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신재생-129화 (129/318)

<검신재생 129화>

129. 손님이 선물은 사 가야지.

표국 행렬에 약간의 긴장감이 맴돌았다.

제갈설아가 안력을 돋궜다.

“수적이네요?”

제각기의 병장기를 꼬나 쥔 일단의 무리는 수적이었다.

“나루터를 점거하고 있는 꼴을 보니, 딱 의도가 불순한 게 보이네요.”

“왜 신이 나셨소?”

“제가요?”

제갈설아가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조가 묘하게 높아진 게 즐거운 듯 보였다.

“수적들이랑 싸울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시오.”

“네? 그럴 리가. 쟤들 흉흉한데요.”

“원래 흑도 놈들이 가진 거 없이 허세부터 부리고 보거든. 저기 능허 놈은 나한테도 대거리하던 놈이오.”

“왜 갑자기 내 얘기가 나옵니까.”

능허의 입을 삐죽였다.

이내 거리가 가까워지자 장노가 천천히 말을 몰고 나갔다.

수적 중에서도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가 나왔다.

중간 위치에서 만난 둘은 대화를 나눴다. 제갈설아는 귀를 쫑긋하고 대화를 엿들었다.

‘어디서 오셨소?’

‘하남 원양현의 청성표국이외다.’

‘멀리서도 오셨구려. 여정이 힘들 텐데 술이라도 한잔 축이고 가시지요.’

‘성의는 고마우나, 일이 바빠 그럴 수가 없소. 그래도 성의에 보답은 해야 싶을 듯한데, 호북의 시세가 얼마인지 모르겠구려. 얼마쯤 보답하면 되겠소?’

‘역시, 나이를 보니 경험이 많아 보이는데 일이 쉽게 가니 좋구려. 표국의 규모를 보니 작은 표국 같고, 내 많이 받진 않겠소. 은자 스무 냥만 주시오.’

‘어허. 이러지 맙시다. 피차 얼굴 붉힐 게 뭐 있소. 내 열 냥 드리리다.’

“응?”

제갈설아는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천무백을 바라봤다.

그 이지적이고 똑똑한 아이가 멍한 표정을 지으니 천무백도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기야 아무리 똑똑해도 처음 보는 상황이라면 곧장 일을 이해하기 어렵다. 천무백은 마치 어린애에게 설명해주듯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통행세를 내는 과정이오.”

“통행세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요? 저 강이 어디 저 수적들 것도 아니고. 관부에서도 통행세를 안 받는데?”

“중원은 넓고 관부의 영향력이 끼치지 않는 곳은 허다하오.”

“그래도 그렇지. 은자 스무 냥이라니. 이거 순 도둑놈 심본데. 제가 나설까요?”

제갈설아가 화가 난 듯 눈을 치켜떴다.

이제부터 호북성의 영역이니 제갈세가의 이름을 대면 수적들은 꼬리를 말고 도망치리라.

천무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지 마시오. 제갈세가가 언제든 청성표국을 계속 두둔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소?”

“어…… 그렇긴 하죠.”

“호북에 지점을 설치하면 표국은 호북성을 자주 오가야 하니, 수적들과 안면을 트고 통행세를 내면 그만이오. 그러면 일이 번거롭지 않지. 한 번 싸우면? 지금이야 쉽게 해결할 수 있소. 하지만 그 이후에 끊임없이 도전을 받게 될 거요. 지금 고작 은전 몇냥 안냈다고 지긋지긋하게 되거든.”

당장은 문제가 없다.

천무백도 있다. 장노도 있다. 순식간에 처리가 가능하다.

하나 표국이 더 커지고, 소규모 표행도 많아지면 표행 책임자의 수준이 언제든 각주급이겠는가.

하물며 수적 중에서도 제법 한가닥 하는 인물들도 나올 터이니.

통행세를 내고 통과하는 그림이 가장 깔끔하긴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옥신각신하던 장노는 은근히 기세를 내뿜으며 은자 열 냥으로 일을 처리했다.

제갈설아는 멀쩡한 돈을 뺏겼단 생각인지 얼굴이 불퉁해졌다.

“왜 그쪽이 더 심각한 표정이오?”

“후우. 어이가 없어서요. 그게 누구 돈인데, 나루터 하나 점거해서 이게 무슨 짓이에요.”

“누구 돈이긴 우리 표국 돈이지. 수가기문도 설치한다고 우리 집에 꽤 오래 있었다고 가족처럼 느껴지나 보오.”

“가…… 족이라니요.”

순간 제갈설아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뒷목을 덮은 머리칼 사이로 빨간 목이 보였다.

“뭐, 그래도 어느 정도 경고는 해놔야겠지.”

“네?”

“함부로 수적들이 헛짓거리 못 하게 해놔야 하지 않겠소.”

천무백은 그리 말하며 불쑥 걸어 나갔다.

오늘도 한건 했단 생각에 껄껄하며 웃던 수적들은 천무백이 다가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웬 어린놈이 칼을 찬 채 험악한 수적들 사이로 다가오니 시선이 집중됐다.

촤르륵!

그 순간 천무백이 허리춤에 찬 검대를 풀며 말했다.

“청성표국이다.”

묵직한 한마디가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잔잔한 파문으로 퍼졌다.

“……?”

“저 자식, 뭐야?”

“거래 끝난 거 아닙니까? 채주, 저놈들이 싸우자는 겁니까?”

갑작스러운 천무백의 행동에 당황한 건 양측 모두였다.

천무백이 은은히 기세를 내뿜으며 터벅터벅 걸어, 강변 근처까지 갔다.

검집채 검을 물 위로 강하게 내리 꽂았다.

멍하니 무슨 짓을 하는가 싶던 수적들의 눈이 찢어질 듯이 부릅떠졌다.

스스스.

강물에 새하얀 서리가 어렸다.

물 위로 떠오르는 서리를 중심으로 물이 조금씩 굳어졌다.

천무백이 내려찍은 검을 중심으로 마치 부채꼴처럼 극음지기가 퍼져나갔다.

쩌저저저적!

“어, 언다!”

“강이 언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봄이 지나고 이제 초여름이 다가오는 시점.

강이 얼 수는 없다. 그건 자연의 이치를 벗어나는 기적이다.

한데 사실이다.

눈앞에서 벌어졌으니까.

단숨에 강의 일부를 얼려버린 천무백이 검을 뽑아 들었다.

그리곤 우두머리에게 다가가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나는 천무백이다.”

“……!”

“천룡검협이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청성표국에 속해 있기도 하지.”

“허억!”

그제야 자신들이 그 대단한 천룡검협의 청성표국에게 통행세를 뜯었단 사실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어디 장강수로채도 아닌, 동네의 수적들인 자신들이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는가.

천무백은 확실하게 경고했다.

“이렇듯 강을 얼려버려 건너는 것도 쉬운 일이다. 그런데도 통행세를 낸 건, 원만한 관계를 만들고자 함이니, 앞으로 통행세 갖고 장난질하면…….”

뒷말은 하지 않아도 됐다.

채주는 천무백의 기세에 질려 바닥에 오줌까지 지렸으니까.

“며, 며며명심하겠습니다!”

장노가 혀를 내둘렀다. 이제 천무백이 없어도, 비단 장노가 없어도 청성표국은 호북성에서 표행하는 데 수적이나 산적들의 큰 방해가 없을 거다.

통행세만 적당히 내면, 아무도 건들 엄두조차 못 내리라.

비록 눈앞의 수적들이 한낱 동네에서 어깨에 힘주고 다니는 애들이어도, 소문은 금세 퍼지기 마련이니까.

“대단하시군요. 저런 빙공이라니.”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대체 언제 빙공까지……. 저한테 숨기시는 게 많았군요.”

장노가 짐짓 섭섭하다는 듯이 말하자 천무백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 사람들은 다 숨기는 게 있는 법 아닙니까. 안 그렇습니까? 장 총표두.”

“……그렇지요.”

무언가 의뭉스러운 천무백의 어조에 장노는 짐짓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백의 맑은 눈빛이 장노의 표정을 꿰뚫었다.

* * *

섬서의 화산이 있는 화음현이 그렇듯, 거대문파의 주위에는 큰 시가지가 형성되기 마련이다.

제갈량이 살던 과거 형주의 융중은 제갈세가가 들어선 이후 끊임없이 발전해 왔다.

대읍인 의창이나 무한과 비견하면 물론 손색은 있었지만, 거리 위를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을 보면 번성함을 알 수 있었다.

제갈세가까지는 이제 시가지를 지나면 적어도 반나절이면 충분히 가는 거리다.

한데 시간이 애매했다. 한 시진만 지나면 해가 질 시간.

저녁에 세가를 방문하는 건 명백히 예의가 아닌 법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객잔에 하루 묵고 아침 일찍 출발하자는 제안이 나와 그리 하기로 했다.

객잔에 짐을 푸는 와중 천무백이 불쑥 말했다.

“잠시 갈 데가 있소.”

“어딜요? 이제 곧 제갈세가예요.”

“무얼 좀 사야 하오.”

“산다구요? 어, 근처에 상점가가 있긴 한데. 뭘 살려고요?”

“근방에 큰 의약방이 있소?”

“의약방이라…… 네. 상점가를 쭉 따라가다 보면 약방들이 모여 있는 곳도 있어요.”

“잠시 좀 다녀오리다.”

“잠깐만요. 같이 가요.”

“……?”

“여기 초행이시잖아요? 여긴 제 앞마당이나 다름없다고요.”

고향에 와서 그런지 짐짓 어깨에 힘이 들어간 제갈설아가 허리춤에 손을 올렸다.

천무백이 답하지 않고 그저 멀뚱히 쳐다보자 제갈설아는 다소 쭈굴해졌다.

“그으…… 저 혹시 같이, 가면 안 되는 일인가요? 길 안내 잘 할 수 있는데.”

“아니, 뭐 그러시오. 쉬고 싶지 않소? 피로할 텐데.”

허락이 떨어지자 제갈설아가 고개를 맹렬하게 저었다.

“전혀요!”

“그럼 갑시다.”

둘이 어깨를 맞대고 한참을 걸었다. 제갈설아는 익숙한 거리를 같이 걷는다는 생각에 묘한 감정에 휩싸였다. 그 감정은 이내 간질간질해져서 뭔가 어색한 기류로 느껴졌다.

“그, 근데 뭘 사실려구요?”

“뭐, 선물 하나 사려고 하오.”

“선물이요?”

“제갈세가는 손님으로 방문하는 거니,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소.”

“어, 쟁자수들이 마차에 실려 온 게 그런 것들 아닌가요?”

맞다. 제갈세가에게 보내는 일종의 감사 인사 겸, 체면치레할 만한 선물들.

천무백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것들 말고 내 따로 태상가주께 선물을 드려야하지 않겠소.”

“할아버지한테요? 왜요?”

“잘 봐줍시사, 인사드리려면 뇌물이 필요하지.”

“……!”

같이 걷던 제갈설아는 순간 땅에 박힌 듯 멈췄다.

‘왜? 잘 봐달라고?’

할아버지가 손녀를 끔찍이도 아낀다는 얘기는 강호사람이라며 누구나 다 안다.

‘혹시 그런 거 때문에?’

제갈설아의 머릿속에선 온갖 생각이 휘몰아쳤다.

“뭐 하시오?”

천무백이 고개를 돌리자 제갈설아는 짐짓 붉어진 얼굴을 감추며 따라붙었다.

왠지 모르게 신난 듯한 발걸음에 천무백은 속으로 짐짓 어처구니가 없었다.

‘저번부터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은지, 혼자 슬퍼했다가 웃다가, 하긴. 어린 나이니 그럴 만도 하구나.’

제갈설아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 살려구요? 제가 추천해 드릴까요?”

제갈설아의 추천이면 태상가주의 취향이겠지. 하나 천무백은 순순히 선물하려는 속셈이 아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마음먹은 게 있소.”

“음, 그럼 우리 부모님껀 제가 추천해드릴게요”

“……부모님 말씀이오?”

“할아버지뿐 아니라 부모님한테도 잘 봐달라고 해야죠. 어머니랑 아버지도 얼마나 엄하신데.”

천무백은 그게 그런 의미가 아닌데,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내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제갈설아는 약방으로 향하는 길에서 고급 명주(名酒)와 깔끔하지만 고풍스러운 느낌이 가득한 장신구를 추천했다.

천무백은 그것들을 구매한 뒤 곧장 약방가로 향했다.

수어 개의 약방을 뒤져서 간신히 원한 걸 찾은 천무백은 사들인 호로병을 품에 넣고 말했다.

“자, 이제 돌아갑시다.”

“잘됐으면 좋겠네요.”

“나도 같은 생각이오.”

전혀 다른 생각이지만, 말은 똑같았다.

* * *

오전에 객잔에서 출발해 곧장 제갈세가로 향하니, 때마침 점심 무렵에 도착했다.

이미 소식을 받은 제갈세가는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제갈서후와 닮은 중년 사내와, 제갈설아와 똑 닮은 중년여인을 보고 천무백은 짐작했다.

‘제갈세가의 현 가주인 제갈여강, 그리고 그의 안주인이고.’

천무백은 말에서 내려 포권을 취했다.

“강호의 말학이 명성 높은 제갈세가의 대선배이시자 어른을 뵈어 그저 기쁠 따름입니다. 천무백이라고 합니다.”

“내 소문은 들었소, 천룡검협. 그대가 내 딸아이를 구해 준 일도 잘 들었고,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도 잘 알고 있소.”

제갈여강은 웃으며 말했으나, 어째 목소리에 뼈가 있었다.

천무백은 가벼운 미소로 그 기세를 흘려보냈다.

그러자 제갈여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하나 이내 그는 아쉬운 기색으로 말했다.

“내 반갑게 맞이하여 인사 하고 싶으나, 태상가주께서 오는 즉시 찾아오라고 하시는구려. 인사는 추후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태상가주부터 만나고 오시오.”

천하십대고수이면서도 강호에서 가장 높은 배분이니, 태상가주 제갈선의 말은 추상같았다.

천무백은 곧장 안내대로 후원으로 향했다.

가기 전에 제갈설아가 전음으로 조심히 조언했다.

‘할아버지가 워낙 괴팍하시긴 해도, 잔정은 많으신 분이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천무백은 그저 웃어보였다. 마치 그 모습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당부하는 모습인지라 제갈설아는 무언가 든든했다.

‘뭐, 그 양반에 대해 잘 아는 건 나도 마찬가지니.’

제갈설아는 본인이 제갈선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여기겠지만.

글쎄.

천무백은 웃으며 후원으로 향했다.

마치 어딘가의 절경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한 폭의 그림 같은 후원이 눈앞에 펼쳐졌다.

연못 위, 고아한 정자에 앉은 채 기다리는 백발의 노인은 마치 신선을 보는 듯 고아했다.

태상가주, 제갈선.

그가 천무백을 보고 입을 열려는 찰나.

휘익!

“……?”

천무백이 품에서 일전에 산 호로병을 꺼냈다.

그리고 거침없이 뚜껑을 열었다.

제갈선의 눈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천무백은 거칠 것 없이 안에 있던 내용물을 후원에 흩뿌렸다.

시커멓고 녹색의 정체불명의 액체가 후원에 번졌다. 깨끗하고 맑기 짝이 없던 연못이 이내 고약한 악취를 풍겨내며 오염되듯 검게 부글거리며 끓었다.

그러자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수많은 진법과 살벌한 기관들이 그대로 눈앞에 드러났다.

“……!”

제갈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천무백이 웃으며 포권을 취했다.

“강호 말학이 괴이천뇌(怪異天腦) 어르신께 인사 올립니다.”

그런 그를 한참이나 노려보던 제갈선은 갑작스레 폭소를 터뜨렸다.

“창천검신, 그 어르신의 후인이라더니. 하는 짓이 아주 똑같구나!”

세상 즐거운 웃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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