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6화>
136. 가슴으로 키웠다.
적왕유의 머릿속에 떠오른 감정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지독한 긴장감이었다.
‘이 무슨…….’
천무백의 검집에서 검이 반쯤 뽑혀나오는 순간, 숨 막힐듯한 압박감을 느꼈다.
두 번째 감정은…….
“말리지 마라, 능허야. 나 오래 참았다.”
“주군, 갈수록 인내심이 늘어나고 있소이다? 처음 만날 때 생각했으면, 저놈 문 박차고 들어올 때 왼팔 잘렸습니다.”
“왜 굳이 왼팔이냐?”
“흐흐, 알면서 왜 되물으십니까.”
“너 때문에 인내심이 배로는 늘었다.”
“제가 도움이 될 때가 있군요. 주군, 자고로 강호를 살아갈 때 인내심만큼 중요한 게 없지 말입니다.”
적왕유의 감정은 황당함이었다.
당장이라도 한판 할 기세로 검을 뽑아놓곤 옆의 늙은이와 잡담이나 하고 있으니.
하물며 그 내용이 우습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 따위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무시 당한 것 같아 적왕유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래도 저 덕분에 인내심이 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뿌듯은 지랄.”
“저 아니었으면, 저기 우락부락한 근육덩어리는 이미 삼도천 건넜죠.”
적왕유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근육 덩어리? 삼도천?’
저런 말을 언제 들어봤던 적이 있던가.
무당에서 저 대단한 위세의 진청진인도 자신에게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자신은 무당을 지키는 검이자 방패요, 사실상 무당의 유일한 무력단체인 적건회의 삼인자가 아닌가.
그것도 헛소문으로 명성이 자자한 천룡검협이 아니라, 옆에 있는 얼간이가 농락한단 말인가.
“지금 할 말 다했나?”
적왕유가 버럭 소리쳤다.
과연 자신만만했던 이유가 있었는지, 목소리에 담긴 공력이 심상치 않았다.
곁에서 천무백과 능허의 만담을 멍하니 지켜보던 제갈설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싸워도 지진 않겠지만, 조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적으로 돌리면 골치 아플 거야.’
보아하니 무당 내에서 적건회가 차지하는 위상은 밖에서 본 것보다 더한 듯 했다.
‘외부인을 검문할 권리라니.’
처음엔 그저 억지를 부리는 줄 알았지만 아니었다. 저토록 광오한 말에 장로인 진청진인이 반박하지 못했다.
아마도 40년 전, 무당이 몰락했을 때 고육지책이었으리라.
진짜 문제는 저만한 권한이 있다면, 다른 권한도 있으리라는 사실.
‘아직 모르는 일이야.’
적건회가 흉수라는 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는 이상 확신하지 않았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 뒀다.
비단 비다라를 치료하는 것뿐 아니라, 제갈세가의 입장에서 혈귀곡을 추적하려면 더 많은 조사가 필요하다.
저만한 권한을 지닌 적건회가 대놓고 계속 방해를 한다면?
물론 그녀도 적왕유의 행동이 마음에 드는 건 아니다.
다만 냉정함을 유지할 필요가 있다.
“여기 계신 천룡검협은 제갈세가와 함께 무당의 의뢰를 받고 왔어요. 곧 적건회가 제갈세가를 의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
제갈설아의 똑 부러지는 말에 적왕유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적법한 절차는 이미 여기 진청진인께서 거치셨습니다. 엄연히 무당의 장로이신분이, 우리들의 신원을 증명해주셨으니 적건회에서도 권한이 침범당한 게 아니고 융퉁성 있게 일이 진행됐다고, 여겨 주시면 좋지 않을까요?”
옳은 말이었기에 적왕유는 내심 침중한 표정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
하나 내심 그 속은 복잡했다.
‘도학파 놈들이 천룡검협뿐 아니라 제갈세가까지 끌어들였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 여길 수밖에 없었다.
‘전대 장문인에게 벌어진 일을 우리 적건회에게 모두 덮어씌우고, 정녕 내칠려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구나!’
그리 여긴 적왕유는 이 상황을 어찌 타개할지 고민했다.
“귀하가 무당의 의견에 따라 왔음을 잘 알겠소. 하나 전대 장문인을 뵙는 건 쉬이 이해할 수가 없소.”
진청진인의 얼굴이 침중해졌다.
“적건회의 회주와 부회주에게도, 현재 전대 장문인의 병세를 공개하지 않으면서, 외부인을 들인다? 이게 말이 되는 것이오?”
맞는 말이다.
다만 고육지책이었다.
‘적건회 모두가 적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회주는 다르다. 그 녀석만큼은 정녕 위험해.’
전대 장문인 피살과 비다라로 만든 흉수로 적건회를 의심하고 있는데, 접근하면 어찌 될지 알고 허락해 준단 말인가.
만일 저들 중 진실로 혈귀곡의 첩자가 있고,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전대 장문인을 자극한다면?
“천룡검협이 비다라를 치료하는 과정을 우리도 참관할 수 있게끔 해 주시오. 그리 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소.”
적왕유가 그리 말하니 상황을 편하게 풀어보자 했던 제갈설아도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저건 엄연히 무당 내부의 일이었으니까.
제갈설아가 입을 다물자, 적왕유는 득의한 미소를 지으며 진청을 압박했다.
“이건 적건회의 적법한 권한을 행사하는 겁니다. 진청진인, 잊지 마십시오. 40년 전, 무당을 지킨 건 적건회의 선배들이오.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진청이 반발했다.
“용납하지 않겠다? 무슨 망발이시오. 나뿐 아니라 장문인께서도 적건회의 참관은 거부할 걸세.”
그러자 적왕유의 고개가 삐딱해졌다. 그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하면 적건회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이번에 독단적으로 계획하신 일에 대해 이의를 신청할 겁니다.”
“독단적이라니! 천룡검협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건 장로회에서 끝난 일이오.”
“무당 내부의 일은 무당파가 처리하지만, 외부와 관련된 일은 적건회와 뜻을 같이 해야 하는 법이오. 이번 일은 내부 사정이라고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소?”
그때 천무백이 불쑥 끼어들었다.
“뭐 맞는 말이긴 해.”
순간 당황한 시선이 쏟아졌다. 심지어 적왕유도 여기서 천무백이 저리 끼어들 줄은 몰랐기에 황당한 얼굴이었다.
천무백이 적왕유를 쳐다봤다.
“그게 적건회가 가진 권한이라면 맞겠지.”
“…….”
“근데 조금 이상하단 말이야.”
“이상하다?”
“응. 이상해.”
천무백의 눈빛이 적왕유를 관통했다.
“보통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호하는 거잖아? 40년 전엔 적건회가 그랬지. 한데, 지금은?”
“지금은 이라니? 우리가 약하다는…….”
“적건회가 무당을 지킬 힘이 있냐고.”
“…….”
적왕유의 얼굴이 경직되어 파르르 떨렸다. 툭 불거진 눈이 타올랐다. 그런 천무백은 그를 냉담한 눈으로 가만히 응시했다.
천무백의 입술이 천천히 다시 열리는 순간, 분위기가 일변했다.
“네놈이 아느냐.”
“……!”
적왕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변했다.
방금까지가 세간에서 말하는 정의심에 가득 찬 협객, 젊은 영웅이었다면.
지금은 아니다.
산.
태산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태산이 용틀임을 하는 듯 꿈틀거렸다.
“자소궁의 벽이 왜 무너져 있는지 아느냐? 진무관의 지붕이 왜 없어졌는지, 남암궁이 왜 터만 남고 사라졌는지 아느냐?”
적왕유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저 식은땀을 흘리며 천무백을 바라봤다. 천무백 역시 적왕유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나 그의 시선이 향하는 곳은 적왕유가 아니었다.
마치, 어딘가 저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저 살고자, 아무것도 모르는 무당산 아래의 양민들이 무당에 올랐다.”
“……!”
진청진인의 눈이 흔들렸다.
그가 고작 열 살도 안 되던 아이 시절.
어머니가 다급한 얼굴로 자신을 품에 안고 무당산에 올랐다.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서 선명해졌다.
‘어찌…….’
한데 그때의 광경을, 천무백은 마치 지켜봤다는 듯이 생생하게 말했다.
“무당의 역대 조사들을 모신 성전도,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도, 그 모든 곳이 열려 도망쳐온 양민들을 받아들였다.”
자소궁, 진무관, 남앙궁…….
비단 그곳뿐이랴. 무당의 제자가 아니면, 무당의 장로가 아니면, 무당의 장문인이 아니면.
누구도 들일 수 없던 모든 장소가 일제히 열렸다.
소림이 그랬듯, 무당도 문을 열어 도망쳐 온 모든 중생을 품었다.
“무당의 모든 무인이 죽어나가, 무공을 익히지도 않은 어리거나 늙은 도인들이 도경을 내팽겨치고 칼을 잡았다. 칼이 부러지니 자소궁의 벽을 헐어 돌을 던졌고, 진무관의 지붕을 뜯어 시신을 덮었고, 남앙궁을 불태워 안에 들어온 마인들과 같이 산화했다.”
어조 없는, 아무런 감정 없는, 그러나 역설적으로 강렬한.
“무당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천무백의 묵직한 울림.
“그게 바로 무당이다.”
천무백의 맑은 눈빛이 적왕유를 응시했다.
“적건회는 무당의 정신을 지켜 준 위대한 협객들이었다.”
무당의 뜻에 반해, 무당의 의기에 반해.
무당의 정신이 마인들의 더러운 발에 짓밟히는 걸 막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진 채 올랐던 무사들.
“그래서 묻겠다.”
적왕유는 그제야 천무백의 별호를 이해했다.
천룡검협.
중생을 구제하고, 마귀를 죽이는 천룡팔부에서 따 온 그 이름.
눈앞의 존재는 천룡(天龍).
“네놈이 아름다운 정신을 간직한 적건회가 맞는지, 무당을 압박할 권한이 있는지.”
천무백이 웃었다.
“그리고.”
반쯤 뽑힌 검이 살벌한 기세를 내뿜었다.
“감히 내 행사를 방해할 자격이 있는지, 검증해 보겠다.”
* * *
묵직한 울림이 장로전을 감쌌다.
진청진인은 격동하는 심정을 간신히 가라앉혔지만 몸이 파르르 떨렸다. 문 앞을 지키던 무당의 일대제자들도 빨갛게 충혈된 눈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비단 무당뿐 아니다.
제갈설아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천무백의 얼굴을 그저 넋놓고 쳐다봤다.
오죽하면 능허마저 감격한 눈빛으로 볼까.
‘크으. 이럴 땐 진짜 천룡검협이란 별호처럼 협객이구나. 협객이야.’
능허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나 이내 그 감탄은 산산조각났다.
“능허야, 칼 꺼내.”
“네?”
“검증해 줘야지.”
“……내가요?”
“너도 검증 받아야지. 나와 함께 같은 목표를 두고 같이 가겠다고 한 거잖아?”
순간 능허는 멈칫했다.
그랬었다. 천무백처럼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혈귀곡을 잡겠다고.
같은 목표다. 그래서 능허는 천무백과 같이 왔다.
천무백은 말하고 있다.
자신과 같은 목표로 같이 걸으려면, 그만한 자격이 있는지 보여 줘야 된다고.
그 깊은 뜻을 능허는 이해했다.
‘이해는 시발.’
아니. 뭐 그런 깊은 뜻이 있겠어. 그냥 요즘 놀고먹었다고 저러는 거다. 아니면 아까 전에 조금 대거리 했다고 삐쳤겠지.
능허가 빤히 쳐다보자 천무백이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쟤랑 붙으면 급이 안 맞잖냐.”
“저보다 급수 높아 보이는데요.”
“칼은 쓰지 않으면 녹슨다. 무인도 잠들면 녹슨다.”
“거, 쓸수록 강해진단 말입니까.”
“천축에 사는 사자라는 맹수는 절벽에서 제 새끼를 밀어뜨린다더라. 그렇게 강하게 키운다고.”
“그런 미친 짐승이 있답니까. 내가 주군 자식도 아니고.”
그러자 천무백이 가슴을 쫙 폈다.
“가슴으로 키웠다.”
“푸훕!”
멍하니 대화를 듣던 제갈설아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능허는 길게 한숨을 내쉬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씨, 쉬워 보이는 놈은 아닌데.’
적왕유는 만만치 않아 보이는 사내였다.
더구나 지금 저 붉으락푸르락한 표정을 보라.
아까 전에 이어서 또 농락당했으니 오죽하랴.
“지금 뭐 하자는 거요. 나랑 싸우겠다는 뜻이오?”
“그렇게 길게 말하니까 이해를 못 했나. 쟤가 널 검증해 줄 거야. 자격이 있는지.”
“이런 씨이……!”
“어이. 형씨. 악감정은 없수. 그냥 일 이렇게 됐으니, 사내답게 딱 서로 칼침 한방 놓고, 술 한잔하고 풉시다. 그쪽 무당 도사도 아닌 거 같으니까 술 먹어도 상관없잔수.”
능허가 특유의 어조로 얘기하자 적왕유는 이제 더는 평정심을 유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불쑥 안도감이 들었다.
솔직히 말해 천무백이 나서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만일 그가 나섰다면, 적왕유는 여기서 도망쳤으리라.
그렇다고 해도, 자신을 두고 급이 안 맞으니 하는 상황에서 평정을 유지하기 쉽진 않았다. 하물며 시정잡배처럼 보이는 저 외팔이에, 애꾸에게 말이다.
“적왕유요.”
“능허외다.”
“알겠소, 적건회의 이름으로 그쪽을 검문하겠소.”
“썅. 아가리로 칼 싸우나.”
적왕유의 눈동자에 살기가 번들거렸다.
‘건방진 놈.’
아무래도 나머지 팔 하나를 잘라줘야 지금 당한 이 굴욕을 풀 수 있을 것 같았다.
적왕유가 잠시 검자루를 꼭 쥐다가, 이내 벼락처럼 발검했다.
극의에 달한 발검술이었다.
얼마나 빠른지 빛살이 쭉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능허 역시 칼을 뽑아 길게 쭉 뻗어왔다. 하지만 반응이 느렸다.
‘흥. 역시, 별거 아니군. 같이 다니는 놈도 이 모양이니, 천룡검협이란 별호도 과장된 게 틀림없겠구나!’
적왕유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천무백은 상대할 자신은 없다만, 이 굴욕을 저 외팔이에게 다 갚아 주면 될 일 아니겠는가.
“으억?”
한데 그때였다.
적왕유의 발검이 능허의 미간을 찌르려는 찰나.
쉐에에엑!
귓가에 찢어질 듯한 파공성이 맹렬하게 파고든다.
‘언제?’
자신이 내뻗은 발검보다, 능허의 검이 더 빠르게 망막에서 확장됐다.
믿을 수 없는 광경.
극에 달한 발검이 닿기 전에, 능허의 검끝이 자신의 목젖을 꿰뚫으리라.
“아……?”
이대로면 죽는다.
그 격렬한 위기감에 내뻗었던 검을 거둬들였다. 일단은, 막아야 한다.
그렇게 찔러오는 검을 후려쳐 쳐내려는 순간.
찔러오던 검이 미묘하게 비틀렸다. 비틀린 검이 뱀처럼 얽혀들며 관자놀이를 후려쳤다.
‘이 미, 미친…….’
털썩.
관자놀이에 전해지는 순간적인 충격. 적왕유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무너졌다.
눙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 뭐지. 이 새끼 왜 이렇게 약해?”
모두가 경악한 현장. 제갈설아마저 놀란 눈으로 능허를 바라보고, 천무백을 다시 봤다.
천무백이 제갈설아를 보며 웃어줬다.
“말하지 않았소. 내 가슴으로 키웠다고.”
천무백의 입에 내심 뿌듯한 미소가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