 산산조각이 났다. 명현의 눈이 떨리는 순간. 무명의 손이 단숨에 목을 부러뜨렸다.
“혈종놈들 계획에 맞춰 움직이면 뭐 해? 혈사문 놈들 이용하는 거나 중경성에서나 다 개판 나는데. 이렇게 된 이상.”
무명.
아니 한때, 다비노괴로 불렸던 기인이자 마인인 무명은 품에서 신호탄을 꺼내 쏘아 보냈다.
“내 맘대로 한다.”
혈종놈들이 세우는 음침한 계략이 아닌.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마인의 방식으로.”
부수고, 짓밟고, 빼앗는다.
* * *
대청진인은 죽은 현엽진인의 시신을 붙잡고 오열하는 무천악을 메마른 눈빛으로 바라봤다.
서로를 정적으로 여겼다. 말도 섞지 않는 사이다.
물론 처음엔 그러지 않았다.
무천악은 한 살 어린 자신을 친동생처럼 여겼고, 대청도 무천악를 친형처럼 따랐었다.
한데 언제부터였을까.
무천악은 자신을 점점 질투하고, 시기했다.
‘어르신께서 장문인에 오르신다면서? 그럼 이제 넌 장문인의 제자가 되는 거야! 정말, 부러워. 이제 무당의 태극혜검이며, 온갖 영약들도 잔뜩 먹을 수 있겠어. 이런, 이제 나는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고수가 되겠는걸?’
‘무슨 소리야. 형도 스승님 제자잖아!’
‘……난 어르신의 제자가 아니야. 그냥 네 덕에 옆에서 같이 약간의 가르침만 받았을 뿐이지.’
그때 무천악의 얼굴에 나타난 감정의 편린은 고통과 시기, 그리고 질투가 뒤섞여 괴로운 것이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대청은 무당의 직계로서, 차기 장문인이 될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익혀나갔다. 한 수 더 높았던 무천악을 무공으로 앞지르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
무(武)에 대한 재능과 이해도는 무천악이 더 나았지만.
여러 협객의 무공이 잡다하게 섞인 적건회와는 달리, 무당은 명문정파로서의 바탕이 단단했다.
그때부터 무천악과 대청진인의 사이는 조금씩 소원해졌다.
결정적인 사건은 대청진인이 약관의 나이가 됐을 때다.
태극혜검.
무당 최강의 절기가 담긴 비급을 받았다.
‘지금부터 차차 배우고 익힌다면, 너의 재능이라면 무당의 이름이 강호를 진동시킬 것이다.’
태극혜검.
무당의 장문인만 익힐 수 있는 절세의 비기.
대청은 그 사실을 무천악에게 알렸다. 드디어 자신이 태극혜검을 익힌다고. 어린 시절부터 무당의 태극혜검이야 말로 강호제일이라고 생각하던 무천악이 아니던가.
한데 무천악이 자신이 자릴 비운 사이, 몰래 태극혜검의 비급을 훔치려다 적발됐다.
‘형님, 그걸 왜 탐하신단 말입니까! 태극혜검은 그 누구도 탐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도 말이냐? 너와 같이 무공을 익혔다. 너는 적건회의 모든 무공들을 익혀갔으면서, 나는 안된단 말이냐?’
‘형님……. 그건 무당의 것입니다.’
‘나는 무당을 지키는 검이로다!’
‘무당을 지키는 검이지, 무당의 것을 훔쳐서는 안됩니다.’
무천악의 표정이 처연해졌다.
‘나는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는 자부심으로 산다. 그러려면 강해야 해. 내 아버지, 내 친우들의 아버지들이 무당을 지키다가 죽어 간 이유가, 마교놈들보다 약해서였다. 무당을 지키는 검이 강해지려면, 무당의 무공을 익혀야 한다. 그게 잘못된 것이란 말이냐?’
그때부터 대청진인은 무천악과는 같이 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무당을 지키는 검이, 검으로서 만족하는 게 아니라 무당 그 자체가 되고 싶어 했으니까.
훗날 장로가 되고 무당에서 본 적건회의 영향력을 본 대청진인은 뼈저리게 느꼈다.
당장은 몰라도 적건회가 무당을 지키는 검이 아니라, 무당을 죽일 검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무당을 지키는 검이다. 새하얀 수건이 붉게 피로 물들 정도로 무당을 지켰다. 그런데 어째서 대청, 너는 우리 적건을 미워하느냐? 무당을 지키는 검을!’
하여 적건회를 밀어내려고 애썼고, 무천악도 그에 대한 반발로 더 강력하게 무당을 몰아붙였다.
그렇게 한번 깊어진 감정의 골은 끝내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사백을 저리 만든 이가 적건회주는 아닌 듯합니다. 장문인. 사백의 눈을 봤어요.”
진청진인의 말에 대청은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였다.
죽어가면서 무천악에게 보여줬던 현엽진인의 눈엔 따스한 온기가 어려 있었다.
자신을 죽인 흉수에게 그런 눈빛을 보이지 못했으리라.
하나, 대청진인은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니, 확신했다. 알면서도 제 욕심에 버려뒀다. 그 욕심이 무당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지만. 과연 정말 그랬을까.
“뭐, 장문인 잘못이지요.”
“……천룡검협.”
“음과 양, 적과 백, 하늘과 땅, 모든 만물의 조화가 태극인데. 장문인께선 아직 태극을 제대로 품지 못하셨던 것 같습니다.”
별안간 훅 들어오는 천무백의 말에 대청진인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마치 그 속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맑은 눈동자에 부끄러움이 불쑥 들었다.
천무백이 차분하게 말했다. 왠지 모르게 목소리엔 따스한 어조가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직 늦은 건 아닙니다.”
“……늦은 건 아니다?”
“태극은 흐려질지언정, 사라지진 않습니다. 태극은 옅어질지언정, 잊히진 않습니다.”
뜻 모를 말이었다.
하나 가슴이 욱신거리는 기분이었다. 동시에 부끄러움과 당혹스러움에 날뛰던 심장이 가라앉았다. 마치 자신보다 배는 더 산 것 같은 노인의 말처럼, 천무백의 목소리엔 그런 힘이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대청진인은 고백하고 싶었다.
“대협, 빈도는 사실 흉수가 누군지…….”
천무백이 손을 휘저어 입을 막았다.
“말하지 마시오. 압니다. 나도 알고 있으니까.”
“……!”
대청진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무백은 그 표정을 흘기며 멀리 무당의 본단을 바라봤다. 능선을 따라 모여 있는 열두 개의 궁.
그중 하나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하여간, 수틀리면 칼부터 뽑는 게 마인놈들이지.”
이미 뽑혀 있는 천무백의 검이 차갑게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