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44화 (144/318)

<검신재생 144화>

144. 내가 들어가겠소.

천무백은 제갈설아와 함께 곧장 움직였다.

무당에선 대청과 진청이, 적건회에선 무천악과 추혼삭, 짐을 풀자마자 무소선사 역시 곧장 뒤따랐다.

“개파조사께서 도를 닦았다고 전해지는 비선동입니다. 본 무당에서 가장 자연지기가 충만한 곳입니다.”

세차게 쏟아지는 폭포. 너머엔 뻥 뚫린 동굴이 있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커다란 사각형의 반석 위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새하얀 백발의 도인이 보였다.

“전대 장문인이신 현엽진인이십니다.”

“나무아미타불······.”

마치 깊은 잠에 든 것처럼 편안한 모습. 신선이 누워있다면 이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선풍도골의 풍채였다.

겉으로 보기엔 비다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머지 사람들이 모두 합장하고, 무소선사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염주를 굴렸다.

천무백은 감상에 빠질 것도 없이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반석의 사방에 도인 넷이 알 수 뜻 모를 주문을 외웠다.

중간중간 한두 명은 일어나 방울을 흔들거나, 싸리나무로 시체처럼 놓여 있는 현엽진인을 때리듯이 휘둘렀다.

무천악과 추혼삭은 그 광경을 보고 우뚝 멈춰 섰고, 제갈설아 역시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진청진인이 좌중의 모습에 쓰게 웃으며 설명했다.

“도력이 높은 도인들께서, 주문을 외우며 비다라의 마기를 억누르는 중입니다.”

모르는 이들이 보기엔 어쩌면 기이하다 여길 광경.

무천악과 추혼삭마저 이런 짓으로 비다라를 억누를 수 있느냐 하는 의문이 들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이 안을 가득 메우는 선기를 느낀다는 것 자체가, 도력이 깊은 도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하니까.

대청진인은 천무백의 반응을 유심 깊게 살폈다.

‘전혀 이상해하지 않는군.’

무소선사야 불가의 사람이니 그렇다 쳐도, 당장 곁에 있는 제갈설아도 애써 표정을 관리하려는 게 보였다.

한데 천무백은 담담했다.

저 도인들이 주문을 외우고 방울을 흔들 때마다 대청진인은 미약하게나마 선기를 느꼈다.

선기가 요동치고, 흔들리며 누워있는 현엽진인의 육신에 들어가고 빠져나가기를 반복했다.

천무백도 마치 그런 흐름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평생을 수양한 대청진인도 흐름만을 간신히 느낄 따름.

옆에 있는 도학파의 진청진인도 선기와 자연지기를 어렴풋이 구별할 정도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이 기운을 그저 자연지기로 오해했다.

그만큼 선기는 고강한 무림인이어도, 도인이 아닌 이상 읽을 수도, 볼 수도, 느낄 수도 없다.

‘선기를 어찌 느끼겠는가? 아마 기감에 예민하여 자연지기로 오해하고 있겠지.’

대청진인으로선 그리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이 선기를 느끼고 흐름을 볼 수 있다는 건, 꿈에도 생각 못할 일이다.

애석하게도 천무백은 실제로 선기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단순히 느끼는 수준을 넘어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확실히, 도력 깊은 도인들은 다르긴 하네.’

주문을 외우고 있는 네 명의 도인에게선 단 한줌의 내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로지 선기만이 흘러나왔다. 주문을 외우면 외울수록 선기는 뚜렷해졌다.

이 정도는 되어야 비다라를 억누를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론 안타까운 심정도 들었다.

‘사실상 비다라를 막을 방법이 없는 거란 말인데.’

그나마 무당파이기에 이 정도 가능하다.

화산이나 종남도 도문이지만, 이만한 도력을 가진 도인은 드물 터.

도문인 화산, 종남도 그럴진대. 다른 무파들은 어떻겠는가.

옆에 있는 무소선사가 소림에서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면 모를까. 지금으로선 속수무책인 일이다.

‘뭐, 그래도 시도는 해볼만 해. 선기가 부족하면, 선기를 늘려주면 그만이잖아?’

지레 포기하기엔 일렀다. 천무백은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준비한 걸 시도해야 하지 않겠나.

이 동굴 자체에 선기가 머물러 있었으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좋은 환경이었다.

천무백이 제갈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작합시다.”

“네.”

제갈설아가 다부진 표정으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이미 천무백과 충분히 논의하여 준비했다. 일을 시작하는 움직임은 거침이 없었다.

“진법입니까?”

지켜보던 대청진인이 물었다.

“예. 진법으로 시도해 볼 생각입니다.”

“진법이라니······. 어떤 방식으로 치유하겠단 겁니까?”

“여기 계신 도인들께선 오랫동안 수양하여 쌓은 선기로 비다라의 마기를 억누르고 있죠. 하지만 이 정도로는 부족합니다.”

“부족하다? 대협. 여기 계시는 도인들은 무당에서 가장 도력이 깊은 분들이십니다. 당장 내일 등선해도 모를 정도로 수양과 공부가 깊어요.”

“뭐, 맞는 말씀이십니다만. 비다라를 치유하는 데에는 확실히 부족합니다.”

주위로 뻗쳐 나오는 선기를 다 합쳐도, 천문경이 선근경의 구절을 외울 때 드러나는 선기에 미치지 못한다.

무당의 내로라하는 도인들의 선기가 이 정도다.

하니 천무백은 이곳에 모여든 선기를 더 증폭시킬 방법을 고안했다.

“부족하면, 증폭시키면 되겠죠.”

“선기를 증폭시킨다? 대협. 선기란 것은 오랜 공부와 수양만으로 쌓을 수 있습니다. 그걸 인위적으로 증폭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해봤습니까?”

“……대협?”

천무백의 목소리에 언뜻 짜증이 묻어났다.

사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천무백은 무당에서 벌어지는 알력 싸움과 숨겨진 모종의 음모에 서서히 짜증이 쌓이고 있었다.

‘이런 썅. 부탁으로 왔는데, 누군 이용하려 하고, 누군 음흉하게 속내 숨기고, 지랄을 해요.’

무슨 자신이 조사관도 아니고 말이다. 만일 무당이 아니었다면 천무백은 제 성격대로 마음껏 날뛰었을 것이다. 과거 40년 전, 무당이 보여 준 분투를 존중했기에, 이만큼 참았다.

하지만 슬슬 참는 것도 임계점을 넘으려 하고 있었다.

“해 보지도 않고 되니, 안 되니, 그런 소리 그만 하세요. 어째 절박해 보이시지도 않으십니다?”

대청진인이 순간 움찔했다.

“허 참. 제 스승이 쓰러졌는데, 지레 포기한 사람처럼.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나였으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했을 텐데. 참.”

대화를 지켜보던 진청진인은 입을 쩍 벌렸다.

‘어찌 저리······ 광오할 수가!’

대청진인은 무당의 장문인이다. 도학에서도 수양이 깊었다. 단호한 어조로 일축하고, 아예 타박하다니.

대청은 진청의 대사형이었다. 장문인이 된 후 잠잠하지만, 본래 성격은 엄격했다. 오죽하면 무당의 호랑이라 불렀을까.

한데 대청의 반응에 진청은 차마 끼어들 수가 없었다. 무언가 얼굴에 떠오른 부끄러움 같은 감정.

‘……?’

이해할 수 없었다.

천무백은 태연한 얼굴로 진법의 완성을 기다렸다.

“짠, 다 됐어요!”

악인봉행진.

제갈세가의 가전진법.

이름 그대로였다.

악인의 행동을 봉해 버리는 봉행진이었다.

단순한 봉행진이라면, 제갈세가의 직계에게만 전해지는 비기가 아니리라.

봉행진은 진법으로 유명하다 싶은 곳이라면 하나쯤은 있으니까.

악인봉행진이 유명해진 건 정마대전에서였다.

“악인봉행진입니다.”

“악인봉행진!”

“정마대전때 칠초절마(七招絶魔)를 삼켰다는 그 진법 말입니까?”

단 일곱 초식이면 어떤 상대도 팔다리를 절단해 버린다는 마인.

제갈선이 그런 마인을 진법 하나로 처리했는데, 그게 바로 악인봉행진이다.

악인봉행진을 설치하는 이가 고작 방년의 젊은 제갈설아란 사실에 중인들은 놀랐으나, 이내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악인봉행진을 왜 여기에다 쓰는 겁니까?”

“봉인된 사람의 내공을 아닌, 진법 안에 가둬진 선기를 증폭시킬 겁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기존의 악인봉행진과는 궤를 완전히 달리한다.

아니, 아예 새로운 진법이라 봐도 무방했다.

제갈설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요. 틀린 부분도 없고, 실수한 곳 없는지 꼼꼼히 확인했어요. 연습하던 대로 잘됐어요!”

“수고했소. 끝내 제대로 완성했구려. 과연 대단하오.”

천무백의 칭찬에 제갈설아가 얼굴을 붉히며 몸을 배배 꼬았다. 천무백이 이처럼 누군가를 진심으로 칭찬한 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번 일은 천무백으로서도 상당히 놀라웠다. 물론 옆에서 여러 조언을 해 준 게 크지만, 제갈설아가 아니었으면 시도조차 하지 못했을 일이다.

그녀가 긴장된 눈으로 천무백을 쳐다봤다.

“잘되겠죠?”

“잘될 거요. 소저가 어련히 잘하셨을까.”

천무백이 그리 중얼거리곤 태연하게 걸어갔다. 현엽진인을 중심으로 꼭짓점이 다섯 개인 오방진(五方陳)의 형태였다.

“도인들께선 각 꼭짓점 부분에 서 주십시오.”

천무백의 요청에 주문을 외우던 도인들이 빤히 대청진인을 쳐다봤다.

대청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천 공자께서 방안이 있으시다니,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선배님들.”

“흐으음. 장문인의 부탁이라면야······.”

도인들이 자리에 서자 천무백은 맨 위 꼭짓점에 섰다.

“각자 지금까지 하던 대로, 각자의 방식으로 선기를 다뤄 주십시오.”

“이 진법 안에 선기를 밀어 넣는다고 생각하면 되는가? 공자.”

“예, 맞습니다.”

도인들은 고개를 끄덕이곤, 이전처럼 주문을 외우고 방울을 흔들었다.

천무백 역시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로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니는 선근경의 구절을 소리 내어 읊었다.

이미 중경성에서 채가령에게 선근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면서, 선근경의 내용을 완전히 독파한 천무백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지켜보던 대청진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진청진인의 표정 역시 변했고, 무소선사의 눈동자도 커졌다.

‘선기······!’

바닥 위에 그려진 진에서 뚜렷한 빛이 뿜어졌다.

투명한 빛은 점점 새하얗게 타오르는 듯 강렬해졌다.

“오오, 과연!”

확연한 변화가 눈앞에 드러나자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에 상기됐다.

“이건, 자연지기······ 아니, 다르군요!”

“이게 선기로구나.”

“허어.”

좌중에서 감탄이 쏟아졌다. 내공과는 다른 기운.

저 새하얀 기운은 갈수록 진법 안에서 몰아치며 그 빛이 확연하게 뚜렷해졌다.

눈송이 같은 새하얀 점이 등불처럼 켜지고 꺼지기를 반복하다가 이내 새하얀 선처럼 쭉쭉 연결됐다.

시간이 지나면서 선들은 하나로 뭉쳐져 마치 장막처럼 진법을 덮어갔다.

실체가 없던 선기가 눈앞에 뚜렷이 나타났다.

그 순간,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잠깐만?’

머릿속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

저걸 내공처럼 쌓을 수 있을까?

선기는 한데 쌓이거나 뭉쳐지지 않는다. 대기중으로 넓게 퍼지고 흩어지는 성질을 지녔다. 마치 자연처럼. 있다가도 없는 것처럼.

한데 그 선기들이 진법을 벗어나지 못해 뭉쳐서 점이 되고, 점이 선이 되고, 선이 장막이 되어갔다.

흩어지지 않는다. 뭉쳐지고 있다. 쌓이고 있다.

그렇다면.

‘저 안에 들어가서 선근경을 외우면?’

선기의 흐름에 관여하는 선근경의 힘.

저 안에 들어간다면?

천하의 천무백도 선기에 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하다.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위험할지도 모른다. 애당초 원형이 된 악인봉행진은 대상을 주화입마에 빠뜨리게 하는 거니까.

하지만 천무백은 강렬한 직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직감은, 매번 천무백을 배신한 적이 없었다.

“내가 들어가겠소.”

“네? 저길 들어간다고요?”

제갈설아가 화들짝 놀랐다.

“안에 들어가는 게 효과적일 것 같소.”

“잠깐만요. 진법 안에 들어가는 건 애초에 시험해보지 않았어요. 위험할지도 몰라요.”

제갈설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애초 원형이 되는 악인봉행진은 진법 안 대상을 폭주시키는 것.

많이 변경된 현재 진법도 골자는 바뀌지 않았다.

어쨌거나 진법 안의 기운을 증폭시켜, 대상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은가.

하여 천무백이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진법을 새로 만든 제갈설아도 확신할 수 없었다.

한데 천무백의 표정을 본 제갈설아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걱정하지 마오. 아무 문제 없으니까.”

천무백은 확신했고 뭐라 만류할 새도 없이 진법 안으로 성큼 걸어 들어갔다.

제갈설아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여차하면 진법을 해체할 준비를 했다.

그러나 막상 안에 들어간 천무백은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그의 얼굴에 묘한 열기가 떠올랐다.

진법 안에서 몰아치는 선기.

그 가운데 서서 천무백은 선근경을 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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