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2화>
132. 고놈 잡아라.
“……그게 무슨 말이오.”
제갈여강은 겨우 말문을 열었다.
워낙 충격적인 말이었는지 표정이 가관이었다.
하나 천무백은 태연했다.
“말 그대로입니다. 이번 무당행에는 반드시 제갈 소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반드시?”
사람은 본래 어떤 일을 하든 확신을 표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세상사가 어찌 될 줄 알고, 확신한단 말인가.
천무백은 담백하면서도 단호했다. 그 모습에 제갈여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무슨 이유이길래?”
“태상가주께 조언을 들었고, 조언대로 하려면 진법과 기관에 능한 이가 필요합니다.”
“제갈씨를 가지고 있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능하오. 서후 녀석도 기관에 해박한 편이오.”
천무백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능한 수준이 아니라, 타의 추종을 불허해야 합니다.”
제갈여강은 입을 다물었다. 침묵한 채 천무백의 눈을 바라봤다.
천무백은 그런 제갈여강을 보고 허락하리라 여겼다.
‘태상가주의 조언이라 언급했으니.’
실제로 천무백이 제갈설아를 굳이 데려가려는 이유가 제갈선과 만남 때문이다.
제갈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몇 가지 조언을 건넸는데, 그중 하나는 천무백이 생각하기에도 써 먹음직하다 싶었다.
“……진짜 그런 이유요?”
무언가 미심쩍은 기색으로 천무백과 제갈설아를 번갈아보는 눈빛.
“네. 그런 이유입니다. 수가기문도 설치에 관해 여러 얘기를 논의하면서, 제갈 소저의 유능함을 확인했으니, 반드시 도움이 필요합니다.”
“으음…….”
왠지 모르게 날선 눈빛이 천무백에 닿았지만, 천무백은 담담했다.
“후우. 알겠소.”
“……이런 도둑놈 새끼.”
천무백과 제갈설아가 나가고, 집무실에 남은 제갈여강은 인상을 와락 일그러뜨리며 벌컥 화를 냈다.
“내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이 자식이, 귀한 딸내미를 어딜 그따위로 채 가려고!”
제갈여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장이라도 욕을 하며 쫓아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자리에서 당장 불호령을 내리지 못했다. 상대가 제갈설아를 구해준 은인이란 점 때문에? 강호에 떠들썩한 천룡검협이란 별호 때문에?
전혀 아니다.
‘그 자식 눈…….’
어떤 반론도 허용치 않겠다는 단호함이 어린 눈.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기세에 잡아먹힌 게 아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하는 것 같았다.’
세상에 절대적인 정의란 있는가.
똑똑한 사람은 다소 세상을 삐딱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
제갈여강도 그런 부류였다.
절대적인 정의가 성립되지 않으리라 여겼다.
한데 천무백의 눈이 말하는 듯했다.
마치 신성한 천명을 받은 사람처럼,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어떤 흔들림도 없는 묵직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행하는 일엔 추호도 틀린 게 아니며, 당연한 정의라고 강력하게 역설하는 듯했다.
제갈여강은 거기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 무슨…….”
이미 정신을 차린 뒤에는 제갈설아를 무당으로 보내기로 허락한 상황이었으니, 한번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더 억울한 건, 그 상황에서 얼굴이 홍당무가 된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던 딸아이의 모습이었다.
언제 그렇게 부끄러워하던 모습을 봤던가.
사십 줄을 넘어선 제갈여강은 그게 어떤 감정의 발현인지 단번에 알아챘다.
“이 얼굴만 반반한 도둑놈 자식이, 대체 검왕곡에서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어쩐지. 제갈설아가 수가기문도를 직접 설치하겠다고 직접 가겠다고 하도 고집을 부리더니.
제갈여강은 가슴이 막힌 듯 꽉 답답해졌다.
“왜 그래요, 듬직한 청년 같던데.”
제갈여강은 옆에서 차를 내려 주는 마부인의 차분한 목소리에 평소와는 달리 화가 솟구쳤다.
“그게 무슨 말이오! 듬직하긴! 새하얀 얼굴을 보니 의뭉스러운 구석이 어디 한두 군데가 아닌데? 내가 보기엔 그놈 속은 능구렁이가 수십 마리는 있소. 아니지, 아예 노괴가 떡하니 자리 잡고 있소.”
만일 이 대화를 천무백이 들었다면, 거 사람 참 관상 볼 줄 안다고 폭소를 터뜨렸으리라.
하나 마부인은 샐쭉해진 눈으로 제갈여강을 흘겼다.
“설아도 이제 스물이에요. 제가 당신한테 시집올 때가 스물한 살이었던 거 아시죠?”
“……!”
“설아도 다 큰 나이라고요. 오히려 너무 늦은 감이 있어요. 처음 아니에요? 매일 책 읽고, 진법에 몰두하고, 무공이나 익히던 아이가 남자를 보고 수줍어하는 게 귀엽지 않아요?”
“귀엽기는! 그래서 문제 아니오, 제대로 연정을 품어 보지도 못한 애가, 사람도 많이 겪어 보지 못한 애가, 흠뻑 빠져서는…….”
“웬 이상한 놈보다야 낫죠. 저 나이에, 분연히 일어서서 홀로 마도를 쫓는 협객이라니. 그 대단한 창천검신도 서른 살이 되어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걸 생각하면, 지금 저만한 청년이 있을까요?”
마부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마치 향이 좋은 따듯한 차를 마시는 듯 사람의 감정을 가라앉히는데 특효약이었다.
“그리고 얼마나 심려 깊어요. 제 취향의 장신구며,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술까지도 선물로 사 왔잖아요?”
살짝 장난기 어린 목소리였다.
제갈여강은 똑똑한 사람이다.
마부인의 말이 옳다는 걸 왜 모를까.
다만 겪어 보지 못한 감정이었고, 가족 관련해서는 감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흥. 그것도 문제요. 그게 계산적이란 거지.”
“계산적이라고요? 오로지 정의를 위해 한몸 던지는 협객이라고, 화산의 청현진인이 서찰로 전해 왔던 것 같은데…….”
“그건 속고 있는 거요. 다 계산이오. 소림에서, 화산에서, 비검문에서. 이젠 정의맹까지 창설했다지? 그 모든 것에 천룡검협의 입김이 들어갔소. 놈은, 협객처럼 겉을 꾸몄지만 속은 엉큼한, 그야말로 여우 같은 놈이오.”
“참…… 이이가 왜 이리 어린애 같이 굴까.”
마부인이 끝내 혀를 차며 흘리자, 제갈여강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왜 그러시오. 내 눈이 확실하다니까?”
“네네. 알겠어요. 당신 그러다가, 설아에게 미움받을지도 몰라요.”
“미움받다니? 설마 설아가 날 아니라 그 옴팡이 녀석을…….”
제갈여강은 고개를 휘휘 젓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되겠소. 설아를 나보다 끔찍이 여기는 건 아버지니, 아버지께 이 사실을 말해드려야겠소. 아버지가 애지중지 품에 안고 키운 설아가 웬 도둑놈이 채갈 것 같다고.”
마부인이 한숨을 푹 내쉬었지만, 제갈여강은 자신의 촉을 믿었다.
‘건실한 청년은 무슨, 속에 노인네 하나가 꽉 들어선 기분이더만.’
이런 감정은 저보다 똑똑한 제갈선이 이해해주리라.
후원을 찾아가 제갈선에게 그간 있던 일과 자신의 감상을 얘기하자, 제갈선의 표정도 심각해졌다.
“고 녀석이, 무당에 가는데 서후가 아닌 설아가 꼭 필요하다고 했다고?”
“그렇습니다. 녀석의 의중이 혈귀곡과 싸움에 본 세가를 끌어들이는 거라면, 서후가 가는 게 녀석의 계획에 맞을 터인데…….”
“허, 고놈 참. 무서운 놈이군.”
“그렇습니다. 정말 무서운 놈입니다.”
“가주.”
“네, 아버지.”
“고놈 잡아라.”
“……네?”
“딴 가문이나 문파에 가지 못하게 꽉 세가 사람으로 만들어.”
“세가 사람으로 만들라니요?”
제갈여강의 얼굴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뭣 하고 있어? 설아는 고놈 곁에 꼭 붙여서 무당으로 보내. 호위무사론 적절히, 그래 무용이 놈 계속 붙여놓고.”
“아니, 아버지. 그게 무슨…….”
황당하다는 반응에 제갈선은 손을 휘휘 저었다. 그리곤 팔짱을 끼며 묘한 미소를 지었다.
“녀석……. 내가 말해 준 내용에서, 무엇을 발견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 게냐.”
뜻 모를 제갈선의 중얼거림에 제갈여강의 얼굴에 혼란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 * *
천무백은 다음날 제갈여강에게 곧장 무당파로 출발하겠단 얘기를 전했다.
제갈세가에 온 지 하루 만에 떠나는 건, 예의가 아니긴 하다.
다행히 제갈여강도 제갈선에게 무언가 얘기를 들은 게 있는지 탐탁지 않은 표정은 지을지언정 말리지는 않았다.
덕택에 천무백은 곧장 무당으로 향했다.
제갈설아는 호위무사 한 명만 대동했고, 천무백도 능허와 무당의 유수를 데리고 움직였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 때문에 제가 필요한 거란 얘기죠?”
“맞소.”
어쩐지 제갈설아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딱 그 이유 때문이에요?”
왠지 모르게 은근한 목소리에 천무백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이유도 맞소, 가주님을 설득하기 위한 명분이기도 하고.”
“다른 이유도 있다는 거네요?”
제갈설아가 눈을 반짝였다.
맞다.
‘제갈서후는 깐깐하기도 하거니와…….’
제갈세가가 무당을 도와주는 장면을 연출하게 되면, 비교적 완만했던 두 문파간의 사이도 급격하게 친밀해질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전대 장문인이 비다라가 됐다는 치부를 제갈세가가 도와준다면?
‘동맹이 공고해지지.’
호북에서 무당과 제갈세가가 혈귀곡에 맞서 확실한 연합을 구축한다면…….
어쩌면 그게 가장 중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 진법을 이용하는 건 아직 천무백의 계획일 뿐이니, 통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으니까.
“됐어요. 그럼 충분해요.”
“……뭐가 말이오?”
“아주 괜찮은 명분이었다고요. 아버지 설득하는데, 할아버지의 조언 핑계 대는 것도 효과적이었고요. 역시, 좋은 뇌물을 준비하셨나 봐요. 효과가 대단해요.”
“…….”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안가던 천무백은 내심 흡족해하는 제갈설아를 가만히 내버려뒀다. 그 모습이 새끼 고양이 같았으니 퍽, 귀엽다 싶기도 했다.
“무당의 일이 생각보다 화급을 다투는 것 같으니, 빨리 갑시다.”
경공을 펼쳐대자 며칠 만에 엄청난 거리를 주파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했기에, 무당산에 가까워질 무렵 객잔에 묵기로 했다.
사실 그제야 처음으로 입을 뗄 정도로 기진맥진한 제갈설아가 반색했다.
“으으, 씻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요!”
천무백이 고개를 돌려 쳐다도 보기 전에 제갈설아는 빠르게 객잔에 들어갔다.
지저분한 모습을 보여 주기 싫어서인지, 왠지 눈도 못 마주친 채 도망치듯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좀 쉬고 날 밝으면 출발합시다.”
천무백 역시 잠깐의 휴식이 필요했다.
경천혼공만 운용하다 보면, 하단전이 그 기운에 자극받아 움찔거리는데, 이때마다 갈무리해 놓지 않으면 몸에 무리가 심했다.
‘이대로라면 몸에서 두고두고 충돌을 일으키겠어. 조만간 어떻게든 다스려야겠군.’
욕조에 몸이 익을 것 같은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그 안에 들어가, 빙백신공을 운기하니 날뛰려던 기세를 보이던 하단전의 극음지기가 점점 차분해졌다.
그렇게 잠깐의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
천무백의 감각에 무언가 잡혔다.
‘세상이 조용해졌군.’
창밖에서 들려오던 벌레의 울음소리, 객잔을 오가는 사람들의 잡담 소리, 그 모든 게 갑자기 사라진 듯했다.
천무백은 감각을 더욱 확장했다.
극음지기를 때마침 진정시켜 놨기에, 상단전을 크게 열어도 무리가 없었다.
넓고 깊어진 그의 초감각이 마치 객잔 내부의 공간을 넘었다.
능허가 그대로 이부자리에 쓰러져 코를 고는 소리,
유수가 도경을 외우는 소리, 무용이 가부좌를 튼 채 운기를 하는 기의 흐름까지.
그리고 벽을 넘어 제갈설아가 콧노래를 부르며 물을 끼얹는 미세한 소리까지.
그 수많은 소음 사이에서,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칼이다.’
검은 발검하지 않더라도, 그 검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울림이 있다.
검이 소리가 초감각에 잡혔다.
‘기습인가…….’
천무백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다시, 강호라는 칼날 위에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