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42화 (142/318)

<검신재생 142화>

142. 내 뜻대로 움직일 뿐.

“어때요, 친해지셨나요?”

“그렇게 친해진 건 아니다만, 속에 있는 얘기는 나눴소.”

천무백의 대답에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정말요? 그 추혼삭이란 분, 고지식해 보여서 친해지기 힘들어 보이던데요.”

“무인에겐 무인끼리 친해지는 법이 있으니까.”

“흐음. 저도 무인이거든요.”

제갈설아가 팔짱을 꼈다. 진법에 능하다지만, 그녀도 강호에 나선 만큼 무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나름 자부심도 강했다.

다만 천무백 앞에서 겸양을 표했던 것일 뿐이다.

천무백도 알고 있기에 웃었다.

“아오. 그러니 우리가 친해진 거 아니겠소.”

“……친해요?”

“나만 그리 느낀 것이오?”

제갈설아가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아, 아뇨. 뭐, 친해진 거죠. 그쵸..”

“그쪽은 잘 돼 가오?”

“네. 제법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확실히, 대청진인이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어요.”

현 장문인을 의심하는 얘기였기에 누가 들어서는 안 된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가슴께로 머리를 숨기듯 파고들며 목소리를 낮췄다.

“기감을 퍼뜨려 소리가 흘러나가지 않게 막았소. 편하게 얘기해도 괜찮소.”

“아, 그래요…… 네.”

무언가 살짝 골이 난 듯한 어조였지만, 천무백은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으니까.

“이쪽 적건회 회주, 무천악도 의심스럽긴 마찬가지요.”

“그래요?”

“회주 자리에 오르고, 무당과 적건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둥, 적건의 무공을 무당의 제자들에게 전수했었는데, 무당의 무공도 적건회와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도 종종 펼쳐 왔소.”

“음. 그거 확실히 좀 그러네요.”

“맞소. 공공연하게 무당의 절기를 원하는 모습을 은연중에 보였다고 하니…….”

“무당을 완전히 접수해서 끝내 무당의 절기를 취한다? 그게 무천악의 목적이라고요?”

“표면으로 드러난 정황은 그렇소.”

“하지만 전대 장문인을 비다라로 만든 건, 너무 도박수인데.”

“그래서 이상하단 거요. 정황상 무천악이 무당의 무공에 공공연하게 욕심을 내서, 도학파와 갈등이 생긴 건 확실하오. 하물며 적건회의 입김이 강한 무학파 장로들도 이 점만큼은 껄끄럽게 여기고 있으니까.”

이리 보면 적건회를 의심하는 도학파의 입장이 이해됐다.

그렇지만 제갈설아는 확신을 내리지 못했다.

“사실, 대청진인도 이상한 구석이 한두 군데가 아니에요.”

“이상한 구석?”

“본래 그분은 사실상 무학파로 분류되는 장로였어요.”

“…….”

“어린 시절 무당에서도 무공을 배우고, 적건회에서도 몰래몰래 무공을 배웠대요. 그 재능이 얼마나 대단한지, 양측의 무공을 섭렵해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수준이었다더라고요.”

천무백도 대청진인이 범상치 않음을 느꼈다.

단전에 태극 자체를 품었다고 느낄 정도로 수양이 깊어 보였다.

“거기에 도학에도 조예가 깊었대요. 무당의 도경을 모조리 독파래 자신만의 도를 설파할 정도로. 도학에 대한 목마름이 얼마나 강한지, 은거한 원로 도인들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고, 무당 밖의 수많은 도인을 일일이 만나고 다녔다고 할 정도라고 해요.”

천무백은 그제야 이해했다.

무천악이 적건회의 회주에 오른 건 십년 전.

그때부터 적건회와 무당파는 갈등이 심해졌다고 하니, 당시 장문인이었던 현엽진인은 선택했을 것이다.

적건회에서 배워 적건회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한편으론 도학에도 수양이 깊어 도학파의 지지도 받을 수 있는 대청진인을 후계자로 세운 이유.

두 파벌의 갈등을 봉합하고 아우르는 인물이라는 판단이리라.

“태극을 생각한 것이로군.”

무학과 도학.

양측의 판이하게 다른 의견을 한데 모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

조화를 상징하는 태극이 곧 대청진인이었다.

“문제는 그런 대청진인이, 장문인이 되자마자 적건회와 대놓고 갈등을 일으켰어요. 음, 이렇게 말하면 좀 그렇긴 한데. 간단해요. 짐 빼고 집에서 나가라는 거죠.”

천무백이 피식 웃었다.

“누구보다 적건회를 잘 이해하는 사람이, 그리 대했으니……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겠군.”

적건회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

역설적으로 그랬기에.

“적건회를 가장 위험하다고 여긴 것이지.”

위기감을 느낀 무천악이 가장 큰 후원자인 전대 장문인을 죽였을 수도 있을 것이고.

적건회를 내칠 명분을 쌓기 위해 대청진인이 자작극을 벌였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두 가지의 가능성.

하나 이어지는 제갈설아의 말에 천무백은 또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아, 얼마 전부터. 그러니까 전대 장문인께서 비다라가 되신 이후에, 대청진인이 자주 무당을 나가 어딜 다녀오신다고 하던데요. 무용이 말했는데, 엄청 강해보이는 호위 둘을 데리고 나간다고 하더라고요.”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 * *

무당산은 높고 험준했다.

비단 산이란 것이, 산 하나만 불쑥 솟아 있는 게 아니다.

길고 가느다란 산맥이 병풍처럼 쭉 이어지기 마련이다.

그런 산맥에는 비단 무당파에 적이 올린 도인이 아닌, 수십, 수백 개의 도관이 곳곳에 가득했다.

도인 한 명이 홀로 참선하는 작은 도관이 무수히 많았다.

온전히 속세와의 연을 끊고 도를 닦는 도인들.

무당산 너머, 산맥 곳곳에 퍼져 있었다.

간혹 무당파는 영험하고, 깊은 도를 닦았다는 도인들을 초청해 가르침을 받곤 했다.

아무리 중원 도문의 중심이라 무당이 역설해도, 속세와 연결된 이상, 연을 끊고 도를 닦는 도인들보단 수양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무당파 인물 중엔 여러 도인과 연을 맺을 경우도 잦았다.

대청진인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여기서 기다리시오.”

“예. 장문인.”

대청진인은 호위로 따라나선 무당삼걸 중 두 명을 밖에 세워 놓고, 혼자 걸었다.

지붕 하나만 올려 있는 허름한 도관이었다.

장문인 자리에 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청진인이 연을 맺은 도인이 머무르는 곳.

그곳에 들어서자 마치 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새하얀 백발이 허리까지 내려온 도인이 찻잔을 꺼내놓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장문인.”

“찻향이 무당의 자소궁까지 전해지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찾아왔습니다. 무명(無名)도인.”

“흘흘흘. 이 빈도의 도는 한없이 부족하나, 차를 우리는 도만큼은 천하일절이지요.”

“과연 그렇습니다.”

대청진인이 웃으며 맞장구를 쳤다. 익숙한 행동인 듯, 자연스레 차를 한 모금 머금고 대청진인이 물었다.

“근래 수양엔 진전이 있습니까?”

“흘흘, 빈도는 그저 도 닦는 흉내나 내는 사이비지요. 수양이랄 게 있겠습니까.”

“도인께서 사이비라면, 부끄럽게도 무당의 모든 도는 부끄러울 따름이지요. 과한 겸손도 도에 맞지 않는 법입니다.”

“장문인이 이 늙은이의 얼굴에 금칠을 해 주시는 걸 보니, 무슨 일이 있으신가봅니다.”

“그래 보이십니까?”

대청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그 순간에 그는 아주 조심스럽게 기감을 넓게 퍼뜨렸다.

혹여 듣는 이가 있을까.

저 멀리, 도관에 오기 전에 호위로 따라 나온 무당삼걸 중 두 명이 지키고 있었고.

그리고 바로 지붕 위에서 느껴지는 기척.

오래전부터 무당삼걸의 마지막 한 명이 머무르고 있었다.

대청진인은 내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도인의 조언 덕에 일이 해결될 것 같습니다.”

“허어. 이 늙은이가 무슨 조언을 했나 싶군요.”

“다 도인 덕이지요.”

무명도인이 찻물을 머금었다.

“밖에선 천룡검협을 모셔 왔습니다. 예상대로 적건이 반대하더군요.”

“으흠. 그 사람이 치료할 수 있겠소?”

대청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무명도인의 목소리에는 그저 평범한 호기심이 담겨 있었지만, 오랜 기간 무명도인을 지켜본 대청진인은 무언가 다른 게 느껴졌다.

“모를 일입니다만. 그러길 바랄 따름입니다. 원시천존께서 도와주시리라 믿습니다.”

“무량수불…….”

“하지만 흉수가 적건임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치료를 방해할 이유도 없지요. 스승님의 완벽한 치유를 바라나, 그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온전히 정신을 되찾으신다면, 분명 그분의 입에선 무천악의 이름이 나올 겁니다.”

무명도인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런 무명도인을 보며, 대청진인 역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다행인 일이군요.”

“그때가 올 때까지, 어딜 가시진 마십시오.”

“흘흘. 이 늙은 말코 도사가 갈 데가 있겠소이까.”

“하하. 그리고 몸조심하시지요. 주위에 산짐승들이 많습니다. 혹여 변을 당할까 우려됩니다.”

“알겠소.”

“무당을 적건으로부터 완전히 되찾는 날, 도인을 무당으로 정중히 모시겠습니다. 도학에 대한 깊은 지식과 깨달음을, 후배들에게 전해주시지요.”

“흘흘흘흘.”

고갤 숙인 대청의 눈이 번뜩였고, 그저 신선처럼 웃는 도인의 눈에도 미묘한 열기가 일렁였다.

* * *

대청진인이 장로들을 소집했다.

장문인이 장로들을 모으는 건 특별한 일이 아니다. 하나 이번 자리에는 장로들뿐 아니라, 천무백과 적건회에서 무천악과 추혼삭이 참여했다.

이들이 참여한 의미는 명백했다.

“이젠 더는 시간이 없습니다. 무당의 도력 깊은 도인들께서도, 피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천룡검협께서 나서 줘야합니다.

“그 과정에 우리 적건회도 참관하겠소.”

기다렸다는 듯이 무천악이 나섰다.

무천악은 대청진인과 비슷한 나이대의 장년인이었는데, 인상이 의외였다.

어디 마음씩 넉넉한 평범한 중년사내의 모습이이니까.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내력을 느낀 천무백은, 과연 대청진인이 경계할 만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둘 다 거의 입신지경에 가깝다. 약간의 깨달음만 얻는다면, 입신지경의 벽을 깨뜨리고 순식간에 더 높은 곳으로 향하겠구나.;

둘의 나이가 불혹을 갓 넘었다는 걸 떠올리면, 범상치 않은 수준이다.

아마 저들이 깨달음을 얻고 오십대가 넘어가면, 능히 천하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릴 만했다.

천무백이 조용히 상황을 주시하자, 무당이 직면한 갈등이 한눈에 훤히 보였다.

“이번 일은 확실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전대 장문인에게 일어난 참사는, 오로지 무당만이 결정할 수 있는 노릇입니다.”

“무당의 공론이 한데 모였소이까? 여기 몇몇 장로분들께선 아니신 것 같은데.”

무천악이 그리 시선을 돌리자, 무학파 장로들 일부가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장문인. 적건회는 무당에 큰 도움이 되는 동료들입니다. 하니 회주님이나 부회주님 정도로 참관을 허락케하면 좋을 듯합니다.”

“두 분 다 고강한 무인이시고,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어허, 이번 일은 개인이 가진 무학(武學)과는 상관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무학파가 그리 말하면, 도학파가 곧장 반발하는 흐름이 이어졌다.

천무백은 대청진인을 바라보다가 나섰다.

“상관없습니다. 그냥 참관토록 하시지요.”

“……!”

순간 대청진인의 부릅뜬 시선이 천무백에게 향했다.

천무백은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누굴 졸로 아나.’

천무백은 내심 실소했다.

자신은 어떤 문파 출신도 아니고, 사문도 없다.

그저 뒤에는 표국이란 배경 하나.

무당파 입장에선 그렇게까지 대단한 배경은 아니다.

아마 대청진인은 적절한 압박과 동시에, 무언가 무당으로서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회유를 할 예정이었으리라.

하나 천무백은 결단코 손뼉을 마주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일의 핵심을 맡은 천무백이 그리 말하자, 곧장 시끄러워졌다.

“그냥 뭐, 우리 과감하게 얘기합시다. 무당 측에선 이번일의 뒤엔 적건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품고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

“그, 그런!”

천무백의 직언에 회의장은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또, 적건회도 내가 혹여 거짓된 증언을 할까 싶어 감시하겠단 의도로 참관하겠단 의중이시고.”

“…….”

“하면 이렇게 합시다.”

천무백은 곧장 제안했다.

“한낱 천룡검협이란 명성 하나 말고, 진짜 강호의 모든 이들이 믿을 수 있는 이름이 나서야겠지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대협.”

대청진인의 목소리엔 은은한 분노가 느껴졌다.

천무백은 마주보며 웃었다.

이미 어젯밤 능허에게 오늘 도착한다는 서신이 왔다.

그리고 때마침.

“저, 장문인! 밖에 손님이…….”

“손님? 지금 장로회 중이다. 잠시 기다리라고 하거라.”

“그것이…….”

소식을 전한 무당 제자가 안절부절 못했다.

그제야 상황이 이상하단 걸 느낀 대청진인이 물었다.

“누가 왔길래 그러느냐.”

“……소림. 소림에서 나한각주, 무소선사가 왔습니다!”

“……!”

대청진인도, 무천악도.

그 누구도.

‘난 내 뜻대로 움직일 뿐.’

천무백을 이용할 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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