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9화>
139. 판을 새로 봅시다.
“으음. 지척에 있는 무당이 이렇게 난리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니.”
제갈설아는 밤이 깊어졌건만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끝내 그녀는 누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등잔을 켰다.
“무당 세력이 약화하면, 제갈세가 입장에서 좋은 걸까?”
평상시라면 그것이 맞다.
호북성의 이권을 제갈세가와 무당파가 나눠 가진 형태.
여기서 무당이 흔들리면, 제갈세가로서는 호북성에서 확실한 입지를 굳힐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은 평시가 아니다.
“무당의 전대 장문인을 비다라로 만들 정도로 심상치 않은 놈들이야.”
천룡검협이 혈귀곡을 쫓아 소림을 구하고, 화산에서 여러 활약을 펼쳤다는 소식을 들을 때만 해도.
제갈설아는 이번에 강호에 벌어지는 일이 직접적인 위험으로 다가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혈귀곡은 강호가 직면한 위험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당이 흔들리면, 제갈세가는 호북성에서 입지를 다지기는커녕.
혈귀곡이 진실로 마교처럼 준동했을 때, 그 위험을 홀로 버텨 내야 한다.
“결국, 적건회일까.”
장로전에서 본 적건회의 행동.
천무백이 오기 전에 얘기했던 대로, 적건회가 아무래도 의심스러웠다.
일단 무당 안에 있되, 무당이 아닌 외부세력이다.
혈귀곡의 입김이 충분히 닿을 수 있다.
한데 그러면서도 무당에 들어오는 외부인을 검문할 권리까지 있을 정도로, 많은 권한이 쏠려 있다.
‘내가 혈귀곡 소속이라면?’
제갈설아는 처지를 바꿔 생각했다.
“무당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윗 명령이 있으면, 나라고 해도 우선 적건회를 이용할 거야.”
상황이 너무 좋지 않은가. 무당과 갈등을 빚고 있으니까. 적당히 잘 자극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음. 그러면 적건회를 조사할 방도를 찾아볼까…….”
한데 그때였다.
“소저, 늦은 시간에 실례지만 혹, 얘기를 나눌 수 있겠소?”
방 밖에서 들려오는 천무백의 목소리.
“힉!”
제갈설아는 순간 식겁했다.
이 늦은 시간에? 처소를 찾는다고?
천무백은 청성표국에서도 제갈설아와 단둘이 같은 방에 있지 않았다.
사실 그게 맞았다. 조금은 개방적인 무림인이어도, 제갈세가라는 명문의 귀하디귀한 여식이니 한 방에 젊은 남녀가 같이 있는 건 여러 추문이 꼬리말처럼 따라붙을 만했다.
그런데 천무백이 이 밤중에 찾아왔다!
제갈설아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다가 겨우 헛기침하며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네, 들어오세요.”
나름 침착하게 말했지만, 목소리의 어조가 떨리는 걸 그녀 본인도 직감했다.
‘으으. 이 멍청이. 또 혼자 덜덜 떤다!’
내심 자책하던 사이.
문이 드르륵 열렸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오. 불이 켜진 걸 보고 찾아왔소.”
제갈설아는 왠지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렸다.
‘도도하게. 도도하게. 최대한 도도하게.’
본래 성격처럼 하자고. 설아야!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로 막 입을 열려는 찰나.
천무백의 뒤에 불쑥 나타나는 노인네의 얼굴에 제갈설아는 순간 김이 팍 샜다.
“뭐야. 아저씨는 왜 왔어요?”
절로 튀어나오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아니…… 난 오면 안 되나?”
능허는 순간 가슴이 아려왔다.
* * *
제갈설아의 불퉁한 시선을 받은 능허는 뭔가 억울했다.
자려고 누웠는데 천무백이 다짜고짜 깨운 것도 화나는데, 막상 아무 말 없이 찾아온 여기에서도 환영은커녕 불청객 쳐다보는 눈빛이라니.
‘보고 싶다. 설영아…….’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눈치 빠른 능허는 둘이 같이 있으라고 비켜 주고 싶었지만,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천무백이 데리고 왔는데 간다고 하면 일 안 하고 뺀질거린다고 한 소리 들을 터.
제갈설아는 한차례 능허를 노려보다가 천무백에게 가벼운 미소를 띄우며 물었다.
그 확연한 변화에 능허는 내심 섭섭했다.
“무슨 일이에요?”
“계획을 새로 점검해야 할 것 같소.”
“계획을요?”
“판을 새로 봅시다.”
제갈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천무백은 대청진인과 나눴던 대화를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말했다.
사실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하나 마지막에 나온 말이 의미심장했다.
“반드시 적건회여야만 한다…… 라.”
이상하다. 정말 이상하다.
천무백은 그때의 표정과 분위기를 자신의 감상대로 전했다.
말에 내포된 의미심장함을 눈치 못 챌 제갈설아가 아니다. 하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쉬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분명했다.
제갈설아가 딱딱한 얼굴로 간신히 머릿속에 드러난 생각을 끄집어냈다.
“자작극?”
“그럴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 같소.”
능허 역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참. 소림에서나 화산에서나, 정파 놈들이 고루하긴 해도 마음만큼은 굳건하구나 싶었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나보오.”
“아직 가능성일 뿐이다.”
“흥. 뭐 정파 놈들도 강호에서 사는 사람 아니겠소.”
능허의 냉소에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다.
“적건회를 내치려는 움직임인가요?”
“적건회에 대한 적개심이 뚜렷해 보이오. 적개심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열등감이라 해야 할지. 아니면 위협이라 해야 할지.”
“그 모든 게 섞였겠군요. 제가 보기엔 자작극은 아닐 것 같아요.”
천무백이 눈이 반짝였다.
설명을 더 원하는 것처럼 바라보자, 제갈설아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조곤조곤 얘기했다.
“자작극이 되려면, 적어도 많은 장로가 한마음으로 뭉쳐야죠.”
“대청진인 홀로는 불가능하다?”
“어느 한두 명이 욕심을 가지고,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건 명문정파에서도 흔한 일이에요. 하지만 모두가 그러진 않아요. 몰락하고 타락한 사람 중에서도, 정의심을 갖춘 인물은 분명히 존재하고요.”
“모든 뜻이 뭉치기 어렵겠지.”
당장 진청진인만 떠올려도. 그 양반이 자작극을 벌이는 데 손을 보탤 것 같진 않다.
“맞아요. 정의로운 일도 아니고요. 하물며 무당파는 파벌이 갈렸잖아요. 무학파는 적건회의 입김이 강해요. 그런 이들의 도움 없이 전대 장문인을 비다라로 만들고, 유수 도인을 죽이는 전 불가능하다고 봐요.”
“하면 적건회의 짓이다?”
“아니요.”
제갈설아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전 아직도 적건회의 손이 닿았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지만, 그것도 적건회 전체의 범행은 아닐 거예요.”
“하면?”
“적건회주가 가장 의심스럽긴 해요. 저도 공자께서 장문인과 가신 사이, 나름 몇 가지 알아봤어요. 적건회주 무천악, 그자가 회주가 된 직후에 갈등이 심해졌다고 하더라고요.”
대청진인이 의심스럽긴 하나 자작극은 아니다.
적건회의 소행임이 가장 유력하나, 만일 그들이 범인이라면 적건회 전체가 아니라 적건회주, 또는 회주를 포함한 일부일 것.
“하면 대청진인이 했던 말은 무슨 의미일 것 같소?”
“이번 일에 적건회를 의심하고는 있지만, 만일 아니더라도 상관없다는 태도에요. 이번 기회에 반드시 적건회를 내치겠단 의도죠.”
“그래. 내 생각도 그렇소. 적건회가 흉수면 적건회를 무당에서 내치기에 가장 완벽한 명분이지. 설령 아니더라도, 그리하면 된다는 뜻이고.”
“뭐야. 다 알면서 저한테 물어본 거예요?”
제갈설아가 입술을 뾰로통 내밀었다.
실컷 생각한 바를 풀어놓으니, 마치 다 미리 생각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가.
새삼 억울한 마음도 불쑥 들었다. 하나 천무백은 그저 가볍게 미소를 지어줬다.
“아니,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기진 않소. 하나 소저와 의견이 통하니, 얘기를 나누기가 편하구려.”
“…….”
부드러운 목소리에 제갈설아는 언제 억울한 마음이 들었냐는 듯,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꾹 참았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했지만, 팔짱을 껸 채 보던 능허의 눈을 피할 순 없었다.
“광대에 파리 앉았나? 왜 이렇게 입꼬리를 꿈틀거리오? 간지러우면 긁던가.”
“……아저씨는 좀 조용히 해요.”
“지금까지 입 다물고 있었는데, 뭘 새삼스럽게.”
능허가 실실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천무백은 어느새 머리를 써야 할 땐 제갈설아를 찾게 됐다.
제갈설아가 똑똑해서?
틀린 말은 아니다. 똑똑하지 않다면, 이렇게 찾아와 얘기를 나누는 일은 없으리라.
과거부터 그랬다. 복잡하게 머리를 써야 하는 상황이 생기면 제갈씨를 찾았다.
근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말이 통하는군.’
전생에서도 제갈선과 여러 계획을 짜고 머리를 맞댔다.
그때도 제갈선이 똑똑하다고는 여겼고, 훌륭한 전략과 계책을 수도 없이 냈다. 하나 천무백과는 잦은 갈등을 일으켰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수두룩했다.
서로의 성정 탓이다.
둘 다 옳은 의견이었지만, 성정에 따라 방향성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한데 제갈설아 하고는 말이 잘 통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성정이 비슷하다기보단, 왠지 그런 게 있었다.
그리고 지금, 제갈설아는 천무백의 생각과 일치했다.
“판을 새로 봐야겠네요.”
제갈설아가 푼 머리를 목 뒤로 올리며 대충 끈으로 묶었다.
“그러시오?”
“적건회를 의심하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위험한 판단이에요. 한번 의심한 순간, 정상적인 판단을 하기 어려워져요.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둬야 해요.”
“맞소.”
“이분법적 사고는 위험해요. 도학파가 정의, 적건회가 악. 이건 아니에요.”
“나도 그리 생각하오.”
제갈설아는 적건회와 무당파 장로들에 대해 이것저것 알아봤다.
자세한 속사정까진 말해 주지 않아도, 대략적인 개요를 파악했다.
가령 적건회를 무작정 싫어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도.
적건회에서도 무조건 도학파를 경계하는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가장 좋은 건 비다라를 치료해서, 전대 장문인께 누가 범인이냐고 묻는 게 최고죠.”
“하지만 어려운 일이오. 치료 가능하다는 확실한 보장도 없거니와.”
“적건회가 자신들도 참관하지 못하면, 외부인에게 보일 수 없다며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으니까요.”
“도학파 입장에서도 이해가 되는 얘기오. 그들은 적건회가 흉수라 의심되니, 전대 장문인께 접근해 비다라로 어떻게든 이용할지도 모른다고 여기니까.”
물론 비다라를 치료하긴 해야한다. 하나 그게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그리고 확실하게 가능할지도 불투명하다.
“그래서 우리가 판을 새로 보자는 뜻은 이거예요.”
천무백이 씩 미소 지었다.
어쩐지 같은 생각일 것 같았으니까.
“내가 먼저 말해도 되겠소?”
“네? 네.”
“우리 편을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오.”
“어, 맞아요!”
제갈설아가 손뼉을 쳤다.
“우리끼리만 일을 해결하려면 어렵소. 그렇다고 그 속에 들어가기엔, 우리는 외부인이니까.”
“그러니까 안에 있는 사람을 우리 편으로 만들자는 거죠.”
“맞소.”
“좋아요. 적건회에서는요?”
“부회주 추혼삭.”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많이 파악하셨네요! 추혼삭이 유난히 도학파 장로들과 친하니, 서로 불화가 일어날 때 그걸 진정시키려고 부회주가 나섰다고 해요.”
“무당에선 누가 좋겠소?”
“진청진인이요. 도학파이긴 하나, 성정이 온화하면서도 단호해요. 더구나 율법당의 당주를 맡고 있어, 무당 내 규율에 엄격하고요. 그래서인지, 적건회가 무당의 규율을 벗어나려고 행동할 때마다 기함해요.”
“좋소. 하면, 진청진인은 소저가 맡아 주시겠소? 추혼삭은 내가 담당하리다.”
물 흐르듯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능허의 얼굴이 불퉁해졌다.
‘아주 서로 북 치고 장구 치고. 이럴 거면 난 왜 데리고 왔대. 졸려 뒈지겠구먼.’
그런 능허에게 천무백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럼 능허, 네가 어딜 좀 다녀와야겠다.”
“네, 네. 알겠습죠. 저야 시키는 대…… 예? 어딜요?”
“무당을 내려가면 하오문 지부가 있을 거다. 거기서 내 이름 대고 최대한 빠르게 소림으로 연락을 취해.”
“소림 말입니까?”
소림이 튀어나오자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아!”
하나 이내 무언가 이해했는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능허만 미간을 찡그렸다.
“뭐, 시키는 거니까 일단 하겠습니다.”
“그러면 출발해라.”
“이 늦은 밤에요?”
“시급한 일이다.”
능허는 낙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얘기가 끝나자 천무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밤이 늦었으니, 여기까지 하고, 내일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해 봅시다.”
“네, 알겠어요.”
제갈설아가 일어나서 배웅했다.
능허가 먼저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갔고, 천무백이 방문을 나서려는 찰나.
무언가 생각난 듯, 고개를 돌려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 막 자려고 할 때 찾아와, 잠을 방해해서 미안하오.”
“네? 아니요, 괜찮아요. 안 자고 있었어요.”
천무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 그렇소? 난 편한 잠옷 입고, 머리도 풀어 놓으셨길래 자는 중인 줄 알았소.”
“…….”
“그럼 가 보겠소.”
천무백이 나가고, 제갈설아는 움찔하며 저도 모르게 자신의 차림새를 내려다 봤다.
어쩐지 어릴 때부터 입어 온 편한 잠옷이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