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33화 (133/318)

<검신재생 133화>

133. 음모가 판을 치고

천무백은 잠깐 고민했다.

‘모두가 헤이해질 때 기습이라니.’

능허는 잠들었고, 제갈설아의 호위무사인 무용은 그간 소모된 내공을 다스리기 위해 운기행공중이다. 제갈설아 역시 자신처럼 씻고 있었고.

한마디로 모든 경계심이 풀릴 때.

가장 위험한 순간에 상대는 기습해 왔다.

이게 가능할까?

‘지금까지 우리를 쫓아오면서 감시했단 얘기지.’

천무백은 단호하게 부정했다.

자신의 감각에 적의 기척은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다.

‘하면 이 행적을 누군가 알리고 있다는 얘기인데.’

워낙 빠르게 움직이고 있어 일행 중 누군가 자리를 비우면 눈치를 못 챌 리가 없었다.

하나 딱 한명.

천무백의 행적을 대놓고 알리는 사람이 있었다.

‘유수.’

천무백의 감각이 다시 한번 확장됐다.

자신의 자리에 앉아 도경을 읽고 있는 유수의 어렴풋한 목소리는 그저 차분하고 태연했다.

‘유수가 중간 중간, 무당에 가고 있다고 연락을 보내긴 했지.’

천무백의 행적을 노출한 건 그것밖에 없다.

‘하면 무당에게 보낸 게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게 보냈다는 의미인가.’

천무백은 눈을 감았다. 빙백신공을 운용하면서 뜨거운 물이 식고, 다시 점소이가 들어와 물을 끓이기를 수어 번 반복한 결과.

뿌연 수증기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 너머.

문이 아주 조심스럽게 열렸다.

“드디어 이번 삶에서도 자객이 나타나는구나.”

천무백의 목소리는 일견 지루한 일을 겪는 사람처럼 태연자약했다.

불쑥 들어온 자객 셋의 몸이 움찔했다.

이내 그들은 발가벗은 채 욕조 안에 있는 천무백을 보고 눈을 번뜩였다.

무방비 상태다.

무기는커녕, 옷을 벗은 상태이니 당장 손에 잡을 무기도 없다.

기껏해야 몸을 닦을 때 쓰는 석감 정도.

그 사실에 자객들은 곧장 벼락처럼 쇄도했다.

채채채챙!

‘날카롭군.’

셋 모두 내지르는 검격이 날카롭다. 오랫동안 수련을 거듭해 온 증거다. 하지만 특별하진 않다. 단지 그것뿐이다.

천무백의 본능이 경고를 하고, 위기를 느낄 정도는 아니다.

천무백은 나신의 상태로 벌떡 일어났다.

동시에 욕탕에 담긴 물이 철렁이면서 수십, 수백 방울이 허공에 튀었다.

자객들이 내지르는 검 위로 물방울들이 살포시 가라앉았다.

웅웅웅!

천무백은 상단전이 아닌 하단전을 개방했다. 지금까지 억눌러왔던 극음지기가 머리를 치켜들고 거세게 솟구쳤다.

동시에 기경팔맥으로 질주하며 천무백의 주위로 한기를 내뿜었다.

쩌저저적!

“……!”

지독한 극음지기가 닿자 뿌연 수증기들이 순시간에서 얼어붙었다.

만년월단의 정수가 그대로 녹아있는 극음지기는 북해빙궁의 빙정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극한의 한기를 몰고 왔다.

주위에 있던 모든 수분이란 수분이 얼어붙었다.

“이이익!”

복면 위로 드러난 자객들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부릅떠졌다.

이곳에 들어선 순간.

자객들의 전신에는 수증기가 그대로 묻었다.

내지르던 검에 얼음의 무게가 더해지니 검로는 무거워졌고, 느려졌다. 내지른 자세 모두가 얼어붙은 듯 움찔거렸으니, 그들의 공격은 맥없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반면 천무백은 자유로웠다.

모두가 피부 위에 가라앉은 얼음으로 몸이 굳었을 때, 천무백이 오른발을 차올리며 정면에 있던 자객의 턱을 가격했다.

빠각!

이어 뒤에서 움찔하던 자객의 손목을 손날로 내려찍었다.

동시에 왼손을 쭉 뻗어 손끝에서 탄지공을 쏘아 보냈다.

순식간에 천무백의 공격이 놈들의 전신을 두드렸다.

“커헉!”

한 놈은 제법 오래 버텼지만, 그것도 찰나에 불과했다.

천무백이 이어 내뻗은 주먹은 내가중수법의 묘리를 담았다.

“……!”

자객의 눈이 급격하게 생기를 잃었다.

살가죽 너머 극음지기가 쏟아져 내장과 심장을 그대로 얼려버렸다.

“이것도 빙공인가.”

천무백은 조금 멋쩍게 자객들의 시신을 내려 봤다.

“나쁘진 않아.”

피를 흘리지 않고 그대로 얼어붙게 했으니 깔끔했다.

천무백은 차차 괜찮은 빙공을 수련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대충 바지만 입고 그 위에는 녹의장포를 걸치고 복도로 나섰다.

이미 확장된 초감각엔 수많은 움직임이 잡혔다.

“능허는 온갖 쌍욕을 쏟아 내며 싸우고 있고, 무용이란 무사도 싸우는 중이고…… 유수 이 녀석은 움직임이 아예 없는데…….”

천무백의 감각은 이내 정지됐다.

“목적은 제갈설아였나?”

제갈설아가 있는 욕탕.

그곳에서 강렬한 기파가 터져 나왔다.

* * *

제갈설아는 오랜만에 목욕을 즐겼다.

사실 그간 천무백 앞에서 말도 제대로 못 하고, 고개도 제대로 못 들었던 이유가 뭔가.

‘검왕곡에서는 하도 정신이 없어서 그랬지만, 또 꼬질꼬질한 모습을 어떻게 보여 줘!’

처음엔 청성표국과 제갈세가에서 보여 준 모습을 어떻게든 유지하려 노력했다.

하나 강호행이 어디 그리 쉽겠는가.

중원은 넓고, 하루에도 몇십 리를 단숨에 주파하니 풍찬노숙은 당연한 일이다.

화장은커녕 제대로 씻지도 못해 지저분하고, 입 냄새도 나는 것 같아 천무백에게 말도 걸지 않았다.

다행히도 천무백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다가오지 않았다.

길지 않은 여정 중에 제갈설아는 내심 잘 감췄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래도 아예 관심 없는 건 좀 그런데.’

아버지 앞에선 그런 뜬금없는 고백까지 해놓곤.

제갈설아는 순간 달아오르는 얼굴을 뜨거운 물 아래로 감췄다.

‘진짜. 이건 여행도 아니고 뭐야.’

물론 자신이 말도 못 걸게 입을 다문 것이었지만, 제갈설아는 뾰로통해졌다.

물에 쏙 들어가 눈만 수면 위로 드러내 데구르르 굴리던 그녀는 순감 멈칫했다.

이내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기척…….’

밖에서 느껴지는 기척.

‘뭐지?’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어느 순간부터 느껴지는 묘한 정적. 그 사이에서 전해지는 미세한 살기를 느꼈다. 제갈설아가 입술을 깨물었다. 몸에 병장기라도 차고 있으면 모를까. 지금은 무방비 상태다.

‘일단은, 시간을 끌며 버텨야……’

소란이 나면 호위무사인 천세섬도, 무용이 달려오리라.

절정에서도 최상에 도달한 지 오래된 고수였으니까.

어차피 손에 무기도 없으니 자객의 목을 벨 수는 없다. 답은 시간을 끌며 버티는 것이다.

그런 면에 있어서 제갈설아는 유능하다. 진법과 기관에 밝다는 건, 주위의 지형을 완벽하게 파악하고, 그중에서도 사물을 사용하는 방법에 능하다.

덜컥.

문이 열리는 순간, 주위에 빼놓았던 비녀에 내공을 담아 쏘아 보냈다.

“끄억!”

맨 처음 잠입한 자객의 목에서부터 선명한 핏줄기가 솟구쳤다.

촤르르륵!

이어 욕조의 판자를 뜯어내 기습적으로 휘둘렀다.

하나 두 명의 자객 중 하나는 평범하지 않았다.

“……!”

내공을 담은 판자다. 강도는 웬만한 도검을 뛰어넘는다. 한데 그걸 머리로 정확히 맞았는데도, 상대는 단 조금도 타격을 입은 듯한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커다란 손아귀를 쭉 뻗어 제갈설아의 가늘고 새하얀 목줄기를 움켜쥐려 했다.

“으읏!”

제갈설아는 간신히 빠져나왔다.

하나 얼굴이 암울하게 굳어졌다.

목이 잡혔다면, 아마 그대로 부러졌으리라.

‘격차가 분명해!’

제 병장기를 다 갖추고도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이 서지 않는 상대.

하물며 지금은 병장기, 분위기, 모든 상황에서의 우위마저 내준 상태다.

‘천세섬도가 오기 전까지 버틸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자신을 습격한 자객만 두 명이다.

자객이 다른 사람에게도 향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들이 당하리라 생각되진 않지만, 처리하는 데 시간이 걸릴 터.

결국, 제갈설아 혼자서 이겨 내야 했다.

그리 굳게 마음먹는 순간, 자객의 손이 쭉 늘어났다.

그게 얼마나 빠르던지 마치 손이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제갈설아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이번만큼은 피할 수 없으리라 직감한 그녀는 오히려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차라리 뻗어온 손을 꺾어 버리겠단 의도.

그러나 이때, 손목을 꺾고자 내뻗은 팔이 무안하게 허공을 갈랐다.

목표가 사라졌다.

서걱!

“……!”

수증기가 가득 차 제대로 분간이 되지 않았으나, 새빨간 선혈이 솟구치는 이유는 알았다.

자객의 손목이 잘려서 뚝 떨어졌다.

이어 수증기 사이로 얼음이 번지더니 핏물이 흘러나오던 손목이 꽁꽁 얼었다.

“피 흘리면 치우는 게 얼마나 힘든데.”

천무백이었다.

그 목소리가 귀에 꽂히고서야, 제갈설아는 주위가 얼어붙는 광경과 달리 따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 * *

제갈설아에게 온 자객은 강했다.

천무백이 상대한 셋이 동시에 덤벼도 이놈을 이겨 내지 못하리라 여길 정도다.

하나 애당초 그 셋은 천무백의 털끝 하나 스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즉슨, 이놈도 천무백에게 큰 위협이 되지 않는다.

검에 담긴 냉기가 한번 흩뿌려질 때마다 자객은 움찔거렸다.

지금 그에게 있어 최악의 환경이리라.

욕탕에 가득 찬 수증기.

그 수증기를 단숨에 얼려버리는 극음지기.

이곳에 들어선 순간부터 온몸에 수증기가 묻어났으니, 제아무리 고수라도 온몸이 얼어붙는 환경에서는 수도 쓸 수 없었다.

‘빙공의 효능도 대단하군. 수련을 더 해봐야겠어.’

그런 모습에 천무백은 결심을 더욱 확고히 했다.

선기를 더 활용하여 두 가지 기운을 동시에 사용하는 것.

그것은 천무백을 분명 새로운 길로 인도하리라.

“이이익!”

온몸이 얼어붙자 자객은 벌게진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그 지독한 광경에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미 싸움의 승세는 끝났다. 하면 도주하거나, 아니면 정체를 감추기 위해 자결하는 게 일반적인 자객의 행동일 터.

한데 자객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천무백과 제갈설아를 죽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 눈을 들여다본 천무백이 미간을 좁혔다.

“비다라군.”

천무백은 망설임 없이 목을 끊어냈다.

천무백은 고개를 돌렸다.

제갈설아가 보였다. 천무백이 내뿜는 극음지기 때문인지, 그녀는 추위에 떨며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었다. 천무백은 아차하며 기운을 거둬들였다.

“괜찮소?”

“네? 네. 고, 고마워요. 공자님.”

그러다 제갈설아가 천무백의 모습을 훑었다.

녹의장포를 걸치고 있지만, 맨발에 풀어헤친 채 어깨와 얼굴에 달라붙은 젖은 머리.

“씻다가…… 오신 건가요?”

“그렇소. 이쪽에 아찔한 기파가 느껴져서 달려왔는데, 늦지 않은 것 같구려.”

제갈설아는 차분한 목소리에 적잖이 안심됐다. 잠깐이나마 두려웠던 마음이 가셨다. 오히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자신을 걱정해 곧장 달려왔다는 것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러다가 문득 그녀의 동공이 확 커졌다.

막 씻고 온 천무백.

그리고 그녀 본인도…….

“흠. 일단 날이 추우니 이 녹포라도 걸치고 계시오.”

“히익……!”

새하얀 나신을 그대로 덮어 주는 천무백의 녹의장포에, 제갈설아는 순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그대로 장포 안으로 쏙 감췄다.

“아가씨! 괜찮습니까!”

그때 뒤늦게나마 무용이 도착했다.

무용은 온몸에 피칠을 한 채 흉흉한 기세로 나타났다.

하나 이내 바닥에 널브러진 자객의 시체를 보고 움찔 멈췄다.

그런 그에게 천무백의 다소 차가운 목소리가 꽂혔다.

“호위를 맡았으면, 똑바로 하시오.”

“……송구합니다.”

“당신이 나에 대해 염탐하라는 명을 받은 건 충분히 이해하나, 본업을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소? 어쭙잖게 기세를 숨겨서 무공을 숨기지 말고.”

“……!”

무용의 동공이 흔들렸다.

예상 못 한 강한 질타에 당황한건 무용만 아니라 제갈설아도 마찬가지였다.

하나 천무백은 그들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때마침 능허가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달려왔다.

“주군!”

“멀쩡하구나.”

“멀쩡하긴, 내 뒈지는 줄 알았소. 그리고 이 자식은 진짜 뒈져버렸고.”

“…….”

능허가 등에 업고 온 건 유수였다.

미간에 구멍이 뚫린, 유수의 시신.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음모가 판을 치는구나.”

강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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