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6화>
126. 뭔가 더 있는데.
천무백이 곧장 행한 곳은 천문경의 집무실.
이곳에는 비단 천문경뿐만 아니라 현재 표국의 핵심인사들이 들어서 있었다.
부국주인 천유하, 각주인 허성과 추자성이란 중년의 표두. 그리고 세 개 단의 두 명의 단주가 있었다.
자리에 없는 마지막 각주인 장노는 표행을 맡아 아직 돌아오기 전이었으며, 단주도 마찬가지였다.
그 외에도 장부를 관리하는 대장궤와 쟁자수들의 우두머리인 상자수 유노인이 있었다.
천무백은 그 모습에 새삼 청성표국이 성장했음을 느꼈다.
일전만 해도 천문경과 천유하가 거의 다 일을 처리했고, 기껏해야 장노가 손을 보태지 않았던가.
이제는 규모가 커진 만큼 일을 분담한 상태였다.
한데 그들보다 천무백의 시선을 끈 건, 한쪽에 바르게 앉아있는 젊은 사내였다.
머리에 태극건을 두른 채 단정하게 내린 머리칼과 새하얀 도복을 보면, 그가 바로 무당에서 온 사람임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찾으셨습니까.”
천무백은 시선을 떼곤 천문경에게 고개를 숙였다.
“무백아, 여기는 무당에서 온 유수 소도장이시네.”
유수라 불린 청년 도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합장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하신 천룡검협을 만나 이 못난 도인이 개안하는 기분입니다. 반갑습니다, 무당의 유수라고 합니다.”
“과찬이십니다. 천무백입니다.”
천무백이 천문경을 다시 바라보자, 천문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당파에서 의뢰가 들어왔다. 한데 네가 필요한 일이라 네 의견을 듣기 위해서 이 자리에 불렀다.”
“제가 필요하다고요?”
“그래. 나는 무슨 일인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더구나. 네가 직접 들으면 좋겠다.”
천문경의 시선을 받은 유수가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무당에서도 여러 통로를 통해 혈귀곡과 그를 추적하는 천룡검협의 강호행에 대해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마 저 여러 통로는 명문정파끼리 공유하는 일종의 비선과 개방을 뜻하는 것이리라.
개방이 천무백을 도와주는 만큼, 개방도 천무백에게서 필요한 정보를 얻어 갔다.
정보들은 곧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로 대표하는 정파로 흘러 들어갔다.
천무백이 의도한 바였다.
혈귀곡에 대한 정보를 계속해서 그들의 비선과 개방을 통해 퍼뜨려서 경각심을 일깨우는 것.
다소 굳은 얼굴의 유수를 보니, 그런 의도가 어느 정도 통한 듯싶었다.
“특히 이번 중경성과 안휘성에서 발생한 일명 ‘비다라’라는 사술을 통해 벌어진 참사에 대해 본 무당은 극히 위험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다라가 거론되자 천무백의 눈이 가늘어졌다.
혈귀곡에 대한 정보는 이제 천무백이 추적한 만큼은 퍼졌으리라.
가령 마류칠종 중 암종이 끼어있다. 같은 정보.
한데 그런 것들보단 비다라를 먼저 언급한 모습을 보니 알만했다.
무당에서 의뢰해 온 게 무엇인지.
“무당의 제자 중에 비다라가 된 사람이 있나 보구려.”
“······!”
천무백이 끼어들자 유수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좌중에 있는 사람들은 비다라에 대해 체감하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한 얼굴이었지만, 유수는 정곡을 찔린 듯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움찔했다.
잠깐 뜸을 들인 뒤 유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한데 중경성에서 일부 비다라를 제어하고 억누르는 데 성공했단 소식을 듣고, 무당에선 비검문주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비검문주는 날 찾으라고 했겠구려.”
“맞습니다. 하남의 천룡에게 도움을 구하라. 비검문주가 전해온 서찰에 적힌 내용입니다.”
천무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히려 생각보다 일이 잘 풀리게 된 셈이었다.
‘하남에서는 소림, 섬서에서는 화산과 종남. 물론 종남은 조금 껄끄럽긴 하지만······. 그리고 호북에선 제갈세가에 이어 무당파까지.’
구파일방에서 네 개의 문파, 그리고 안휘성의 남궁세가도 비다라에게 피해를 보았을 터이니 오대세가 중 두 개 세가가 혈귀곡에 원한이 생긴 셈이다.
천무백이 원했던 공동전선이 절반쯤 이뤄진 것이나 다름없다.
특히 무당파가 확실히 참여한다면 의미는 남다르다.
무당도 정마대전 때 피해가 큰 문파 중 하나다.
하여 백도무림의 양대 거두였던 소림과 무당이 지금은 비록 세가 약하더라도.
그들의 명성만큼은 오히려 하늘을 찌르는 게 작금의 강호였다.
북숭소림 남존무당(北崇少林 南尊武当).
중원에 있어 두 문파의 존재감은 절대적이다.
정마대전에서 스러져간 영웅들이 신격화되는 지금에서야 더더욱.
하니 천무백은 무당파를 확실하게 이쪽 전선으로 끌어들일 필요성을 느꼈다.
때마침 기회가 온 셈이다.
“어떤 도움이 필요한 겁니까?”
“비다라가 된 무당파의 인물을 구해 주십시오.”
“저 역시 완전한 치료는 불가능입니다. 중경성에서 그랬듯이, 약간의 제어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무당에서도 지금 어느 정도 그 살기를 억누르고 제어에 성공했습니다. 다만 한계가 절실하니, 같이 힘을 합치자는 게 무당의 뜻입니다.”
그 말에 천무백의 눈이 의외라는 듯이 크게 떠졌다.
‘이미 제어하고 있다고?’
하면 어느 정도 성과가 있단 얘기다.
‘하긴, 무당파라면 세속적인 화산, 종남과 달리 더 도가적이지 않은가.’
그런 무당이라면 도력이 깊은 도사들이 분명 존재할 터.
그들이라면 어느 정도 선기를 느끼고 다룰 수 있으리라.
비단 선근경의 선기가 아니라, 선기, 그 자체만으로 비다라를 제어할 수 있다면······.
‘어쩌면 나에게도 기회가 될지도 모르겠군.’
천무백은 숱한 전생을 살았지만, 도사가 된 적은 없다.
그의 방대한 지식 속에도 선기와 관련된 지식은 상대적으로 부족할 따름이다.
하여 지금 남은 네 가지 성물을 찾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지 않았는가.
한데 그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막막하기도 하고. 당장 천무백도 어디부터 움직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 상황이었으니까.
‘무당에 가면 답이 보일지도 모르겠어.’
비단 성물이 아니더라도, 선기를 이용하는 방안.
비다라를 자체적으로 제어할 줄 아는 도인들이라면 무언가 있을 터.
천무백은 그리 여기며 눈을 빛냈다.
“그래서 본 무당에서 천룡검협을 모셔, 지혜를 구하고자 합니다.”
“나 역시 비다라를 완벽히 제어할 수 없습니다. 그나마 제어할 방도가 있을 뿐이지. 하지만 지금의 무당과 머리를 맞대면 더 나은 방안이 나올지도 모르겠군요.”
무당파의 의뢰는 천무백을 무당으로 데리고 와 비다라를 제어할 방법을 찾는 것.
하나 천무백은 무언가 묘하게 신경을 건드리는 걸 느꼈다.
‘뭔가 더 있는데.’
천무백은 유수의 표정을 면밀하게 살폈다.
무언가 더 있었다.
때문에 천무백은 확답을 주지 않았다.
“하나 이는 청성표국을 통해 정식으로 들어온 의뢰이니 저 홀로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여기에 계신 표국의 어른들과 얘기를 나눈 후 답을 내드리지요.”
완곡한 축객령을 알아들은 유수는 합장하며 물러났다.
* * *
청성표국은 대체로 천무백의 의견을 따르겠단 뜻을 표방했다.
전적으로 표국의 힘보단 천무백이 필요한 의뢰였으니까.
그렇다고 표국에서 손을 놓은 건 아니다.
“만일 일을 진행한다면 가용할 수 있는 인력이 부족합니다.”
“이미 여러 의뢰가 들어와 있고, 곧 이행할 예정입니다.”
“해당 의뢰를 천 공자께서 책임진다 해도, 무당이니 적어도 각주급은 가야 합니다.”
“허 표두와 추자성 표두도 다음 임무가 정해져 있으니······.”
“장노께선 곧 복귀하지 않으십니까?”
“으음. 하면 쉬지도 못하고 곧장 일을 치르는 것인데······.”
천무백은 조용히 회의를 지켜봤다.
아니, 사실 회의에 집중하지 않고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무언가 있다. 단순히 비다라를 제어할 방법을 찾는 게 아니야.’
물론 그게 거짓은 아니리라.
하나 아직 밝히지 않은 무언가 하나가 더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천무백의 직감이 말했다.
더구나 청성표국을 통해 공식적으로 의뢰해 왔다.
이는 천무백 홀로 거절할 수 없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무당파가 의뢰해 온 것이지만, 어조는 간곡한 부탁이나 다름없었다.
청성표국 입장에서 어떻겠는가?
의뢰를 가장한 부탁을 들어주는 것이다.
하면 확실하게 무당파와 연을 맺을 수 있다. 청성표국이 최근 확장을 거듭하고 있는 걸 생각하면, 탐낼 수밖에 없는 미끼다.
‘무당이 머리를 썼군.’
그리고 만일 청성표국이 거절한다면?
하면 천무백에게 개인적으로 부탁하리라. 강호의 협의를 위해서라는 중요한 명분으로.
천무백은 무당의 의뢰가 치밀한 계산 하에 이뤄진 것임을 파악했다.
하면 반드시 천무백을 무당으로 데리고 가야 한다는 의미.
그만큼 천무백의 도움이 절실한 이유가 분명할 터.
천무백은 고심했다. 그사이 표국의 의견은 정해졌다.
“무백아, 네 의견을 따르겠다.”
어찌 됐건 천무백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 천문경으로선 아무리 회의해 봤자 천무백이 못한다고 하면 말짱 도루묵 아니겠는가.
천무백은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하루의 시간을 주세요. 조금 더 고민해 보겠습니다.”
* * *
전생과 달리 바뀐 점이 하나가 있다면 단연코 음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머릿속이 복잡해질 때나 잠깐의 휴식을 취할 때, 또는 내공을 다스릴 때.
천무백은 전생들과 달리 악기를 연주했다.
방안에서 당적이란 관악기를 불자 머릿속의 상념이 깔끔하게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도련님.”
연주가 끝나기를 기다렸을까.
끝나자마자 밖에서 점박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갈세가의 제갈설아 소저께서 찾아왔습니다.”
방안에 들일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천무백은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는 제갈설아가 늘 붙어 다니는 시녀와 함께 서 있었다.
“무슨 일이시오?”
“그거 무슨 노래였어요?”
“노래요?”
“지금까지 연주한 거요.”
뜬금없는 말에 천무백은 가볍게 대답했다.
“특별히 노랠 연주한 건 아니오. 머릿속에 떠오르는 걸 그냥 불은 것뿐이오.”
대답을 들은 제갈설아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냥 즉흥으로 부른 것이라고요? 마치 전설속의 신선인 한상자(韓湘子)의 연주인 줄 알았는데!”
천무백이 고개를 끄덕이자 제갈설아는 입맛 뻥긋거리며 아무 말도 못 했다.
수가기문도 설치 현장엔 제갈설아 혼자 도맡아 일하고 있었다.
원래는 그게 맞는 일이었지만, 요 며칠간 곁에 있었던 천무백이 없어지니 뭐라 표현하기 힘든 허전함이 느껴진 것이다.
하여 직접 찾아왔다. 몸종인 점박이는 곧장 알리려고 했는데, 제갈설아가 만류했다. 밖으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음색이 너무 아름다웠으니까.
잠깐이나마 여러 감정이 휘몰아칠 정도로 감명 깊은 연주였다.
한데 그게 즉흥연주라고?
“무슨 일이오?”
천무백이 답을 재촉하자 제갈설아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아, 수가기문도 때문에요. 설치하는 데 얘기를 나눌 게 조금 있어서요.”
“음. 이미 설계는 거의 끝나지 않았소?”
“그렇긴 한데······. 그래도 설계 마무리까진 같이 보셔야 하지 않아요?”
“궁리해야 할 고민이 있소. 이미 설계는 거의 끝났으니, 그대로 진행해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천무백의 대답에 제갈설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리 말하니 딱히 더 얘기할 게 없었으니까.
그렇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홱 돌아가기는 무언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제갈설아는 천무백을 빤히 쳐다보다 이내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뭔데요, 그게.”
“뭐가 말이오?”
“무얼 고민하고 있냐구요.”
“흐음.”
천무백은 팔짱을 꼈다.
순간 제갈설아는 자신이 너무 주제넘게 관여했나 싶어 심장이 철렁했다.
하나 천무백은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진 않았다.
‘모를 땐 제갈 씨에 묻는 게 답이긴 했지.’
전생을 떠오르면, 천무백은 고민할 거리나 복잡한 계산이 필요한 계획 같은 건 모두 제갈세가로 떠넘겼다.
비단 전생뿐인가.
‘제갈량, 그 친구에게 물어보면 뭐든 답이 하나 나오긴 했지.’
그만큼 제갈세가는 영민한 두뇌를 바탕으로, 천무백에게 큰 도움이 되어 왔다.
이번 생에서도 혈귀곡에 대응하는 전선에 제갈세가를 참여시키려고 했던 이유가 바로 그렇다.
하물며 천무백은 혼자 고민해서 답이 안 나오면 끙끙 앓는 유형은 아니었다.
“무당에서 찾아온 일 때문이오.”
“네?”
천무백이 천천히 그간의 사정을 얘기했다. 묵묵히 경청하던 제갈설아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네요. 확실히 뭔가 좀 이상하네요.”
“그렇소?”
“네. 이미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다면, 큰 문제는 없잖아요. 그 비다라라는 거. 시간을 두고 천천히 방안을 찾아가면 될 일이죠. 무당의 저력이라면.”
“그렇지.”
“한데 급하게 천 공자를 청하면서까지, 비다라를 빠르게 치료해야 하는 이유가 생긴 거잖아요.”
“응?”
“그러면…… 당장 치료해야만 하는 건데.”
순간 천무백의 눈이 번쩍 뜨였다.
제갈설아의 얘기를 듣자 무언가 탁 풀린 기분이었다.
“당장 치료해야만 하는 비다라라면. 그냥 평범한 무당 제자가 아니라는 것이겠지. 고양이 손이라도 보태서 어떻게든 빨리 치료해야만 하는.”
“그럼 높은 고위직의······ 적어도 장로급?”
천무백이 씩 웃었다.
최소한 장로.
아니, 장로 정도면 유수가 의뢰할 때 언급했으리라. 하나 무당의 사람이라고 퉁 쳤으니까. 아마도······.
“그 이상일 수도 있소.”
적어도 대장로, 어쩌면······.
“무당파의 장문인이 최근 모습을 드러낸 적 있소?”
천무백의 눈이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