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1화>
131. 아니요, 저한텐 필요한 사람입니다.
천무백의 반응을 본 제갈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마치 아는 눈치구나.”
“들은 바가 있습니다, 스승님께.”
“그러고 보니 자네는 검존의 제자가 아니라, 창천검신이 새로 기른 제자의 후인이라 했던가. 하면 들을 법했겠군. 검신이 썼던 신검(神劍)에 대해서 말이야.”
상자에 담긴 건 검이었다.
지금 천무백이 허리춤에 차고 있는 화려한 장식의 검과 비견하면,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낡고 볼품없었다.
검자루를 감싼 가죽은 낡아 헤졌고, 그 위를 덮은 자루 끈도 다 풀어진 채 갈기갈기 찢겼다.
뿐이랴. 검은 아예 반 토막이 났다. 사선으로 중간쯤 뚝 끊어졌다.
제갈선이 말하는 대로 신검이라고 부르기엔 썩 볼품없었다.
하나 절반의 검신만큼은 깨끗하고, 순백의 빛을 그대로 담고 있었는데, 과연 범상치 않았다.
“당대 제일의 검객들만 쓸 수 있다는 검. 연원을 알고 있나?”
제갈선은 머릿속에 지식을 뽐내는 걸 즐겼다.
천무백은 내심 고소를 삼켰다.
검의 연원에 대해선 천무백만큼 잘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
“첫 번째 주인은 검으로서 마(魔)를 평정한 검마였지요.”
“……어째 아는 게 많구나. 맞다. 그 이후로 하나같이 당대에서 최고였던 검객을 주인으로 모신 신검이지. 검마 뿐이더랴. 암천검제, 산동검호. 검성, 검왕, 벽력일검, 천검신군, 그리고 창천검신까지.”
“그 검의 이름이, 바로 철신고검이었지요.”
철신고검(鐵神古劍).
천무백의 전생을 그대로 관통한 검.
천무백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떠올랐다.
“정마대전 중에 천마의 일격을 받아낸 뒤에 검이 뚝 끊어졌지. 그때 창천검신이 어찌 싸운 지 아느냐?”
“…….”
“반 토막 난 검을 버려 버리고 주먹질을 했다. 그거 보면 검신이 아니라 권신(拳神)이었어. 하여간, 이후 정마대전이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나고 다시 전장을 찾았다가, 이 검을 찾았다.”
천무백은 그제야 이해가 갔다.
당대 제일의 검객만 쓸 수 있다는 검.
그랬기에 역설적으로 천무백만이 쓸 수 있는 명검이었다.
하나 이번 생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었다. 전투 중에 파괴됐고 잃어버렸으니까.
아예 잊고 살았다.
“이걸 습득했을 땐, 이미 어르신은 등선하신 이후였고, 백기 고놈도 새외로 떠났을 때다. 하여 백기가 올 때까지 내가 보관 중이었다. 하지만 수리는 불가능이더군.”
천무백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걸 수리 할 수 있는 장인이 세상에 있을까. 완전히 반 토막 난 검인데.
물론 일반적으로 완전히 불가능한 건 아니다. 다시 녹이고 만들면 그만이다.
“산동의 육가철방도 고개를 내두르더구나. 운철(隕鐵)로 만들었다지만, 재료는 구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다시 녹이는 건 불가능이라 단언하더구나. 그저 검을 유지보수 하는 게 최선이라면서.”
산동의 육가철방.
전생에서 천무백이 주로 찾았던 육장인의 철방이었다.
검면에 나타난 물결무늬. 이것이 바로 육가철방의 특징이었는데, 천유하가 선물해 준 천무백의 화려한 검이 바로 육가철방의 검이었다.
그런 대단한 장인들도 이 검을 수리할 수 없다.
“그리고 그 검을 탐낸 놈들이 많았다. 곽용이 그 멧돼지 자식은 검존이 없으니 자신이 당대 제일 검객이라고 검을 들 자격이 있다했지만…… 이걸 뭐라 해야 하나. 그의 손에 이 검이 들리니 정말 형편없는 목검보다 못한 검이 되더구나.”
그렇다.
그랬기에 철신고검은 오로지 천무백만이 사용 가능했다.
“비단 곽용뿐이냐. 화산 장문인도 검을 들곤 고개를 저었으니, 당장 네놈도 마찬가지 일거다. 들어봤자 반토막난 그저 고물에 불과하…….”
그때였다.
천무백이 낡아빠진 검자루를 꽉 쥐는 순간.
찡-.
공간이 진동했다.
* * *
철신고검이 마치 속삭이듯이 진동했다. 손바닥을 통해 전해지는 그 거친 진동은 처음 천무백에게 반항하는가 싶었지만, 이내 주인을 알아본 듯 잠잠해졌다.
오히려 마치 강아지가 아양을 부리듯 울어댔다.
천무백은 웃었다.
‘너만이 내 전생을 꿰뚫어 날 알아봐 주는구나.’
검에 세월이 축적되면, 염(念)이 담긴다.
당대 제일의 검객만 쓸 수 있단 의미는 그랬다.
오로지 천무백만을 주인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천무백은 매번 삶에서 당대 제일의 검객이었으니, 그렇게 소문이 와전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새하얗게 빛나는 검신 너머, 찢어질 듯 부릅떠진 눈의 제갈선을 봤다.
제갈선은 마치 과거를 회상하는 듯 눈가에 아련한 빛이 떠올랐다.
“검이…… 우는구나. 마치 어르신이 휘두를 때, 우는 것처럼.”
“감사합니다, 어르신.”
천무백은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지금만큼은 진심만이 가득했다.
멀어졌다 여겼던, 이제는 쓸 수 없다. 여겼던, 그리고 잃어버렸다 여겼던 친우를 되찾은 기분이니, 이걸 보관한 제갈선에게 그저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허어……. 유백기만이 쓸 수 있으리라 여겼건만.”
“아마 검존 어른도 쓰지 못할 겁니다.”
제갈선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러다 이내 어처구니없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감탄한 기색이 역력했다.
“과연 창천검신의 후인답구나. 그 담대함과 광오함이 정녕 제일이니, 하기야 새로운 시대의 천하제일인은 네놈일 게 분명할지니…….”
제갈선은 천무백이 스스로 검존보다 뛰어난 검객이라고 말하는 거로 여겼지만, 아니었다. 실제로 검존은 지금의 천무백보다 더한 고수임이 분명하다.
창천검신의 정수를 그대로 이어받은 제자니까.
하나 그렇다고 해도, 철신고검의 염(念)은 오로지 천무백만을 따른다.
천무백은 검을 조심스레 검집에 넣고 허리춤에 메었다.
‘아직은 쓸 때가 아니다.’
철신고검의 주인으로서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이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
당대 제일.
적어독 천무백이 눈앞의 제갈선, 나아가 천하십대고수를 모조리 상대할 수 있을 쯤에나 쓸 자격이 생기리라.
그때까진 천무백은 철신고검을 곁에 둘 생각이었다.
조심스레 검을 대하는 모습은 일견 고귀해 보이기까지 했으니, 그걸 지켜보는 제갈선의 눈빛이 묘해졌다.
* * *
“기분 좋아 보이십니다?”
후원에서 나오자 능허가 반겼다. 천무백이 서류 뭉텅이를 건넸다.
“여기 있는 놈들, 하오문과 개방 통해서 빠르게 조사해.”
“뭡니까?”
“혈귀곡으로 의심되는 마인들 명단이다.”
“……!”
능허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걸 어떻게……?”
“태상가주.”
“맙소사. 이미 알고 있었단 말입니까?”
“자세히는 몰라. 이 마인들은 마류칠종 중 암종과 혈종 출신으로 강호에 한번이라도 모습을 드러냈던 적이 있던 놈들이다. 혈귀곡에 소속되었을 확률이 높으니, 추적한다.”
“하지만 명단을 봐도……. 솔직히 말하면 지금은 다 모습을 감춘 이들밖에 없습니다. 그나마 최근이라고 볼 수 있는 천량괴마라는 놈도 제가 알기론 8년 전에 산동에서 혈사를 일으키고 잠적했으니까요.”
천무백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능허는 강호 인물에 그렇게까지 해박하진 않았다.
“저도 그간 놀고만 있던 건 아닙니다. 혈귀곡이 마인 놈들인 건 맞으니, 그간 이름을 남긴 마인들에 대해 좀 알아봤었죠. 흠흠.”
“이제야 네가 쓸모가 있어지는 거 같아 눈물이 나올 지경이로구나.”
“거, 듣는 사람 섭섭하게. 지금까지 내 도움을 얼마나 받았소?”
“지랄하지마라.”
“네. 죄송합니다.”
천무백은 능허에게 마인들의 명단을 넘겼다.
명단에는 천무백도 익히 아는 40년 전의 마인들도 있지만, 거의 대다수는 모르는 이름이었다.
40년 사이에 모습을 드러낸 마인들이겠지.
천무백으로서도 정보가 빈약한 상황이라 당장 쫓을 수가 없다.
그래도 이것만으로도 천무백은 큰 그림을 볼 수 있었다.
‘혈종은 마류칠종 중에서도 숫자가 많았다. 마종을 넘어 천마신교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늘 경주하던 놈들이고. 아마 이놈들이 혈귀곡의 절대다수를 차지할 거고, 암종은 비교적 숫자가 적겠지.’
혈종.
천무백은 마류칠종 중 혈종을 가장 싫어하는 편이긴 했다.
‘음험한 놈들.’
가진 무공도 그렇고, 성정 자체가 그랬다. 마교가 암약하는 음모의 뒤엔 늘 혈종이 있었다.
천무백도 비단 직전 전생뿐 아니라, 숱한 전생 중 여러 악연으로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군. 하여간 적이 될 수밖에 없는 놈들이라니까.’
천무백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기억들을 털어 댔다.
하나같이 불쾌한 기억들이었으니까.
기억을 털어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장노가 제갈세가의 총관과 대화를 나누며 움직였다. 쟁자수들이 마차에 실고 온 선물을 건네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아마 천천히 지부 설립에 관해 얘기를 꺼내면서 조언을 구하겠지.
사실 별 거 없다.
제갈세가의 세력권에 지부 하나만 낼 수 있으면, 청성표국으로선 깔끔하게 일을 성공시키는 것이다.
그 일은 아마 어렵지 않으리라.
그때 제갈세가의 시종이 천무백에게 다가왔다.
“혹 바쁘시지 않다면, 가주님께서 뵙기를 청하고 있습니다.”
“알겠소.”
아직 짐 하나 풀지 않은 상태지만, 태상가주에 이어 가주와의 만남이다.
제갈선으로부터 도움을 받기로 됐다. 지금 넘겨받은 마인들의 명단과 그간의 진실, 그리고 철신고검까지. 심지어 최근 무당파의 행적까지도. 얻어낼 건 얻었다. 제갈세가에 들르기 잘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러나 그건 제갈선의 개인적인 도움이다.
혈귀곡을 상대하기 위해선 전체적인 규모를 넓히고, 판을 크게 키울 필요가 있다.
제갈세가 자체의 도움이 필요한데, 그것은 오로지 가주의 권한이었다.
‘쉽지 않겠어.’
제갈선이야 일선에서 물러나 정치적인 역학구조 같은 것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하나 제갈여강은 다르다. 엄연히 가주니까.
‘그렇다고 해도, 이미 내게 유리하니.’
제갈서후의 약속은 확실하니, 제갈여강도 어쩔 수 없으리라.
그리 여기며 제갈여강의 집무실에 들어서는 순간.
천무백은 조금 난처한 마음이 불쑥 들었다.
“아, 왜요! 오라버니 근신 중이잖아요!”
“됐다. 네가 갈 필요는 없다. 세가의 대표로 소가주인 서후가 가는 게 맞다.”
천하의 천무백도 가정문제는 쉽사리 끼어들기 쉽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껄끄러웠다.
제갈설아와 다투고 있는 제갈여강의 모습.
모른 척 하고 나가려고 했지만, 제갈여강이 고개를 들어 천무백을 바라봤다.
“오셨소? 천룡검협.”
목소리에 무언가 가시가 잔뜩 느껴졌다.
천무백의 등장에 제갈설아는 마치 구원이라도 내린 사람처럼 눈을 반짝였다.
‘알만하군.’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 짐작한 천무백은 포권을 취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천무백입니다.”
“과한 예의는 괜찮소, 세가의 은인이기도 하니…….”
한데 그리 말하는 목소리가 묘하게 날카로웠다. 얼굴에서 드러난 표정도 떨떠름했다.
“하긴, 내 딸아이를 구해 준 값으로 수가기문도면 싸게 먹힌 거지.”
“표국에 수가기문도를 설치해 주는 결정을 내리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아니오, 하지만 내 딸아이를 데리고 무당으로 가는 건 재고해주시오.”
“……?”
“아니라니까요! 내가 따라간다고 한 거예요!”
“어허, 넌 조용히 하거라.”
천무백은 부녀의 스스럼없는 대화를 보며 속으로는 실소했다.
도도했던 제갈설아도 아버지 앞에선 말괄량이였고, 그 모습이 마치 천문경과 천유하 부녀가 사적인 자리에서 보이는 광경과 비슷해 웃음이 튀어나왔다.
천무백의 미소를 본 제갈여강은 미간을 좁혔다.
“무당의 일은 나도 들었소. 하여 서후에게 내린 근신 처분을 거두고, 서후를 보내기로 했소. 검협과 손을 한번 맞춰봤고, 실력 역시 그대에겐 못 미치겠으나 이 호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후기지수요.”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오히려 명성으로 따지면 제갈서후였다.
현 제갈세가의 소가주이자, 장남.
차기 제갈세가 가주.
제갈세가의 세 번째 권력자.
그런 이가 함께 무당으로 가면,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혈귀곡에 대응하기 위한 공동전선에 제갈세가가 참여했음을.
제갈설아가 가는 것보다 효과적이다.
받아들일 만 한, 합당한 제안이다.
제갈여강도 아마 천무백이 받아들이리라 여기는 표정이었다.
하나 이내 그의 얼굴이 단숨에 굳었다.
“아니요, 제갈설아 소저가 가야 합니다.”
“……!”
“……!”
제갈여강은 물론이고, 옆에 있던 제갈설아도 그대로 돌이된 것처럼 움직임이 멈췄다.
천무백은 힘이 실린 어조로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 저에게 필요한 사람입니다.”
제갈여강의 표정이 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