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41화>
141. 태극과 적건.
추혼삭이 검자루만 남은 자신의 애검을 바라보았다.
한때 들었던 의문이다.
어째서 아버지께선 이 거대한 대검을 남기셨을까?
왜 쾌검의 묘리를 잘 살릴 수 있는 검이 아니라, 이 무거운 대검을?
의아했었지만, 이유가 있으리라 믿었다. 더없이 무공을 갈고 닦았다. 시간이 흘러 경지에 올랐다. 아무리 무거운 대검이어도, 적건회에서 적수가 없는 쾌검의 대가가 되었다.
그러나 천무백은 말했다.
무아의 상태에서 보여 준 그것.
어렴풋이 손끝에서 느껴지는 감각.
‘이게 아버지가 남기셨던 검.’
원래 그의 무공이 가진 진짜 묘리.
강맹하며 무겁되 속도는 쾌속하다.
하나 시간이 흘러 그 일부를 잊고 쾌속함만이 남았다.
정마대전 당시 너무도 젊은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미처 다 전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저자가 어찌 안단 말인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격렬한 의문.
상대는 모든 걸 알았다. 마치 40년 전에 현장에 있던 것처럼 생생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게 말이나 되는가. 40년 전의 일을.
그럼 의문에 대한 답은 하나다.
‘한눈에 나도 모르던 무공의 묘리를 몇 번 검을 섞어본 것만으로도 안다. 그만한 경지에 오른 절대자.’
그것만이 이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다.
경외심이 타올랐다.
자신이 무아의 상태에 빠져서, 모든 잠재력을 끌어낸 것인데도.
상대의 옷깃 하나 스치지 못했다.
오히려 천무백은 상처 하나 안 입히고, 검을 부러뜨리며 굴복시켰다.
그건 단순한 무위의 격차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었다.
압도적인 벽.
칼을 잡은 이후,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벽이 서 있었다.
‘넘어서야 하나, 좌절할 수밖에 없는 것,’
벽을 만난다는 건 진실로 두려운 일이다.
절대다수의 무인들이 그 앞에서 평생을 보내니까.
하나 추혼삭은 가슴이 맥동했다.
그에게 있어 벽은 하나의 증명이었다.
벽 너머에는 새로운 경지가 있다.
그 경지를 증명하는 게 벽이다. 추혼삭은 무도를 걷는 이로써, 벽을 만나는 것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명확히 제시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여 그는 천무백에게 경탄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검이, 아버지의 검이 변했다는 그의 말은 틀렸다.
단지 자신이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을 뿐.
검의 본질은 그대로다.
그것은, 적건회도 마찬가지다.
“변하지 않았소.”
“…….”
추혼삭의 목소리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명백한 신념이었다.
“그가 적건회주가 된 이후, 상황이 악화된 건 알고 있소. 하나, 무천악은 무당을 사랑하오. 무당을 깊이 흠모하고,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소.”
추혼삭의 눈이 맹렬하게 타올랐다.
“그를 의심하지 마시오. 적건은, 아직도 무당을 지키는 검이오.”
물끄러미 바라보는 천무백의 시선에 추혼삭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 그대가 40년 전의 적건회의 모습을 어찌 아나 모르지만,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의 적건회는 다소 문제가 있소.”
무당을 지키려는 검을 넘어, 스스로 무당이 되고, 무당 위에 서고 싶어 하는 지금이다.
“하지만, 적건회가 품은 신념은 변치 않았소.”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자는 그렇군.’
확실하게 보였다.
대를 이어 변하지 않는 신념. 그때의 모습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건 당신만의 생각 아닙니까?”
“…….”
“정녕 적건회의 모두가 그러리라 여깁니까?”
“그건…….”
“정녕, 무당을 지키는데 단 조금의 사심이 없다고 단언합니까?”
추혼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적건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무당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단체입니다. 하나, 작금의 적건화는 무언갈 바라고 있습니다. 무천악, 그는 무얼 원합니까?”
“…….”
추혼삭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파르르 경련했다.
* * *
당연히 추혼삭은 천무백에게 대답을 주지 않았다.
천무백도 그 자리에서 대답을 재촉하진 않았다.
어차피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당장 복건성에서 열리는 흑회도 시간이 남았고, 능허가 소림을 데려오는 것도, 아무리 빨리 움직인다 해도 시간이 걸릴 터.
그동안 천무백과 제갈설아는 각기 적건과 무당으로 나뉘어 정보를 조사, 취합했다.
천무백은 매일같이 추혼삭이 수련하는 봉우리를 올랐다.
“또 오셨소?”
“내가 못 올 곳에 온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지. 그대는 무당의 손님이니……. 하나 타인의 수련을 지켜보는 건 금기임을 알고 있잖소?”
“이미 내가 그쪽 추가의 무공을 다 아는 데 무슨 금기겠습니까.”
“…….”
추혼삭은 봉우리에 올라오는 천무백을 막지 못했다. 이 봉우리도, 무당 안의 모든 것은 어쨌거나 무당의 것이다.
적건회는 그런 무당의 일부를 빌려 살아가는 것뿐이니까.
무당의 손님인 천무백이 원하는 대로 가겠다는데, 그걸 자신이 어찌 막으랴.
아니, 막을 수나 있겠는가.
추혼삭은 입가에 떠오르는 씁쓸한 미소를 애써 지웠다.
“어디, 오늘도 한번 검을 겨뤄보겠습니까?”
“……이 추모가, 한수 배우겠소.”
막을 수 없는 이유.
천무백은 매일같이 추혼삭과 친선으로 비무를 겨뤘다.
그 의도가 무엇인지, 천무백이 무얼 원하는지 알았다.
도학파의 편에 서 적건회를 의심하고 있는 자.
적건회에서 무언가 의심스러운 점을 발견하면, 천무백은 그 부분을 여지없이 파고들 것이다.
그런데도 추혼삭은 천무백을 거절하지 못했다.
까가가강!
가슴이 욱신거린다.
검과 검이 불똥을 튀며 충돌할 때마다, 추혼삭의 안계는 더욱 넓어졌다.
천무백은 가르침을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이가 깨달음을 얻는다면, 그건 훌륭한 가르침이고, 추혼삭은 분명한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그의 검에는 강맹함과 무거움이 실렸다.
그러면서도 쾌속함을 잃지 않았다.
무아의 상태에서 겪었던 검의 본질.
천무백과 비무할 때마다, 조금씩 가까워졌다.
마치 천무백이 일부러 알려 주는 것처럼.
어느 날은 추혼삭이 도저히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째서 내 가문의 무공을 알고 계시오?”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오.”
“아직도 멀으셨군요.”
“……!”
순간 추혼삭의 몸에 벼락이 내리친 듯 우뚝 멈췄다.
천무백은 검을 거둬들이며 그날은 그대로 물러났다.
이후 며칠은 천무백은 봉우리에 오르지 않았다. 마치 추혼삭이 어떤 과정에 빠졌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다시 추혼삭을 찾아온 건 사흘이 지나서였다.
천무백이 변한 추혼삭의 기도에 내심 웃었다.
두 눈엔 밝은 정광(定光)이 번쩍였다.
“진척이 있으셨나 봅니다.”
“어렴풋이,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난 내 검에 의문을 품었소.”
조금은 떨리는 어조.
“아버지께서 마인들의 손에 돌아가시고, 나는 그분께 검 한 자루만 받았소. 그때 만해도 내가 익힌 건 쾌검이었으나, 아버지가 유품으로 남기신 검은 아무리 생각해도 쾌검에 적합한 검이 아니오.”
병장기에 따라 적합한 무공이 있기 마련이다.
괜히 절대고수이 자신의 손에 맞는 무기를 찾으러, 중원의 장인을 다 뒤지고 다니는 게 아니다.
“실제로 검을 익혀 가면서, 대검이 가진 단점이 벽이 되어 날 막았소.”
추혼삭의 어조는 담담했다.
이미 지나간 일이니까.
“아버지가 남기신 유일한 검과 무공이오. 그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었지. 하여, 내가 가진 무공의 근원이, 연원이 어떻게 되는지 평생 궁금해 왔소.”
그 순간, 추혼삭은 웃어보였다. 씁쓸한 웃음이 아니라, 밝은 미소였다.
“하나 궁금해 할 필요가 없더이다. 결국, 검은 내 손에서 펼쳐지는 것인데. 내가 휘두르는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것인데.”
추혼삭은.
“고맙소. 그대 덕택이오.”
벽을 넘었다.
하나 천무백은 상황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고작, 벽 하나 깬 걸로 만족하십니까?”
“……!”
“걷는 길에, 끝이 있다고 여깁니까?”
“그런…….”
“무도를 걷는 이에겐 끝은 없는 법입니다. 평생을 해도, 수십, 수백 년 동안 전생을 반복해도.”
추혼삭은 그 말이 자신에게 자만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로 생각했으나, 왠지 모르게 씁쓸해 보이는 천무백의 표정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천무백이 검을 꺼내는 것을 따라 똑같이 꺼내 들 뿐.
그러면서 추혼삭은, 껍질을 깨고 나오듯 더 성장했다.
그럴수록 또 의문이 차오르는 걸 참지 못했다.
“어째서요? 그쪽은 도학파의 뜻에 따라 적건을 의심하오. 나 역시 적건회의 소속이고. 한데 나에게 이처럼 가르침을 베푸는 이유가 뭐요?”
“그것도 중요합니까?”
“이건 중요하오. 무인으로서 이런 걸 신경 써서 좋을 일은 없으나, 난 적건회의 부회주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당신을 무당을 위해 오지 않았소. 지금 무당이 원하는 건 적건회를 내치는 것.”
그제야 천무백의 표정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추혼삭은 내심 득의한 표정을 지었다. 핵심을 짚었다고 느꼈다.
하나 이어지는 천무백의 말에 그는 얼떨떨해졌다.
“무당을 위해 왔다고요? 그들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천무백은 어림도 없다는 듯이 코웃음을 쳤다.
“아닙니다. 나는, 나의 길을 걸어왔을 뿐입니다. 적건회든 무당이든, 중요치 않습니다.”
“……!”
“오직 내가 올라선 칼 위를 걷고 있을 뿐입니다. 끝을 향해 가는 중간, 누가 올라오든 상관없지요. 그게 내 갈 길이면, 무너뜨리고 가면 되는 거니까.”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태도.
추혼삭의 목소리가 작게 떨렸다.
“하면, 그러면, 당신은 대체 왜 내게 가르침을 전해주는 것이오? 부정치 마시오. 난 그쪽 때문에 벽을 깼고, 나아가고 있으니까.”
“그게 뭐가 문제가 됩니까. 무도의 길을 걷는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게.”
“지금 당신은 무당의 의뢰를 받았소. 그리고 그 의뢰의 본질은 결국 무당을 지키는 것이고. 하지만 지금 무당과 적건회, 아니 태극과 적건은 갈등하고, 어쩌면 칼부림이 날지도 모르지. 그러면 난 적건일 것이오. 한데 나를 더 강력한 적으로 만들면…….”
“아니, 뭔 개소리야.”
“……?”
순간 변해버린 천무백의 어투에 추혼삭은 당황해 입을 다물었다.
마치 답답한 사람을 본다는 듯 그의 얼굴은 와락 일그러졌다.
천무백의 귀찮은 듯한 표정이 망막에 맺혔다.
“본인이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면서?”
“……그건.”
“적건은 변하지 않았다면서?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는 자부심을 품고 있다면서?”
“…….”
추혼삭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천무백은 한숨을 내쉬곤 검집에 검을 넣었다.
“검엔 뜻이 담기는 법이고, 당신의 검엔 그 의지가 담겼어. 그것뿐이야.”
“……!”
천무백은 그리 말하고 떠났다. 추혼삭은 홀로 남아 천무백이 남긴 말의 의미를 온종일 곱씹었다.
“검에 담긴 의지라…….”
얼마나 지났을까. 별안간 그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천무백은 인정했다.
자신이 검이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고.
그 의지를 읽었다고. 그러자 이해가 갔다. 천무백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왔는지.
적건회를 의심해서? 아니었다.
추혼삭은 전율이 이는 것처럼 몸이 파르르 떨렸다.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적건이 무당의 검이 맞는지.’
하나 그 방식이 진실로 아름다웠다.
자신을 시험하는 게 아니라, 가르침을 줬다. 아주 어린 시절 들었던 옛날 얘기처럼.
천무백은 자신에게 금쪽같은 무학에 대한 조언을 하며, 자신이 무당의 검임을 확인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무당과 적건의 싸움이 아니라, 혈귀곡이란 거대한 적과의 싸움. 천무백은 그걸 알고 있고, 그걸 위해서 움직이고 있다.’
단지 그것뿐이다.
“오로지 자신의 길을 걷는다. 그것이 정도임이라 굳게 믿고…….”
강호에 익히 소문난 천룡검협의 행로를 떠올려본 추혼삭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진실로, 협객이구나.”
어쩌면. 저토록 협과 의를 아는 협객이라면.
“무당과 적건의 갈등을 풀 수도 있겠구나.”
다음날.
천무백이 다시 찾아오자 추혼삭은 조용히 물었다.
“궁금한 게 무엇이오, 천룡검협.”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