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34화 (134/318)

<검신재생 134화>

134. 큰 행운이오.

천무백은 유수의 이마에 남은 상흔을 살폈다.

손가락 한마디만 한 구멍이 뻥 뚫렸다.

“한 방에 당했군.”

그 외에 상처는 없다.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얘 적어도 일류무사입니다. 근데 한 방에 당했다고요?”

이해가 가지 않는 목소리.

하나 그의 말을 설명해 준 건 천무백이 아니라 제갈설아였다.

“다른 상처는 보이지 않아요. 부지불식간에 당한 기습에 절명했어요. 상대가 도저히 항거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기 보단…….”

“그냥 이 친구가 너무 경계를 풀었던 거다.”

천무백은 단언했다.

천무백의 초감각엔 수도 없이 자객들의 움직임이 잡혔다.

한데 그중에서도 천무백이 제갈설아에게 온 이유가 무엇인가.

‘가장 위험한 놈은 저 비다라였다.’

저 비다라가 자객 중에 가장 강했다.

반면 다른 이들에게 향한 자객들의 수준은 그렇게까지 썩 높지 않았다.

물론 천무백의 기준이긴 했다.

무용이나 능허가 상처 하나 안 입은 걸 보면 알만했다.

반면 제갈설아는 천무백이 오지 않았다면 죽었으리라.

유수에게 간 자객도 천무백의 감각에선 특별하지 않았다.

저건 오로지 방심해서다.

“저 친구, 강호행이 처음이었다고 했지.”

“으음.”

많은 기재가 풍운의 꿈을 안고 강호에 나선다.

그중에서 제법 실력을 갈고닦은 이들도, 산적이나 수적들에게 객사하는 게 빈번하다. 그게 강호였다. 아무리 실력을 갖춰도 강호경험이 미천하면, 그리고 옆에서 이끌어 주는 선배가 없다면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하곤 한다.

지금의 유수가 그랬다.

무공은 제법 갈고 닦았고, 도경을 읽으며 도도 많이 닦았지만 순진했다.

“일이 복잡하게 됐군.”

천무백은 미간을 좁혔다.

‘감이 잡히질 않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여기서 자객이 올 이유가 무엇이 있는가.

비다라가 왔으니 혈귀곡의 습격이다.

한데 지금껏 조용히 있다가 무당 근처에 와서야 습격을 감행한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다.

만일 천무백을 죽이고자 했으면, 이미 그가 어떤 사람인지 겪은 이들이 고작 이런 허섭한 자객들을 보낼까.

하물며 진짜 목적은 제갈설아였다. 한데 또 죽은 건 유수였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마치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을 초래하려고 했던 것처럼.

천무백은 고개를 돌려 무용을 바라봤다.

“각자 할 일은 정확히 합시다. 그쪽은 소저의 호위를 맡았소. 어쭙잖게 내공을 숨기는 짓하면서 눈치나 슬슬 보지 말란 말이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공자.”

천무백의 냉혹한 말에 무용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평소 보기 힘들었던 차가운 모습이었다. 언뜻 보면 분노를 표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릿발 같은 호통이었다. 당황한 건 무용뿐 아니라 능허와 제갈설아도 마찬가지였다.

무용은 입술을 깨물고 포권을 취했다.

“천세섬도 무용이 사과드립니다. 아가씨의 호위에 만전을 기하겠습니다.”

천무백이 무용을 질타한 이유는 분명했다.

“자칫하면 소저가 죽을 뻔 했소.”

싸늘한 목소리에 무용이 흠칫 떨었다.

만일 천무백에게도 여기에 온 비다라만큼의 자객이 향했다면, 처리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더 걸렸을 터.

그 시간이라면 제갈설아가 당하고도 남았을 지경이다.

제갈설아가 여기서 죽어 버린다면, 천무백이 계획한 모든 내용이 흩뜨려진다.

제갈세가와 무당파의 연합, 무당파의 의뢰를 해결하는 일까지. 하물며 자신도 제갈세가와 관계가 험악해질 게 분명했다.

그런 와중에 호위무사란 놈이, 청성표국에서처럼 제 무공을 숨기고 자신을 관찰하기나 하고 있으니.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만.’

천무백이란 인물에 대한 호기심도 있거니와, 제갈세가 입장에선 천무백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려는 노력을 계속 하는 것이다.

천무백에 대한 일종의 감시역이기도 했다.

하니 천무백은 이번 기회에 그걸 걷어냈다.

자신을 염탐하는데 신경 쓰지 말고 업무인 호위나 똑바로 하라고.

이로써 천무백은 귀찮게 달라붙던 시선을 떼어냈다.

한참 후배인 천무백의 질타에도 무용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천무백은 두 번이나 제갈설아를 구명했으니까. 더구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세다.’

숨이 턱 막히는 기세.

극음지기를 갖춰서 그럴까. 심장 한쪽이 싸늘해지는 목소리. 깊게 가라앉은 눈빛은, 마치 그가 주군처럼 따르는 제갈선이 분노했을 때의 침중한 눈빛과 유사했다.

그런 눈빛이 무엇인지 안다.

‘절대자!’

어느 한 경지에 접어든 절대자의 눈빛.

무용은 잠깐이나마 그 눈빛을 봤다. 그랬기에 아무 말도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갑작스러운 습격.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하나 천무백은 분위기에 휩싸이지 않았다.

여기서 궁리해도 답이 나오지 않으면, 답을 찾으려 이동하면 그만이다.

“내일 오전에 곧장 무당으로 가지.”

* * *

“어제 일은 정말로, 진짜로 고마웠어요. 매번 신세만 지네요.”

제갈설아는 아침에 출발 준비를 마치자마자 잘 갠 녹의장포를 건네며 말했다.

천무백의 눈을 똑똑히 쳐다보지 못하는 게, 어쩐지 미안한 기색과 고마움이 섞였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검왕곡에서부터 벌써 두 번째로, 천무백에게 도움을 받은 상황이다.

그것도 목숨을 구명 받았다.

제갈설아로서는 고맙기도 하면서, 폐를 끼친 거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천무백은 멀뚱히 녹의장포를 받아들였다.

녹의장포에선 은은한 향이 배어 있었다. 천무백은 그간 생긴 얼룩 하나 없이 깨끗한 모습에 못 말리겠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이걸 밤새 빤 거요?”

“그…… 네에.”

“굳이 그럴 필요 없을 텐데, 하여튼 고맙소.”

“아니에요.”

녹의장포 얘기를 하니, 어제 일이 떠올랐는지 제갈설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원체 피부가 하얘서 그런지, 조금만 빨개져도 그 티가 확 났다.

그걸 감추기 위해 제갈설아는 급히 말을 덧붙였다.

“여하튼, 구해 주셔서 정말로 고마워요.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다니, 그저 민망할 따름이네요.”

“그야 당연한 일 아니오.”

“당연한 일이요?”

“같이 무당까지 가기로 하지 않았소. 그리고 거기서 소저의 도움이 필요해요.”

“그, 어떤 도움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갈설아는 약간의 의문이 떠올랐다.

‘강해. 정말로.’

검왕곡에서부터 느꼈지만 천무백은 강했다. 가끔 자신보다 두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하물며 머리 또한 똑똑했다.

상황을 두고 분석하는 능력이나 수가기문도에서 보여 준 압도적인 직관력. 어떤 일이 벌어지든 흔들림도 없는 철심(鐵心). 거기에 대화를 나눠보면 놀랄 수밖에 없는 그 방대한 지식이란.

이런 사람에게 자신이 도움이 될까 싶은 염려가 불쑥 생겼다. 실제로 천무백은 홀로 모든 일을 다 해낼 것만 같았으니까.

천무백은 잠깐 생각하는 듯 뜸을 들이다 말했다.

“소저와 연을 맺은 건 어쩌면 나에게 큰 행운이오.”

“……!”

갑작스러운 발언에 제갈설아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나 천무백의 표정은 진지했다.

실제로 천무백은 그리 생각했다.

‘그저 제갈서후의 의뢰를 수행한 거라고 여겼지만…….’

가만 생각해 보면 그로 천무백이 얻은 게 어디 한둘이던가.

아직은 말썽쟁이지만 하단전의 극음지기는 천무백의 진일보에 바탕이 되어 줄 것이다.

표국에 설치된 수가기문도는, 청성표국을 굳게 지켜 주리라.

제갈설아의 목숨을 구명해 준 은인이란 수식은 제갈세가에서도 뜻밖의 도움이 됐다.

‘제갈선이 나에게 그만큼 많은 걸 베푼 이유도, 창천검신의 후인인 점을 고려한 것도 있지만, 그래도 제갈설아를 구해 준 것도 크겠지.’

손녀를 끔찍이 여긴다는 소문이 강호에 자자했으니까.

사람이라면 기본적인 호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제갈세가 태상가주의 호의는 그만큼 중요했다.

천무백은 비단 철신고검과 검존의 행방뿐 아니라, 무당에 관한 일로 몇 가지 조언을 해 줬다.

‘무당파에 가까운 제갈세가였기에 파악하고 있는 정보였으니.’

덕택에 천무백은 머릿속에 충분한 계획을 심사숙고해서 세운 뒤 움직였다.

만일 미리 알지 못했다면, 천무백도 무당에 가서도 상황을 알아보는 데 상당한 시간을 소비했으리라.

“이번 일은 소저가 필요하오. 그러니 행운이겠지. 소저가 내 뜻을 따라 같이 가 준다니까.”

“그, 그게, 제, 제가 먼저 따라간다고 한 건데.”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소?”

천무백이 쾌활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얘기를 해 줘야겠군. 혹시 적건회(赤巾會)를 아시오?”

제갈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마대전 때, 무당을 지탱하기 위해 강호 협객들이 만든 단체 아닌가요?”

“맞소.”

“잘 알고 있죠. 소림처럼 봉문을 앞두고 있었는데, 그들의 도움으로 무당이 꿋꿋이 살아남았으니까요.”

“한데 적건회는 아직도 해체하지 않고 무당 안에 있다고 하더구려?”

천무백의 말에 제갈설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천무백은 제갈선에게 적건회란 이름을 들었을 때 황당한 감정이 먼저 들었다.

왜냐면 적건회는 제자인 검존이 만든 단체였으니까.

소림처럼 무당도 괴멸적인 피해를 보아 봉문을 앞두고 있었는데, 당시 내로라하는 협객들이 적건회란 단체를 만들어 무당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무당을 지켰다. 역사와 무공, 보물들까지.

그 덕택에 무당은 소림처럼 봉문하지 않고도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적건회의 목적은 무당의 멸문 또는 봉문을 막는 거였소. 지금에 이르러 무당은 부활해 과거의 성세를 회복하고 있고. 하면, 적건회는 이제 필요가 없는 단체지 않소?”

“그렇긴 하죠. 하지만…… 잠깐만요. 이번 일에 적건회가 관련되어 있다는 건가요?”

“무당파에 있어 외부인이되, 외부인이 아닌 존재들이 적건회요.”

천무백은 그 적건회가 아직도 무당 안에 남아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애당초 목적을 이루면 해산되어야 할 단체니까.

한데 40년이 지나도 무당 내에서 단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건…….

“설마, 전대 장문인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게…….”

“가능성일 뿐이오.”

천무백은 일축했지만, 제갈설아는 이미 천무백이 그리 확신한다는 걸 눈치챘다.

순간 그녀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혈귀곡의 입김이 적건회에 닿았고, 그들이 그렇게 움직였을 수도 있다는 뜻이겠네요?”

“그렇소.”

“맙소사…….”

40년 전의 적건회는 의기에 가득 찬 젊은 협객들로 이뤄진 단체였지만.

현재는 본래 목적을 상실한 단체가 됐다.

하면 사람들의 성정도 과거와는 다르겠지.

제갈선 역시 적건회가 무당의 행사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 무당과 손을 잡기는 어렵다고 말했을 정도니까.

“하면 답은 하나네요.”

한참 궁리하던 제갈설아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비다라가 된 전대장문인을, 반드시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

“맞소.”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당초 무당의 의뢰가 그러했다. 어떤 상황인지 알려면 전대장문인을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이다.

문제는 방법이 없다는 거다.

선근경의 선기로도 제어하는 것에 그칠 뿐이니까.

한데 제갈선과 대화를 나누며 무언가 퍼뜩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악인봉행진(惡人封行陳)”

“……!”

뜻밖의 단어가 천무백의 입에서 튀어나오자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뭐에요? 수가기문도도 그렇고, 악인봉행진은 어떻게 알아요? 세가에서도 세가 직계만 아는 건데?”

천무백은 대답 대신 웃었다.

그러자 제갈설아는 알겠다는 듯이 감탄을 터뜨렸다.

“할아버지가, 말씀해 주신거죠? 그쵸?”

천무백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제갈선과 비다라를 해결할 진법이 있을지 대화하다가 제갈선이 악인봉행진을 기가 막히게 잘 써먹던 걸 떠올렸을 뿐이다.

하나 제갈설아는 제갈선이 일러 줬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세상 모든 악적이 진법 내에서 스스로 힘을 다 쓰게 만들고 소모시켜 무너지게 만드는 악인봉행진. 아마 할아버지 다음으로 제가 가장 잘 다룰 거예요. 직접 대상을 두고 써 본 적은 없긴 한데…….”

됐다.

어차피 그대로 써 먹을 생각은 없으니까.

“그게 필요하오.”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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