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38화 (138/318)

<검신재생 138화>

138. 원래대로.

추혼삭의 자세. 벌어진 어깨. 칼이 놓인 위치. 단전에 꿈틀거리는 무거운 기운.

그 모든 걸 파악한 천무백의 눈에 언뜻 아련함이 스쳤다.

익숙한 기세와 자세, 그리고 내공이다.

그때였다.

모여든 중인들이 양옆으로 나뉘었다.

“그만들 하시오. 신성한 무당에서 어찌 칼부림이 계속 이어진단 말이오?”

이 소란을 듣고 나타난 장년인은 무당파 장문인.

대청진인(大淸眞人)이었다.

무당 장문인이 나서자 분위기는 순식간에 정리됐다.

적건회가 아무리 위세를 떨쳐도, 무학파가 장문인과는 파벌이 갈린다 해도, 한 문파의 장문인이라는 절대적인 권위는 유지되는 듯싶었다.

자리에 들어선 대청진인은 추혼산을 지그시 노려봤다.

“추 부회주, 이번 일은 유감이라는 사실을 회주에게 전해주시오.”

“……죄송합니다.”

추혼삭은 꼼짝도 못 하고 고개를 숙였다.

천무백은 대청진인을 보며 그 절대적인 권위가 어디서 나오는지 짐작됐다.

‘태극인가.’

도학파라고 하길래, 가진바 무위는 약한 줄 알았건만.

그건 아니다.

하단전에 꿈틀거리는 거대한 태극(太極).

‘무당제일이군.’

천무백의 눈이 유난히 빛났다.

그리고 그런 눈을 빤히 응시하던 대청진인이 합장하며 고개를 숙였다.

“천룡검협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소림을 구하고, 중경성의 참사를 해결했다는 소식. 현재 무당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대협의 도움이 절실한데 여기까지 방문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차라도 나누며, 그간의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 * *

적건회(赤巾會)

무당이되 무당이 아닌 무인.

그것이 적건회를 가장 잘 표현하는 문구였다.

무당에서 먹고, 자고, 무공을 익히며 그들은 무당을 위해 싸운다.

적건회의 창설 목적이 그것이었다.

무당의 멸문 또는 봉문을 막기 위한 협객들의 회(會).

아무런 이득을 바라지 않고, 오로지 무당을 지키기 위해 무당산에 올랐다.

무당을 위해 싸우고, 죽었다.

그들의 희생으로 무당은 꿋꿋하게 살아남았다.

적건회가 무당을 지키는 검이었다는 건 누구도 부정치 않는다.

적어도 40년 전에는.

과거의 성세를 거의 회복한 작금의 무당에게 적건회는 이제 애매한 단체다.

세상 그 어느 문파가, 문파 내에 전혀 다른 이질적인 무력집단을 두는가.

문제는 무당을 지키며, 무당과 함께 살아온 40년 동안.

적건회는 자신을 스스로 무당으로 생각했단 점이다.

만일 그들이 진실로 무당파에 동화될 수 있다면, 하등 문제없다.

무당이 성세를 회복한 가장 큰 원인은 적건회였으니, 흡수한다면 무당은 남존무당(南尊武当)이란 이름을 영원히 지킬 수 있으리라.

문제는 근본이다.

협의에 가득 찬 협객들이긴 했으나, 도학(道學)에 근본을 둔 무당과는 완전한 궤를 달리했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

하여 적건회와 무당의 중심인 소위 도학파(道學派)와의 갈등은 첨예해졌다.

“천룡검협은 도학파의 부름에 오는 작자다. 그자가 도학파와 입을 맞춰, 전대 장문인에게 벌어진 참사를 우리가 꾸몄다고 둘러대면, 우리는 어찌 되는가?”

적건회주의 말에 적건회들은 침중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도학파는 전대 장문인의 참사를 적건회의 짓이라 의심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대 장문인은, 일찍이 장문인 물려주고 뒤에서 도경을 정리하고 새로이 쓰며 무당의 근본을 되찾자는 도학파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셈.

이후로 도학파에 힘이 실리며 무학파에 적건회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전대 장문인의 죽음도 경천동지한 일인데, 비다라로 되살아났다.

이 같은 사실에 도학파는 적건회를 의심했다.

적건회는 엄청난 위기감을 느꼈다.

“천룡검협이 도학파와 입을 맞춰, 이 모든 짓이 우리의 짓이라고 꾸며 댄다면?”

“협객이라고 하나, 모를 일이지.”

“그가 진정 협객이라고 볼 수 있겠소? 강호의 소문을 어찌 다 믿으리까?”

“하지만 그가 정녕 비다라를 치료하여, 흉수가 누구인지만 밝혀내면 오히려 우리로선 억울함을 벗을 수 있지 않소?”

추혼삭이 그리 반문했지만, 적건회에선 회주의 말이 절대적이었다.

회주, 무천악이 느릿한 어조로 말했다.

“이미 삼 년 전부터, 현 장문인께선 적건회를 무당에서 퇴출할 궁리를 하셨소. 우리에게 배우고 익혀 무당의 큰 축을 차지한 장로들을 배제하고, 은근히 멀리하지 않으셨는가.”

“그런…….”

거기에 천무백을 데리러 갔던 유수가 자객의 습격에 사망했단 소식이 전해졌다.

도학파는 분노와 슬픔을 동시에 터뜨렸고, 적건회 역시 경악했다.

“우리가 한 짓은 아니외다!”

적건회가 아무리 무당과 첨예한 갈등을 빚더라도, 무당에서 40년간 무당을 지켜 온 검이었다.

어찌 무당의 제자를 해하겠는가.

하나 적건회가 대놓고 천무백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반대했었기에, 의심의 눈초리가 쏟아졌다.

그쯤 되자 적건회도 분노했다.

“설마 이 모든 게 도학파가 저지른 짓은 아니겠지요?”

“어쩌면 전대 장문인이 비다라가 됐다는 것도 거짓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도력으로만 억제할 수 있다고, 우리가 접근하는 걸 엄금하고 있지 않습니까. 누가 여기서 직접 비다라가 된 전대 장문인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도학파가 그럼 유수를 죽이고 우리에게 혐의를 뒤집어씌운단 말입니까?”

“얼마나 적절한 명분입니까. 적건회를 당장에 쳐낼 수 있지요!”

추혼삭은 적건회 내부에 감도는 분위기에 미간을 좁혔다.

무언가 이상했다. 특히 추혼삭은 도학파에 대한 갈등을 부추기는 듯한 무천악의 태도에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씌워진 의심을 벗어내기 위해선, 전대 장문인께서 회복되셔서 이유를 밝히셔야 합니다.”

추혼삭이 그리 주장하자, 무천악의 곁에 있는 이들이 대놓고 조롱했다.

“허어. 부회주께선 도경을 어린 시절부터 읽으시더니, 완전히 도사가 다 되셨소이다. 무인이 아니라 도인으로 사는 게 어떻겠소?”

그 말에 추혼삭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적건회 내부에서도 비교적 무당의 장문인과 도학파 장로들과 친분을 가진 자가 바로 추혼삭이었으니까.

“듣자 하니 적공이 당했는데도, 천룡검협 앞에서 꼬리를 말고 물러났다는데?”

“거 참…….”

적건회는 엄연한 회(會).

무당을 지킨다는 공동의 목적으로 만들어진 모임이다.

회주와 부회주는 있을지언정, 그것이 문파의 수장처럼 권위를 가지진 않는다.

다만 회주만 다를 뿐이다.

십 년 전, 투표로 적건회주 자리에 오른 현 회주, 무천악.

그가 회주에 오른 직후 적건회는 급변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적건회는 해체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무당이 과거의 성세를 거의 되찾아가고 있음을 느꼈으니까.

한데…….

‘무당이 되려고 하는 것인가.’

추혼삭은 굳은 얼굴의 무천악을 바라봤다. 저 무표정에 숨긴 미미한 열망.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자신도 공감하는 것이니까.

강력한 무(武)에 대한 갈망.

하나 그것의 방향성이 잘못됐다.

‘스스로 무당이 되어, 무당의 검을 원하는 것인가.’

그의 눈동자에 암울함이 어렸다.

무당에서 태어났으나, 무당의 사람이 될 수 없는 존재.

적건회가 가진 태생적 한계를 무천악은 벗어나고 싶어 했다.

무당이 가진 검.

‘언젠가 태극혜검을 가지면, 천하일절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한탄했었지…….’

추혼삭은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졌다.

* * *

대청진인은 비교적 젊었다.

화산 장문인과 소림의 혜량대사가 엄연히 노령의 나이라면, 대청진인은 한창 전성기를 구사할 불혹을 넘은 지 얼마 안 되는 나이였다.

때문일까. 그에게선 무당의 차분한 도(道)가 느껴지면서도, 한편으론 패기가 전해졌다.

‘무당도 바뀌긴 했군.’

그를 보니 어째서 무학파와 도학파가 갈렸는지 일견 이해가 갔다.

도학파의 일인이라고 보는 장문인도, 이런 패도를 갖췄으니까.

과거의 무당을 떠올리면 확연하게 바뀌었다.

‘정마대전이 이리 바꿔놨겠지.’

무당의 처절한 몰락을 지켜본 이들이 이제는 새로운 무당의 주역이 됐다.

강하지 못해 쓰러지던 선배들, 무당을 찾아 피난 온 양민들을 위해 죽어가던 무당을 지켜본 세대.

그 어떤 세대보다 약함을 증오하게 된 세대들.

강력한 힘을 추구할 수밖에 없겠지.

이런 세대에서 도학파가 명맥을 잇고 있다는 게 오히려 신기할 따름이다.

누군가는 이런 분위기에 위기를 느꼈을 것이다.

아마 전대 장문인, 현엽진인이 그러하리라.

무당의 근본을 찾자는 도학파는 그리 만들어졌으리라.

상황을 내심 짐작한 천무백은 대청진인과 말없이 한참 걸었다.

그러다 문득 무너진 벽이 보수가 안 된, 자소궁 앞에서 대청진인이 우뚝 멈춰 섰다.

“대협.”

“아직 대협이라 부를만한 나이도, 배분도 아닙니다. 편히 부르시지요, 장문인.”

대청진인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무당이 처음이 아닌가 보오.”

“…….”

“여기까지 오면서 막힘없이 걸으셨습니다.”

천무백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내키는 대로 걸었을 따름입니다.”

“내키는 대로라…… 좋군요. 세상사가 모두 내키는 걸음대로 흘러가면 참으로 좋을 터인데.”

조용히 중얼거리던 대청진인이 물었다.

“이 무너진 자소궁에 와 본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적어도 지금 생에선.

“무당의 속가문파들은 하나, 둘씩 돌아오고, 후원해주는 큰 상단들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재정적인 위기는 벗어났고, 자소궁을 재건하자는 이야기도 많지요.”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

“그때를 기억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입니다.”

“…….”

“당시 소림은 봉문했고, 무당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적건회가 없었다면,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적건회의 선배들에게, 정말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때 죽어가신 협객분들이 묻힌 곳을 향해 평생 고개를 숙여도 은혜를 갚을 수 없을 겁니다.”

차분했던 대청진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적건회가 아니었다면 무당이 남아있을 수 없었다니. 남존무당이, 외부의 힘이 없었다면 쓰러졌으리라는 사실이.”

천무백은 가만히 대청진인을 바라봤다.

태극.

음과 양의 조화.

세상 만물의 균형.

천무백은 대청진인의 얼굴에서 그 태극이 사라지고 있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때를 기억하는 모든 무당의 사람들은 강함을 추구하게 됐습니다. 나쁜 건 아닙니다. 무파라면 능히 강함을 추구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 도를 벗어나고 있고, 전대 장문인인 스승님께선 이를 경계했지요.”

대청진인이 시선을 돌려 천무백을 응시했다.

“과거의 적건회는 무당을 지키는 검이었으나, 지금은 무당을 위협하는 검이 되었습니다.”

“이번 일에 적건회가 배후에 있다고 여기십니까?”

“천 공자께서도 그리 생각되지 않으십니까?”

“…….”

“적건회가 흉수입니다.”

단호한 목소리.

천무백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아니 적건회여만 합니다.”

대청진인의 목소리에서 피어오르는 미미한 열기.

“그래야만 합니다.”

그건, 흡사 광기였다.

* * *

천무백은 걸었다.

그러다 문득, 사라졌다. 다시금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무당산의 72개 봉우리.

그중 가장 높은 천주봉(天住峰)이었다.

구름이 손에 잡힐까 싶을 정도로 높은 곳. 그곳에 서서 천무백은 무당의 전경을 내려 봤다.

지금 수많은 사람이 오가는 저 무당이 아니라, 불타고, 시체가 잔뜩 깔린 무당을. 다 무너져 버린 무당을.

“40년이 짧은 줄 알았지만, 많이 변했구나.”

천무백은 추혼삭에게서, 그리고 대청진인에게서 옛 기억을 봤다.

옛날. 여기 무당이 무너질 때.

천무백은 이 자리에 있었다.

‘무당이 죽는 날, 내 동지들도 여기서 같이 죽을 것이오.’

‘선배님은 소림을 지키러 가셔야 하니, 여기는 우리에게 맡기십시오. 나랑 여기 추공(公)과 강호동도들이 무당을 지켜낼 거요.’

‘장문인, 아니. 이 자식아. 왜 선배님을 보내려고 해? 어? 아니. 적어도 유백기, 그놈은 놓고 가쇼.’

‘걱정하지 말고 가시오, 선배. 소림이 당장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하지 않소. 흥, 우리 무당은 다르오! 남존무당이 고작 마인놈의 발에 무너지리까!’

‘썅. 다 무너져 놓고, 꼴에 자존심은. 에잇, 좋다! 내 그래도 무당이 되어 무당을 지키겠소. 해도 머리에 태극건을 쓸 순 없으니, 그래. 이 새하얀 수건이 피로 붉게 젖을 때까지 싸우리다. 내 동지들도 같이.’

“…….”

천무백은 무당을 내려 보던 눈을 천천히 감았다.

한때 손을 잡던 친우였던 적건회와 무당은, 지금은 완전히 갈라섰다.

대청진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

반드시 적건회여야만 한다는 얘기.

천무백도 적건회가 가장 의심스러웠고, 여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적건회가 범인이라 지레짐작했었다.

그러나 대청진인의 말이 내포하는 의미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반드시 적건회여야만 한다…….

“정마대전과, 그 이후로 이어진 시간이, 참 많은 걸 바꿔놨구나.”

천무백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 원래대로 되돌려 놓을 수도 있겠지.”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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