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8화>
128. 하긴, 예쁘긴 하지.
수가기문도 설계는 끝났다.
“이걸 수가기문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장인들이 공사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갈설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약식이니, 본래의 수가기문도에 비교할 수는 없다.
지금 설치되고 있는 건 약식도, 본래의 수가기문도의 정립된 형식과도 달랐다.
청성표국 맞춤형 수가기문도라 해야 할까.
아니면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할까.
“그래도 좋은 공부가 됐어요. 이걸 바탕으로 새로운 기관진식도 개발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제갈설아의 눈이 반짝였다.
시야가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천무백의 의견에 갈등을 빚고 투닥거렸지만, 결과물을 보니 아주 흡족했다. 이대로만 완성된다면 청성표국은 무당이나 해남보다도 더 두꺼운 철옹성이 되리라.
“이제 슬슬 떠나도 될 것 같은데.”
“네. 설계는 끝났고, 이제 공사만 시작하면 되니까요.”
“공사가 안 끝났는데, 소저가 떠나도 되겠소?”
“물론이에요. 공사 중간중간 문제점이 생겨도, 여기에 온 학자들은 세가에서 내로라하시는 기관진식의 전문가분들이세요.”
제갈설아는 반론의 여지도 없이 단호했다.
마치 이번에 반드시 무당으로 같이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준비합시다. 그제 표행을 나갔던 장노가 왔으니, 곧 출발일이 잡힐 거요.”
“네. 알겠어요.”
“우선 제갈세가에 들려 소저의 양친과 조부님께 인사를 먼저 같이하고, 다소 실례지만 빠르게 무당으로 가야 할 것 같소.”
제갈설아가 순간 움찔하며 시선을 내렸다.
“네, 네네. 그래야죠.”
현재 가장 급한 건 무당파의 일이었다.
비다라는 여러모로 무서운 적의 사술이다.
강시 따위와는 비교도 안된다.
비다라가 단순한 정파 무인도 아닌 무당의 전대 장문인이다?
혈귀곡이 무당의 전대장문인을 죽였다는 뜻인데, 이게 말처럼 쉬운 이야기가 아니다.
무당 본산에 있는 전대 장문인을 어찌 죽일 수가 있었을까.
‘무당파 내에 암약하고 있는가?’
그럴 수도 있다.
아니면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 하나 떠오른다.
‘저쪽에 붙은 배반자가 있을지도 모르지.’
입안이 씁쓸해진다. 사실 정파라고 늘 정의롭기만 했던 건 아니다. 거대한 외부의 적이 없이 평화의 시기가 오래 이어지면, 안에서 곯아지고 썩어들기 마련이다.
그런 과정을 몇 번 걸치고, 다시 자성하며 정의로워지고, 그러다가 또 썩어 문드러지고.
세상사가 그렇듯, 정파의 역사도 그러했다.
모든 문파가 소림처럼 늘 사시사철 똑같을 수는 없었다. 하물며 그 대단한 소림도 한때는 변질했던 적도 있으니까.
만일 그런 가정이 사실이라면.
‘큰일이지. 아주.’
천무백이 생각하는 공동전선의 한 축이 되어줘야 하는 무당이다.
이번 무당행이 단순히 들어온 의뢰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함을 느꼈다.
‘제갈세가도 중요하지.’
그들의 행동도 촉구해야 하니까.
제갈서후가 장담은 했지만, 근신 상태이기도 하고. 제갈세가는 권력이 여러모로 분산된 상태다. 현재 가주부터해서 뒤로 물러난 태상가주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하니 제갈서후의 장담을 믿고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적극적으로 나서야 했다.
가령 태상가주나 가주의 확답이 필요했다.
그를 위해 제갈세가에 한 번쯤은 방문해 볼 생각을 가졌기에, 지금 가는 길에 들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천무백이 그렇게 짧게 스쳐 가는 상념으로 얼굴이 진지해지는 반면,
제갈설아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해졌다.
‘부모님하고 할아버님한테 인사를 같이 드린다고?’
아니, 그야 세가를 방문하는 손님이니 당연한 일인데.
왜 이렇게 뭔가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까. 뭔가……조금 부끄러웠다. 집을 찾아가 같이 인사를 드린다니. 제갈설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런 둘을 보고 두어 발짝 물러나 있던 점박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두 분 다 심각한 표정이야?”
점박이가 유아에게 물었다. 천무백과 제갈설아가 세가 내에서 같이 있으니, 둘을 따라다니는 몸종인 둘도 안면을 트고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다.
유아가 제갈설아의 얼굴을 보고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아가씨, 단단히 빠지셨네.”
스스로 감이 날카롭다고 여기는 유아는 제갈설아가 퍽 귀여웠다.
* * *
“오랜만에 뵙습니다. 도련님, 많이 헌양해지셨군요.”
“장노, 오셨습니까.”
장노가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잠깐이나마 천무백의 수련을 지도해줬던 장노는 천무백의 변한 기도에 감탄하다 못해 경악했다.
‘강호에 천룡검협의 위명이 엄청나더니. 과연, 천재셨구나.’
천무백의 수련을 보고 순식간에 변하는 모습을 보며 얼마나 경악했던가.
그래서 천문경에게 천무백은 천재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했었다.
천문경은 그 말을 다소 믿지 않았지만, 보라. 결국은 사실이지 않은가. 천무백은 저토록 어린 나이에 강호에 어마어마한 위명을 떨치는 협객이 되었으니까.
한편으론 부러움도 생겼다. 저 어마어마한 재능에.
하나 질투를 하기엔 그의 나이가 벌써 환갑을 넘어 고희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노는 장성한 손주를 보는 듯한 흐뭇한 시선으로 천무백을 봤다.
“피곤하시지 않겠습니까. 표행을 다녀오자마자, 곧장 제갈세가와 무당으로 향해야 합니다.”
“허허. 괜찮습니다. 비록 늙은 몸이나, 그래도 꾸준히 단련하여 산과 강을 넘고 건너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누님에게 들으셨지요? 무당의 의뢰는 아마 전적으로 제가 해결할 것 같습니다. 하니, 장노께선 호북에서 표국의 지부를 설치하는 데 힘을 써주세요.”
“알겠습니다.”
“제가 제갈세가와 얘기해 될 수 있으면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하면 일이 쉽게 풀릴 것입니다.”
장노와 간단한 해후를 마친 천무백은 곧장 여정 준비를 했다.
능허도 준비를 마치고 표국에 와서 기다리는 상태였다.
천무백은 점박이를 찾았다.
또 떠난다 하니 이미 짐작한 듯 짐짓 대담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으리라.
이미 떠날 걸 알고 있었을 거다. 그래서 점박이는 천무백이 표국에 머무르는 동안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니 떠나기 전에 제대로 인사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점박아.”
“힉, 도, 도련님.”
깜짝 놀라는 모습에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하냐, 너.”
보아하니 점박이는 허릴 숙여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비단으로 짠 보자기 같은 것이었는데, 천무백은 코끝을 찌르는 향긋한 향에 무엇인지 알았다.
“향낭 아니냐?”
“그것이…… 네.”
“보아하니 네가 차려고 만드는 건 아닌 거 같고, 나한테 줄 만한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그게…….”
점박이는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가만두지 않았다. 천무백은 그 시선이 이리저리 닿는 곳을 보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저 멀리. 담장 근처에서 막바지로 장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는 제갈설아가 보였다.
천무백은 짐짓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이 맹랑한 녀석. 나랑 같이 있고 싶어서 날 따라다닌 게 아니구나?”
천무백의 짐짓 목소리를 높이자, 점박이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요! 도련님이 곧 떠나니까 제가 아득바득 도련님 따라다닌 겁니다!”
“그래, 그래.”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튀어나왔다. 그러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었다. 확실히 표국 내에 있으니 실없는 웃음이 자주 튀어나오곤 했다. 늘 날카롭게 서 있던 머릿속 신경이 차분해지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이래서 편안히 쉴 곳이 언제든 필요하지.’
천무백은 그리 웃으며 점박이와 향낭을 바라봤다.
제갈설아를 처음 볼 때부터 눈도 떼지 못했던 놈이니, 그럴 만도 하다.
천무백은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제갈설아를 흘깃 보곤 잔뜩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점박이에게 말했다.
“참 예쁘긴 해, 그치?”
“그, 그게…….”
“점박아. 내 돈을 더 줄 테니, 향은 사향노루의 향으로 바꿔오거라. 그 향이 더 잘 어울릴 듯하다.”
천무백은 당황해하는 점박이의 얼굴을 즐겼다.
* * *
여정에 나서는 행색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무당의 유수는 임무를 성공시켰단 생각에 얼굴이 조금은 평안해 보였다.
청성표국에선 장궤 한 명과 장노를 비롯한 표사들, 그리고 마차 한 대와 쟁자수 여럿이 따라붙었다.
제갈세가에선 제갈설아와 시녀 유아, 호위무사론 무영이 따랐다. 나머지 학자와 장인들은 표국에 남아 공사를 끝내기로 했다.
천문경과 천유하가 마중을 하는 한편.
천무백은 마지막으로 점검을 하고 제갈설아에게 물었다.
“수가기문도는 더 이제 확인할 필요 없소?”
“네? 네. 네. 그, 맞아요.”
“왜 말을 더듬소?”
“그, 그야 이제 떠나니까요.”
“……?”
천무백은 제갈설아가 자신을 쳐다도 못 보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으나 이내 점박이를 보고 턱짓했다.
그 의미를 알아들은 점박이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때마침 제갈설아도 점박이에게 향했다.
마치 점박이가 무얼 하려는지 아는 것처럼.
점박이가 쭈뼛쭈뼛하며 품에서 향낭을 꺼내 다가왔다.
천무백이 그 모습을 마치 노인네가 바라보는 듯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한데 점박이는 제갈설아를 스쳐 지나가 뒤에 있던 유아에게 향했다.
“저, 이, 이거.”
“응? 뭐야? 나한테 주는 거야?”
유아가 깜짝 놀라 점박이의 선물을 받았다. 점박이는 그저 바보처럼 머쓱하게 웃었다.
“……허.”
천무백은 저도 모르게 실소했다.
‘하여간, 사람 마음은 오래 살아도 모르는 법이라니까.’
* * *
호북으로 향하는 길은 평탄했다. 잘 닦인 관도를 통해 빠르게 움직였다. 하남성은 청성표국의 확실한 영향력에 있었기에 관부의 통행도 빠르게 이뤄졌다.
관도를 타고, 수로를 통해 배를 타고.
혈사문의 역병이 사라진 후엔 혼란이 많이 가라앉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어쩌면 지루하게 느껴질 정도로 평안하기 짝이 없었다.
한데 제갈설아는 무언가 마음이 복잡했다.
“좋니?”
왠지 모르게 불퉁한 목소리가 유아에게 향했다.
유아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뭐가요, 아가씨?”
“그거 향낭 말이야.”
“아아. 이거요?”
유아가 피식 웃었다.
“뭐, 비싼 천도 아니고 조오금 조잡하긴 한데. 그래도 안에는 사향이더라구요! 향은 너무 좋아요.”
“그래…….”
향낭이 무엇이 대수겠는가.
사실 제갈설아는 꽤 고수다. 후기지수를 논할 때 제갈세가의 남매를 빼놓지 않는다. 진법과 기관에 능해 개인의 무력이 다소 저평가되는 경향이 있을 뿐이지, 개인의 무력도 충분히 우수한 편이다.
온 신경만 집중하고 있으면, 꽤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소리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청각이 좋았다.
그리고 제갈설아는, 주위에 천무백이 나타나면 저도 모르게 그에게 모든 신경을 쏟았다.
‘나한테 하는 얘기인 줄 알았는데…….’
제갈설아는 휙 고개를 돌려 천무백을 바라봤다.
능허와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왠지 모르게 불퉁한 마음이 불쑥 솟구쳐서 가까이 다가갔다.
약간 성이 난 걸까. 당돌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유아가 이쁘긴 하죠?”
갑작스러운 물음에 천무백은 당황도 할 법한데, 멀뚱히 유아를 쳐다보곤 피식 웃었다.
“점박이 녀석이 생각보다 눈이 높은 편이오. 그러니 이쁜 거겠지.”
“……그쵸.”
제갈설아의 당돌했던 목소리가 살짝 힘을 잃은 듯 처졌다.
“뭐, 그래도 다행인 일 아니오.”
“네?”
뜻 모를 말에 제갈설아가 반문했다.
“난 점박이가 소저에게 반한 줄 알았소. 그래서 이 녀석이 헛된 꿈을 꾸는구나, 싶어 안타깝기도 했는데. 어쩌면 다행인 일이니까…….”
순간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어…… 그럼 저 향낭 선물도?”
“응? 그래. 난 유아가 아니라 소저에게 주는 것인 줄 알았소. 해서 들어간 향도 사향으로 내가 바꿔 줬더만…….”
순간 제갈설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밝아지자 천무백이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 아니에요. 그건 그렇고 이제 호북성에 다 왔네요!”
묘하게 높아진 어조였지만 천무백은 굳이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쓰기엔 그의 머릿속을 툭툭 건드리는 다른 게 있었으니까.
“이거야 원. 그간 너무 평안했나. 마중 인사가 나와 있구려.”
호북성으로 접어드는 강.
일단의 무리가 강 위를 점거한 채 기다리듯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