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30화>
130. 오랜만이도다.
별호는 강호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괴이천뇌(怪人天腦) 제갈선.
별호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사람답지 않은 두뇌를 소유한 자였다.
가문의 비전과 외부에서 흘러온 무공을 집대성하여 제갈세가가 엄연히 ‘무가’로 우뚝 서게 했다.
정마대전 당시 무림맹의 총군사를 역임했으며, 전체적인 판을 짠 전략가.
현재는 개인의 무력도 대단해 천하십대고수에 꼽히는 절대자였다.
‘지금의 나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다.’
천둔검법까지 자기의 것으로 만든 작금의 천무백도 제갈선과 충돌하면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극음지기를 완벽하게 활용하고, 선기를 더 축적해 상단전과 하단전을 모두 양손에 쥘 수 있다면야 모를까.’
그쯤 되면 각오를 할 만하다.
물론 지금 맥없이 당할 정도는 아니다.
머릿속엔 숱한 무공이 존재했고, 그중엔 누굴 만나도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비장의 수가 존재한다.
‘동귀어진은 할 수 있지.’
지금 제갈선과 싸우러 온 것도 아니다. 이런 걱정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하나 천무백이 경계할 정도로 제갈선은 지극히 위험한 사내다.
아름다운 후원을 더럽혔는데도, 제갈선은 화를 내기는커녕 폭소를 터뜨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가를 슥 닦았다.
“정말 난놈이구나. 난놈이야. 네놈, 감히 본좌에게 경고를 하는 것이냐?”
“그거야 받아들이는 사람의 뜻에 달리지 않겠습니까. 찔리는 게 있으면 경고인 셈이고, 그게 아니라 화가 난다면 그저 아끼는 후원이 지저분해진 것뿐이지요.”
“으하하하.”
제갈세가의 후원은 특별한 장소다.
태상가주가 머무르는 이유도 있지만, 이곳이 바로 수가기문도의 핵심이다.
‘제갈세가 최후의 방어선이자 마지막 고지.’
제갈세가의 최후를 대비한 장소였다.
누군가의 침입에 곧 무너질 위기에 처했을 때.
제갈세가의 식솔들이 빠져나갈 수 있는 비밀통로가 후원을 통했다.
후원은 그 어떤 적이라도 막아 내야만 하는 최후의 저지선이었다.
이곳에 수가기문도에서도 가장 위험한 진법과 기관이 잔뜩 설치되었다.
제갈세가에서도 극히 몇몇의 사람만 후원에 접근할 수 있고,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 안다. 한데 천무백은 그 기관진식을 일부나마 모습을 드러내게 했다. 마치 알고 있다는 듯이.
제갈선이 웃음을 거둬들였다.
“내 경고로 알아들으마. 이미 강호 일선에서 물러난 노인네다. 혈귀곡이고 뭐고, 관심 없다.”
“관심은 가져 주시지요. 조언 정도는 강호 말학으로서 충분히 들을 자세가 됐습니다.”
“노부의 얄팍한 도움은 필요하지만, 장기말이 되는 건 싫다? 이거, 난놈이구나.”
제갈선은 혀를 차며 손짓했다.
“오거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가 설아를 구해 준 은인에게 기관을 작동할까.”
“하면 실례를 무릅쓰고 가겠습니다.”
천무백은 포권을 취한 뒤 금세 움직였다.
그 자세가 거침없이 당당했다.
제갈선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간댕이 하나만큼은 창천검신이구나.’
제갈선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연못은 다시 어느새 정화된 듯이 맑게 변해갔다.
드러난 수많은 진법과 살벌한 기관들이 다시 서서히 모습을 감췄다.
‘아마 바다 건너 이주섬에 있다는 환각초겠지. 물과 만나면 일시나마 순식간에 물을 증발시켜버리는…….’
제갈선은 당당하게 걸어오는 천무백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이 후원에 당당하게 온 세 번째 사람인가?’
후원에 외부인이 들어와 놓고도 멀쩡한 경우가 지금을 통틀어 세 번 있었다.
200년 전, 혈천마괴를 쫓아왔던 검객은 후원의 모든 기관진식을 부숴 버렸고.
45년 전, 정마대전이 한창일 때 창천검신이 이곳에 들어와 기관진식을 모두 ‘피했다.’
“…….”
별안간 그때가 떠오른 제갈선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그때가 내 삶의 마지막인 줄 알았지.’
그는 다시 천무백을 똑바로 바라봤다.
창천검신이 무심하게 기관진식을 모조리 피하면서 달려왔다면,
천무백은 한없이 당당하게 후원을 걸었다.
그 모습에서 제갈선은 한 가지 상념이 스쳤다.
‘시대가 바뀌었구나.’
제갈선은 회한이 어린 눈으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그래도 그렇지, 이 맹랑한.’
맹랑했지만 기분이 썩 나쁘진 않았다.
‘설아가 심중에 품은 놈이 저런 놈이면, 뭐 싹수가 노래도 나쁘지 않지.’
제갈선은 천무백의 행동을 모두 이해했다.
이미 일전부터 화산과 소림을 통해 제갈선도 천무백에 대한 극비정보를 접했다.
창천검신의 후인.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등장하자마자 저지르는 짓을 보니, 창천검신의 후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천무백은 자신에게 경고한 것이다.
‘감히 자신을 장기말로 쓰지 말라는 경고, 하면서도 내 도움은 바라다니. 이 얼마나 맹랑한 놈이던가!’
언제였던가.
제갈선은 무림맹의 군사로서 정마대전의 판을 짠 전략가였다.
그에게 있어 창천검신은 절대적으로 확실한 ‘신의 한 수’였다.
제갈선은 당시 창천검신을 장기판 위의 장기말처럼 다뤘다.
위험한 전장으로 유도했다. 다른 이라면 절대 이길 수도, 살아남을 수도 없는 전장으로 끌고 가 정마대전의 판세를 뒤집어 버렸다.
하나 그 일 이후, 제갈선은 처음으로 저승 문턱까지 갔다 왔다.
‘여기 후원까지 쫓아와 모든 기관을 다 피해 버리면서 다가왔을 때란…….’
하나 창천검신은 알면서도 그리 행동했다.
제갈선의 도박수가 정마대전의 판도를 바꿀 수 있으리라 여겼으니까.
그렇다고 해도, 창천검신은 불쾌한 기색으로 제갈선을 문자 그대로 두들겨 팼다.
자신을 한낱 장기말처럼 이용했단 사실에 불쾌해하면서.
하여 지금의 천무백의 행동이 모두 이해가 됐다.
‘혈귀곡을 상대하는 데 내 조언과 도움은 필요하나, 장기말처럼 다루지 말라는 경고.’
사실 제갈선은 천무백의 등장으로 좋은 수가 생겼다고 여겼다.
정의심에 투철한 젊은 협객.
심중의 치기 어린 정의심을 조금만 충동질해도 쉽게 다룰 수 있으리라 여겼다.
‘하긴 그 창천검신의 후인이니.’
제갈선은 깔끔하게 마음을 접었다.
‘한낱 장기판의 장기말이 될 수 없는 파천황적인 존재.’
단숨에 천무백을 꿰뚫어 본 제갈선은 심중에 떠오르는 장난기를 저버렸다.
‘내 세대는 끝났으니, 그저 뒤에서 조언자로 남아야겠구나.’
그리 결심한 제갈선은 정자로 올라온 천무백에게 말했다.
“혈귀곡을 상대하는 건 도와주마.”
“감사합니다.”
“놀라워하지도 않구나.”
“괴이천뇌 어르신이라면, 이미 결정을 내렸으리라 여겼습니다.”
제갈선의 눈에 호기심이 떠올랐다.
“어째서 그리 생각하느냐?”
“작금의 강호엔 창천검신이 없으니까요.”
“……!”
제갈선의 얼굴이 미미하게 굳어졌다. 천무백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곤륜이 불타 사라지고, 소림이 무너지고, 무당이 학살당하고, 화산의 검이 꺾일 때, 어르신은 창천검신으로 도박수를 던져 판도를 뒤엎으셨죠.”
“허어. 네놈은, 혈귀곡이 그때의 정마대전 정도를 일으킬 놈들로 여기느냐?”
“어르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제갈선은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천무백을 바라보던 제갈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놈, 이미 다 알고 있구나.”
그 순간,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 묘한 어조였다.
‘뭔가 알고 있군.’
혈귀곡이 당시의 마교 수준에 근접했는지는, 천무백은 아직 확신하지 못했다.
지금까지 알아낸 건 혈귀곡이 마류칠종의 암종과 큰 연관이 있다는 점 하나.
한데 제갈선의 어조가 묘했다. 마치 정말로 정마대전 당시에 비견된다고 여기는 듯한 얼굴과 어조였다. 천무백의 머리가 팽팽 돌았다.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를 제갈선은 알고 있다. 천뇌라는 별호가 붙은 사람이다. 저리 생각하는 데는 근거가 있다는 의미.
천무백은 일부러 대답하지 않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미소를 본 제갈선이 짐짓 오해하며 탄식을 토했다.
“과연, 그랬군. 검존이 중원을 내버려 두고, 새외로 갔는지 이해가 가는구나!”
“…….”
천무백은 예상치 못한 말에 순간 흔들렸지만, 겉으로는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제갈선은 살짝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창천검신 어르신은 우화등선하시면서도 유훈을 남기신 게 틀림없어. 검존은 마교의 잔당을 쫓아 새외로 떠났고, 네놈은 중원에 남아 혈귀곡을 추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더구나.”
천무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여전히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은은하게 보일 뿐이었다.
미소가 평범해 보이지 않았다. 제갈선의 두 눈에는 마치 부처의 미소처럼 보였다.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세상사를 관조하는 듯한 미소.
제갈선은 머리에 벼락이 치는 기분이었다.
절대 약관이 안 된 청년이 보일 수 없는 얼굴이다. 세상사를 관조한 듯한 지극히 지혜로운 노인의 미소였다.
제갈선은 몸을 잘게 떨었다.
‘창천검신은 우화등선하면서도 미래를 예견했고, 그의 후인들은 유훈을 따라 강호를 지키기 위해 칼 한 자루를 품고 불길에 몸을 던지니……!’
그 미소를 보고 확신했다는 듯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맞다. 네놈 말대로 이건 정마대전의 새로운 징조다. 마류육종, 아니 마류칠종의 암종과 혈종(血宗)이 중원에서 세력을 만들고, 독종(毒宗)과 광종(狂宗)이 새외에서 힘을 기르니, 창천검신께서 검존 유백기에게는 새외를, 네놈에게는 중원을 담당하게끔 유훈을 남기신 게 틀림없도다. 아아, 과연!”
천무백은 웃었다.
드디어 수수께끼가 풀렸다.
* * *
천무백이 제갈선을 굳이 만나는 이유는 당연했다.
다른 정파들은 천무백이 혈귀곡에 대해 경고하기 전까지는 아예 몰랐다.
하나 천무백은 제갈선을 고평가했다.
천무백이 그에게 군사를 맡기고, 그의 위험한 도박수를 알고 있음에도 몸을 던졌던 이유는, 그 전략적 식견이 아주 훌륭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언가 더 알고 있으리라 여겼다.
40년간의 간극 사이에 일어난 일을.
‘또 백기 놈이랑 친한 녀석이었으니까.’
검존 유백기가 흉금을 털어놓았던 사이가 바로 제갈선이었다.
결국, 제갈선은 무언가를 더 알고 있었다.
‘혈귀곡뿐 아니라 새외에 마교의 세력이 준동한다…….’
천무백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도 백기 녀석이 새외를 맡았으니, 거기까지 신경을 쓸 필요는 없겠구나.’
한편으로는 푸근한 마음도 들었다.
제자 녀석이 제 할 몫을 하고 있으니, 천무백은 중원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다만 제갈선의 말에 따르면 검존이 새외로 떠난 건 35년 전.
창천검신이 삶을 마무리하고 5년 만에 새외를 떠났다.
한데 35년간 제갈선은 검존으로부터 어떤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그것이 못내 의미심장했다.
‘물론 녀석이 죽을 놈은 아니다.’
천무백은 단언했다.
제자 놈은 현 강호에서 능히 천하제일이라 불릴만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천무백의 얼굴엔 그 어떨 때보다 강렬한 믿음이 묻어났다.
‘우선은 혈귀곡부터 신경 쓰자.’
제갈선은 검존이 새외로 떠나고, 자신이 유심 깊게 중원을 지켜봐 왔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얻은 정보는 더없이 많으리라.
한데 비단 정보뿐만이 아니었다.
제갈선은 조금은 안타까운 기색으로 무언가를 들고 왔다.
긴 상자.
습기를 비롯해 그 어떤 기운도 스며들지 못하게 잘 봉인된 상자였다.
“백기 고 녀석에게 주려고 보관했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창천검신의 후인인 네놈에게도 자격이 있는 듯하니, 네놈에게 주마.”
천무백은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창천검신으로서 남긴 게 따로 있던가?
하나 상자가 열리고, 안에 있는 내용물을 본 순간, 천무백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아…… 아, 오랜만이도다.”
천무백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