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40화 (140/318)

<검신재생 140화>

140. 무당을 지키는 검입니까?

천무백은 이전에 천주봉에 올라, 무당의 전경을 한눈에 파악했다.

원래는 없던 전각.

하나 천무백이 향하는 곳은 적건회가 위치한 협의관(俠義觀)이 아니라, 무당산 72봉우리 중 가장 외곽에 있는 봉우리였다.

계단도 없고, 기암절벽으로 이뤄진 아찔한 봉우리.

올라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나, 천무백은 성큼성큼 발걸음을 내디뎠다.

손을 써 올라야 하는 절벽을 두 다리로 걸어 올라가는 광경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천무백은 건곤창응보를 적절하게 응용하며 봉우리에 올라섰다.

“……이곳엔 어쩐 일이오.”

봉우리에서 천무백을 맞이한 건 추혼삭이었다.

붉게 상기된 얼굴과 거친 호흡. 손에 꽉 쥔 검.

시선을 검에서 뗀 천무백이 가볍게 말했다.

“수련 중이었나 보군요.”

“아무도 오르지 않는 이곳에 오신 것부터가, 내가 여기서 수련한다는 걸 알고 오신 줄로 보이는데.”

“맞습니다.”

“어찌 아셨소?”

“칼이 우는 소리가 들리더이다.”

추혼삭의 미간이 좁혀졌다.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여겼는지 추혼삭의 얼굴에 약간의 불쾌함이 떠올랐다.

“왜 찾아오셨소?”

“뭐, 얘기나 하러 왔습니다.”

추혼삭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천무백은 봉우리에 올라 무당의 전경을 한차례 둘러보곤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전대 장문인하고 적건회가 사이가 안 좋았나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오?”

“나는 전대장문인을 치료해 달라는 요청으로 왔습니다. 한데 적건회가 계속 어깃장을 놓고 있지 않습니까?”

“어깃장이라니. 대청진인께서 적건회의 참관도 허락하면 될 일이 아니오?”

“참관이 중요합니까? 전대 장문인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보다?”

“……이미 어느 정도 아는 것 같은데.”

“알긴 알지. 그쪽들이 전대 장문인을 죽이고, 비다라로 만든 게 아닌가 하는 게 무당의 의심 말입니다.”

“후우.”

추혼삭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녕 무당에선 적건회를 내치려는 것인가…….”

장탄식을 토하던 추혼삭의 눈이 순간 불을 뿜었다.

“적건은 무당을 지키는 검이오. 무당을 해하지 않소. 이건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소.”

천무백은 추혼삭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굳은 신념이 보인다. 그제야 저 얼굴이, 과거에 봤던 얼굴과 겹쳐 보여 웃었다.

갑작스레 웃자 추혼삭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비웃는 것인가?”

“그럴 리가. 그냥, 다 변하지 않았다는 것에 내심 흐뭇해 웃은 것입니다.”

“변하지 않았다?”

뜻 모를 말에 추혼삭이 고개를 갸웃했다. 하나 그때, 천무백이 갑작스레 경천혼공을 운용하며 기세를 개방했다.

추혼삭의 전신에 긴장감이 팽배해졌다.

“무슨?”

“일전에 적왕유가, 나를 검문하려고 하더군요. 무당에 들어올 자격이 있는지.”

“그 일은 사과드리지 않았소?”

“맞습니다. 이번 일은 다른 일이죠. 그쪽이, 적건회가 참관할 자격이 있는지, 내가 검증하겠습니다. 검증에 통과하면, 내 대청진인께 요청하여 전대 장문인을 같이 뵈러 가시지요.”

“……!”

추혼삭의 얼굴에 묘한 빛이 떠올랐다. 천무백은 추혼삭이 이 제안에 응하리라는 걸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무도의 길을 걷는 무도가.

그 신념이 보이는 사람이니, 천무백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천무백은 의도적으로, 노골적으로 기세를 내뿜었다.

다만 모든 기세를 내뿜진 않았다.

상단전을 열면, 하단전의 극음지기가 민감하게 반응하다 보니.

모든 힘을 다 토해 낼 수가 없었다.

그 적정선을 지켜 내며 경천혼공을 운용했고, 그것만으로도 추혼삭의 호승심에 불을 댕기는 건 충분했다.

“강호의 명성 높은 천룡검협이라…….”

추혼삭은 그리 중얼거리며 검을 뽑았다.

묵직한 대검이었다.

천무백의 날카로운 장검보단 더 두껍고, 검면이 넓었다.

“내 강호에 나선 적이 없어, 가진 바 별호도, 명성도 없소. 다만, 내 검만큼은 절대 부끄럽지 않소.”

추혼삭의 얼굴에 미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하나 전혀 흥분하지 않았다.

가라앉은 눈으로 천무백을 노려봤다. 천무백 역시 마주봤다.

“…….”

아무런 변화도 없다. 흔들림도 없다. 미세한, 잠깐의 움직임도 없다.

정적.

그것만큼 천무백을 표현하기 쉬운 단어는 없었다.

사람이라면 응당 잡념이 있기 마련이고, 얼굴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천무백은 그런 게 없었다.

추혼삭은 본능적으로 느꼈다. 가슴이 천천히 맥동했다.

‘고수다. 진짜 고수.’

무당에서 만나본 사람 중엔 장문인 대청진인과 적건회주 무천악에게서만 느껴본 기세다.

무당의 대장로 중에도 저만한 기세를 내뿜는 사람이 한둘 있긴 했으나,

지금의 긴장감의 밀도는 그때보다 두세 배는 더했다.

“적건회 부회주, 추혼삭이오.”

“청성표국의 천무백입니다.”

잠깐의 인사가 오간 후, 추혼삭은 천천히 기수식을 취했다.

반면 천무백은 편한 자세 그대로였다.

추혼삭은 곧장 검을 휘둘렀다. 나이로 보나 배분으로 자신이 한참 위다. 이런 비무에선 후배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게 미덕이다. 그런 마음이 일절 들지도 않았다.

거대한 대검이 빛살처럼 휘둘러졌다.

쉐에에에에엑!

거친 파공성이 대기를 찢어발겼다. 추혼삭은 천무백의 반응을 기대했다. 누구나 추혼삭의 덩치와 대검을 보고 예상한다. 무거운 중검이나, 패검을 쓸 거라고.

하나 그의 검은 쾌검이다.

검이 무겁다고? 그게 무슨 상관이랴. 더 빨리 휘두르고, 더 매섭게 휘둘러, 쾌검의 극의에 가까워질 수 있는데.

쾌검을 대하는 방법과 패검을 상대하는 방법은 확연하게 다르다.

보통 무인이라면, 오히려 경험 많은 무인일수록 패검에 대한 대비를 심중에 은연중에 품었을 터.

천무백이 어찌 반응할 것인가.

어쩌면, 추혼삭은 이 한 방으로 천무백을 상대로 기선을 제압할 수 있으리라 여겼다.

대검이 순식간에 천무백의 지척에 도달한 순간.

천무백의 반쯤 감겼던 눈이 번뜩였다.

까가가강!

“……!”

추혼삭의 얼굴에 경악이 피어올랐다.

‘이 자…… 검을 꺼낸 적이 있었나?’

순간 떠오른 의문.

그랬다.

검이 지척에 도달할 때까지도, 천무백의 검은 그 화려한 장식의 검집 속에 있었다.

그랬던 검이 어느 순간 추혼삭의 대검을 막았다.

검면으로 막은 것이 아니라, 검 끝으로.

천무백의 검끝이 추혼삭의 검면 정중앙에 머물렀다.

그걸 막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천무백은 검끝으로 추혼삭의 검을 막는 것이고, 추혼삭은 검 전체에 힘을 실어 휘두른 것이다.

한데, 막혔다.

“……!”

아니, 단지 막힌 게 아니었다.

손목으로 전해지는 아찔한 충격과 고통.

모든 것을 꿰뚫는 관(貫)의 묘리가 담긴 극의에 달한 발검.

추혼삭은 입술을 질끈 깨물고 검을 급하게 거두었다.

‘강하다, 진실로!’

한차례 전율한 추혼삭은 거침없이 공세를 펼쳤다.

검에 실리는 강대한 내공의 유려한 발출.

대기를 찢어발기는 쾌속한 검격.

무당에서 태어나 처음 검을 잡은 이후로, 끝없는 수련으로 완성한 가전무공.

발출과 쾌검에 이어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연환.

모든 것이 천무백의 전신을 노리고 촌각 동안 수도 없이 휘둘러졌다.

단 한 번, 단 한 번의 공격을 허용해도 치명적인 상처가 될 정도로 강맹하다.

‘무도가로서 오랫동안 무를 연구하고, 수련했군.’

강하다.

이건 단순히 내공의 총량, 익힌 무공의 가치, 경험에서 나오는 노련함.

이 모든 걸 벗어난 순수하게 느껴지는 강함이었다.

하나.

‘고작 하나의 삶을 무도가로 살았을 뿐이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쏟아지는 빛살 같은 검격을 모조리 막아내며, 틈을 본다.

하나의 초식을 이어가는 수십 개의 투로.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검속에서도, 투로와 투로 사이에는 끊김이 있다.

‘나는 무수히 많은 삶에서 무도가로서 존재했다.’

천무백의 검이 쭉 뻗어졌다.

“……!”

아무도 보지 못하는, 오로지 수백 년의 전생 동안 무도의 길을 걸어온 자만이 볼 수 있는 검의 흐름.

쭉 뻗어진 검이 정지한다.

그리고 회전한다.

상단전을 타고 뻗어가는 내공이 서서히 회전한다.

근육이 거칠게 움직이며 회전한다. 한 번의 회전, 두 번의 회전, 세 번, 네 번.

수도 없이 꼬아지고 또 꼬아지고, 그러나 검은 정지해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수도 없는 회전력이 담긴다.

념(念)의 묘리가 검 끝에 완벽하게 실리는 순간.

초식의 연결, 투로의 흐름을 부순다.

카카카캉!

대검이 천무백을 베지 못하고, 멈칫한다.

물 흐르듯이 쾌속한 속도로 이어지던 검격의 연환이 순식간에 멈췄다.

이제 천무백이 곧장 반격하려고 한걸음 내딛는 찰나.

천무백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추혼삭의 검이 뒤로 크게 빠졌다가, 쾌속한 속도로 내지르며 거력(巨力)이 실린다.

무겁다. 아주 무거운 검이다.

그리고 강하다. 강맹한 기운이 저 묵직한 대검에 실렸다.

하나 빠르다. 쾌속하다.

천무백의 눈이 아니라면 놓쳤을 정도로 쾌속한 움직임.

쾌검이되, 패검과 중검의 묘리가 담겼다.

‘추가(家)의 검이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구나.’

천무백의 입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올랐다. 놀랍게도 추혼삭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표정도 없다.

일종의 무아(無我)의 상태.

패검의 묵직함과 쾌검의 쾌속함이 천무백의 명치 부근을 노리고 육박했다.

가공할 위력과 속도에 놀랄 법도 하지만, 천무백은 오히려 기껍다는 듯 웃었다.

발을 뒤로 뺀다.

동시에 검을 굳게 잡는다.

하단전의 극음지기가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 감수하고도, 상단전을 완전히 열었다.

극음지기가 예민하게 하단전에서 난동을 부려, 가슴이 욱신거리나 참고 오로이 상단전에 집중했다.

거대한 기운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그 모든 기운이 검에 실린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모든 기운을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검에 담는다.

더는 담을 수 없을 정도로, 검이 버틸 수 없을 때가 되면.

그 모든 기세는 넘쳐서 검 밖으로 발출된다.

창(漲).

어마어마한 공력이 유형화되어 주위로 퍼져나간다.

넘침이, 창(漲)이 쾌속하게 도달하던 추혼삭의 검을 뒤덮었다.

깡!

“…….”

추혼삭은 그제야 손에서 전해지는 허전함에 무아에서 깨어났다.

털썩 주저앉아 그는 멍한 눈빛으로 자신의 손을 쳐다봤다. 손에 검자루만 남기고 완전히 쪼개져 흔적도 없어진 검.

고개를 들어보니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는 천무백이 보였다.

“아…….”

패배.

그것도, 완벽한 패배.

난생처음으로 싸움 중 무아를 겪었고, 무의식이 잠재력까지 다 쏟아냈다. 후회 없는 싸움이었다.

한데도 패배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그에게 천무백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완전히 잊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무엇을?”

“너무 무거우면,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는 움직임이 있지요.”

그것이 곧 중검.

“무거움 속에 강력한 거력이 실려 무거움은 곧 강맹해집니다.”

다시 말해 패검이었고.

“너무 빠르면, 엄청나게 빠르면,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쾌속한 쾌검.

“당신은 검은 쾌검만을 가졌었습니다.”

그랬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쾌검이었다.

“한데, 방금 전은 무거움과, 강맹함, 그리고 쾌속함이 담긴 검이었지요. 내가 알던 추가의 검처럼.”

추혼삭의 동공이 흔들렸다.

“시간은 참으로 야속하군. 많은 걸 잃게 하거나, 많은 걸 바뀌게 하다니…….”

천무백의 눈에 다소 씁쓸한 빛이 스쳤다.

“당신의 무공도, 그리고 무당을 지키는 검이라는 적건회의 의미도.”

추혼삭은 가전무공 중 쾌검의 묘리만을 익혔다. 시간이 흘러 변했음인가.

“말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적건회, 무천악.”

추혼삭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는 진정 무당을 지키는 검입니까?”

정적이 가라앉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