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7화>
127. 연정이란 그런 것이다.
천무백은 유수를 찾아갔다.
유수는 천무백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침착하게 반겼다.
“무량수불, 천공자. 혹여 결정이 내려진 겁니까?”
“내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소도장.”
“예.”
“비다라가 된 사람이 누굽니까?”
“…….”
유수의 눈동자가 거세게 진동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에서 정곡을 찔렸음을 느꼈다. 천무백은 틈도 주지 않고 거칠게 몰아붙였다.
“무당 인물 중 누가 비다라가 되었는지 확실하게 말하지 않으면, 저는 이번 일에 끼어들지 않겠습니다. 천룡검협이란 별호를 들먹이고, 강호의 의와 협을 이야기하더라도, 신의가 바탕이 되지 않는 한 갈 생각이 없습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단호한 어조다.
천무백의 눈썹에는 서리가 가라앉았다. 북풍한설이 휘몰아쳤다. 하단전에서 흘러나온 극음지기가 주위를 급격하게 냉각시켰다.
이어 경천혼공이 운용되며 주위 외기를 짓눌러 유수를 압박했다.
유수는 그리 대단한 무인이 아니다.
물론 일류 막바지를 바라보는 수준이지만 천무백이 작정하고 몰아붙이는 기세를 이겨 낼 수가 없다.
창백하게 질린 그의 얼굴에 온갖 고민이 스쳐 갔다.
천무백이 한층 더 압박했다.
“무당 장문인이 최근 세간에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소.”
“……!”
“그분이시오?”
유수는 숨이 멎을 듯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간신히 내뱉었다.
얼굴에 체념의 빛이 떠올랐다.
천무백은 그 표정을 보고 자신의 예상이 맞았다고 여겼다.
한데, 이어지는 대답은 오히려 예상을 훨씬 벗어나는 것이었다.
“전대장문인(前代掌門人)께서 변을 당하셨습니다.”
* * *
‘무당에 가야 한다.’
천무백이 그리 결심했을 때.
능허가 표국에 찾아와 그간 소식을 전했다.
“태룡방이 주최하는 흑회의 날짜와 장소가 정해졌습니다.”
“언제인데?”
가장 중요한 문제다.
무당으로 떠나는 일도 흑회에 참여하는 바도 둘 다 중요하다.
만일 시간이 겹친다면 무당으로 향하고, 흑회는 능허만 보낼 생각이었다.
무당은 천무백이 직접 나서야 했다. 반면 흑회는 일단 태룡방의 동태를 확인하는 목적이다. 능허라면 조금은 불안하더라도 충분히 맡길 수 있으리라.
하나 다행히도 그럴 필요는 없었다.
“앞으로 넉 달 후, 복건성에서 열립니다.”
“넉 달후, 복건이라.”
“가는 데만 족히 한 달하고도 반은 걸리니, 석 달 조금 안 남았다고 보면 되겠죠.”
복건성은 특별히 강력한 강호문파가 두드러진 곳이 아니다.
중경성도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없었지만, 그래도 비검문이란 걸출한 문파와 흑도의 적룡방이 꽉 쥐고 있지 않았던가.
반면 복건성은 말 그대로 강호의 전국시대라고 표현할 정도로 난잡했다.
흑도도 흑도대로 난립했고, 사파도 사파대로 난립했다.
정파도 정파대로 제각각이었다.
어느 한 세력이 일통하지 못했다. 중원에서 비교적 변방에 있어서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곳이니 태룡방이 흑회를 열 장소로 정했으리라.
그곳을 바탕으로 흑도련(黑道蓮)을 일으켜 세울 생각일지도 모른다.
천무백은 결정을 내렸다.
“그럼 호북으로 간다.”
그러자 능허가 고개를 갸웃했다.
“강소성으로 빠져서 배를 타고 해안선을 쭉 내려가는 게 빠르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면 한 달 반이 아니라 한 달 안에 도착할 겁니다.”
“호북에 들러서 일 하나 먼저 처리하고.”
천무백은 무당의 의뢰에 관해 설명했다. 능허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또 무슨 일을 만들어서 하십니까?”
“어차피 해야 할 일이다.”
“후우! 그러면 언제 갑니까?”
“수가기문도가 어느 정도 진척되는 걸 보고 가야 하고, 장노가 돌아온 이후에 가야 하니 한 오 일 후에 움직이면 될 듯싶다.”
“준비하겠습니다.”
웬일로 순순하게 대답하는 능허의 태도에 천무백의 눈이 동그래졌다.
“웬일로 납득이 빨라?”
“주군. 내 하나만 물어봅시다.”
퍽 진지한 능허의 태도에 천무백도 고개를 갸웃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진지한 태도를 일전처럼 우습게 넘길 수야 있겠는가.
특히 능허의 얼굴에 새겨진 단호함을 천무백은 읽을 수 있었다.
왠지 낯설지 않은 표정.
‘무언가를 지켜야 할 때의 얼굴이군.’
저런 표정을 짓는 무인들을 수도 없이 봐왔다.
다만 능허에게서 저런 얼굴을 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무슨 심경에 변화가 있었던 걸까.
“지금 주군이 무당으로 가는 것도, 복건의 흑회에 참여하는 것도, 모두 그 혈귀곡이란 놈들을 도려내기 위함인 거, 맞지 말입니다?”
“그래.”
“혈귀곡은 분명 강호에 위협이 될 악적들이고요.”
“그건 너도 봐서 알지 않느냐. 그놈들이 지금껏 저질러온 일.”
“그쵸. 그렇죠. 그놈들이 강호를 절반쯤 차지한다면, 개판이 되겠죠?”
“정마대전만 떠올려보면 개판이 문제가 아닐 거다. 난리가 났으니까.”
“하면…… 혈귀곡을 없애야 내가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천무백은 능허를 빤히 쳐다봤다.
“주군이 지금 앞장서 나서는 일은, 솔직히 말해 강호의 평화를 위해서는 아니지 않습니까.”
하, 이 자식. 눈치는 더럽게 빨라요.
천무백은 고소를 삼켰다.
청현진인을 비롯해 소림이나 비검문, 그리고 제갈세가.
하물며 종남까지 지금 천무백의 행적을 두고 강호의 평화를 위한 협객행이라 평가했다.
누구나 천무백을 협객이라 여긴다.
본인의 이익을 도외시하고 오로지 강호의 협과 의를 위해 칼 한 자루 끼고 칼날 위를 걷는다고 생각한다.
아니다. 능허의 말대로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내가 본 주군은, 솔직히 말해서 그리 정의심에 투철하지도 마음속에 강호를 위한 커다란 대의를 품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소.”
“관상학이라도 익혔냐.”
“혈귀곡 잡는 것도, 다 본인을 위해서 아니요? 주군과 주군의 것, 그리고 주군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솔직히 말해 천무백은 그쯤 돼서 능허에게 감탄이 들었다.
물론 천무백이 각성 이후 가장 오랫동안 붙어 다닌 사람이니 가장 잘 파악한 사람이긴 한다. 하나 제 속을 들여다본 듯한 능허의 태도에 감탄했다.
“네 말이 맞다. 오로지 내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천무백의 목소리도 진지해졌다.
그랬다.
실제로 첫 시작은 혈사문이었다.
천무백이 언제든 쉴 수 있는 자신만의 공간을 지키기 위해 혈사문을 족쳤고, 그 뒤로 혈귀곡이란 거대한 암중세력이 모습을 드러냈다.
천무백은 숱한 강호경험으로 필연적임을 느꼈다.
저들을 없애지 않는 한, 자신이 검극을 향해 가는 길이 위태로워지리라고.
싸워야만 검극을 향할 수 있으리라고.
이건 세간의 사람들 뜻대로 강호의 협과 의를 위함이 아니다.
천무백이 만들어 놓은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고, 곧 본인이 검극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능허는 그걸 꿰뚫어 봤다.
능허의 눈치가 대단해서? 아니다.
“나도 이제 그게 무슨 마음인지 알겠습니다.”
능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켜야 할 것이 생겨서 그런가 보오.”
“…….”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명성이 생긴다는 건 곧 적이 생긴다는 거지.”
능허가 씁쓸하게 웃었다.
“독안사 능허. 크으. 협객, 독안사라니. 우스운 이야기 아니오.”
의도치 않게 능허도 강호에 이름이 알려졌다.
천룡검협과 함께하는 협객으로.
명성이 생겼다. 새로운 명성은 필연적으로 적을 만든다. 능허는 혈귀곡의 적이 됐다. 그러니 그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선 혈귀곡을 없애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하니 빨리빨리 합시다. 혈귀곡이든 뭐든, 이 개잡놈들 다 죽이자고요.”
천무백이 씩 웃었다.
목적이 일치한다.
그러면 함께 나아갈 수 있다.
“오냐. 철저히 준비하거라. 이번 강호행은 이전보다 더 바쁘고, 위험할 테니.”
천무백은 능허가 지켜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게 누군지 대충 짐작이 갔다.
‘설영이겠지.’
하여간, 뒤늦게 찾아온 연정이 참 무섭다니까. 저 뺀질거리는 능허를 의욕적으로 만들다니.
연정이란 그런 것이다.
* * *
“저도 무당으로 갈게요.”
제갈설아의 갑작스러운 선언에 놀란 건 천무백이 아니라, 그녀를 따라온 시녀인 유아였다.
“엑? 아가씨!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천무백은 제갈세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제갈설아의 독단임을 짐작했다.
“어째서 무당으로 향하려고 하오? 이번 일은 무당파가 청성표국에 의뢰한 일이니, 소저는 관련이 없소.”
하나 제갈설아는 당당하게 말했다.
“오라버니에게 듣기론 혈귀곡과 관련된 일엔 제갈세가도 함께하기로 들었어요. 그러니 저 역시 제갈세가를 대표해 혈귀곡을 추적할 거예요. 그 시작은 무당에서부터 차근차근 밟아갈 거고요.”
“흐음.”
천무백이 눈을 가늘게 뜨자 제갈설아는 움찔했지만, 당당한 표정을 풀지 않았다.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따라오지 말라 해도, 제갈설아가 제갈세가의 의지라면서 무당파로 향한다면 그걸 말릴 수도, 말릴 명분도 없다.
더구나 천무백으로서도 제갈세가가 행동을 개시하면 좋은 일이다.
굳게 약속한 제갈서후가 근신 처분을 받아서 제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상황.
하나 제갈설아가 움직이면, 그것도 태상가주가 끔찍이도 아끼는 손녀가 직접 움직이면 일은 또 달리 바뀌게 흐르리라.
오히려 천무백으로선 불감청 고소원이었다. 바라던 바가 아닌가.
“뜻대로 하시오.”
제갈설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하나 반론을 제시한 건 다름 아닌 시녀인 유아였다.
“아가씨. 가주님 허락은 받으셔야 하지 않아요?”
“……!”
천하의 제갈설아도 제 아버지는 무서운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으음. 가는 길에 들러서 허락받지 뭐!”
“해 주실까요?”
“…….”
제갈설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평소였으면 허락을 받아낼 자신이 있다.
문제는 당장 얼마 전에 칠면염라에게 납치당하는 초유의 사태가 있지 않았는가.
그런 사태를 겪은 이후에도 밖으로 나가는 걸 허락할까.
수가기문도 설치야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내용이고, 신의 문제도 있으니 지켜야 하는 일이다. 더구나 세가 내에서 기관진식에 가장 해박한 이가 태상가주 다음에 제갈설아 본인이었으니, 청성표국에 오는 건 그다지 문제가 없었다.
하나 무당으로 가서 혈귀곡에 대해 자세히 파헤치는 건 아무래도…….
‘아니지, 잠깐만!’
아버지 허락을 못 받으면 할아버지 허락을 받으면 되는 게 아닌가?
물론 손녀를 끔찍이 아끼긴 하지만, 위험한 곳에 쉬이 보낼 만큼 제갈선도 무르진 않다. 조른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그러니까…….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쳐다봤다. 할아버진 유난히 천무백에게 관심을 드러냈다. 흥미로움을 넘어 신기해했다. 하니 천무백이 좀 도와준다면야…….
‘눈치가 없는 건 아닌데.’
오히려 눈치가 엄청 빠른 사람이다.
한데 진작 상황을 눈치채고도 자신의 기준에 도움이 되거나 맞지 않는다고 여기면, 멀뚱히 있는 게 바로 저 천무백이다. 의뭉스럽게 말이다.
하니 제갈설아는 급히 시선을 돌렸다.
밖에 나와 지켜보고 있던 천문경과 천유하.
특히 천유하와 시선을 마주치자, 천유하가 알겠다는 듯 눈가가 따뜻하게 호선을 그렸다.
“무백아.”
“네, 누님.”
“무당으로 향하는 김에 제갈세가에 들르는 건 어떻겠니?”
“…….”
“이번 무당행에 장노께서 같이 가실거야. 무당의 의뢰는 무백이 네가 중심이 되겠지만, 장노를 비롯해 표국 사람들이 호북에 지부를 낼 준비를 할 거고. 그러면 가는 길이니, 제갈세가에 들러 인사라도 하는 게 괜찮을 것 같구나. 비록 계약이긴 했지만 수가기문도를 설치해 줬으니, 그에 맞는 응당 감사함을 드려야 하고.”
천유하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어차피 무당산으로 향하는 길목에 제갈세가가 있으니 들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표국에선 호북에 지부를 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이번 기회에 제갈세가의 비호를 받아 지부를 세우겠단 의미기도 했다.
그런 역할을 같이 갈 장노가 하겠지만, 천무백의 역할도 중요해진 법이다.
“네, 알겠습니다.”
“마침 수가기문도 설계가 다 끝났고, 이제는 장인들이 설치해야 하는 공사만 남았으니, 제갈소저도 여유로울테니, 같이 가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겠니?”
천유하가 빙그레 웃자 제갈설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순간, 천무백은 제갈설아의 입 모양을 봤다. 독순법까지 익힌 천무백이다.
‘고마워요, 언니.’
천무백은 순간 헛웃음이 나왔다.
‘언제 친해진 거야.’
천무백은 천유하가 작은 두 주먹을 꽉 쥐며 ‘힘내요!’하고 중얼거리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