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7화>
137. 애들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좌중의 시선이 능허에게 집중됐다.
능허는 괴상한 표정을 지으며 쓰러진 적왕유를 내려다 봤다.
“뭐야, 새끼. 얼굴에 힘 빡 주길래 센 줄 알았는데, 별거 없잖아?”
사람들의 얼굴에 허탈한 빛이 떠올랐다.
‘어떻게?’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인들의 가장 중요한 점이 바로 사람 보는 눈이다.
옛날에 천무백이 강조했듯, 강호에서 사람 보는 눈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상대의 기세와 분위기를 읽어 수준을 파악하는 게 강호인들에겐 가장 중요했다.
적왕유는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다.
기세와 분위기.
손에 잡힌 굳은살과 의복 위로 드러난 근육의 형상.
눈동자에 담긴 중후한 빛과 고른 호흡.
그 모든 걸 종합해 보면, 이미 완숙한 경지에 오른 절정 무인이다.
한데 그런 이를, 능허가 쓰러뜨렸다.
‘그것도 일격에.’
단 일격.
상대의 극의에 달한 발검보다 빠르게 검을 찔렀다.
쾌속한 찌르기.
그것 하나만으로도 강호일절이라 불릴 만했다.
더 놀라운 건, 그건 허초였다.
도달지점에서 검을 비틀어 검면으로 관자놀이를 후려치는 장면에서 제갈설아는 진심으로 탄복했다.
‘한가락 하는 무사임은 알았지만.’
새삼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없음을 깨달았다.
적왕유를 저리 일격에 쓰러뜨릴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적왕유를 부축한 적건회 무사들은 당황했다.
“누구시오. 도대체…… 적공(公)을 어찌.”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능허요. 독안사(獨眼蛇) 능허.”
“독안사! 그 독안사!”
“화산 비무전에서 스스로 몸을 버려가며 화산의 어린 제자를 구했다는 협객?”
“과연……!”
“응?”
능허는 좌중의 반응에 얼떨떨했다.
자신의 명성도 천무백 덕택에 나름 알려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협객이란 단어가 붙으니 왠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들은 것처럼 몸이 배배 꼬였다.
“역시. 강호의 소문이 허명이 아니었나.”
“천룡검협도 과장된 것만은 아니겠어. 같이 다니는 독안사가 저 정도니. 하긴, 적건회의 삼인자를 이긴 걸 보니, 헛소문이 아니었구만!”
소란을 듣고 장로전에 몰려온 무당의 무사들이 분분하게 얘기를 나눴다.
그제야 능허는 자신이 꽤 놀라운 짓을 저질렀구나 싶었다.
‘이놈이 생각보다 강한 놈이라고?’
능허도 눈치가 있다.
제법 한가락 하는 놈으로 여겼고, 싸우기 전에도 내키지 않았다.
한데 막상 붙어보니.
‘허. 주군한테 맞을 때 비교하면 턱없이 느리더만.’
수도 없이 천무백에게 비무를 빙자한 폭력을 겪어 본 능허다.
천무백의 손짓 하나에 담긴 속도와 공력을 수도 없이 겪었다. 그것에 비하면 적왕유의 발검은 느리기 짝이 없었다.
천무백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천후, 그놈은 소림에서 잘하고 있나.’
당장 곽천후만 떠올려도, 이보다 빨랐다.
그래서 보기보다 느리고 형편없다고 생각했건만.
‘내가 강해진 것이었구나!’
능허의 얼굴이 상기됐다.
적건회의 삼인자라면 적어도 완숙한 절정의 무인일 터.
과거의 능허였다면, 천무백을 만나기 전의 능허였다면 평생을 살아도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였으리라.
한데 지금 뛰어넘었다.
그것도 가뿐하게.
능허는 가슴이 뛰었다. 발끝부터 차오르는 짜릿한 고양감과 흥분이 뒤섞여 능허의 입꼬리를 헤벌쭉하게 끌어올렸다.
“흐으흐. 어떻습니까? 주군? 나도 내걸 지킬 만한 무위를 갖춘 것 같소?”
“나름 쓸 만해졌구나.”
천무백의 어조는 퉁명했으나 능허는 입이 함지박만 하게 벌어졌다.
칭찬에 인색한 천무백의 평소 언행을 떠올리면, 저 정도의 발언도 처음 듣는다.
극찬이었다.
그간 얼마나 지고한 폭력의 시간이었나.
이제야 성과를 눈에 확인한 능허는 어깨를 으쓱였다.
“흐흐. 주군. 보십쇼. 마치 과거 무림을 일검에 벼락을 내리쳐 쪼개 버렸다는, 전설의 벽력일검(霹靂一劍) 같지 않습니까?”
“아휴, 이 새낀.”
“아닙니까? 그럼 창천검신 같습니까?”
“아이고, 두야.”
천무백이 머리를 짚었다.
“아니면 검왕? 아니면 검성? 아니면 산동검호? 천검신군?”
하나같이 일세를 대표하는 절대강자들의 이름이 하나씩 거론됐다.
능허의 실력에 감탄한 좌중의 표정도 어느새 어정쩡해졌다.
한 시대에 별호를 남기고, 족적을 남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입지전적인 존재.
못 강호인들의 존중을 넘어 숭앙을 받는 존재들이다.
하여 보통 강호인들은 과거 절대자들의 별호를 오히려 함부로 입에 담지 못한다. 한데 능허는 그들과 자신을 비견하지 않는가.
협객이라고 감탄하던 중인들의 표정이 어색해졌다.
“흠. 천검신군 같은 느낌이긴 하죠. 한방에 빵!”
가만히 듣던 천무백의 얼굴도 점점 딱딱해졌다.
“야.”
낮게 깔린 목소리. 심상찮은 기색을 느낀 능허가 순간 정신을 바짝 차렸다.
이 새끼.
어떻게 내 전생들만 골라서 얘기하지?
* * *
‘썩 쓸 만하네.’
능허의 한수는 꽤 위력적이었다. 적왕유가 괜히 당한 게 아니었다.
하나 천무백의 목소리는 싸늘했다.
“우쭐하지 마라. 네가 처한 환경에서 그 정도 못 하면 원숭이한테 칼 쥐여 주는 게 낫다.”
“아니 말씀을 왜 그리 하십니까. 사람 섭섭하게.”
“곽천후가 왜 매번 그토록 강자들과의 비무를 하러 돌아다니냐?”
“그야…… 강한 사람이랑 싸우려고요.”
“강한 사람이랑 싸우면 뭐가 좋은데?”
“실력이 늘겠죠.”
“능허야. 너 매일 수련할 때마다 싸웠던 게 누구냐.”
“…….”
능허는 합죽이가 되었다.
따지고보면 능허는 자못 강해지기를 원하는 모든 강호인이 원하는 환경에 놓였다.
소림에서 약선에게 꽤 괜찮은 영약을 섭취해 내공을 늘렸다.
당대를 휩쓸었던 적혈검귀의 능허좌검을 익혔다.
뿐이랴.
그걸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게 수련할 수 있는 비무 상대가 있었다.
후기지수에서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투귀 곽천후가 매일 두 번, 세 번씩 상대해 줬다.
거기에 방대하고도 장엄한 지식을 갖춘, 무학 종사의 경지를 월등히 넘어선 천무백이 손발을 맞춰 주며 조언까지 해 줬다.
하물며 혈귀곡을 상대하면서 실전 경험까지 쌓았다.
능허는 그간 곽천후와 천무백에게 두들겨 맞느라 자신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만 이미 상당한 경지에 올라섰었다.
그러나 천무백의 목소리는 다소 날카로울 정도로 가시가 서 있었다.
“너 앞으로 한 번씩 검왕이니, 검신이니, 언급하면 뒈지게 처맞는다.”
나름 우쭐한 기색이었던 그는 천무백의 완곡한 표현을 이해했다.
흥분하지 말고, 우쭐대지 말고, 자만하지 말라.
물론 적왕유를 단칼에 쓰러뜨린 건, 그것도 죽이지 않고 무력화시킨 건 꽤 자랑할 만한 성과다.
과거의 능허를 떠올리면 말이다.
‘자만은 독이지.’
천무백은 능허가 자신의 성과에 기뻐할지언정, 자만하지 못하게끔 적절히 조언했다.
‘내가 아직도 검극에 이르지 못한 이유.’
어쩌면 자만해서가 아닐까.
삶마다 강호를 진동시켰고, 일세에 이름을 남겼다.
스스로 자만했다고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지만, 매 전생마다 깨닫는다.
검의 길에는 아직도 자신이 모르는 게 많고, 배워야 할 건 더 많으며,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그 모든 걸 알지 못했으면서도, 강호인들이 칭송하는 소리에 스스로 자만했던 건 아닐까.
스스로 채찍질하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긴, 자만할 구석도 없지. 그 계란 놈은 아직도 불가해의 경지니까.’
생각만 해도 머리칼이 쭈뼛 서는 괴물.
그러나 동시에 호승심이 차올랐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반드시.
그리 결심하던 사이. 장로전은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장로전 앞을 지키던 무사들이나, 진청의 제자들, 그 외에 무당의 장로들까지 자리에 모여들었다.
적왕유가 쓰러지자 적건회의 남은 세 무사는 초반의 기세등등함이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리 적건회가 무당 내에서 영향력이 강하더라도, 장로전에서 소란을 일으킨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적건회에게 우호적인 무학파 장로들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천무백은 굳이 나서지 않았다.
가만히 있으면 일이 해결될 것 같았으니까.
“장로전에서 칼을 꺼내 들다니, 이번 일은 적건회주님께 전달하겠소. 유감이구려.”
평소 진청진인과 사이가 좋지 않은 무학파 장로들도 불쾌감을 내비쳤다.
하나 그때였다.
“회주님께 전달할 필요 없소. 내가 왔으니까.”
묵직한 저음이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모여든 장로와 무당파 무사들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길을 열었다.
특히 무학파 측으로 보이는 장로들은 애써 헛기침했다.
천무백은 걸어오는 사내를 보며 제법 감탄했다.
‘능숙하구나.’
칼날 같은 기세였다.
“부회주.”
턱수염이 인상적인 사내는 적건회의 부회주였다.
굳이 서열로 따지면 적건회의 이인자.
천무백은 쓰러진 적왕유와 부회주를 번갈아 보며 내심 코웃음을 쳤다.
‘적왕유, 저놈이 하는 짓을 보면 무당이 왜 이리 기를 못 펴나 싶었는데. 진짜배기는 부회주부터군?’
진청진인이 도학파의 장로라고 해도, 그래도 내공은 중후하고 툭 튀어나온 태양혈을 보면 익힌 무공도 범상치 않다.
아무리 무당이 도를 찾는다고 해도, 강호의 무파인 이상 도학파 장로들도 강력했다.
한데도 유난히 적왕유의 행패 앞에서도 진청이 기를 못 펴는 모습이었다.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적왕유가 강하다고 해도, 그 정도 실력은 아니었으니까.
이제 그 모든 의문이 풀렸다.
“그대가 천룡검협이시오?”
낮게 깔리는 목소리.
그 안에 담긴 굳건함을 읽은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살짝 미소를 지었다.
“천무백이오.”
“적건회의 부회주, 추혼삭이라 하외다.”
포권을 취하는 자세나, 눈빛이 남달랐다. 천무백은 오랜만에 괜찮은 사람을 만났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추혼삭.
어쩐지 낯설지 않은 이름과 분위기, 그리고 기세였다.
‘전형적인 무도가(武道家)로군.’
적왕유와는 달리 얼굴엔 어떤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았다.
천무백은 이런 류의 사람을 잘 안다.
한평생 무도의 길을 걷는 무도가.
어쩌면 천무백과 같은 유형이다. 천무백은 한평생이 아니라 전생마다 검도를 걷고 있으니까.
“실례했소. 그리고 그 손속에 자비를 두심에 고맙소.”
“자비?”
“그대의 실력이라면 적공을 단숨에 죽일 수 있었을 터인데, 살려 두지 않았소이까.”
천무백이 미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아니라 저치가 했소.”
능허를 가리키자 그제야 추혼삭의 얼굴에 미미한 놀람이 떠올랐다.
“허어……. 강호는 넓다더니. 과연, 여하튼 적공이 무당의 손님에게 큰 폐를 끼쳤소. 이번 일은 엄연히 적건회의 잘못이며, 이를 인정하는 바요. 여기 천룡검협과, 진청진인께 적건회를 대표해 사과드리겠소.”
적왕유와는 달리 그는 안하무인이지 않았다. 진청도 그를 좋게 봤는지 합장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적건회라고 무조건 도학파와 갈등을 빚는 건 아니군. 적어도 당장 서로 칼부림 할 정도로 갈등이 격화된 건 아니거나, 아니면 추혼삭 저 사람만 유난히 호의적인 것일 수도 있겠어.’
추혼삭이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자 그제야 분위기가 조금은 나아졌다.
“아, 그리고 하나 부탁을 드려도 되겠소이까?”
“부탁?”
“오해는 하지 마시오. 무인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적공을 저리 일격에 쓰러뜨린 당신과 한번 겨뤄보고 싶소.”
추혼삭이 능허를 가리켰다.
천무백은 추혼삭의 눈에 어린 불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로 한번 싸워보고 싶은 순수한 열망이 보였다.
무인으로서의 호승심이다.
하나 단지 그것들뿐일까.
‘체면을 차리겠다는 거지.’
이대로 능허에게 적건회의 3인자가 일격에 쓰러졌으니, 적건회의 체면이 말이 아니리라.
아마도 그런 계산이 밑에 깔려 있을 것이다.
능허도 그걸 눈치챘는지, 조금은 기분 나쁜 표정, 그리고 나름 자신감이 섞인 얼굴로 당당히 나섰다.
“좋소. 하지만 여기는 좁으니, 밖에 나가서 합시다.”
“아니, 됐다.”
그때였다.
천무백이 능허를 만류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네가 상대할 수준이 아니다.”
천무백은 웃으며 일어났다.
“애들 싸움이 부모 싸움으로 번진다더니. 어째, 나랑 한판 하겠소?”
“……!”
칼자루를 쥔 추혼삭의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