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43화>
143. 미래의 천하제일인
“과연, 범상치 않다고 여겼다만. 정녕……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이구나.”
천하의 소림이 강호 재출도를 선언했으니, 사실 가만히 있어도 강호의 온갖 소식과 정보들이 귀에 들어왔다.
그런 소식 중에서도 혜량대사는 천무백의 행보에 크게 경탄했다.
“과연 지금 천공자의 수위가 어느 정도일 것 같소?”
“천하백대고수는 충분할 겁니다.”
“약관도 안 된 나이에 천하백대고수라……!”
탄식이 절로 튀어나왔다.
물론 호사가들이 떠드는 얘기가 실제 무인들의 서열은 아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천하에서 가장 강한 백 명을 꼽으라고 하면, 하나같이 망설임 없이 천무백을 거론했다.
혜량대사와 무소선사도 마찬가지다.
실제로 천무백의 무력을 목격했으니까.
“지금 가진바 능력은 후기지수를 넘어섰고, 창천검신의 후인이니 잠재력 역시 천하에 다툴 사람이 없을 것이오. 짧으면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그 이름이 천하에 자자할 것이니…….”
혜량대사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단순히 무공 실력만 따져도 그만한 평가를 들을 만한 존재다.
“하지만 진짜 무서운 점은 따로 있지요.”
“협객이란 점 말씀입니까?”
무소선사의 반문에 혜량대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 공자가 행하는 일은 뚜렷한 목적을 향해 귀결되오. 오로지 혈귀곡, 그놈들을 처단하기 위해서 화산에서는 화산, 종남과 분쟁을 일으키는 걸 두려워하지 않기까지 했으니까.”
그 담대한 행보에 많은 강호인이 감명받았다.
두 거대문파를 상대로 제 의견을 주장하고, 끝내 결과를 성취해 내었으니,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 지지가 뜨거웠다.
“그렇습니다. 더 무서운 건, 단지 강호인들뿐 아니라 민간에서도 천공자의 이름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하남신의니, 하남협객이니.
역병을 치료해 주고, 괴롭히던 흑도들을 벌했다는 얘기들이 민간에서 공공연하게 돌았다.
“이런 자가 천하제일인이 된다면 어찌 되겠소?”
무소선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천하제일인 자체가 곧 강호인 법이오, 천하제일인은 자체가 힘이며, 곧 명분이오”
천하제일인.
수많은 문파와 세가에서 천하제일인이 배출되기를 원하는 이유.
어떤 명분도 천하제일인의 말을 따라가지 못한다.
오로지 강호 그 자체가, 곧 천하제일인이었다.
“거기에 뭇 강호인들의 존경과지지, 그리고 민간에서까지 숭앙한다면…….”
“새로운 창천검신께서 나타나는 거지요.”
창천검신.
그 이름을 떠올리자 혜량대사는 저절로 숨이 가빠졌다.
고작 네 글자의 별호가 가진 힘은 어마어마했다.
정도무림 전체가 그 명성에 뭉치고, 움직였다. 수백, 수천의 강호인이 창천검신의 말 한마디와 손짓 하나에 움직였다.
지금 천무백의 뒷모습에서, 그때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혜량대사는 하오문을 통해 천무백에게서 온 서찰을 펼쳤다.
“각주, 천공자의 요청을 받아들입시다. 나한승 일부를 이끌고 무당으로 가 주시오.”
무소선사는 잠시 망설였다.
나한승을 이끌고 무당파를 찾아가는 것.
만일 무당파가 초청해서 가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지금은 천무백의 요청이다.
무당파가 원하지 않는 방문일지도 모른다. 거기에 나한승을 이끌고 간다? 자칫하면 무당의 심리를 거슬리게 할지도 모른다.
망설임을 느꼈을까. 혜량대사의 얼굴엔 굳건한 표정이 떠올랐다.
“소림이 다시 한번 천하제일이 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오. 적어도 우리 세대에서는 불가능한 일 아니겠소.”
“…….”
“천하제일이 될 수 없다면, 그렇다면 천하제일인과 함께 걸어가야 하오.”
소림은 봉문을 풀었다.
고고하게 산 안에서 목탁을 두들기며 불심만 닦을 수는 없다.
이제는 강호라는 칼날 위에 올라섰고, 수많은 위협 속에서 걸어야 했다. 모든 걸 이겨 내고 소림이 북숭소림이란 명성을 되찾으려면…….
“천 공자와 뜻을 같이해야 하오.”
“알겠습니다.”
어쩌면 세속적인 얘기였다.
미래의 천하제일인과 두터운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
혜량대사는 소림을 책임진 방장으로서, 소림이 과거의 영화를 되찾길 원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소림이 간직한 아름다운 정신을 유지하길 바랐다.
“그런 점에서 천 공자와 뜻을 함께하는 것은 최고의 선택이오.”
천하제일인이 될 사람의 행보.
정도무림의 뜻을 한데 모으고, 마(魔)에 대항한다.
혜량대사로선 당연히 할 선택이었다.
“나한승들을 이끌고 무당으로 가겠습니다. 하나, 괜찮겠습니까?”
무엇을 우려하는지 알기에, 혜량대사는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소. 약선 어른이 설치해 놓은 진법도 훌륭하며, 소림의 제자들도 소환단 하나씩은 먹고, 좋은 무공들을 연마 중이니. 또한, 빈승도 이제 그리 약하지 않소.”
무소선사는 결연한 얼굴로 합장을 했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방장님, 아니, 사형.”
“몸조심하시게, 사제.”
천무백이 전한 서찰에는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무당의 사정과 비다라, 그에 대한 소림의 도움.
하나 그것뿐이 아니다. 나한승들을 데리고 와 달라는 부탁도 있었다.
“천 공자가 원하는 도움이, 비단 비다라에 대한 도움만은 아닐걸세.”
“나한승들이 간다는 건…….”
“어쩌면 무당에서 천 공자는 싸움이 있을 수도 있다고 여기는 걸세.”
“……북숭소림의 이름을 떨치고 오겠습니다.”
“부디, 몸조심하시게.”
* * *
“나무아미타불, 무당의 도인들을 뵙습니다. 소림에서 나한각주를 역임하고 있는 무소라고 합니다.”
소림에서 방문한 손님.
그것도 평범한 전령도 아닌, 무려 나한각주.
무소선사의 등장에 대청진인도 앉아서 맞이할 수는 없었다.
대청진인은 환한 미소를 머금고 일어나 합장했다.
기쁜 마음으로 손님을 받는 태도. 하나 일어서는 순간에 천무백에게 한차례 날카로운 시선이 닿았다가 사라졌다.
‘당황스럽겠지.’
천무백은 그 광경에 내심 실소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다라는 고대 천축의 밀교에서 건너온 비술입니다. 이와 같은 비술을 원래대로 돌려놓는 데, 소림의 조력이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천무백이 그리 말한 뒤 중인들의 표정을 살폈다.
무천악은 묘한 눈빛으로 천무백을 흘깃거렸다.
마치 무언가 탐구하는 듯, 샅샅이 훑어보는 시선이다.
‘이쪽은 차라리 나아. 제 욕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니까.’
무천악의 외견은 호탕하고 인상 좋은 중년 사내였다.
비단 외견뿐 아니라 성격도 유사했다. 추혼삭을 통해 들은 무천악은 욕심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내지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안하무인은 아니었다.
과감하며 욕심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성정.
무당의 무공을 탐내는 걸 공공연히 드러냈다.
솔직한 성정이 화를 자초하고 지금 오해도 사고 있지만, 천무백 입장에서는 차라리 낫다.
반면 천무백을 다소 복잡한 시선으로 쳐다보는 대청진인은 달랐다.
‘굳이 날 콕 집어 도움을 청했단 말이지.’
의뭉스럽다.
만일 천무백이 무당의 장문인이었다면, 고작 천무백 한 명에게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화산과 종남도 도문이고, 저 멀리 찾아보면 곤륜의 후계들도 근근이 맥을 잇고 있을 텐데 말이야.’
절실하다면 천무백뿐 아니라 다른 방면으로도 방안을 모색하는 게 맞다.
하나 대청진인은 그러지 않았다.
‘비다라를 완전히 치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회의가 든 것일지도 모르지.’
이미 죽은 몸이 비다라로 재탄생한 것인데, 치유된다면 결국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문득 적건회에게 생각이 옮겨갔을지도 모른다. 적건회를 의심하는 분위기가 밑에서부터 만들어졌을 테고, 비다라를 완벽히 치료할 수 없다면, 차라리 이 기회를 살려 내치겠단 의도.’
대청진인은 적건회를 증오했다.
아니, 정확히는 무천악을 위험하게 여겼다.
‘굳이 따지면 서로 같은 스승을 둔 사형제이건만.’
천무백이 내심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대청진인은 어린 시절 적건회에서 몰래 무공을 배웠기에, 정식으로 사형제가 아닐뿐, 사실상 같은 스승을 모시지 않았나.
‘사형제가 늘 화목한 건 아니지.’
사형제들 사이에서 반목이 흔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하물며 무천악과 대청진인이 평범한 관계도 아니지 않은가.
무천악은 정식으로 적건회의 무공을 이은 정통이고,
대청진인은 적건회의 무공에 무당의 직계를 이은 무당의 정통이기도 했다.
‘여하튼, 적건회를 내치려면…….’
비다라가 잠깐이라도 제정신을 차려, 흉수로 적건회를 지명해야 한다.
하지만 역시 쉽지 않을 터.
대청진인이 적건회가 왜 그리 참관하지 못하게 막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천무백을 적절히 이용해 적건회에게 덮어씌우겠다는 의도.
말을 맞추든, 아니면 협박을 하든, 거래를 하든.
한데 여기서 천무백이 적건회의 참관을 주장하고, 심지어 소림을 데리고 왔다.
그것도 배분을 따지면 허투루 대할 수 없는 무소선사를.
‘대청진인은 정말로 무천악이 흉수라고 단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아서, 내치려는 것인가. 아니면 내치기 위해 설령 흉수가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천무백은 대청진인이 제 스승을 죽이고 비다라로 만들었으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대청진인의 단전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태극.
그걸 보면 절대로 혈귀곡과 연관된 인물은 아니었다.
물론 완전히 의심을 접은 건 아니다.
‘능허 녀석이 눈치는 빠르니. 적당히 위험하면 빠질 터.’
대청진인은 다소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대협, 어찌 무당의 의견을 묻지 않고 일을 행했습니까?”
명백한 타박이었다.
이번 일은 어쩌면 무당의 치부라 여길 수도 있는 사건.
천무백이 그 치부를 얘기도 하지 않고 소림과 공유한 것으로 봐도 무방했다.
그러자 조금은 날카로운 시선들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상황을 멀거니 지켜보던 무천악의 얼굴에 이채가 스쳤다.
‘저 상황에서도 기가 죽지 않는다?’
대청진인부터해서 장내에 있는 장로들의 시선이 일제히 쏟아진다.
호의적인 눈빛도 아니다. 여기저기에서 압박하는 기세.
한데도 천무백은 기가 죽은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허어, 이거 난놈이구나.’
무천악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천무백은 포권을 취하며 허리를 숙였다.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점에 관해서 강호 말학이 선배님들께 사과드리겠습니다. 요청을 받아 무당에 온 이후, 비다라를 치유할 수 있는지 여러 방법을 모색하다가 소림에 닿았습니다. 운이 좋게도 소림에게 약간의 연이 있는지라, 급한 마음에 이리 청하게 됐습니다. 비록 강호의 협의와 무당에서 벌어진 참사를 해결하고 싶은 욕심의 발로에서 저지른 일이지만, 경험이 일천하여 큰 죄를 지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천무백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대청진인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정중한 사과와 차분한 어조.
그 모습에 장로들은 헛기침하며 날카로운 눈빛을 거둬들였다.
누가 봐도 젊은 강호 후배가 열의에 차서 일을 처리하려고 노력하다 벌어진 일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오히려 몇몇은 그런 천무백에게 호의적인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다소 열의에 가득 차 서투르게 일을 처리한 것 같았지만, 그게 오히려 더 인간미가 느껴졌다.
‘이 무슨…….’
대청진인은 말 한마디에 휙 바뀐 장내의 분위기를 느끼곤 내심 당혹스러웠다.
우선 천무백을 타박하고, 일단 이 자리를 파한 뒤에 방법을 모색할 생각이었건만.
천무백의 말 한마디에, ‘그럴 수도 있지.’ 하는 식의 분위기가 만들어진 것이다.
도학파 장로들은 이왕이면 소림의 명사가 도와준다면 더 잘된 일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무학파 장로들도 무천악과 시선을 교화하곤, 소림이 함께 간다면 억울한 일은 당하지 않겠다 싶어 찬동하고 나섰다.
단숨에 분위기가 천무백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설마 이렇게 될 걸 예상하고, 소림을 불러온 것인가?’
만일 대청진인의 말대로, 천무백이 사전에 논의했다면 대청진인은 무당의 치부라는 근거로 일축했을 것이다.
하나 딱 장로들을 소집했을 때 무소선사가 도착했으니, 빼도 박도 할 수 없게 상황이 만들어졌다.
그 순간.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숙였던 천무백과 눈이 마주쳤다.
“……!”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깊게 가라앉은 눈.
그 눈을 보는 순간, 대청진인은 몸에 소름이 오돌토돌 올라왔다.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겨 불러왔건만…….’
잘못된 생각이었다.
거대 문파를 사문으로 둔 것도 아니고, 집안 역시 평범한 표국.
배경이 없기에, 오히려 잘 활용할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치밀어 오르는 후회를 억누르며, 대청진인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