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신재생 125화>
125. 천룡을 찾으시오.
남궁세가.
안휘성 회남에 근거지를 둔 남궁세가는 고작 하나의 가문이라고 보기엔 엄청난 영향력을 떨쳤다.
안휘성 전체에 남궁세가의 이름이 끼치는 영향력은 이루어 말할 수도 없으며, 강호 전체를 통틀어 봐도 남궁세가의 대단한 명성은 더욱 두드러졌다.
화산파가 천하제일검문을 자처한다지만, 남궁세가도 천하제일검가임을 자타가 공인하는 사실이니 화산파를 바라보는 남궁세가의 시선이 의미심장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나 지금은 서로가 경계하거나 반목하거나 할 때가 아니었다.
“이로써 안휘성에 숨어든 비다라는 모두 죽였소.”
싸늘한 목소리의 주인은 남궁세가의 대공자 남궁진천이었다.
“힘겨운 싸움이었습니다.”
청현진인이 합장하며 도호를 외웠다.
그는 슬픈 눈빛으로 바닥에 놓인 여섯 구의 시신을 바라봤다.
“하나같이 훌륭한 정파의 협객들이었거늘…….”
남궁진천의 싸늘한 목소리가 비웃듯이 파고들었다.
“협객들은 이미 죽었소. 중경에서 전해온 소식을 듣지 않았소. 비다라는 이미 죽은 사람을 소생시켜 살인을 시키는 지독한 사술임을.”
“…….”
남궁진천은 냉정했다. 어쩌면 감정하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한 기계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청현진인은 그것이 내심 불쾌했으나, 차마 반박할 수 없었다.
이미 이들은, 그러니까 이 비다라들은 남궁세가의 무수한 인물을 죽였고 안휘성의 내로라하는 고수들을 죽였다.
남궁진천이 조소를 보일만 했다. 그가 아끼던 수하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가.
그 죽은 이들의 시신은 사라졌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비다라로 다시 나타나리라.
그 끔찍한 사실에 청현진인은 몸을 떨었다.
“그래도 그나마 피해가 적은 것입니다. 장로님. 만일 중경에서 천 공자가 비다라에 대한 사실을 전해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일은 오리무중이었을 테니까요.”
국보의 말에 청현진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남궁진천이 다소 미간을 좁혔다.
“천룡검협, 그자는 대체 어떻게 비다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오? 우리 아버지도, 세가의 장로들과 원로들 그 누구도 몰랐소.”
“화산도 마찬가집니다. 화산에서 비다라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만일 비다라에 대한 사실이 전해지지 않았다면, 남궁세가는 좀처럼 일에 진척이 없었을 것이다.
비다라는 남궁세가 내에도 숨어 있었다.
평범한 생활을 꾸려나가는 척하며, 모습을 숨겨왔다.
그것이 비다라가 무서운 이유였다.
강시와는 다르게 스스로 사고하고, 인지하며 평범한 모습으로 보인다. 생전의 모든 무공을 기억하고 내공도 그대로다.
하나 누군가의 명령을 내리면 절대복종한다.
이 얼마나 끔찍한 적이란 말인가.
하니 어쩔 수 없었다. 안휘성에서 남궁세가와 청현진인을 비롯한 화산파 무인들은, 비다라를 만나는 족족 참살했다.
그 사실에 청현진인은 몸을 잘게 떨었다. 비다라이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정파의 협객이었으니까.
“참으로 지독한 것들을 만들었구나.”
몸서리쳐질 정도로 끔찍한 사술이다.
한편으로는 천무백에 대한 소식을 듣곤 감탄을 넘어 경악했다.
“비다라를 치료했단 말인가!”
“치료까진 아니지만, 활력의 당준파가 비다라로 소생했는데, 지금 어느 정도 제어하고 있답니다.”
소식을 전한 국보는 청현진인이 저토록 흥분한 모습은 처음 봤다.
그럴 만했다. 중경성에서 전해진 소식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으니까.
“선근경의 구절을 이용해 비다라를 제어할 수 있다니!”
“완전한 제어는 아닙니다. 하지만 비다라의 습격에서 선근경의 구절을 외웠더니 비다라들이 순간적이나마 행동에 이상이 생겼답니다. 소식을 전한 비검문의 투신께선 묘한 선기를 느꼈다고…….”
“선기라. 허어! 그랬구나.”
청현진인은 털썩 주저앉으며 장탄식을 토해 냈다.
“그래서 천 공자가 선근경을 노렸던 것이었어. 화산과 종남을 적으로 돌릴지도 모를, 그런 선택까지 하면서 말이야.”
“천 공자가 선근경에 담긴 힘을 알고 행했단 말씀입니까?”
“그래. 우리나 종남이 선근경을 가졌다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가?”
“그야…… 잘 보관했겠죠.”
“그래. 성물이니 아주 잘 보관해 놨을 거다. 비다라를 잠시나마 제압할 힘이 담긴 선근경을, 창고에 갔다 모셔놨겠지!”
“아!”
그제야 국보는 의미를 깨닫고 감탄했다.
“그렇군요. 천 공자는 이미 선근경의 힘을 알고 있었고, 다소 무리하더라도 비무전까지 참여하면서 가져간 것이었군요.”
“그래. 그렇다면 비다라에 대해 이미 추측했단 사실이지. 어쩌면 혈귀곡이 소림을 습격할 사실을 미리 알고, 소림을 구하러 간 것일지도 몰라.”
“맙소사. 하면 천 공자가 이미 다 계획대로 움직였단 사실 아닙니까?”
“그래. 그렇지.”
청현진인의 몸이 감탄을 거듭하다 못해 파르르 떨렸다.
정말 넓고, 멀리 보는 시야가 아닌가.
그는 한편으로는 마음 한편이 든든해졌다. 비다라를 처음 마주한 순간 그를 옭아맸던 암울한 감정이 모조리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비다라라는 악독한 사술을 사용하는 일세의 마인들이 등장해 강호가 위험에 처한 순간이다.
한데 그에 맞서 새로운 인물이 강호에 나타났으니, 청현진인은 천무백이 시대에 맞춰 나타난 대단한 인물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과연, 창천검신의 후인이 또 한 번 강호를 구하러 세상에 드러났구나!’
가슴이 뛰었다.
무수히 많은 선배가 창천검신의 곁에서 역사를 썼었다.
이제는 어쩌면 자신이 그의 후인 곁에서 잠깐이나마 한 시대를 살 수 있단 사실에 그는 감격했다.
“화산 본단에 알려라. 화산파는 천룡검협을 전적으로 도와야 한다고.”
청현진인의 눈이 맑게 빛났다.
* * *
“오늘도 둘이 붙어 계시는구먼.”
바쁘게 창고에 있는 물건을 꺼내던 늙수그레한 쟁자수가 그리 말하자 모든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엔 일단의 무리가 있었다.
제갈세가의 학자들과 장인들이 분분히 모였다가 흩어지며 여기저기에 공사를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그들과 달리 두 명은 계속해서 붙어서 무언가 얘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퍽 다정해 보였다.
“선남선녀시구먼.”
“우리 막내 도련님도 인물이 훤하지만, 저기 제갈세가의 아가씨도 참 아름다우셔.”
“그러니 저리 붙어 있는 거 아닌가.”
“하긴. 저 젊은 나이라면.”
쟁자수들이 짓궂게 수군댔지만, 거기엔 물씬 애정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천무백이 걸음마를 떼던 시기부터 봐온 나이 지긋한 이들이다.
어린 천무백을 멀리서나마 귀여워하고, 예뻐하던 이들이다.
하니 천무백이 건강을 되찾고 저리 장성해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흐뭇했다.
물론 그들의 생각처럼 천무백과 제갈설아가 다정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음. 이건 제 생각이 맞는 것 같아요.”
“그렇소? 하지만 이쪽은 내 생각대로 하면 효과가 더 좋을 것 같소.”
“어휴. 정말 고집 있으시네요.”
“그건 소저도 마찬가지오.”
“그래도 그 고집대로 하면 더 좋아 보이는 건 당연해 보이니…….”
제갈설아와 천무백은 수가기문도의 설계를 맡은 셈이었다. 학자들과 장인들은 그 설계대로 공사를 진행하고 진법과 기관을 설치하는 일을 맡았다.
그러다 보니 천무백과 제갈설아는 둘이 같이 움직이며 협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이 타인에겐 어떻게 비칠지는 둘은 신경 쓰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 기발할 수가 있지?’
제갈설아는 천무백이 내놓는 건의에 계속해서 감탄을 터뜨렸다.
수가기문도가 설치되는 장소에 맞게 일부 변경되기는 하나, 이처럼 극적으로 바뀌는 예는 거의 없었다.
그만큼 수가기문도는 이미 완성된 기관진식이란 얘기다.
한데 천무백은 계속해서 공사현장을 돌아다니며 여러 생각을 건의했고, 곰곰이 얘기 나누다 보면, 그게 훨씬 더 나은 방안인 경우가 많았다.
‘이게 수가기문도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약식이라지만, 어느새 약식이 아닌 수가기문도다.
한데 어쩌면 계획대로 제대로 만들어진다면, 무당이나 해남에 설치된 약식보다 훨씬 뛰어난 위력을 자랑할지도 모른다.
이 모든 건 천무백의 엄청난 직관력에 있으리라.
‘지닌바 무위도 대단한데, 머리까지 영민하다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천무백을 바라보는 천유하의 눈빛에 순수한 호기심이 떠올랐다.
한편 천무백도 제갈설아에게 감탄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제갈서후도 영민한 것처럼 느껴졌지만, 진짜 제갈세가의 두뇌는 이 아이가 되겠군.’
천무백이야 무수히 많은 전생을 거듭해 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의견을 내놓는 것이다.
한데 그것에 맞게 반론하고, 공감하는 제갈설아의 머리도 단순히 영민하다는 수준을 뛰어넘는다.
‘덕택에 일이 수월하군.’
천무백은 흡족했다.
수가기문도를 설치하는데 자신이 의견을 개진해도, 상대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될 일도 안 된다.
각 장소에 맞게, 지어진 건물에 맞게, 그리고 건물의 쓰임새에 맞게 기관진식이 서로 연동되어야 한다.
아무리 같은 약식이어도 해남과 무당에 설치된 것보다 더 나은 효능을 보려면, 여러 점을 상황에 맞게 고쳐야 한다.
제갈설아가 그걸 이해하고 받아들여 주니, 천무백은 이 수가기문도를 웬만한 고수여도 뚫지 못하리라 여겼다.
‘칠면염라같은 입신지경이 두셋이 와도 뚫지 못할 거다.’
장강만독과 석독도 곳곳에 놓여 있으니까.
이 정도면 천무백도 충분히 안심하고 강호를 주유해도 되리라.
“도련님! 도련님!”
그때였다.
한참 공사를 설계하던 도중에 점박이가 황급히 달려왔다.
“왜 그러느냐.”
한참이나 뛰어왔는지 점박이는 숨을 고르다가 이내 제갈설아를 보곤 흠칫 놀랐다. 얼굴이 살짝 빨개지는 모습이다. 천무백은 피식 웃었다.
“시선을 어디에다 두는 거냐, 점박아.”
“아, 도련님. 국주님께서 급히 찾으십니다요.”
“아버지가?”
“네.”
“무슨 일인데?”
“그게 듣기론…… 무당파에서 사람이 찾아왔답니다요.”
“무당?”
곁에 있던 제갈설아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당파하고도 안면이 있으셨어요?”
“전혀 없소. 듣기론 표국에서 무당파의 표행을 한번 맡았다곤 들었소.”
“공자님을 찾는 걸 보니…….”
천무백을 찾는다.
하면 그간 천무백의 행적과 관련이 있단 의미리라.
* * *
비검문주 곽용은 소림으로 간 곽천후의 서찰을 받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림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지지를 표할 의중도 갖고 있다라…….”
정마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의 후인들을 중심으로 만들어지는 정의맹 창설.
여기에 정마대전의 주역이었던 소림의 지지라면, 큰 장애물을 넘은 셈이다.
곽용은 흐뭇한 얼굴로 서찰을 읽었다. 아들인 곽천후가 충분히 제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천룡검협 천무백이 정의맹 창설을 권했다 하니, 소림에서의 반응도 매우 긍정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이들에겐 천룡검협은 단순한 협객이 아니라, 일생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특히 소림방장이 그렇습니다.]
그 같은 문구에 곽용은 침음을 흘렀다.
“소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는다라…….”
뿐인가.
만일 정의맹이 창설된다면, 정의맹 내에서도 천무백의 영향력은 이루어 말할 수 없으리라. 어찌 됐건 정의맹 창설에 천무백이 큰 영향을 끼쳤으니까.
그런 생각이 들자 불현듯 곽용은 헛웃음이 나왔다.
“이토록 어린나이에 강호의 절반을 뒤흔들고 있구나.”
이만한 인물이 나타난 적이 언제였던가.
그 대단한 창천검신도 어린 나이에 모습을 드러내진 않았다.
서른 즈음에 마인들의 준동에 혜성처럼 나타나지 않았던가.
“도대체 얼마나 큰 인물이 되려고…….”
그는 곽천후의 서찰을 접고, 이내 호북에서 온 서찰을 꺼냈다.
“무당파.”
서찰에 적힌 이름은 무당파의 이름이었다.
아예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사로이 서찰을 보낼 정도로 비검문이 무당파와 친하진 않았다.
한데 갑자기 무당파의 서찰이라…….
그 내용을 살피던 곽용의 눈이 이내 다소 찌푸려졌다.
“비다라에 대한 도움을 청한다?”
곽용이 서찰을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비다라.
여러모로 조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만, 천무백이 알려준 내용 외에 더 밝혀진 건 없다.
그나마 당준파를 사로잡아 어느 정도 살기를 억누르는 데 진척이 있단 사실 하나뿐.
그것도 천무백이 일컬어 준 방법대로, 당준파의 제자인 채가령이 행하는 일이 아닌가.
곽용은 침음하다 이내 종이를 꺼내 서찰을 써 내려갔다.
많은 내용은 없었다.
마지막에 적힌 문구가 모든 의미를 전달했다.
[하남의 천룡을 찾으시오.]