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35화 (135/318)

<검신재생 135화>

135. 내가 검증하마.

마침내 천무백 일행은 무당산에 도착했다.

쿠구궁.

이미 무용이 먼저 가서 곧 도착할 것을 알렸기에 거대한 철문은 기다렸다는 듯이 빠르게 열렸다.

들어서자 무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천무백과 능허가 관을 들고 왔으니까.

궁금증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다.

몇몇 도인들이 굳은 얼굴로 다가와 관을 보고 그 자리에서 통곡했다.

천무백은 통곡하는 도인들을 보며 관을 내려놨다.

“무당의 유수 도인입니다. 정체불명의 자객들에게 당했습니다.”

“아아…… 이 끔찍한!”

유수의 시신임이 알려지자 도인들이 모여들어 통곡하거나 합장하는 등 부산스러웠다.

관을 여기까지 들고 온 능허도 그 광경에 짜증도 다 잊고 그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첫 강호행에, 참 안됐소이다.”

능허의 말에 천무백이 다소 딱딱하게 대답했다.

“준비되지 않으면 강호에 나서서도 안 되는 일이다. 괜히 많은 문파가 기재를 강호에 내보낼 때, 사형제들과 같이 나서겠느냐.”

“맞소. 내 실수요.”

그때였다.

장년의 도인이 합장하며 걸어왔다.

머리에 쓴 태극건과 입고 있는 도복의 허리춤엔 몇 개의 수실이 더 달려 있었다.

근처에서 통곡하는 일반 도인들과는 다르다.

천무백은 그 도복에 달린 수실을 보고 맞춰 합장했다.

무당파의 장로를 의미하는 수실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청성표국의 천무백입니다.”

“반갑소, 무당의 진청이오. 그리고 그대를 무당으로 청한 사람이기도 하지. 그리고…… 제갈세가의 꽃도 함께 오셨구려.”

“강호 선배께 인사 올립니다. 제갈세가의 둘째 여식인, 제갈설아예요.”

천무백과 제갈설아를 번갈아 보는 진청의 지친 얼굴에 잠깐이나마 환한 빛이 떠올랐다.

“천룡검협과 제갈세가라……. 내가 바랐던 건 천룡검협의 도움이었거늘, 제갈세가까지 우릴 도와주러 오신 것인가?”

“당연한 일입니다. 청성표국에 머무르는 당시, 의도치 않게 유수 도인이 전한 무당의 비보를 접했습니다. 하여 실례를 무릅쓰고, 태상가주와 가주의 명을 받아 무당에 왔습니다.”

제갈설아가 짐짓 정색하며 말했다. 제 나름에는 굳은 결의를 표하는 것처럼 진지한 표정이었지만, 천무백이 보기엔 어색해서 내심 실소했다.

아마도 이런 자리에선 보통 제갈서후가 다 앞장섰기 때문이리라.

반면 진청진인은 힘이 된다는 듯 넉넉한 미소를 지었다.

“고맙소. 제갈세가와 최근 통하지 않았으나, 이토록 고마운 일이 있을 수가. 조만간 직접 제갈세가에 방문해 이 고마움을 전하겠소.”

잠깐 훈훈한 인사가 오가는 사이.

무당의 제자들이 몰려들어 유수의 관을 수습했다.

그 광경을 잠시 지켜보다 천무백이 말했다.

“이번 습격에 비다라가 동원됐습니다.”

“……비다라라니, 그게 참말이오?”

“예. 어쩐 연유인지 모르지만, 저와 여기 제갈소저를 급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유수 도인은 끝내 참변을 당하셨고요. 이번 일에는 아무래도 혈귀곡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아아…….”

진청진인은 이마를 짚었다.

이미 전대 장문인이 비다라가 된 시점에서, 무당 내부에 혈귀곡의 손길이 닿은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 와중에 무당이 청한 손님이 비다라에게 공격당하다니.

진청은 눈앞이 깜깜해졌다. 천무백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했다.

“그대들의 행적은 무당에 속속들이 알려졌소. 유수가 잠깐 머무를 때마다 전서구를 보내왔으니까.”

천무백의 예상대로였다.

하면 선택지가 좁아진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그 전서구를 확인한 이들을 먼저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후우. 알겠소.”

진청진인은 내부 사람들을 의심하고 감찰해야 한다는 사실에 고통스러운 표정이었다.

하나 유수의 죽음을 밝혀내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천무백은 굳이 자세한 사정까진 얘기하지 않았다.

‘유수를 노렸다기보단, 제갈설아를 노렸어. 다른 이들은 몰라도 제갈설아는 죽이겠단 뜻이었지.’

천무백이 비다라에 접근하는 걸 막으려면, 천무백을 노려야 한다.

죽은 건 유수였다. 유수를 노릴 이유는 없었다. 만일 천무백의 무당행을 막으려면, 청성표국에 도착하기 전 유수를 죽였으면 일은 끝나는 일이었다.

‘이유가 뭘까. 악인봉행진을 이용할 걸 저놈들이 미리 알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 기회에 제갈세가와 분란을 일으키려는 목적일까.’

그럴 확률이 높다.

제갈설아가 죽으면 제갈선과 제갈여강은 분노할 것이고, 무당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아지리라. 하물며 천무백과의 사이도 크게 틀어질 게 분명하다. 천무백이 이루려는 대(對) 혈귀곡 동맹이 삐걱거리게 되니까.

그걸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우선 의심을 접어 뒀다.

“우선 이쪽으로 오시오, 자세한 얘기를 나눠야 할 이유가 있은즉슨.”

하나 천무백은 무당의 일과는 별개로, 자객들의 배후를 확실하게 캐내려고 마음먹었다.

‘누굴 건드려?’

제갈설아는 이미 천무백의 울타리 안에 들어왔으니까.

* * *

“전대 장문인께서 자리에서 물러나신 건 3년 전 일이오.”

전대 장문인 현엽진인은 3년 전에 장문인 자리에서 물러났다.

“물러나신 뒤에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어 주셨소. 무당은 최근 과거의 근본을 되찾고자 노력 중이라오. 많은 장로와 어린 제자들이 무학에 너무 심취해 패도(悖道)를 걷고 있으니.”

“패도라…….”

진청진인이 쓰게 웃었다.

“젊은 나이의 혈기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천룡검협께선 다른 것 같소만.”

“저도 혈기왕성합니다.”

천무백이 가볍게 농을 하듯 얘기하자 옆에 있던 제갈설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 모습을 번갈아 보던 진청진인이 그나마 슬픈 기색을 덜어내며 어렴풋이 웃었다.

“역시 젊은 게 좋긴 좋구려. 하여간 장로들 사이에서도 갈등이 있소. 어느 문파나 그렇듯이. 무학에 집중하여 무파로서 강호로 나서자는 측과 무당의 도를 찾자는…….”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갈선에게 들은 내용이다.

소위 ‘도학파’와 ‘무학파’로 파벌이 갈린 무당이다.

도학파는 무당의 도를 찾아 도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파벌.

무학파는 말 그대로다.

강력한 무위를 갖춰 과거 남존무당의 이름을 되찾자는 일파다.

문제는 이 무학파가 적건회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점이다.

“적건회란 단체가 있소.”

“예.”

“무당이되 무당이 아닌 자들이오.”

“…….”

“그들의 선조는 분명 무당을 위해 평생을 바친 협객지사들이나, 지금 그들의 후인은 무당의 도를 저버린 채 무당을 무파로 만들려고 하오. 도경 하나 읊지 않고 말이오.”

천무백은 그간의 사정을 이해했다.

‘거의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무당의 어린 제자들에게, 적건회는 그야말로 영웅이었을 테니까.’

오로지 정파를 지키기 위해, 무당을 지키기 위해 연고도 없던 젊은 협객들이 무당산에 올랐다.

죽어 가면서도 무당을 지켜 냈다. 문파의 몰락을 경험하고 있던 당시의 어린 제자들은 적건회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무너지지 않으려면 강한 무위를 갖춰야 한다는 것.

그때의 어린 제자들이, 40년이 지난 지금에서는 무당의 새로운 실세가 됐다.

그게 바로 무학파다.

“무학파에 속하는 장로들은 그래도 이해할 수 있소. 방향성은 다르나 그들은 무당을 위하는 행동이니까. 무당의 도를 저버리진 않소. 하지만, 적건회는 다르오.”

진청진인의 얼굴에 일순 분노가 비쳤다.

“적건회를 창설한 선배들은 존경받아 마땅하오. 아무것도 원하지 않고, 오로지 협과 의를 위해, 정의와 무당을 위해 죽어 갔으니까. 하나 지금의 적건회는 그렇지 않소. 무당이 아니면서도 무당으로 살려고 하오. 무당이 해야 할 의무를 행하지 아니하면서, 무당을 차지하려고 하오.”

천무백은 진청진인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들었다.

한참이나 적건회에 대한 속사정을 토로하며 거침없이 질타했다.

‘알 만하군.’

제갈선에게 무당의 세력 구도를 듣긴 했으나, 진청진인에게 들으니 그 갈등이 생각보다 더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소위 도학파의 수장이라고 볼 수 있는 진청진인이 저리 말하는 이유도.

“장로님께선, 적건회가 배후라고 의심하시는군요.”

“…….”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맞소. 전대 장문인은 일부러 장문인 자리를 도학파에게 넘겨주고 물러나셨소. 그리고 뒤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시며, 우리에게 힘을 실어 줬지. 그렇지 않았다면 무당은 폭주했을 것이오.”

천무백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그렇게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까.

더구나 유수의 관이 도착할 때, 몰려든 무인들 중엔 적건회의 무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기름과 물 같은 관계.

한 지붕 아래서 무당을 위해 살면서, 완전히 방향을 달리하는 두 집단이라니.

당연히 갈등은 생기고, 충돌이 심해지다 보면 극단적인 선택이 나올 수 있으리라.

“우선, 비다라가 된 전대 장문인을 보고 싶습니다.”

“후우. 알겠소. 지금 갑시다.”

그때였다.

“지금 장로께선 손님과 대화 중입니다!”

“비켜라! 나도 그 손님을 좀 봐야겠다!”

“여기가 어디라고! 여긴 장로전입니다!”

밖이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이냐!”

진청진인이 공력을 실어 그리 소리쳤다.

그러자 소란이 잠깐 가라앉더니, 이내 고함이 들려왔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소이까, 외부인에게 본 무당의 치부를 보여주자니! 적건회 사람들은 전대 장문인의 얼굴도 보지 못하게 두면서, 외부인에게 공개하겠다니!”

적건회.

진청진인의 얼굴이 차가워졌다.

* * *

무당의 장로전.

장로들이 머무르는 개인 공간이다.

그런 곳에서 고함을 치는 불청객이 있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한데 그 범주를 벗어나는 자가 있다.

도를 찾는 무당에서 오로지 힘만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칼 든 멍청이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비켜라!”

그 목소리를 들은 진청진인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얼굴엔 부끄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천무백과 제갈설아가 보는 앞에서 무당의 위신이 떨어진 모습을 보여 줘야 한다니.

하나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무슨 일이오, 적공(公).”

문이 발칵 열렸다. 한 명이 아니었다. 사람은 넷. 그들도 도복을 갖춰 입었으나, 행색이 묘했다. 머리엔 태극건 대신 붉은 띠를 둘렀다.

적건(赤巾).

네 명의 정체는 다름 아닌 적건회였다.

그들이 아니고서야 장로전에 함부로 들어오는 무례를 범할 자가 누가 있겠는가.

“손님을 대하는 중이오, 할 말이 있으면 추후에 다시 찾아오시오.”

진청진인이 차분하게 대했다.

그러나 네 명 중 가장 앞에 있던 우락부락한 사내, 적왕유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한 일이군요. 40년 전 무당이 멸문 직전에 이를 때, 무당의 보물을 노리는 숱한 악적들이 있었지요.”

“…….”

적왕유가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으르렁거리는 듯이, 묘하게 협박조가 섞인 어조였다.

“하여 적건회가 목숨을 바쳐 무당의 문을 지켰지요. 들어오는 외부인들은 모두 적건회가 검문하면서, 그 과정에서 적건회의 선배들이 악적들의 손에 죽어 나갔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진청진인의 얼굴에 굴욕감이 솟아올랐다.

그는 장로다.

반면 적건회의 적왕유와 기타 무인들은 무당 내에서 아무런 직급도 없다. 단지 무당파 안에 있는 적건회의 무사일 뿐이다.

“어째서 저자는 적건회의 검문을 거치지 않고 들어온 것이오.”

“……!”

진청진인의 얼굴이 거무죽죽해졌다.

이 엄청난 굴욕감에 그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자신이 직접 청한 손님이다. 무당의 장로가 직첩 초대한 사람이다. 한데 그걸 의심하고, 자기들이 검문을 하지 않았다고 역설하는 꼴이라니.

무당 장로의 권위를 완전히 무시하는 짓이 아닌가.

당장이라도 요절을 내고 싶었지만, 도학파의 장로인 그는 무공이 저들에게 닿지 못한다.

그런 진청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적왕유가 고개를 돌렸다.

“천룡검협이란 명성은 필요 없소. 무당에 들어오는 자, 그 자격을 검문해야 할지니!”

“잠깐만요, 그럼 저는요?”

천무백은 가만히 상황을 주시했으나, 제갈설아의 뾰족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소저는……?”

“제갈세가의 제갈설아라고 해요. 좋아요, 저도 검문해 보실 생각이신가요?”

“……!”

적왕유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는 이내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제갈세가의 여식이라면 당연히 환영하는 바요. 하나 천룡검협에 대한 얘기는 다르지. 강호에 떠도는 소문은 다 믿을 게 못 되니까, 우리가 검문해야겠소.”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고 빤히 쳐다봤다.

제갈설아가 자신이 공인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덧붙였지만, 적왕유는 거부했다.

“따라오시오. 몸에 찬 병장기는 모두 반납하고, 적당히 검문 후에 들여보내 주겠소.”

그 안하무인적인 태도에 진청진인이 끝내 참지 못하고 나서려는 찰나.

천무백의 나른한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그쪽이 날 검문할 자격이 있나 모르겠네.”

“……뭐요?”

천무백이 싱긋 웃었다.

“그쪽이 자격이 있는지, 내가 검증해 주마.”

철컥.

검이 새하얀 광채를 머금으며 뽑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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